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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168화 (168/200)

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68화

“…….”

팔을 갈랐음에도 피가 흐르지 않자, 내려앉는 적막.

사람 몸에서 피를 전부 빼내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보통 단시간에는 무리다.

그리고 보통이 아닌 방법은…….

“혈교…….”

오직 혈교도만이 가능한 수법이었다.

그 어떤 증거보다 확실한 정보가 나오자, 잠시 혈교의 이름을 입에 담았던 천살검은 노기 서린 눈으로 명령을 내렸다.

“경계 단계를 갑급으로 변경한다. 감독관들 전원 복귀하고, 인원들도 전부 복귀시켜. 자세한 안내가 있을 때까지 방에서 나가면 실격 처리한다고 해…… 아니, 내가 직접 척살하겠다고 전해!”

“알겠습니다!”

사태가 영 심상치 않은 걸 확인했는지 부리나케 달려 나가는 감독관들.

잠시 그들의 등 뒤를 보고 있자, 천살검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아무리 상정했다고 한들, 진짜 왔을 줄이야…… 불찰이군.”

천살검은 감독관으로 책임감을 느끼는지 입술을 몇 번 짓씹더니 이내 내게 물어왔다.

“독살은 아니라고 했지. 왜 그렇게 판단했냐?”

“지금 쓰인 이 독은 당가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독입니다. 그런 주제에 독성은 꽤 강한 편은 아니죠.”

“희귀한 독이라…… 누명을 씌우기에 딱 좋구나.”

“예, 이 독의 가장 큰 특징은 여타 독과 달리, 입술의 색이 변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하지만 변했잖냐?”

“피가 온전히 보존된다면 그랬겠지만, 피가 없어져서 여타 독처럼 변해 버린 겁니다. 다른 사람도 독살일 건 확연히 알아볼 수 있게끔 말이죠.”

“그럴 거면 차라리 다른 독을 쓰는 게 낫지 않았겠나?”

“명확한 이유까진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구한 게 이것뿐일 수도 있고, 부검을 대비해 장기까지 검푸르게 변하는 걸 노렸을 수도 있죠.”

솔직히 내가 혈교도도 아니고 어떻게 그들의 속내까지 짐작하겠는가.

그래도 짐작 가는 바가 없진 않았다.

“딱 하나 확실한 건, 말씀하신 대로 누명을 씌우려고 작정한 것 같습니다.”

누가 봐도 독살당한 듯한 시체의 모습.

내가 곧장 팔을 가르지 않았다면 피가 있는지 없는지도 몰랐을 거다.

그 말인즉슨, 발견한 시점에서 이미 독살로 단정 지어졌을 거란 이야기.

“부검을 제대로 해도 피가 없다는 특이점을 제외하면 독살의 흔적이 남아 있으니 제가 범인으로 몰릴 거란 가능성이 클 겁니다. 화골산도 존재하는 마당에 피를 증발시키는 독은 왜 없겠냐며 말이죠.”

“……그럴 계획이었다면 지금쯤 밖에선 소문이 돌고 있겠구나.”

“아마도 그럴 겁니다.”

“끄응…….”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골이 아픈지 천살검이 머리를 부여잡았다.

“네가 누명을 쓴 것도 그렇고, 감독 문제도 그렇고, 하나같이 열 받는 일만 있구나.”

“그렇네요.”

“근데 너는 왜 이렇게 태연하냐? 누명을 쓴 게 억울하지도 않냐?”

“억울하긴 합니다.”

내가 한 잘못도 아닌데 손가락질 당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거다.

“단지, 평범하게 화를 내기엔 이번 일은 심상치가 않아서 그런 겁니다.”

혼란을 만들면 만들었지, 왜 누명을 씌우려고 하는 걸까.

흔히 높으신 분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인성에 문제 있는 경우가 있어도 바보는 아니다.

내가 독살할 동기가 빈약함은 물론이고, 피가 순식간에 증발하듯 사라졌다는 걸 고려해 보면 혈교도의 소행임을 분명히 알 거다.

그런데도 왜 이러는지…….

‘설마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러는 건가?’

분명 남궁세가에서 태천검을 만났을 때 당가에 대한 적대감이 어마어마했다.

만약 무림맹에 있는 사람들도 그런 성향이라고 가정한다면?

‘옘병…… 외통수잖아?’

단순히 가정뿐이지만, 실제라고 생각하면 아찔해지는 상황.

