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58화
쓰러진 팽가주를 뒤로한 채 남궁세가로 향하는 길.
“정말 괜찮은 겁니까?”
아무리 감격에 겨워도 그렇지.
수준 높은 무인이 쓰러진다는 것 자체가 과로의 결과물임을 알기에 걱정스레 묻자, 팽구용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하루 이틀 그러는 게 아니니까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평소에도 그러시는 거면 더 큰 문제 아닙니까?”
“괜찮대도. 몸 성한 거로 따지자면 팽가 사람들이 중원 제일이다. 걱정할 필요도, 이유도 없다.”
“예…….”
믿기지는 않지만, 가족인 팽구용이 그렇다면 그런 거 아니겠는가.
딱히 도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애초에 팽 대협을 모시고 나온 것부터가 팽가주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도움이니까 말이지.’
팽가주는 물론.
팽가에 거의 은인 취급을 받는 상황.
‘오죽하면 군사부 사람이 튀어나와 전표를 주고 가겠냐고.’
팽구용을 만나는 것 이외에 팽가에 볼일이 있던 건 아니었기에 금방 떠나려고 하자, 부리나케 튀어나온 군사부 인원이 손에 전표를 쥐여줬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소협. 약소하지만 경비로 쓰시지요.
자고로 가문의 살림을 담당하는 군사부 인원들은 수전노들.
돈 한 푼 아끼려고 아득바득 기를 쓰는 사람들인데, 순순히 경비를.
그것도 금 1,000냥이나 되는 금액을 손에 쥐여줬으니 얼마나 기뻐하는지는 금액이 증명하고 있었다.
‘도대체 얼마나 갈궈댔길래 이 금액을 턱턱 갖다 바치는 건지…….’
기가 찬다는 얼굴로 팽구용을 쳐다보자, 내겐 관심도 없는지 고개를 돌려보지도 않는 팽구용.
그 대신이랄까, 옆에 나란히 걷는 사칭범을 뚫어져라 쳐다볼 뿐이었다.
“혈교의 것으로 혈교도들을 능멸한다라…… 보면 볼수록 신기하구나.”
“하, 한낱 보잘것없는 재주에 불과합니다.”
“그 어떤 비루한 재주라도 쓸모 있다면 더는 비루한 게 아니다. 자신감을 가져라.”
“가, 감사합니다.”
팽구용이 사칭범의 어깨를 두들겨 주자, 감격에 겨운 얼굴로 고개를 숙이는 사칭범.
팽가에서 떠난 뒤로 계속 이어지는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다시 한번 해봐라.”
“예!”
팽구용의 명령에 사칭범은 우렁차게 대답하더니 삽시간에 팽구용의 얼굴로 변했다.
“내가 무얼 하면 되겠느냐?”
“허어…….”
유약해 보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팽구용을 연기하는 사칭범.
외모는 물론이며 같이 다닌 지 얼마 안 됐는데도 자신의 몸짓과 말투를 그대로 재현하는 그의 재능에 감탄을 연발했다.
“이거 완전히 허장성세로 써먹기 딱 좋겠구나. 그리고 그 이외에도 이곳저곳 쓸 곳이 참 많겠어.”
“가, 감사합니다. 대협.”
“그런 의미에서 묻는 거다만, 무림맹으로 올 생각은 없느냐?”
“무, 무림맹 말씀입니까?!”
“그래. 네 재능을 썩히기엔 심히 아쉽구나. 내가 친히 추천서를 써줄 테니…… 아니, 내 직접 가서 추천해 줄 터이니 무림의 대의를 위해 같이 힘써보자꾸나.”
팽구용이 참으로 어울리지 않게 점잖게 꼬시자, 황송하다는 얼굴로 팽구용을 쳐다보는 사칭범.
일전에 봤던 모습에 비춰보면 사칭범은 더 큰물에서.
