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57화
“예?”
다시금 입에 오르는 황당함의 표시.
아니, 남의 귀한 집 자제를 패라는 것도 웃긴 일인데, 후기지수들을 패라고?
“아니, 제 실력이 얼마나 된다고 이들을 팰 수 있겠습니까.”
내가 뒤늦게 무공을 익힌 것치고 빠르게 경지를 올렸다.
남들은 가히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속도.
허나, 그럼에도 후기지수들은 만만하게 보면 안 될 이들이었다.
“후기지수라고 불릴 이들이라면 저보다 실력이 월등할 터. 거기다. 독을 봉인하고 싸우면 엇비슷한 수준도 이기기 힘들 겁니다.”
자고로 후기지수란 영약으로 떡칠하는 건 기본.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들이다.
아무리 내가 강해졌다고 한들, 독을 쓴다면 모를까.
독도 없이 그들을 상대하라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그런데도 팽구용은 그런 걱정할 필요 없다는 듯 씨익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엇비슷한 수준이라면 말이지.”
팽구용이 늘어진 용모파기 중 하나를 골라 내 앞으로 내밀었다.
“모용세가의 사람이군요.”
[해천회검 모용집.]
바다와 하늘을 품은 검이라는 거창한 별호를 단 이 청년은 말쑥하고 고상하게 생긴 전형적인 미남형의 사람이었다.
“제일 뛰어난 후기지수입니까?”
“아니.”
“하면?”
“제일 싸가지가 없는 놈이야.”
“…….”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이야기의 맥락.
이젠 일일이 되묻기도 지칠 정도라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자, 팽 대협이 알아서 말을 이었다.
“너도 알다시피 모용세가 놈들이 싸가지가 좀 없긴 해. 근데 이놈은 달라. 모용세가 놈들의 한계를 뛰어넘었어.”
“……대체 어떻게 뛰어넘었길래 그렇게 성을 내십니까?”
“머리 굴리는 놈들이 으레 그렇듯이 비꼬듯 말하며 사람 이상하게 만들잖냐.”
“그렇긴 합니다만…… 설마 팽 대협께 그랬단 말입니까?”
“그래, 이놈의 언사가 간사하기 짝에 없어서 내가 성내면 속 좁고 하찮은 사람으로 만들어 버리는 동시에, 가만히 있으면 그것대로 바보로 만들어 버리더구나.”
“아니, 그걸 듣고 가만히 계셨단 말입니까?”
다른 어른이라면 몰라도 천하의 팽구용이다.
머리 굴리는 사람을 극히 혐오하는데 선까지 넘었으니.
사지육신 멀쩡히 돌려 보냈다는 건 말이 안 됐다.
“물론, 손수 지도비무를 해줬지. 좀 진득한 비무를 말이야.”
“역시 그러셨군요.”
“하지만 그 이후로 나한테만 안 그럴 뿐. 무림맹 내부에서 악명이 자자하다. 특히나 밑에서 일하는 무인들은 그 녀석 때문에 탈모가 생겼다고 청원서를 얼마나 넣어대던지…….”
낙하산 상사가 어리고 실력이 있긴 한데, 싸가지는 밥 말아 먹은 상황.
혈교도를 상대하기 위해 한마음 한뜻으로 뭉쳐도 모자랄 판에 분란을 조장하는 이가 있으니 팽구용의 마음에 들 리가 없었다.
……특히나 탈모를 유발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래서 내가 이 녀석을 패라고 한 거다.”
“기를 한번 죽여야 하니 말입니까?”
“그렇지. 잘 아네.”
“…….”
무슨 벽력탄이 한 무더기 있는 것도 아닌데, 여기도 폭탄처리반.
저기도 폭탄처리반이냐.
“제가 과연 가능할지 모르겠습니다. 아시다시피 독이 없으면 팔 하나 안 쓰고 싸우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비슷한 수준이라면 해치우긴커녕, 이쪽이 당할 겁니다.”
“그건 걱정 마라. 혹시나 발전이 없었으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지금 보아하니…….”
-스릉.
말끝을 늘인 팽구용이 다짜고짜 도를 뽑아 휘둘렀다.
“충분히 가능할 것 같구나!”
이놈의 무인들은 뭔 기습을 이래도 좋아하는 건지.
실력 볼 일만 있으면 말로 해도 될 걸 꼭 기습을 가했다.
그래도 본심을 내진 않았는지, 팽구용이 펼치는 오호단문도는 그 안에 든 묘리가 무겁지 않았기에 어찌저찌 막을 만했다.
“으익.”
그렇기에 나도 모르게 이상한 소리를 내며 팽구용의 도를 공중에서 잡아챘다.
“…….”
그러자, 팽구용의 입은 물론이고, 옆에서 보던 팽가주의 입도 떡 벌어졌다.