팽구용의 빚을 갚으러 왔을 뿐인데 빚을 갚긴커녕, 잘못하면 누명이나 된통 쓰고 갈 판이다.

그걸 천살검도 아는지 얼굴을 굳히며 말했다.

“일단 네게 격리 처분을 내려야겠구나. 트집 잡히지 않으려면 그게 최선일 테니 말이다.”

“정말 그게 최선입니까?”

“글쎄.”

마땅한 수가 생각나지 않는지 옅게 고개를 젓는 천살검.

여전히 입술을 짓씹은 채 나를 보며 다짐하듯 말했다.

“하지만 나도 그렇고, 천괴도도 그렇고 가서 잘 말할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비록, 너와 얼굴을 맞댄 건 이번이 처음이지만, 꽤 많은 인연으로 엮여 있으니 말이다.”

단순히 무력이라면 몰라도 정치적인 능력은 떨어지는지 확신을 주지 못하는 천살검.

그래도 최선을 다할 거라는 말에 나는 옅게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고는 찝찝한 발걸음으로 삼풍객잔으로 돌아갔다.

* * *

대기 기간 2일 차 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갑절 이상의 감독관들이 보충되고 쟁탈전이 재개되었다.

그런데 나는 격리를 당한 탓에 방 밖으로 나갈 수 없어서 연신 한숨만 푹 내쉬었다.

“하아, 모용집, 그 녀석만 계 탔네.”

딱, 일 합만 겨루면 내가 이기는 상황이었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누가 우위인지 명확하게 우열을 가릴 상황이었단 말이다.

한데, 사건이 터져서 우열을 가리긴커녕, 모용집과의 비무까지 묻혀 버릴 지경이었다.

“명예로운 죽음이 이런 건가. 이럴 줄 알았으면 확실하게 끝장을 내버릴걸.”

-삐익, 삐익.

그러게 왜 뜸을 들였냐는 듯 한심스러운 눈초리로 쳐다보는 삐익이.

사실 안에 사람이 든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참으로 다양하게 사람 열 받게 했다.

“어차피 지금만 기회가 아니거든? 나중에 본선에서 해치우려고 봐준 거야.”

-비잇, 비잇.

“진짜라니까?”

-비잇, 비잇.

어련하시겟냐는 듯 비웃는 삐익이.

저 히죽대는 부리를 보면 깃털을 죄다 뽑아서 삶아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싸우면 질 게 뻔하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틀린 말도 아니긴 하지.’

본선은커녕 지금 처분조차 걱정해야 할 판.

팽구용의 원래 부탁인 대기 기간에 상위 3명을 잡는 일도 방 밖으로 나가기는커녕, 수십의 감독관이 배치된 상황이라, 사칭범이 들어올 수 없어서 무산이 될 듯했다.

-똑, 똑.

“당지천 참가자. 안에 있습니까?”

하지만 때마침 들려오는 문 두들기는 소리에 조심히 다가가 문을 열어보자, 면식이 없는 무인 한 명이 서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맹에서 나왔습니다. 잠시 얼굴 좀 보시죠.”

“그러죠.”

다른 용무도 아닌 얼굴 좀 보자는 말.

오늘 오지 않을 듯한 손님이 어떻게 찾아온 걸 보고 감독관을 안으로 끌어들인 뒤 문을 닫으며 전음을 보냈다.

-사람들이 많이 깔렸는데 어떻게 왔네?

전음을 듣자마자 본래의 얼굴을 꺼내는 무인.

그는 다름 아닌 원래 오기로 예정되어 있던 사칭범이었다.

-팽 대협께서 많이 도와주셨습니다. 그것보다 바깥 상황이 여간 심상치 않습니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공자님께서 참가자를 독살했다고 합니다.

-알고 있어. 일단 자세히 좀 이야기해 봐.

예상했던 상황.

이미 누가 누명을 씌우려고 했다는 걸 알고 있던 만큼 놀라기보단 설명을 요구했고, 사칭범의 이야기가 끝날 때쯤 나는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옘병…… 누굴 인성파탄자로 아나. 뭔, 마음에 안 든다고 독살이야. 아니, 누명을 씌울 거면 좀 그럴듯한 사유를 만들어야 하는 거 아냐?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만, 유감스럽게도 개방에서도 적극적으로 소문을 퍼뜨리는 중이라고 합니다.

-개방에서? 난 걔네랑 원수진 거 없는데? 설마 이번 용봉지회에 후개도 참여하냐?

