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69화
당지천에게 격리 처분을 내린 다음 날, 동이 트는 아침.
쟁탈전 중 참가자가 죽는 사건이 발생하고 꽤 시간이 지난 만큼 대응 방침이 결정됐을 법도 하건만, 무림맹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교화각에서는 여전히 회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쾅!
“아니, 그저 의심 간다는 이유로 배제하는 게 말이나 됩니까? 전 동의 못 합니다!”
“맞습니다. 혈교도가 그랬을 걸 잘 아시는 분들이 대체 왜 이러십니까?”
팽구용이 씩씩거리며 탁자를 내려치자, 천살검이 힘을 실어주겠다는 듯 말을 보탰지만, 눈앞의 노인들은 이야기를 듣긴커녕, 귀찮다는 듯 귀를 팠다.
“거, 식탁 좀 함부로 치지 말라니까 말은 귓등으로 들었나?”
“이래서 팽가 놈들이 안 돼요. 화가 나면 대화로 풀어야지, 일단 싸울 생각부터 한다니까?”
“자자, 흥분한 건 우리도 마찬가지 아니겠나. 아무리 말귀가 통하지 않는다고 한들, 개인의 성향 가지고 가문을 들먹이는 건 너무 나갔네.”
“크흠, 미안하구려. 내 도통 말이 통하지 않아 너무 화가 난 나머지 그랬네. 사과하겠네.”
“하…… 그걸 사과라고 하시는 겁니까?”
“자자, 혈살단주도 흥분하지 말고 좋게좋게 사과를 받아주게나.”
“맞네. 이들이 꼬장꼬장한 노인네라서 그런 거니 조금만 양보해 주게나.”
“이야기를 듣고 보니 내가 너무 심했구려. 내 체면을 봐서 한 번만 봐주게나.”
“그런 의미에서 당지천의 참가 여부는 양쪽의 의견을 들어 일단 보류하는 게 어떻겠는가?”
팽구용이 화를 내자 교묘하게 화를 내지 못하게 만드는 노인들.
이들은 구파일방과 사대세가의 대표들로 이루어진 무림맹 원로들로, 무력이라면 몰라도 정치력에서는 팽구용을 압살하는 고수들이었다.
“아니, 보류가 어떻게 양쪽 의견을 듣는다는 겁니까? 예선 못 나가면 본선 못 나가는 것 뻔한데…….”
“아니지. 우리가 토론해서 가능케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여기 모인 사람들 다들 자네만큼은 아니어도 무림에서 이름깨나 날렸던 사람들일세. 거기다. 천하의 혈살단주와 수호각주가 나서서 보증한다는데, 반대할 이가 얼마나 있겠는가?”
팽구용과 남궁호자가 듣기에도 속내가 뻔히 드러나는 어이가 없는 답변.
허나, 어이가 없는 것과 달리, 마땅히 반박할 말이 없었기에 팽구용과 남궁호자는 울분을 삼키며 입을 다물어야 했다.
왜냐면 반박하는 순간 대표들의 체면을 무시하는 게 되는 거고, 괜히 자신들의 입지만 좁혀질 게 뻔했기에.
“…….”
그래서 팽구용은 어떤 방식으로 반박해야 말려 들어가지 않을지 한참을 고민했다.
그리고.
교화각 밖에서 이야기를 듣던 노인 한 명은 어이가 없다는 듯 실소를 흘렸다.
“멍청한 녀석. 본디 무력이란 허허벌판이 아닌 이상에야 세 치 혀에서도 나오는 거라 그렇게 말해줬건만, 본전도 못 찾는구나.”
팽구용이 한심하다는 듯 코웃음 치며 교화각 안을 쳐다보는 노인.
그는 다름 아닌 남궁세가의 태상가주 남궁전유였다.
“그런 거 없어도 된다고 큰소리 뻥뻥 칠 때부터 알아봤다. 하여간 팽가 놈들 무식한 건 알아줘야 한다니깐.”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 남궁전유.
대화가 전혀 통하지 않던 팽구용의 모습이 떠오른 건지 다소 언짢은 표정으로 교화각을 봤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자 얼굴엔 언짢음 대신 미묘함이 감돌았다.
“그 녀석만 아니었어도 내가 몸소 행차할 일도 없었을 터인데…… 참 운이 좋구나.”
남궁전유는 씁쓸하면서도 아련한 미소를 짓더니 이내 하늘을 올려다보며 잠시 과거를 회상했다.
* * *
한창 젊을 때의 남궁전유.
