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64화
폭풍 전야와도 같던 시간이 지나가고 어둠이 내려앉은 시각.
자시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삼풍 객잔 내 참가자들은 입이 바짝 마름을 느꼈다.
‘고작해야 20명 있을 객잔에 쟁쟁한 후기지수가 2명이나 되다니…….’
‘잘못하면 동이 트기도 전에 내쫓길 판이군.’
평균적으로 규모가 큰 객잔일수록 강자가 많고, 작을수록 강자가 없다.
그런데 삼풍객잔에는 대문파의 기재가 무려 2명이나 있었으니 참가자들이 억울할 만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창호일검이 화가 잔뜩 났다는 점인가?’
‘백독멸악하곤 무슨 일이 있던 거지? 거의 원수를 보는 느낌이던데?’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라고 했던가.
자신들을 사냥할 만한 당지천은 방에 틀어박혔고, 백현은 그런 당지천의 방문을 노려보며 이를 갈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당지천 이 개자식…… 그 짓거리를 해놓고도 나를 기억 못 해?”
-까드득.
백현은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지 이를 갈았다.
지금 방에 틀어박힌 당지천은 기억조차 못 하지만, 백현은 당지천에게 졌던 그 날 이후로 하루도 당지천을 잊은 적이 없었다.
왜냐면 승승장구하던 백현의 행보에 유일하면서도 가장 치명적인 오점을 남겼으니 말이다.
“기필코 눈물 콧물 다 빼며 빌게 해주마.”
전의를 불태우는 백현.
그 일 이후로 문파에서 수모를 겪을 때마다 당지천을 만나기를 고대했다.
그런데 이렇게 용봉지회에 나와서.
그것도 같은 객잔에 배정받게 되었으니 다른 게 눈에 뵐 리가 있겠는가.
-까드득.
백현이 당지천의 방문을 보며 한 번 더 이를 갈았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다른 인원들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강자가 둘이라고 한들, 서로 싸워준다면야 우리야 바랄 게 없지.’
‘나머지는 결국 어중이떠중이. 적어도 이들보단 내가 제일 강하다.’
‘잠깐, 생각해 보니 이거 잘하면 일망타진할 수 있겠는데?’
서로의 실력을 가늠하며 눈치를 보다가 갑자기 눈으로 대화를 나누는 참가자들.
일류의 경지가 무림에서 그렇게 뛰어난 경지는 아니나, 작은 지역 단위로 보면 꽤 실력 있는 경지다.
당연히 여기 있는 이들 중 적당한 직책 하나 없는 이가 없었고, 자연히 눈치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창호일검과 백독멸악의 사이는 잘 모르지만, 잘하면 두 명 다 배제할 수 있을 것 같소. 그러니 둘이 양패구상할 때까지 잠시 휴전하는 게 어떻겠소?’
‘나쁘지 않은 생각이지만, 양패구상을 못 하고 한쪽이 이기면 어떡할 거요? 그렇게 되면 손도 못 써보고 당하는 건 우리가 될 거요.’
‘만전이라면 모를까. 아무리 기재라고 한들, 비슷한 실력의 상대를 상대하고 나면 힘이 많이 빠졌을 거요. 그러니 남은 쪽은 일시에 달려들어 처리하면 되오.’
전음을 쓸 수 없기에 눈빛만으로 대화를 나눔에도 대화가 통하는 참가자들.
서로 고개를 설레설레 젓거나 끄덕이는 거로 의사소통을 마치고는 합의에 이르렀다.
‘좋소. 단, 다들 명심하시오. 괜히 힘 아낀다고 설렁설렁한다면 당하는 건 우리가 될 거요.’
‘그 누구도 배신해선 안 되오. 잠시뿐인 협력이니 몸이 달아오르더라도 조금만 참으시오.’
‘알겠소. 다 알아들었으니 걱정 마시오.’
참가자들이 분주하게 계획을 세우고 서로 믿음을 내보였다.
그렇게 백현을 제외한 삼풍객잔의 참가자들이 한마음 한뜻이 된 그때.
숙수 역할을 맡던 감독관이 주방에서 나오면 말했다.
“거 소리도 안 나는데 시끄러워 죽겠다. 차라리 전음으로 해…… 아, 니들 그 정도 실력은 안 되지? 별수 없구나. 미안미안.”
대뜸 날아온 감독관의 사과에 백현의 눈치를 보기 바쁜 참가자들.
설마하니 은밀하게 이뤄진 계획을 감독관이 나불댈 줄은 몰랐기에 심히 당황한 얼굴이었는데, 다행히 백현은 듣지 못했는지 이글거리는 눈으로 당지천의 방문을 쳐다볼 뿐이었다.
