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62화
기약 없는 전회가 끝나길 기다리길 3일째.
남궁세가에 신세를 지는 동안 남궁전유가 한 번쯤은 더 부를 거라 생각했는데, 아무 소식도 없었고, 조용히만 흘러갔다.
그래서 종일 방에서 뒹굴거리고 있자, 흔유가 소식을 전하러 들어왔다.
“공자님. 오늘부로 전회가 끝나고 대기 기간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뭐? 전회가 끝나?”
“예, 이제 좀 덜 심심하시겠네요.”
잘됐다는 듯 웃는 흔유.
일염이가 남궁전유의 명패를 가지고 있어서 일이 잘 마무리되긴 했어도, 보는 눈이 없는 게 아닌지라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렇기에 나간다고 하니 갑갑함이 풀림과 동시에 곤란한 감정이 들었다.
“이거 곤란한데…….”
“뭐 때문에 그러시는데요?”
“삼촌 심부름이 있는데, 못 전해드렸거든.”
주머니에서 나오는 전서를 가장한 커다란 두루마리.
삼촌은 표국에서 화물로 취급당해서 빨리 좀 보내려고 내 편에 부친 건데 막상 도착하니 수령인이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다.
“뭐, 중요한 건 아닌 거 같으니 뇌의님께 부탁하면 되겠지.”
삼촌이 직접 건네주라 신신당부한 것도 아니고, 그저 빨리 보내려고 한 것이니 남궁공자에게 부탁하면 되겠다 생각하며 두루마리를 다시 집어넣었다.
“지천이 게 있느냐?”
두루마리를 집어넣자마자, 찾아온 팽구용.
내가 일어서서 움직이고 있는 걸 보자, 대충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했는지 가까운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
“이야기는 들었느냐?”
“예, 전회가 끝났다길래 슬슬 나갈 채비를 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래. 나도 얘기를 듣자마자 온 건데, 소식이 참 빠르구나.”
“저희가 좀 빠르긴 하죠.”
옆에서 깐족대듯 미소를 짓는 흔유를 지긋이 쳐다보는 팽구용.
혹시 화났나 싶어서 흔유를 제지하려 했는데, 팽구용은 그저 혀를 찰 뿐이었다.
“걸개들이 정보 새어 나가지 않게 틀어막는다고 하더니만, 개뿔. 이러니까 혈교도에도 정보가 줄줄 새지.”
단순히 혀를 차는 거에 그치지 않고, 불편한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는 팽구용.
솔직히 전회가 끝나는 게 그렇게 중요한 정보는 아니어서 이렇게까지 화낼 일인가 싶었지만, 뭔가 쌓인 게 있어서 이러는 듯했다.
“미안하다. 시답잖은 이야기를 했구나.”
“저한테 그러신 것도 아닌데 괜찮습니다. 그것보다 무슨 일로 오신 겁니까?”
“이거 주러 왔다.”
팽구용이 말을 마침과 동시에 작은 목패를 던져줬다.
[삼풍객잔 당지천]
어딘지 모를 객잔과 내 이름이 적혀진 목패.
대충 보아하니 전회에 합격하면 주는 합격패인 듯했다.
“예선전에 필히 지참해야 하는 합격패다. 굳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도 한 개만 가졌으면 통과시켜 주긴 하다만, 뺏긴 것 자체가 명성에 먹칠하는 거니 잃어버리지 않게 주의하거라.”
“알겠습니다. 근데 여기 적힌 객잔은 어딥니까?”
“그건 지정 구역에 가면 알려줄 거다.”
“지정 구역?”
“애들이 혈기왕성한 나이잖느냐. 괜히 인명 피해가 나지 않도록 맹에서 객잔 밀집 지역을 통째로 빌렸다.”
“허어…….”
단순히 힘으로 밀어버린 걸 수도 있지만, 이 정도 규모면 관에서 용납하지 않을 규모.
아마 돈으로 사람들을 전부 물렸을 가능성이 컸다.
“어마어마하게 들었겠군요.”
“그래도 생각보단 많이 안 들었어. 아무튼, 객잔에 들어가면 규모에 따라 다르지만, 최소 20명에서 많으면 50명까지 있을 거다.”
“인원 차이가 심한데, 형평성에 어긋나는 거 아닙니까?”
“그건 위에서 다 알아서 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단다. 네가 할 일은 거기서 합격패를 지키는 것. 그리고 내가 말했던 상위 3명을 혼내주는 거다.”
“다른 인원들은 건드리지 말고요?”