그는 이름난 무인만 보면 득달같이 달려들어 비무를 종용하는 투룡.
아니, 가히 투귀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였다.
“네 이놈. 아무리 제일가는 후기지수라고 한들, 감히 이 복건제일검 종도옥에게 도전하다니 건방지기 짝이 없구나.”
“그래서? 꼬우면 칼부터 뽑던가.”
“뭐? 그래, 네놈 같은 녀석들은 관을 보기 전까진 두려움이라는 걸 모르고 산다지. 내 오늘 공포가 뭔지 똑똑히 새겨주마!”
“말 더럽게 많네!”
가히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할 만한 상황.
그러나 실상은 하룻강아지이긴커녕 호랑이를 잡아먹는 귀신이었다.
“크윽…… 어째서…….”
“주둥이 나불대는 거에 비해 실력은 보잘것없었구나.”
너무나도 강해 패배를 모르던 사나이.
그야말로 독고구패라는 말이 어울리는 외로운 무인이었다.
“하아, 좀 져보고 싶다. 무림은 이리도 넓은데 왜 대체 날 이길 놈이 하나 없는 거야?”
매일 승리가 아닌 패배를 원하는 기묘한 삶.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내심 자신이 진다는 상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 녀석을 만나기 전까진.
“그쪽이 그 유명한 무정검이지? 나랑 자웅을 한번 겨뤄보자꾸나.”
“싫다.”
“뭐? 싫다고? 말이 돼? 무인이 싸움을 피하다니…… 설마 너 쫄았냐?”
“편한 대로 생각해라.”
처음엔 싸우는 것조차 귀찮게 여기던 무정검.
아니, 귀찮음조차 내비치지 않던 무감정한 눈으로 남궁전유를 훑더니 발기를 돌려 자기 갈 길 가려 했다.
“아니꼽게 굴지 말고 한 번만 싸워보자!”
“난 아니꼽다는 게 뭔지 모른다.”
“등신이냐?”
“다만, 계속 이렇게 싸움을 걸어온다면 피하진 않겠다.”
“좋아! 그렇게 나와야지!”
귀찮게 굴어서 겨우겨우 얻어낸 비무 기회.
그 당시의 남궁전유는 무정검에게 예절을 직접 주입해 주겠다는 일념으로 평소보다 더 진지한 마음으로 비무에 임했다.
“적혈난무. 파.”
“크으윽…….”
허나, 결과는 압도적인 패배.
수준급에 이른 남궁전유가 미래가 기대되는 대목이었다면 눈앞의 흑의인은 이미 완성된 무인이었다.
그러니 상대가 될 리가 없었다.
“비무는 여기까지 하지. 더는 네 몸이 못 버틸 거다.”
“차라리 죽여라. 이런 수치스러운 패배는 내 명예를 더럽힐 뿐이다.”
“나는 네가 나한테 개차반처럼 굴든, 호인처럼 굴든 상관없다. 허나, 될성싶은 무인이니 목숨 대신 네 명패를 가져가마.”
“뭐? 날 살려두겠다고? 네가? 그거 잘못 생각해도 단단히 잘못 생각한 거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내가 진 건 아직 제왕검형을 익히지 못해서 졌을 뿐이다. 이미 한계에 달한 네놈과 달리, 앞으로 성장할 여지가 많이 남았단 말이다! 그러니 시간이 지나면 기필코 넌 날 이길 수 없을 거다!”
“하나 착각하고 있나 보군. 나는 완성된 무인도 아니고, 문파의 모든 무공을 익히지도 못했다.”
“뭐?”
“우리 문파의 비전은 감정 없는 인간은 쓸 수가 없다. 당연하게도 나는 비전을 쓸 수가 없다.”
남궁전유의 입장에서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이야기.
지금 이렇게 강한 상대가 더 강해질 여지가 남았다니 가히 재앙과도 같은 말인 한편, 만신창이가 된 남궁전유의 얼굴엔 환희가 깃들었다.
‘이렇게 강한 녀석이 더 강해진다고? 그렇다면 30년 뒤에도 호적수가 있다는 이야기잖아?’
패배 없는 삶은 무료하고, 목표 없는 수련은 지겨웠다.
그런데 드디어 갈 길을 찾았으니 얼마나 기쁜 일이겠는가.
“나 남궁전유는 이 수치스러운 패배를 잊지 않을 거다. 그러니 다음번엔 기필코 너를 꺾겠다!”
이름을 기억하라고 힘껏 외치며 명패를 던져주자, 무심한 눈으로 남궁전유를 내려다보는 무정검.
“…….”