“저 싸가지 집념 하나만큼은 쓸 만하구나. 그럼 슬슬 시작해 줘야겠지.”
머리를 긁적인 감독관이 사람 머리통만 한 종을 들며 말했다.
“자, 종을 치는 순간부터 쟁탈전을 시작한다. 몇 번이나 들었겠지만, 살초를 쓰거나 급소를 찌르는 행위는 금지되며 생명에 지장을 주는 행위도 동일하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위급한 상황이다 싶으면 지체 없이 호각(호루라기)을 불어라.”
자신의 허리에 걸린 적색 호각을 보여주는 감독관.
중요한 사안인 만큼 한 명 한 명에게 꼼꼼히 인지시킨 뒤에야 고개를 끄덕이고는 종을 칠 준비를 하며 말했다.
“다들 힘들게 온 길인 만큼 좋은 결과 가져가길 바란다. 그럼 시작!”
-땡! 땡! 땡!
삼풍객잔은 물론이고 온 사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백현은 당지천의 방을 향해 달려갔다.
-텅!
백현의 가벼운 발길질에 방문이 부서질 듯이 열렸고, 백현은 쏜살같이 안으로 튀어 들어가며 검을 빼 들었다.
“당지천! 네 이놈! 지난날의 원수를 갚겠다!”
그러거나 말거나 당지천은 의자에 앉아서 자신의 애완조를 쓰다듬으며 태평하게 말했다.
“남의 방에 허락도 없이 막 들어오는 건 실례라고 안 배웠어?”
“문답무용!”
몸이 달아오를 대로 오른 백현은 당지천과 대화를 나누는 것조차 무의미하다 생각해 곧장 기수식을 취했다.
그러자, 당지천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천천히 의자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뭐, 그래도 용케 도망치지 않고 온 건 칭찬해 줄게. 덤벼.”
당지천이 가만히 서서 손을 뻗자, 백현은 앞뒤 가릴 것 없이 곧장 검을 뻗었다.
‘독을 쓰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사출기는 쓸 수 있을 터. 지근거리라 암기도 쓰기 까다로울 테니 사출기만 조심하면 된다.’
굉장히 흥분한 듯 보였지만, 백현 역시 무인.
눈이 훼까닥 뒤집히긴 했어도 이성을 잃지는 않았기에 당지천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다시금 되새겼다.
‘초격은 얕게.’
백현이 탐색의 의미로 청품검을 펼치며 당지천의 오른쪽 어깨를 노렸다.
그런데.
갑자기 백현의 시야에서 당지천이 사라졌다.
“뭣?”
차마 눈에 담기 힘든 속도로 사라진 탓에 당황해서 백현이 주위를 둘러봤다.
그러자, 어느샌가 백현의 오른편에 있던 당지천은 백현이 검을 든 오른쪽 손목을 잡고 있었다.
“귀찮으니까 어설프게 간 보지 마라.”
이어서 당지천이 반대 손으로 장을 한 번 때리니 백현이 문밖으로 날듯이 튕겨 나갔다.
-쿵!
단번에 방 밖으로 날려진 백현.
벽에 부딪히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긴커녕, 고개를 떨군 채 미동도 하지 않는 게 완전히 정신을 잃은 듯했다.
“차, 창호일검이 일격에…….”
“분명 비슷한 실력이라고 하지 않았나?”
“…….”
예상외의 상황에 참가자들은 서로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당지천과 백현이 싸운다면 필시 둘 중 하나는 힘이 빠질 거라 예상했다.
허나, 결과는 예상과 달리, 당지천이 너무나도 쉽게.
일격에 백현을 처리해버렸다.
그래서 이도 저도 어떻게 하지 못한 채 얼음처럼 굳어 있자, 당지천은 귀찮다는 듯 걸어와 말했다.
“혹시 더 덤빌 사람?”
“…….”
당지천이 훑어보듯 참가자들을 보자, 서로 눈을 피하기 바쁜 참가자들.
아까 달려들자는 말은 다들 까먹었는지 어떻게든 당지천의 눈에 안 거슬리게끔 뒤로 물러나는 이도 있었다.
“없으면 백현의 패 아직 있으니까 필요하면 알아서 가져가고, 귀찮게 굴지 마.”
“…….”
-텅.
당지천이 냉큼 방문을 닫아버리자, 참가자들은 떨떠름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봤다.
“그냥 들어간다고? 왜?”
“낸들 아나…… 근데 창호일검의 합격패를 남겨뒀다고?”
자고로 무인이란 족속들은 명예에 살고 명예에 죽는다.
설령 1등을 하지 못하더라도 창호일검의 합격패를 자신이 빼앗는다면 평생 안줏거리는 물론.