“그건 네 맘대로 해라…… 뭐, 그래도 적당히 괜찮은 녀석이 있으면 웬만해선 손속에 사정을 둬줬으면 좋겠구나.”
“알겠습니다. 한데, 팽 대협. 말씀하신 상위 3명을 제가 어떻게 압니까? 혹시 그것도 제가 알아내야 하는 겁니까?”
설마 그것까지 알아내야 하냐고 묻자, 팽구용은 당연히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더니 밖을 향해 손짓했다.
“들어와라.”
팽구용이 밖을 향해 손짓하자, 조심히 걸어오는 한 사람.
그는 다름 아닌 팽구용이 빌려 갔던 사칭범이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공자님.”
“내가 2일째 밤에 이 녀석을 보내 알려주마. 용모파기를 만들어주는 것보다 훨씬 나을 테니 말이다.”
“확실히 나쁘지 않긴 한데…… 괜히 휘말리는 거 아닙니까? 일부러 구역까지 빌릴 정도면 그냥 막무가내로 공격하는 사람도 있어서 그런 거 아닙니까?”
“그런 이들이 없진 않지. 하지만, 객잔에 있는 숙수와 점소이가 맹에서 나온 인원들이다. 작은 핍박이라도 하면 당연히 실격 처리고, 실력 있는 무인들이 위장하고 있는 경우도 종종 있어서 정신 나간 게 아니라면 안 건드릴 거다. 그러니 중간에 한번 바꿔치기해서 넣어주마.”
“나쁘지 않은 생각이긴 합니다만…… 괜히 다른 인원이 눈치채면 팽 대협이 난처해지시는 거 아닙니까?”
사칭범이 나랑 비슷한 실력이라면 모를까.
후기지수들에 비하면 부족한 실력이라 괜히 정체가 드러나는 게 아닌가 싶어 염려하자, 팽구용은 괜찮다는 듯 손사래 쳤다.
“싹수가 보이는 애들끼리는 같은 객잔에 넣지 않는다. 그래야 본선에서 만나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제 객잔에는 저뿐이라는 이야기십니까?”
“맞지. 나머지는 다 어중이떠중이일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녀석 실력이 상당해. 누군가 눈치챘다고 한들, 맹에서 나온 감독관으로 생각할 만해.”
“과찬이십니다.”
사칭범은 팽구용의 칭찬에 감복스럽다는 듯 고개를 숙이면서도 입꼬리가 귀에 걸린 채 내려올 생각을 안 했다.
그리고 그런 사칭범을 보는 팽구용 또한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쓰읍, 분명 데려온 건 나인데, 왜 팽 대협이 유용하게 쓰는 느낌이지?’
괜스레 심술이 샘솟을 만큼 팽구용이 사칭범을 이곳저곳 잘 활용하는 듯하자, 죽 쒀서 개 준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팽 대협께 받은 게 있는 만큼 이 정도는 충분히 용인할 수 있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알고 가도록 하겠습니다.”
주의 사항도 다 들었겠다.
이제 출발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자, 팽구용은 마지막으로 힘껏 내 등을 두들겨 주며 말했다.
“그래, 잘 다녀오고. 아이들의 수준이 생각보다 낮더라도 실망하지 말아라. 나중 가면 또 모르는 법이니까 말이다.”
지금 당장은 쉽게 이길 수 있을지 몰라도 자고로 무인은 실력의 3할을 숨기는 법.
그 3할은 꺼냈을 때는 달라질 수도 있을 거라는 팽구용의 경고에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섰다.
“꼭 명심하겠습니다.”
* * *
남궁세가를 떠나 정해진 구역으로 향하는 길.
용봉지회에 참여하거나, 관람하기 위해 모인 무림인들이 워낙 많은 터라 온 사방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더럽게 많네…….”
발 디딜 틈도 없을 정도.
자칫 잘못하면 인파에 휩쓸려 갈 만큼 사람들이 많았는데, 공간이 워낙 없다 보니 잘못하면 길을 잃을 판국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어찌저찌 사람들을 헤치며 나아가자, 점점 사람들이 줄어들더니, 무인들이 길을 막고 서 있는 곳에 도착했다.
“일현객잔은 저쪽이오. 그럼 무운을 비오.”
마침 눈에 잘 띄는 청색 호루라기를 쥔 채 지정 구역 안으로 들어가는 무인 하나.
정갈하게 입은 무림맹의 인원과 달리 거적때기에 가까운 무복을 걸친 게 외지에서 온 합격자인 듯했다.
“다음. 어떤 용무로 오셨소?”