“……이건 또 뭐냐?”
“아하하…… 이런.”
팽구용의 반쯤 넋을 놓은 듯한 물음에 나는 멋쩍음이 담긴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팽구용이 봐줬다고 한들, 팽가의 묘리가 담긴 공격이었다.
그런데 그걸 피하거나 막는 게 아니라 잡아채 버렸으니…… 내가 팽가의 무공을 파훼할 수 있다는 걸 자랑한 꼴이었다.
“네 녀석. 팽가의 무공을 어디서…….”
한순간 경악이 깃들었다가 좁혀지는 팽구용의 눈초리.
막무가내로 나간다고 한들, 가문의 무공이 파훼되는 건 팽가제일인인 팽구용에게는 용납할 수 없는 일 일터.
하지만 기습을 당해서 원치 않은 걸 보여준 건 나도 마찬가지였기에 뻔뻔하게 나갔다.
“놀랍군요. 저도 이런 걸 해낼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 우연이라고 하는 거냐?”
“맞습니다. 그저 우연입니다.”
“되지도 않는 말은 거기까지 해라.”
팽구용이 압박을 하듯 인상을 뻑 쓰고 으르렁거리며 경고했다.
허나, 기분 나쁜 건 나도 마찬가지.
모르쇠로 일관하면서 비꼬기 한 사발을 들이부었다.
“진짜, 진짜 우연입니다. 어, 근데 우연이 아니어도 저한테 그러시면 안 됩니다. 무림맹에 가입된 대문파는 물론이고, 팽가에서도 당가의 독을 낱낱이 분석하는 실정입니다. 저희 또한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죠.”
“그거랑 이거랑…….”
“같죠. 무공이 문파의 근간이듯, 독은 당가의 근간이니까요.”
팽가주가 뭐라 하려 드는 걸 단번에 끊자, 팽가주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그런데 웃기게도 팽구용은 되레 미소를 지었다.
“뭐, 그렇다면 할 말 없긴 하지.”
“구용아, 지금 그게 무슨 말이더냐? 오호단문도가 아무리 팽가의 기초 검술이라고 하여도 파훼당했다면 이는 쉽게 볼 일이 아니다.”
“형님. 뭣 좀 꼬투리 잡아서 하나라도 얻어낼 생각이신 거 같은데, 얘 저희 도와주러 온 겁니다. 그러니 그러지 맙시다.”
여전히 웃는 얼굴로 납도를 한 팽구용은 내 어깨에 손을 올리더니 팽가주를 보고 말했다.
“얘 말대로 당가에서 오호단문도의 파훼식을 만들었다고 하면 그럴지도 모르겠죠. 근데, 형님. 그럴 리 없다는 건 형님도 아시잖아요. 당가 괴롭히는 문파가 좀 많아야지, 우리가 뭘 했다고 우리 거를 그러겠어요?”
“…….”
“딱 봐도 얘가 그만한 재능이 있으니 그런 거겠지. 그러니 이 건은 곱게 넘어갑시다.”
“…….”
팽구용의 말에 잠시 팽구용을 노려본 팽가주는 어이가 없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니,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설명할 수 있는 놈이 대체 왜 내 말을 귓등으로 듣는 게냐?”
“아니, 귓등으로 듣다니요. 형님께서 제 말을 귓등으로 듣고 계신다고 내가 몇 번이나 이야기하잖아요.”
“어후……, 내가 저걸 확 그냥…….”
“아이 그럼, 뭐 때려보시든가요.”
-퉁, 퉁.
팽구용의 항변에 속이 꽉 막힌 듯 팽가주가 연신 가슴을 두드려 대는 게 참으로 불쌍해 보였다.
하지만 계속 놔두자니 이야기가 산으로 가다 못해 그 너머 어딘가로 갈 듯해 공손히 부탁했다.
“두 분 이야기는 거기까지 하시고, 본론으로 돌아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 그래. 그래야지.”
-텅, 텅.
팽구용이 손바닥 뒤집듯 돌아보자, 이젠 아예 가슴이 부서져라 쳐대는 팽가주.
일부러라고 볼 수밖에 없는 행동에 화염을 내뿜어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잘 참았는지 조용히 있었다.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내 공격을 막아낸…… 아니, 잡아챈 시점에서 모용집 정도는 충분히 해치울…… 교육해 줄 수 있으니 걱정 안 해도 된다. 거기다, 이 녀석이 여기 있는 놈들 중 2번째로 강한 녀석이거든.”
“그러면 가능은 하겠지만…… 뒷감당은 어쩌란 말입니까? 제가 대뜸 찾아가서 ‘천괴도 대협이 지엄하신 명이니, 좀 맞도록’ 이러면서 팰 수도 없는 노릇이잖습니까.”
“그거야, 내가 다 생각이 있지 않겠느냐?”