더 명성을 떨치며 지내고 싶어 했던 만큼 팽구용의 제안에 감격스러워했지만, 누가 순순히 놓아준 댔는가.
나는 죗값을 치를 때까지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대협. 제가 데리고 온 인재입니다. 함부로 뺏지 마시죠.”
“누가 데리고 왔는지가 중요하더냐? 옥석을 가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세공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왜 어울리지 않게 그러십니까.”
팽가에서 볼 땐 대화가 불가능한 사람처럼 굴더니 밖에 나와선 또 정상인처럼 굴었다.
“내 눈은 옹이구멍이 아니고, 내 머리는 장식이 아니다. 널 위해 팽가에 오는 길에도 안배를 미리 준비해 놨잖냐.”
“백문인가 하시는 어르신이라면 사람 기분 상하게 만드는 데 재능이 있으시던데…….”
“……그랬지 참.”
팽구용은 무안하다는 듯 헛기침을 하고서는 시선을 돌리며 사칭범에게 말했다.
“크흠, 이 녀석 밑에 있는 것도 괜찮지만, 한번 잘 생각해 보거라. 무림 최고의 후기지수들과 같이 일할 기회다.”
“예, 예…….”
반복되는 팽구용의 영입 제안에 또르르 굴러가는 사칭범의 눈동자.
누가 승냥이 같은 놈 아니랄까 봐.
간이고 쓸개고 다 줄 거처럼 그러더니 한 달도 못 가서 다른 곳 갈 생각하고 앉아 있었다.
“하, 하지만 다, 당 소협께서…….”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사칭범이 우물쭈물하고 있자, 주머니에서 삐익이가 튀어나왔다.
-삐익!
“아얏!”
튀어나오자마자 사칭범의 뒤통수를 후리고는 유유히 내 어깨에 내려앉는 삐익이.
조금이나마 묵직해진 게 주먹만 했던 삐익이가 지금은 어느샌가 주먹보다 조금 더 큰.
윤이 반질반질한 솜뭉치같이 변해 있었다.
“얘는 또 커졌네.”
“잘 먹이고 잘 재웠나 보구나.”
“예?”
“저번보다 더 커졌다는 거 아니냐?”
“맞습니다만…….”
“영물은 잘 먹고 잘 자면 커진다.”
“설마…….”
황급히 무한낭을 뒤적여 보자, 어느샌가 줄어들어 있는 독들.
교묘하게도 가까이 있는 것들은 티끌만큼도 건들지 않고, 저 안쪽에.
나중에 쓰려고 박아둔 것들만 해치운 걸 보면 눈치채지 못하게 하려고 애쓴 듯했다.
“진짜 영악하기 짝에 없네.”
눈 뜨고 코 베이면 이런 기분일까.
아니,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내 잘못이 크긴 했지만, 그래도 배신감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하하하, 많이도 먹었나 보구나.”
“뭐, 챙겨온 양이 적지 않아서 반도 안 줄긴 했습니다만…… 계속 놔두면 동나는 건 일도 아니겠죠.”
지금이야 웃어넘기지만, 그런 사태가 벌어지면 진짜 심각한 일이다.
그래서 비교적 작은 주머니에 독들을 옮겨 담고, 무한낭을 꽉 잠가 버리자, 항의하듯 우는 삐익이.
-비잇, 비잇!
그러나, 울음 세기가 강하지 않은 걸 보니 이미 배가 부를 대로 불러서 그냥 한번 항의해 본 느낌이 강했다.
“이런 웬수 같은 녀석…….”
“안 그래도 당가의 대표라 신기하게 볼 텐데, 귀여운 녀석을 데리고 다니니 이목이란 이목은 다 끌고 다니겠구나.”
“별로 이목을 끌고 다니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요.”
“끌고 싶지 않아도 끌게 될 거다. 내 부탁이 그거였으니까.”
“…….”
팽구용의 부탁대로라면 명문세가의 이름난 후기지수들을 친히 교육시켜 줘야 했다.