잠시간 말없이 남궁전유를 내려다보다가 툭 한마디를 던졌다.
“부디 감정을 찾기 전에 찾아와라. 감정을 모두 되찾게 되면 내 위에 설 자는 오직 한 명밖에 없게 될 터이니.”
그 말을 남긴 12대 무정검은 자리를 떴고, 이후 무림에서 자취를 감췄다.
* * *
이제는 다시 찾을 수도, 싸울 수도 없는 과거의 망령.
그렇기에 천하제일인이 된 지금.
호적수라 부를 만한 존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런데 어젯밤 13대 무정검이 찾아와 대뜸 말하는 게 아닌가?
-지천이가 용봉지회에 참여하고 싶다고 했다. 명패의 대가는 그거로 하지.
-아니, 명패의 대가라면 이전에 치른 것 아니더냐?
-그건 단순히 무력시위였다는 걸 잘 알고 있을 텐데?
-말도 안 되는 소리. 내가 겨우 신화문이 무서워 물러났다고 하는 거냐?
-남궁전유. 날 화나게 하지 마라.
-……뭐라?
가히 천하제일인에게 한다고 생각할 수 없는 천일염의 건방진 말에 남궁전유는 순간 벙찔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천일염이 건방져서가 아닌 두 눈에 들끓는 듯한 분노를 표출하며 노려봤기에.
-……방금 화났다고 한 거냐?
-이야기 딴 데로 돌리지 말아라. 네 명패가 곧 네 체면일 터. 네가 생각한 네 목숨값이 고작 그 정도는 아닐 테니 잔말 말고 이행해라.
반신반의하며 묻는 물음을 말 돌리기라 생각했는지 제 할 말만 하고 사라지는 천일염.
그의 뒷모습을 본 남궁전유는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천하의 그 무정검이.
감정을 가졌음을 말이다.
‘지금은 오직 분노만 보였을 뿐이지만, 천하의 그 무정검이 마음을 가졌다라…….’
남궁전유는 피식 미소를 흘렸다.
“참 재밌구나.”
여태껏 가주 자리에 앉았을 때부터 책임감 때문에 스스로를 억압하며 살았다.
남들이 보기엔 강압적이고 안하무인하게 나온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앞뒤 생각 다 하고 계산적으로 했던 행동이다.
즉, 언제나 머리부터 굴리고 행동해야 했다는 이야기.
그렇기에 삶이 무료하고 재미가 없었는데, 이런 재밌는 일이 생기니 남궁전유로선 들뜰 수밖에 없었다.
“그래, 내 체면이 있지. 그런 허접한 거에 명패를 쓰는 게 말이 안 되긴 해. 그러니 내키지 않더라도 당가 놈을 위해서 무림맹 정도야, 한번 뒤집어줄 수 있지.”
마치 행동의 이유라도 찾듯이 연신 혼잣말하는 남궁전유.
“애초에 대표라고 앉아 있는 녀석들 하나같이 밉상이었어. 그 녀석이야 뭐 이제 품을지 말지 고민하는 단계고, 무정검이 절로 따라오는데 이걸 안 하면 가문의 어른으로 실격이지.”
어지간히도 들뜬 듯 계속해서 혼잣말하며 천천히 교화각으로 다가갔다.
“정지! 현재 중대 사안으로 인한 회의 중이므로 외부인의…….”
“비켜.”
“예, 옙! 실례했습니다!”
남궁전유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화들짝 놀란 문지기가 신속하게 문을 열었다.
이어서 문지기가 부동자세로 서 있는 걸 확인한 남궁전유가 위풍당당하게 걸어 들어가자 자연스레 열리는 내문들.
바깥쪽에 있던 문지기와는 달리, 단번에 남궁전유를 알아보고 속히 통과시켰다.
“태천검 어르신께서 방문하셨습니다.”
본인의 위엄을 증명하듯 회의실까지 막힘없이 들어가는 남궁전유는 회의실에 도착하자마자 실없는 미소가 나왔다.
“녀석들, 검에 손을 올린 걸 보면 어지간히도 약이 올랐나 보구나.”
왜냐면 남궁호자와 팽구용이 검 자루에 손을 올리고 있었기에.
“이게 대체 무슨 짓이오! 교화각에서 검을 뽑으려 하다니!”
“자루에 손을 올리는 것만으로 엄격히 금하는 것 모르오!”
“수호각주, 실망이오. 혈살단주는 그렇다 쳐도 수호각주가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니오?”
교화각엔 불문율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절대 검을 뽑아선 안 된다는 것.