“예전엔 그렇게 생각했긴 했습니다만…….”
“했습니다만, 뭐? 말꼬리 늘이지 마라. 기분 나쁘니까.”
팽구용을 살살 긁자, 팽가주는 껄껄 웃어댔고, 팽구용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래도 별 신경 안 쓰는지 태연하게 말했다.
“곧 있으면 안휘에서 용봉지회가 열린다.”
“용봉지회?”
용봉지회.
자고로 젊은 무림인들이라면 한 번쯤 출전해 본다는.
명성을 쌓아 올리기엔 최고의 대회.
각 문파에서 손꼽히는 기재들이 한자리에 모여 무를 논하기에 인기도 많고, 경험을 쌓을 수 있다는 점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행사였다.
“근데 그게 왜 무림맹이 아닌 안휘에서 열립니까?”
“거기가 천하제일인이 있는 곳이니까.”
“아…….”
작금의 상황을 고려하면 단번에 이해되는 팽구용의 답변.
“지금은 숨어들었다고 해도, 후기지수들을 단번에 처리할 수 있는 장이니 혈교도들에겐 군침이 도는 행사겠군요.”
“그래. 열지 말자고 해도 미련스럽게 열어젖히는 걸 보면 뭔가 이유도 있겠지만, 일단 다음 대 애들의 안위도 중요하니 안휘에서 열기로 한 거다.”
정파에서 보기엔 미래의 기재들이 모이는 각축장이지만, 혈교도가 보기엔 진미.
집어삼킨다면 급할 것 없이 세월만 기다리면 저절로 이기게 되는 혜안이 될 테니 조심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렇군요.”
“그런데…….”
잠시 운을 뗀 팽구용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밖을 지긋이 내다보며 말했다.
“저 인원들은 놔두고 가야 할 것 같구나.”
밖을 내다보며 말하는 걸 보면 누구를 말하는지는 안 봐도 불 보듯 뻔한 일.
아마 암혈대를 보고서 말하는 걸 거였다.
“단순히 무림맹에서 개최되는 거라면 어떻게든 비벼보겠다만, 그 양반 앞마당은 얄짤없어. 더군다나 마교가 지워진 세월이 워낙 길다 보니 아무도 신경 안 쓰는데, 그 양반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적대심이 강해서 설득하기 어려울 거야.”
“그 양반이라면 남궁전유 님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 양반.”
“…….”
천하제일인에게도 막힘없이 막말하는 팽구용.
하도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턱 막히자, 팽가주가 타이르듯 말했다.
“……네 방식대로 지도 대련을 해서 너를 친히 교육해 주셨다고 한들, 친구 아버지이기 전에 남궁세가의 태상가주님이시다. 최소한의 예는 갖춰라. 아니, 애초에 친구 아버지시면 예를 갖춰야지.”
“그래서 양반이라고 하잖아.”
“……됐다.”
포기한 듯 팽가주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이내 나를 보며 말했다.
“이 녀석이 원래 이렇게까지 막 나가는 녀석은 아니었는데, 그분을 만나고서부터 고집스러운 부분이 강해졌다. 한 성깔 하다 못해, 까다로운 분이시니 웬만하면 주의하거라.”
“그거라면 알아서 할 테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팽가주가 조언하듯이 이야기하자, 가만히 있다가 다짜고짜 끼어드는 일염이.
팽가주는 단순히 호위라고 생각했던 일염이가 반말로 끼어들자, 기분이 나쁜 듯 눈가를 좁혔지만, 팽구용이 제지하자, 한 번은 참는 듯한 모습이었다.
“뭐야? 그 양반을 설득할 방법이 있단 말이야?”
“있다.”
가능성을 점치는 것도 아닌 확언을 해버리는 일염이.
나는 남궁전유가 누군지 말로만 들어서 어떤 사람인지도 잘 모르는데, 일염이는 뭔가를 아는지 망설임조차 보이지 않았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제멋대로인 천하제일인을 상대로 설득할 수 있다는 말.
팽가주가 보기엔 허황되기 짝에 없는 소리였는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팽구용은 의미심장한 얼굴을 하더니 이내 팽가주를 향해 말했다.
“형님.”
“왜?”
“저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가, 가본다니 어디를?”
팽구용의 말에 침을 꿀꺽 삼킨 팽가주는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지천이를 따라서. 안휘에 좀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허허…… 네가 안휘에. 가문을 떠나서 안휘에 간다는 말이지?”
“맞습니다.”
팽구용이 확인 사살을 하듯 고개를 끄덕이자, 감격에 젖는 팽가주의 얼굴.
“귀인이 왔구나…… 정말 귀인이 왔어…….”
팽가주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 몸을 부르르 떨다가, 결국…….
“버티다 보니 볕 드는 날이 오는구나.”
기쁨을 못 이겨 환희에 찬 얼굴로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