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55화
침상에 드러누운 채 배를 벅벅 긁는 3일째.
평소라면 조용하기 짝이 없을 터인 현청.
길현의 최고 권력자인 현령이 업무를 보는 곳인 만큼 죄인을 처벌할 때를 제외하곤 조용한 분위기였는데, 오늘따라 유독 소란스러웠다.
그것도.
관에 연이 없는 무림인들 때문에 말이다.
“현청에 들고자 하는 이들은 모두 줄을 서시오!”
“자네! 끼어들 생각 말고 뒤로 가게나!”
“크흠, 소인은 길현 제일의 문파. 금각문의…….”
“거기! 관병의 적법한 통제에 따르지 않는 이는 돌려보내라는 당지천 소협의 전언이 있었소!”
“어허, 그렇다면야 들어야지. 하지만 우리가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너무 정 없게 구는 거 아닌가. 이거라도 받고…….”
“관병을 능멸하려는 자 또한 돌려보내라는 전언도 있었소.”
“…….”
“뒤로 가서 줄을 서시오.”
관병의 냉랭하기 짝이 없는 명령.
관무불가침이라 할 만큼 평소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요 며칠간.
적어도 지금만큼은 항명이 불가한 절대적인 명령이었다.
“그렇지 않겠다면 당 소협의 전언대로 돌려보내고, 내 직접 보고하겠소. 금각문의 누구가 관병을 능멸하고, 더 나아가 당 소협을 능멸하려 들었다고 말이오.”
왜냐면 이들이 모두 모인 건 오직 혈혈단신으로 혈교도를 물리친.
나와 연을 맺기 위해서였으니 말이다.
“……알겠소.”
고작 관병에게 명령받는 게 심히 기분이 상했는지 금각문의 뭐시깽이가 눈초리를 좁혔다.
하지만 다행히 말이 통하긴 하는지 순순히 줄의 맨 뒤로 갔다.
“쟤는 딱 보아하니 만나주면 이름 팔고 다닐 녀석인데요?”
“그럼 저 녀석 앞에서 끊어. 대기 줄 긴 거 보니 충분할 거 같네.”
“옙, 그럼 병사들에게 전달하겠습니다.”
장난스럽게 답한 흔유가 방을 나가자, 나는 곧장 시선을 돌려 줄의 맨 앞사람을 쳐다봤다.
“다음.”
“처음 뵙겠소. 당 소협. 소인은 쌍두문의 문주인 상공지라고 하오. 무림 최고의 후기지수를 이렇게 뵈어 영광이오.”
“길현쌍권 대협이셨군요.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소인의 별호를 알고 있다니…….”
심히 감격한 듯 눈물을 닦는 남자.
내세우고 다닐 만큼 특출난 별호가 아님에도 내가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심히 감동한 얼굴이었다.
“뭐, 당연히 알 수밖에 없지.”
근데 알기나 할까.
진짜인 나는 그의 별호를 알기는커녕, 들어본 적도 없단 사실을 말이다.
“사칭범 놈이 길현을 그렇게 헤집고 다녔는데 모르겠냐고.”
상공지인가 쌍꽁치인가 하는 사람.
그 사람 앞에서 담소를 나누는 나.
그건 다름 아닌 내 모습으로 위장한 사칭범의 모습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잘하긴 정말 잘하네.”
며칠 전.
사칭범이 날 사칭하고 다닌 건 괘씸하긴 하나,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고.
남 사칭하는 데 재능이 있는 것 같아서 한 번 내 역할을 맡겨봤다.
그런데 웬걸.
일말의 위화감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정말 잘하는 게 아닌가?
물론, 오래 본 사이가 아닌 만큼 세밀한 부분은 달랐지만, 그래도 단시간에 날 연기하는 건 참으로 어마어마한 일이었다.
“근데…… 얘가 가서 멀쩡히 대화만 하랬더니 아예 금칠을 해주고 있네.”