-예, 맞습니다.

“아이고, 두야…….”

절로 터져 나오는 감탄사.

지네들 후계자 하나 밀어주겠다고 사람 하나 매장하는 데 참으로 거리낌 없이 일을 벌일 줄이야.

-그래서 어떻게 됐어? 일단 혈교의 개입도 있다는 건 알렸을 거 아니야.

-팽 대협은 물론이고, 천살검께서도 힘쓰고 계십니다만, 여론이 좋지 못합니다. 혈교도는 혈교도고, 독살은 독살이라고.

-아마도 걔네들도 혈교도 짓인 건 알 거고, 모용집과의 대련 때문에 그렇겠지.

감독관이 전부 천살검의 수족은 아닐 터.

굳이 개방이 아니더라도 당연히 한두 명씩 수족을 심어놨을 테고, 아마 그쪽을 통해서 들었을 거다.

-제가 그런 쪽은 잘 모릅니다만, 팽 대협께서 하시던 말씀을 들어보니 공자님의 위명에 다른 후기지수들이 묻히는 걸 막으려고 안간힘을 쓴다고 합니다.

-에라이, 치사한 녀석들 같으니라고…… 그래서 팽 대협께서는 어떻게 하신대?

-참가는 하되, 독은 물론이고, 암기와 사출기 모두 못 쓰는 방향으로 협상하시겠답니다.

독과 암기야말로 당가의 근간.

그걸 빼면 씨 없는 수박.

팥 없는 호빵.

그리고 그냥 시체다.

-그냥 시체 가지고도 이길 거란 판단이 있으니까 그러시나 보네. 그래서 어떻게 될 거 같대?

-잘 모르시겠답니다. 천살검 대협께서도 도와주시긴 하나, 그쪽에서는 냄새를 맡았는지 완강하게 거부하는 중이라고…… 팽 대협께서 부탁하셨던 약속은 차후 본선으로 미룰 테니 그냥 나서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꼬투리 잡힐 일 하지 말아달라는 건가. 진짜 능구렁이 같은 놈들 너무하네.

무력은 몰라도 정치력 하나만큼은 뛰어나니 자리를 보존했을 이들.

그런 이들은 팽구용이 독과 암기 없이 참여시켜 달라고 했을 때부터 냄새를 맡았을 거다.

내가 팔다리 없이도 그들을 이길 수 있단 사실을 말이다.

-그나저나 공자님. 천살검 대협과도 친분이 있으셨습니까? 대체 인맥이 얼마나 넓으신 겁니까?

반짝이는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사칭범.

팽구용도 팽구용이지만, 한 명의 검객으로서 무림오검과 연줄이 닿아 있는 사람을 보게 됐으니 아주 존경스러운 눈으로 보는 듯했다.

-나도 오늘 처음 알았어. 이래저래 연이 꽤 닿아 있던 분이시더라고.

-그냥도 아니고, 이래저래…….

뭔가 김칫국이라도 한 사발 한 건지 사칭범은 아주 황홀하다는 듯 숨을 내뱉었다.

-정말, 정말 대단하십니다!

-아니, 내가 대단할 일은 아닌 거 같은데…….

고작 연줄 좀 닿았다고 대단할 일인가?

그런 생각을 하던 찰나.

갑자기 천장에서 일염이가 떨어져 내리며 물었다.

“공자님. 혹시 몰라서 여쭤봅니다만 공자님께선 용봉지회에 참여하고 싶으신 겁니까?”

용봉지회에 참여 안 할 거라면 쉽게 해결할 수 있다는 듯한 일염이의 물음.

허나, 그런 말을 들었음에도 나는 용봉지회를 포기하고 싶진 않았다.

“참여해야지.”

과거 무협지를 읽었던 독자로서 이런 큰 행사를 놓치고 싶지 않기도 했고 팽구용의 부탁도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가의 소가주로서 무림에 나온 만큼 용봉지회에 우승해서 당가의 건재함을 널리 알리고 싶었다.

“웬만하면 꼭 참여하고 싶어.”

굳은 눈으로 일염이를 바라보며 말하자,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는 일염이.

“공자님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그렇게 해드리겠습니다.”

아까 전 자리를 비웠던 것처럼 갑자기 사라지더니 이내 전음을 남기며 떠났다.

-쉬고 계시죠. 본선에 참가하시려면 만전을 기해야 하실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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