용봉지회에서도 소소하게 이야깃거리가 될 테니 절대 놓칠 수 없는 물건이었다.
“…….”
잠시 이어진 침묵.
아까까지의 임시 동맹은 목표 달성이 불가능해짐으로 해체됐다.
거기다, 한가운데 탐스러운 먹이가 놓여졌으니 더는 안 싸울 이유가 없었다.
그렇기에 서로 눈치를 보던 참가자들은 얼마 가지 않아 서로의 무기를 꺼내 들며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창호일검의 패는 내 것이다!”””
* * *
백현을 일격에 쓰러뜨린 다음 날 아침.
-삐익, 삐익.
창문 너머로 들어오는 햇살과 밥 달라는 삐익이의 울음소리에 하품을 쩍 해대며 몸을 일으켰다.
“잘 잤니?”
-삐익, 삐익.
“그래, 밥 바로 줄 테니까 재촉 좀 하지 마.”
무한낭을 뒤져 삐익이에게 먹일 독을 꺼내주자, 냉큼 머리를 갖다 박는 삐익이.
어제도 많이 먹였으면서 아침에 이렇게 먹는 걸 보면 그 독이 다 어디로 가는지 참으로 신기할 따름이었다.
-비잇, 비잇.
“신경 쓰지 말라고? 에휴, 뭔 말을 못 해요. 애완조 키워봤자 다 소용없다니까…… 나도 아침이나 먹으러 가야지.”
아침부터 까탈스럽게 구는 삐익이는 혼자 밥 먹게 놔두고, 하품을 쩍쩍 해대며 방문을 열자 난장판이 된 복도가 보였다.
“구멍도 뚫어놓은 거 보니 열심히도 싸웠나 보네.”
검흔과 핏자국이 사방에 낭자한 풍경.
그래도 어제 쓰러뜨린 백현이 사라진 걸 보면 감독관이 알아서 치운 듯했다.
“생각해 보니 그 녀석한테 감사 인사도 했어야 했는데 까먹었네.”
다른 이들이 나서기 전에 직접 나서서 기선 제압도 도와주고.
또, 자기 합격패 놓고 다투게끔 해서 숙면도 도와준 걸 보면 진짜 큰 도움을 줬는데, 이렇게 말도 없이 사라져 버리니 좀 섭섭한 감이 없지 않았다.
“뭐, 나중에 하면 되겠지.”
어차피 사라진 거 더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그래서 발걸음을 옮겨 1층으로 향하자, 한순간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렸다.
“푸우, 콜록, 콜록…….”
나를 보자마자 사레들린 듯 연신 기침하는 참가자 하나.
어제 오래 싸웠는지 몰골이 참 말이 아니었는데, 그러면서도 자신의 검에 손을 올리길래 편히 먹으라고 말했다.
“밥 먹을 땐 개도 안 건드리는 거 알지? 내가 너희 잡을 거였으면 어제 다 끝냈어.”
“……어제까지만 해도 위압적으로 굴지 않았소?”
“귀찮아서 그래.”
어제 위압적으로 군 건 어디까지나 기선 제압을 위해서였다.
목표 달성이 끝났으니 더는 그럴 필요가 없었고, 적당히 존댓말을 안 하는 선에서 그치기로 했다.
“엄청난 자신감이구려.”
“원래 내가 자신감 빼면 시체거든.”
일부러 멀찍이 떨어져 앉은 사람들이 다 볼 수 있게끔 정중앙에 앉자, 감독관이 뭘 시키기도 전에 나와 소면과 만두를 올려줬다.
“다른 거 만들기 귀찮으니 이거만 먹어라.”
그러고는 대답도 듣지 않고 쏜살같이 주방으로 사라졌다.
“…….”
다른 걸 주문하려는 생각도 없긴 했으나 원체 빠르게 갖다 놓는 탓에 황당하게 쳐다보기도 잠시.
출출한 배를 채우기 위해 소면을 한 젓가락 뜨려는 순간.
갑자기 객잔 문이 부서질 듯 열렸다.
-텅!
“네놈이 당지천이냐?”
“…….”
객잔에 발을 들이자마자 나를 정확히 지목하며 인상을 찌푸리는 한 남자.
말쑥하고 고상하면서도 심히 싸가지 없게 생긴 게 왠지 어디선가 본 느낌이었다.
그것도 근래에 본 느낌이었는데…….
“아, 기억났다. 해천회검 모용집?”
자신을 알아보자, 흡족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용집.
그러면서도 오만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네놈도 내 위명을 들어보긴 했나 보구나. 그래, 바로 내가…….”
“그 싸가지 없다는 놈이 여긴 웬일이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