분명 내가 명령한 것은 ‘적당히 내가 있음을 알릴 정도만. 위화감을 느끼지 못할 정도만 연기하고 와라.’라고 명했다.
한데, 거의 뭐 오는 사람마다 알아보며 금칠을 해주니 참으로 웃긴 노릇이었다.
-무례하게 문전박대하지 말랬지, 금칠하라고 한 적도 없다.
“…….”
“무슨 일 있으십니까? 소협?”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전음을 보내자, 잠시간 굳어버리는 사칭범.
뭔가를 찾듯 또르르 또르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주변을 잠깐 살폈다가 이내 태연하게 미소를 짓고는 상공지를 상대했다.
“아닙니다.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랬습니다.”
조금 당황했으나 금방 태연을 가장하는 사칭범.
‘이거, 조금만 더 훈련시키면 장난 아니게 쓸 만해 지겠는데?’
무공 실력은 보지 못했기에 얼마나 잘할지 몰라도 사람 하나 위장시키는 건 정말 쓸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자님. 말씀 제대로 전했습니다.”
계속해서 녀석이 잘하고 있는지 잠시 감시하자, 흔유가 방으로 돌아와 보고했다.
“잘했어.”
“저, 공자님. 그런데 굳이 이렇게 많이 만나주실 필요가 있나요? 솔직히 별 도움도 안 되는 인원들이잖아요. 어디 가서 공자님 이름 팔아서 나대지 않으면 다행인 정도인데요.”
“원래라면 그렇지. 원래라면 말이야.”
자고로 무림인이란 족속들은 대부분 싸우기 전 호구조사가 기본인 이들이다.
당연히 날 건드리면 누구누구가 와서 널 개밥으로 던져줄 테니 순순히 물러나라고 남의 이름을 팔고 다니는 경우도 꽤 됐다.
그 과정에서 본의 아니게 원치 않는 은원에 얽혀 들어가는 건 당연지사.
그렇기에 이렇게 이름 팔릴 일을 만들지 않는 게 좋았다.
하나, 난 그런 골치 아픔을 감수하더라도 이들을 만날 필요성을 느꼈다.
“하지만 알려줄 필요가 있거든. 그깟 자폭 공격으로는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한다고 말이야.”
“허장성세란 이야기십니까? 나쁘지 않은 수 같은데 다른 곳도 아니고, 혈교에서도 예상하지 않을까요?”
“아마 혈교라면 그렇겠지. 그런데 내가 그러는 건 혈교와는 상관없어.”
“하면?”
“자고로 사람이란 소문을 듣는 거로도 지레 겁을 먹는 존재거든. 그런데 봐. 혈교도가 자폭해서 고수 한 명 날려 버린다는 소문이 돌면 어떻겠어?”
“아무도 나서려 하지 않겠죠.”
“그치. 아무리 명예에 목숨을 건 불나방들이라고 해도 가능성 있는 싸움을 하지, 개죽음은 피하려 한단 말이야.”
“그리고 무림인들이 싸움을 피한 만큼 양민들의 피해가 커질 테고 말이죠.”
이제야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흔유는 놀랍다는 양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나무를 보고 있을 때, 공자님은 숲을 보시는군요.”
“그것보단 지향하는 바가 달라서 네가 생각 못 한 걸 거야. 근데 저번에 확인하라 했던 저 녀석 정보는 확인했어?”
“예, 지부에 연계해서 확인해 본 결과 혈교도일 가능성은 1푼이 채 안 된답니다. 실력을 숨기고 있는 거는 문주님이 계시니 볼 필요도 없고요.”
“그렇단 말이지.”
혈교도의 장비를 제 것처럼 능숙하게 쓰는 녀석이 우습게도 혈교도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이는 즉, 유용한 전력을 얻었다는 이야기와 일맥상통했다.
“한동안 요긴하게 쓰겠네.”
원래 이렇게 사람 막 데리고 다니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 사칭범은 요긴했다.
더군다나, 이 녀석은 범죄자.