당연히 이목을 안 끌 리가 있겠는가.
“그러고 보니 용봉지회 참가 신청은 어떻게 합니까? 당가가 무림맹에 가입되어 있지 않은지라…….”
“꼭 맹의 일원이 아니어도 누구나 참가할 수 있다. 신청은…… 원래라면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해서 설명하기 복잡하겠지만,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할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애초에 네 참가 신청은 오래전에 넣어놨으니 말이다.”
“오래전에 말입니까?”
“그래, 오래전에 말이다.”
내가 언제 올지 알고.
또, 못 하겠다고 도망치면 어쩌려고 냅다 신청해 버린단 말인가.
‘이유가 있어서 안 온 거면 그냥 없던 일로 치고, 만약 도망치면 사람 잘못 봤다면서 꼽을 주려 한 거겠지.’
우직하게 들이받는 팽가의 대표로 안하무인의 대명사처럼 굴다가도, 이렇게 미리 안배를 해두는 걸 보면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오묘한 눈으로 팽구용을 쳐다보자, 팽구용은 괜스레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그러니 얼른 가자꾸나. 그 양반 얼굴이 구겨지는 걸 빨리 보고 싶거든.”
기대된다는 발걸음으로 바삐 걸어 나가는 팽구용.
이렇게 할 수 있으면서 팽가에서 그렇게 깽판을 친 건 무슨 원한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본인만 알 일이다.
“뭐 하느냐. 얼른 가자.”
“예, 예. 갑니다. 가요.”
* * *
안휘성 합비.
남궁세가가 위치한 안휘성의 성도로, 평소엔 어떨지 몰라도 용봉지회가 열리는 지금만큼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리고 역시나 문전성시를 이루는 남궁세가.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연을 맺어보겠다고 여기저기서 몰려오는 중소문파의 무인들부터 인사차 들른 대문파의 인원들까지.
많은 방문객이 예상되는 만큼 대문을 활짝 열어놓은 남궁세가였지만, 워낙 인원이 많고 혼잡한 탓에 잠시 줄을 서게끔 하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어디까지나 어중이떠중이들에게 통용되는 이야기.
태생에서 보나, 실력 면에서 보나, 귀빈인 팽구용은 줄을 무시한 채 대문으로 다가갔다.
“죄송하지만 순서대로 안내해 드리고 있으니…… 헛, 천괴도 대협이셨습니까?”
문지기가 자신을 알아보자, 대뜸 나를 끌어당기는 팽구용.
이어서 보란 듯이 나를 내밀며 말했다.
“태상가주께 전해. 나하고 사천당가의 소가주. 당지천이 왔다고.”
팽구용의 말에 한순간에 쏠리는 이목.
안 그래도 혈교도가 나타나고 위명을 떨치는 팽구용이다.
그런데 그런 팽구용이 직접 데리고 와서 내밀 정도의 인물이 있으니 절로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다.
“당 소협도 계셨군요. 혹시 방문하신다면 바로 안으로 모시라는 태상가주님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안내하겠습니다.”
무슨 이야기라도 되어 있던 건지 안내하는 사람이 알아보고 바삐 움직이자, 자연히 팽구용과 나.
흔유와 사칭범.
그리고 일염이를 포함한 암혈대가 뒤를 따랐다.
‘이게 맞는 선택인지 모르겠다.’
무림맹 인원들이 많이 들어와 있는 만큼 밖에 두는 것도 불안하지만, 이건 이리 떼가 무서워 호랑이 굴에 들어오는 격이었다.
‘그래도 일염이가 빈말하진 않았을 테니까 괜찮겠지.’
장난칠 게 따로 있지.
이런 거로 장난치면 농담이 아니라 그냥 사망이다.
‘진짜 괜찮겠지……?’
하지만 남궁세가를 거닐자, 줄어드는 자신감.
누군지 모를 남궁세가의 인물은 물론.