앞서 들어간 인원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 무림맹의 인원이 나를 부르길래, 앞으로 다가가 말없이 팽구용이 준 합격패를 내밀었다.
“합격자셨소…… 당가?”
패를 건네받은 무림맹의 무인이 합격패를 보고 눈초리를 좁히더니 이내 의미심장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고는 근처에 있는 건물로 들어가며 말했다.
“잠시 기다리시오.”
“…….”
졸지에 영문도 모르고 남겨진 상황.
‘이 사람도 당가에 무슨 원한이 있어서 이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다행히 그건 아닌 듯 감독관으로 보이는 무인과 함께 금방 나왔다.
“당지천 소협 본인 되시오?”
“맞습니다. 무슨 문제 있습니까?”
“아니오. 그냥 팽 대협이 매일같이 극찬을 하시길래 어떻게 생겼나 보러 나온 거요.”
“…….”
“뭔 같잖은 사유로 기다리게 하냐고 생각했다면 미안하오. 단지 그만큼 팽 대협이 우릴 갈궜다는 점도 알아주시오.”
“팽가에서도 그랬다더니 맹에서도 그랬나 봅니다.”
“하하하, 이해해 주셔서 감사하오.”
처음에 어이가 없긴 했어도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여 주자, 중년인은 멋쩍은 미소를 짓고는 패를 돌려주며 말했다.
“합격패 쟁탈전은 금일 자시(23시~1시). 종이 울림과 동시에 시작되어 사흘 뒤 정오에 종료될 예정이오. 그 전후에 싸움을 벌이다 걸리면 실격 처리되니 주의하시오.”
이어서 품에서 적색 호루라기를 꺼내 건네주며 말했다.
“또한, 대기 기간에 합격패 쟁탈전을 벌이더라도 인의를 져버린 행위는 금지요. 만약 발견한다면 가까운 감독관에게 신고하거나 이 호루라기를 불어주시오.”
“적색? 앞에 간 인원은 청색 호루라기를 받지 않았습니까?”
“색깔에 딱히 의미는 없으니 신경 쓰지 마시오.”
호루라기 색깔에 별다른 의미는 없다는 감독관.
허나, 참으로 이상하게도 감독관들은 전부 보란 듯이 적색 호루라기를 달고 있었다.
“…….”
특혜를 주는 건지, 아니면 이용해 먹으려는 생각인 건지 알 길이 없는 상황.
그래도 팽 대협과 잘 아는 사이인 것 같으니 뒷감당을 생각해서라도 무리한 부탁을 하지 않을 거다.
그래서 대수롭지 않게 챙겨 넣자, 감독관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맙소. 삼풍객잔은 저쪽이오. 다른 건물과 달리 홀로 2층짜리이니 헷갈릴 일은 없을 것이오. 그럼 무운을 비오.”
“……뭐야?”
감독관이 자기 할 말만 하고 사라지는 게 어이가 없었다.
허나, 안내는 다 받은 상황이라 딱히 꼬투리 잡을 게 없었기에 그냥 얼른 객잔에 가는 걸 택했다.
“…….”
지정 구역 안으로 들어가자, 쏠리는 시선들.
다들 손쉬운 먹잇감을 찾고 있는지 창 너머로.
또, 길을 걷는 도중에도 조용히 나를 훑어보기 바빴다.
‘하나같이 어중이떠중이들이네.’
굶주린 이리떼마냥 다소 위험해 보이는 이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이들은 내게 신경 쓸 가치도 없는 녀석들로 보였다.
왜냐면 호랑이는 싸울 때.
상대를 가려서 싸우는 게 아니니까 말이다.
[삼풍객잔]
다른 무인들이 보든말든 무시한 채 걷자, 금방 도착한 삼풍객잔.
여타 객잔보다 낡아 보이는 객잔의 문을 열고 들어가니 처음 구역에 들어왔을 때처럼 시선이 한 번에 쏠렸다.
“…….”
1층에 여섯.
2층에 다섯.
잠시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내 수준이 어떤지 가늠하더니.
이내 하나같이 먹잇감을 노리는 얼굴로 나를 쳐다 봤다.
‘이거 자존심 상하는데?’
시간 제약만 없었으면 바로 공격해 왔을 상황.
내가 다른 옷도 아니고, 당가의 직계임을 증명하는 자색의 무복을 입고 왔다.
그런데 아무리 보는 눈이 없다고 해도 겁을 먹긴커녕, 먹잇감으로 본다?
이건 절대 못 참고, 참아서도 안 됐다.
그렇기에 나는.
아예 초창부터 기부터 잡고 가기로 했다.
“건방지기 짝에 없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