감히 아름다운 내 얼굴을 맘대로 훔쳐서 뒤집어쓰고 다니던 놈 아니던가.
노동으로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게 당연한 거였다.
그렇기에 사칭범을 보고서 얼마나.
또 어떻게 부려먹어야 잘 부려먹었다고 소문이 날까 고심하던 찰나.
열린 방문을 통해 현령이 들어왔다.
“문이 열려있구려. 당 소협. 몸은 좀 괜찮소?”
“이제 완벽히 나아졌습니다. 뭐, 단순히 기력이 부족했던 게 전부여서 치료할 것도 없었지만 말입니다.”
“그렇군. 그렇다면 참 다행이네.”
“한데, 여긴 어쩐 일로 오셨습니까?”
“새삼스럽지만 감사 인사를 전하러 왔소. 고맙소. 당 소협.”
현령이 고개를 옅게 까닥이고는 말했다.
“비록, 혈교도들과 직접 싸우는 모습은 보지 못했지만, 혈교도와 혈투를 벌인 흔적들을 잘 봤소. 거기다. 성벽에 있던 병사들의 보고에 따르면 가히 성벽이 무너질 듯한 폭음과 진동도 한 차례 울려 퍼졌다고 하더군.”
그건 내가 한 게 아닌데…….
“쉬이 이길 수 없는 상대라 필시 절기를 썼을 테지.”
절기는 커녕, 제대로 된 무공도 쓰지 않았는데…….
‘뭐, 상관없나.’
무림에서 어중간하게 위명이 높아지면 날파리가 많이 꼬이긴 하나, 현령이라면 이야기가 또 다르다.
받을 게 있는 만큼 마음에 빚은 많이 지울수록 좋다.
“내 비록 정순한 관리라 칭할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은혜를 입고도 모른 척할 만큼 안하무인한 관리도 아니네.”
“애초에 마땅한 보상을 하지 않으면 고발당했을 때 뒷감당이 안 돼서 그러시는 건 아니고요?”
“크흠흠, 그런 면도 없지 않아 있네만, 나름 진심이라네.”
현령이 슬쩍 내미는 주머니를 열어보자, 들은 건 자잘자잘한 야명주들.
모양이 일정치 않고, 방출하는 빛의 세기가 강하지 않아서 유의미하게 쓰긴 어려운 물건이다.
하나, 이것들의 진정한 용도는 화폐.
이런 작은 것들이 금으로 치면 한 100냥 정도 되는 물건이다.
그런 것들이 거의 50개가 넘으니 이 주머니 하나의 가치만 해도 5,000냥이 넘었다.
“개인적인 성의라네. 그리고 이건 현령으로 주는 것이고.”
다음으로 현령이 내민 건 전표.
무려 5만 냥짜리로 야명주보다 액수가 10배 정도 차이 나긴 했으나, 나는 야명주 쪽을 더 감사하게 받았다.
왜냐면 현물로 가져온 5천 냥어치 야명주.
그건 현령의 뒷주머니에서 나온 이름 없는 돈일 테니까 말이다.
“정말 진심이셨나 봅니다.”
“아까도 말했지 않나. 진심이라고. 내 소협에게 충고 하나 하자면 원래 귀하신 분이 오시면 뒷돈부터 건네는 게 제일이네. 정말 무례하게 굴지 않고서야 웬만한 건 넘어가 주시거든.”
“하하하…….”
경험에서 우러나오다 못해 인생이 담긴 조언을 해주는 현령.
대충 보면 현령이 부패한 관리처럼 보였으나, 이렇게 선뜻 돈을 쓰는 걸 보면 어쩌면 이게 현령 나름대로의 생존방식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어떻게 할 건가?”
“저는 갈 곳이 있어서 가봐야 할 듯합니다. 애초에 혈교도들이 길현에 몰려온 것도 저를 노린 거기도 하고요. 물론, 제 탓은 아닙니다.”