이름 모를 어딘가의 무인들까지 범상치 않은 기운을 가진 몇이 꿰뚫듯 나를 쳐다보자, 괜스레 가슴이 찔렸다.
-단순히 호기심에 쳐다보는 거니까 그렇게 불안해하지 말아라.
팽구용은 그런 속내를 짐작했을까.
슬쩍 돌아보며 전음을 보냈다.
-하지만 팽가주님은 바로 아셨잖습니까?
-그거, 그냥 찍어본 거다. 내가 알려줬거든.
-예?
-나조차도 집중하지 않으면 때때로 저들의 존재를 잊을 정도다. 그런데 형님이 아셨을 리가 없지.
-그럼 단순히 찔러본 겁니까?
-그래, 저들 또한 네 뒤가 아닌 너를 보는 것이니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이런 말씀 드리면 실례일지도 모르지만, 팽가주님보다 강한 분들이실 수도 있잖습니까?
-가주전에서도 그렇더니만, 너는 널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구나. 아니, 다른 무인들을 과대평가하는 건가.
짐짓 미소를 지은 팽구용은 입꼬리를 재차 말아 올리며 전음을 보냈다.
-무림에 숨은 고수들이 많긴 해도, 말 그대로 숨어 있는 사람들이고, 진짜로 염려해야 할 사람은 한 손가락에 꼽으니 괜한 걱정 말아라.
-예…….
무인들이 모두 강한 건 아니니 과대평가하지 말라는 팽구용.
다른 곳이었다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겠지만, 천하의 남궁세가.
거기다, 손님들도 무림에서 이름난 귀인들일 게 분명했기에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았다.
“여기가 태상가주님께서 기거하시는 천무보입니다. 들어가시죠.”
팽구용의 충고를 듣고, 사람들의 이목을 끌며 이리저리 이동한 결과.
어느샌가 한적하기 짝에 없는 건물에 도착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도착하자마자 대뜸 문을 여는 안내원.
본디 가문의 어르신이 계신 곳이면 지키는 이가 있을 법도 하건만, 아무리 눈 씻고 찾아봐도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없네요.”
“태상가주님께서 번잡한 걸 싫어하시는 터라, 곁에 사람을 잘 두지 않으십니다. 이쪽입니다.”
사람이 없는 거치고는 규모가 꽤 큰 천무보.
남궁세가의 세를 과시하듯 크고 아름다운 면적에 한참을 걸어서야, 응접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들어오너라.
응접실 앞에 도착하기 무섭게 들려오는 노인의 걸걸한 목소리.
안내원은 그 목소리에 고개를 한 번 숙이고는 문을 붙잡았다.
“태상가주님의 무례엔 미리 사과드리겠습니다.”
문을 열기 전에 왠지 모르게 사과를 꾸벅한 안내원은 문을 힘껏 열어젖혔다.
“그럼 전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도대체 뭘 하는 사람이길래 이래?’
아니, 얼굴 맞대기도 전에 대뜸 무례에 사과드린다니.
이거 완전히 시작부터 곱게 가지 않겠다는 의미 아닌가?
‘들어가 보면 알겠지.’
문이 열렸음에도 모두가 꿈쩍 않고 있길래 내가 제일 앞서서 응접실로 들어갔다.
“어서 오너라.”
그러자, 인사를 건네오는 인자한 미소의 노인.
한눈에 봐도 남궁공자를 닮은 게 남궁공자의 아버지.
태천검 남궁전유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크윽…….”
두 번째 발자국을 떼었을 때.
나는 안내원이 왜 그런 소리를 했는지 깨달을 수 있었다.
왜냐면…….
“네가 공자가 말하던, 저 녀석이 말하던 그 녀석이지? 어디 내게 몇 걸음이 닿을 수 있는지 보자꾸나.”
이 빌어먹을 가주들은 약속하기라도 한 듯.
대뜸 사람을 시험부터 해댔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