대화를 통해서 합의에 이르러야 할 의논이 무력으로 인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막고, 또, 괜한 소모성 싸움과 한 문파가 무림맹의 안건을 독식해 버리는 사태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불문율이었다.
그렇기에 검 자루에 손을 올리는 것만으로도 매우 예민하게 반응하곤 했는데, 한계에 몰린 팽구용과 남궁호자는 자신들도 모르게 그런 결례를 범했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이 건을 안건으로 회부하고 혼내주고 싶다만…… 태천검이 오셨으니 한 번 기회를 주는 게 어떻겠소.”
“맞소. 남궁세가의 태상 가주께서 가문의 어르신으로 한마디 해주시지요.”
지금이라면 자그마한 문책으로 넘어가겠다는 대표들.
팽구용과 남궁호자의 실수를 이용해 근신 처분을 내리고, 당지천의 안건을 일방적으로 처리하겠다는 속내가 뻔히 드러나는 말이었지만, 남궁전유는 고개를 옅게 끄덕이고 순순히 수긍했다.
“알겠소. 내 한마디 해드리지.”
고개를 떨구고 있는 팽구용과 남궁호자를 돌아보는 남궁전유.
평소 정치적인 부분이 많이 약한 둘이 얼마나 시달렸는지 알기에 측은지심이 아주 조금 들었지만, 그것보다 한심한 감정이 더 컸다.
“이 바보 같은 것들. 내 누누이 말했잖느냐. 전체를 일방적으로 찍어 누를 무력이 없고서야 한낱 검이 세 치 혀를 이기진 못한다고 말이다.”
“…….”
“그런데 이렇게 멍청한 방식으로 위협을 해? 그것도 능력이 없는 녀석들이?”
“…….”
한심하다는 듯 문책하자,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숙이는 팽구용과 남궁호자.
평소에 찍어 누를수록 반발하곤 하나, 남궁전유의 말 중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기에 일언반구도 못 했다.
“쯧, 쯧, 이렇게 생각이 없어서야. 어디 가서 또 실수하지 않을까 무섭구나.”
“맞소. 이번 기회에 한번 제대로 교육시키시는 게 어떨까…….”
“그러니 이번 기회에 잘 보고 배워라.”
“뭣?”
뭔가 심상치 않게 변하는 걸 느끼자, 팽구용과 남궁호자가 남궁전유를 고개를 들고 남궁전유를 올려다봤고.
대표들은 설마 하는 눈으로 남궁전유를 쳐다봤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자고로 위협이란 이렇게 하는 것이다.”
-스릉.
남궁전유의 손짓에 서슬 퍼런 소음을 내며 매끄럽게 검이 딸려 나오자, 각 문파의 대표들은 핏기가 가신 얼굴로 외쳤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불문율을 지키라고 다그쳐도 모자랄 판에 직접 검을 뽑다니!”
“드디어 노망이 나서 미쳐 버린 것이오?!”
피식 웃은 남궁전유가 물었다.
“노망이 나? 내가?”
“지금 행하는 일이 그렇잖소!”
“상황 파악이 안 되는 것 같은데 검부터 집어넣고 이야기합시다!”
“뭐? 상황 파악이 안 돼? 하하하하하!”
도저히 웃음을 참을 수 없는지 화통하게 웃음을 터뜨린 남궁전유는 한참을 웃더니 어이없다는 실실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정말 그리 생각하오?”
“당연하지 않겠소? 손에 검을 든다는 것. 이게 무슨 의미인 줄 모르오?”
“알지. 여기 있는 모든 대표를 핍박해 홀로 안건을 처리하겠다는 의미 아니겠소. 대화가 아닌 무력으로 말이오.”
“그걸 알면서 그러시는 거요? 당신이 아무리 뛰어나다고 한들, 한 손으로 열 손 막을 수 없는 법. 우리 전부를 상대하겠다는 게 말이 되오?”
“아무리 천하제일인이라고 한들, 우리 전부와 싸우면 승산이 없을 것이오. 그러니 정녕 제정신이라면 거기까지 하시오.”
각 문파의 대표들이 저마다 긴장한 기색으로 검 자루에 손을 올리자, 입가에서 웃음을 지운 남궁전유는 무미건조하게 물었다.
“내가 당신들과 싸우면 승산이 없다라…… 다들 그렇게 생각한다니 내 하나만 묻겠소.”
-쿵!
단번에 기운을 방출해 회의실의 사람들을 찍어 누른 남궁전유가 흉흉한 눈으로 물었다.
“지금 누구 손에 검이 들린 줄 아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