“그 부분은 잘 알고 있으니 염려 마시게나.”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으로 창문 너머의 사칭범을 보는 현령.
지금은 물론.
이전에도 속았다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오르는 듯했다.
“공자님. 인원들 교체 완료했습니다.”
그때, 때마침 방으로 들어오는 일염이.
잠시 암혈대를 마중 나갔다가 돌아온 것 같길래 기척을 읽어 보려 했으나 지금은 전무.
수호대가 호위할 땐 수호대원의 기척을 읽을 수 있었으나, 이젠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혈교도에게서 나온 정보들을 취합하여 정리하여 발송했습니다. 천괴도에게 보냈으니 팽가에 도착할 때쯤이면 분석을 마쳤을 겁니다.”
“그래? 그럼 슬슬 가봐야겠네.”
내가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며 현령을 쳐다보자, 현령은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웃으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정말 고생 많았소. 당 소협. 부디 다음에 시간이 나더라도 길현은 오지 마시구려.”
그래서 나도 마주 웃어주며 작별인사를 건넸다.
“언제일지 몰라도 꼭 다시 찾아뵐 테니 기대하시죠.”
* * *
사람들의 감사 인사와 아쉬움이 가득한 아우성을 받으며 길현에서 떠나 팽가로 오는 길.
정말 놀랄 만큼 아무 일 없이.
평온하고 평화롭게 팽가가 있는 곳에 도착했다.
“이렇게 태평하게 올 줄이야…… 뭔가 이상한 기분이네.”
“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먼 길 오느라 피곤했는데 어서 들어가시죠.”
“……네가 피곤하다고?”
“헛, 저도 모르게 말실수를.”
의도가 다분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가리는 흔유.
마음 같아선 발걸음을 돌려 노숙을 며칠 더 하고팠지만, 지친 건 나도 매한가지였으므로 흔유의 머리를 한 대 쥐어 박아주고 팽가에 장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정지. 어디서 오신 분…….”
검문을 하다 말고 말을 멈추는 팽가의 문지기.
무슨 일 있나 싶어 문지기를 빤히 쳐다보자, 반대로 문지기가 끔뻑끔뻑 나를 쳐다보더니 호들갑을 떨며 물었다.
“호, 혹시 당지천 소협 되십니까?”
“맞습니다만…….”
“안으로!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증명패는커녕, 다른 것도 일절 확인도 안 하고 대뜸 문을 열어 재끼는 문지기.
‘아니, 대체 뭔 반응이 이래?’
아무리 팽구용과 아는 사이라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환대할 이유는 없었기에 당혹스럽게 문지기를 쳐다봤다.
하나, 문지기는 한술 더 떠서 비명을 보이는 아무나 잡으며 외쳤다.
“거기 너! 당 소협이 오셨다고 가주님께 일러라!”
아니, 내가 무슨 귀빈도 아니고, 저렇게 외친다고 알기나 할까?
“예에에에?! 당 소협이 오셨다고요?! 알겠습니다!”
……잘 아네?
심지어 당혹스러울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부리나케 가주전으로 향하는 것 아니겠는가?
근데, 정말 놀랍게도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뭐?! 당 소협이 도착해?!”
“뭐시라?! 그분이 오셨어?!”
“당 소협! 당 소협!”
마치 경보라도 울린 듯 사방으로 퍼지는 내 도착 소식.
모두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날 반기는 모습에 나를 비롯해 일행들은 도무지 당혹감을 감출 수 없었다.
“도대체 다들 왜 이래? 단체로 약이라도 잘못 먹었나?”
그래서 나도 모르게 뱉어버린 의문.
다른 가문에서 하기엔 무례한 언사였으나, 팽가의 사람들은 정말 약이라도 한 듯 내 이름을 연호하기 바빴다.
“오오오오!!! 당 소협이 오셨습니다! 여러분!”
그렇게.
나는 팽가의 가주전에 도착하기 전까지.
영문도 모른 채 부담스러운 환대를 받아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