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54화
잠이 들었는지, 아니면 깨다 만 건지 구분이 안 가는 몽롱한 상태.
천천히 눈을 뜨자 시야에 들어온 건 익숙한 무림의 모습이 아닌.
어디선가 본 적 있는 거대한 연병장과 그 앞에 도열한 군인들이었다.
-■■■■■■■■■!
그리고 단상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며 연신 뭔가를 외쳐대는 높으신 분 하나.
마치 물속에서 말하는 사람처럼 입만 뻐끔댈 뿐 그저 웅웅대는 소리만 들려왔지만,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말하는 걸 보면 뭔가 대단한 연설을 하는 모양새였다.
‘하아, 또 꿈인가…….’
처음에는 이게 무슨 개꿈인가 싶었지만, 이제는 어렴풋이 떠오르는 기억들.
주변을 살펴보면 살펴볼수록 이게 단순히 허구의 장면이 아닌, 내 뇌리에 잠들어 있던 장면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
기억을 떠올리는 동안 목에 핏대를 세우다 못해 정열적인 연설을 하는 높으신 아저씨.
마치 원수라도 만난 듯 얼굴이 새빨개질 때까지 힘을 주고 말함에도 귀 옆에서 웅웅댈 뿐.
아저씨의 말은 전혀 들리지 않았다.
‘그때는 이딴 걸 왜 하나 싶어서 안 들었는데, 그 탓에 뭐라 했는지 기억 못 해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건가?’
내가 뇌 과학에는 연이 없다 보니까 확신은 못 하겠다만, 단순히 꿈이 아니라 그 날의 기억을 재현하는 거면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사실 그런 건 딱히 상관없지. 어차피 들어봤자 좋은 이야기는 아닐 테니까.’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건 수많은 무기를 포함한 열병식.
내가 만들었던 최악의 독.
HBL-VX를 군에 인계하는 날의 행사였다.
내가 봤던 윗사람들은 ‘환경문제가 대두되는 지금 인간의 숫자를 줄이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라든가, ‘이제 핵의 시대는 갔다. 대한민국만이 뚜렷한 정의를 가지고 세계에서 우뚝 설 수 있는 유일한 국가’라든가 정신 나간 소리를 태연하게 늘어놓는 사람들이었다.
그러니 들어봤자 기분만 나쁠 뿐, 좋을 것 하나 없었다.
-■■■■■■■■!
연설하던 장성이 힘차게 손을 휘두르자, 하나둘 움직이기 시작하는 무기들.
커다란 미사일부터 포탄, 특수부대가 도수 운반하는 가방까지.
듣도 보도 못한 무기까지 존재했는데, 저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독을 퍼뜨리기 위한 물건이라는 점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해 많은 사람을 죽인 물건이었다.
‘지금 와서 보니 더럽긴 해도 또 다른 느낌이네.’
처음엔 감언이설에 속아 넘어가 사람을 살릴 희대의 무기인 줄 알았고.
죽기 전엔 세상에 다시 존재해선 안 될 최악의 무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오랜 담금질을 겪고 나온 지금.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이전에는 절대 다시 만들지 않을 거라 다짐했지만…… 어쩌면 만들게 될지도 모르겠네.’
왜냐면 HBL-VX가 치명적이긴 하나, 그것보다 강한 독이 수두룩하게 존재하는 게 무림.
거기다, 천독림에서 보낸 시간 동안 아버지께서 항상 강조하신 말씀이 있었다.
-독은 당가의 모든 것이되, 결국은 수단. 그 의지는 오롯이 인간의 것이다. 우리가 서슴없이 강한 독을 만드는 것은 우리를 믿기 때문이다.
-독을 조심히 다루되, 두려워하지 말아라. 독이 해하는 것이 너뿐만이 아니라 하여도 독 없인 의지를 관철할 수 없으니 말이다.
등등.
독과 관련된 가치관을 완전히 들어낼 만큼 반복하시던 아버지의 가르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내가 당지독처럼 그릇된 마음을 먹진 않을까 싶어 그러신 거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독을 좀 더 관대하게 다루게 만들었다.
‘독은 올바른 의지를 행하기 위한 도구. 결국 다루는 사람의 문제다.’
독이란 결국 양으로 정해진다.
그러니 대상이 일반인이 아니라 무림인이라면 꺼릴 필요가 없고, 무엇보다 뚜렷한 적.
혈교도가 있으니 필요하다면 어느 정도 고려해 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아직은 거부감이 더 크지만 어쩌면. 정말 어쩌면 쓰게 될지도 모르겠네.’
마음가짐이 변했다고 한들, 거부감이 드는 건 매한가지.
그 재앙을 내 손으로 다시 만든다는 건 정말 어지간한 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언젠가 힘에 부치고 당가의 독이 전부 읽혀서 못 쓰게 되는 날이 오면 HBL-VX를 쓰는 날이 오지 않을까.
확신할 수 없지만, 왠지 모르게 그런 기분이 들었다.
* * *
감겨 있던 눈을 번쩍 뜨자, 보이는 낯선 천장.
고풍스러우면서도 이제는 조금 익숙해진 양식의 천장이 눈에 들어오자, 꿈에서 깬 걸 실감했다.
“빌어먹을 자식들…… 악몽이나 꾸게 하고 말이야. 끄응…….”
과거의 흑역사를 보는 건 힘든 일이다.
그런데 꿈속에서 이름 모를 장성의 연설도 1시간을 넘게 들어서인지 온몸이 안 아픈 곳이 없었다.
뭐, 물론, 그런 이유 때문은 아니겠지만 말이다.
“불화수소를 그렇게 들이마셨는데 안 아플 리가 없지.”
이전에 언급했듯이 불산은 칼슘과 반응한다.
즉, 몸으로 침투한 불산이 뼈에 작용하면 뼈가 녹아내린다는 의미.
일염이에게 해독제를 줬으니 심각하진 않겠지만, 뼈에 구멍이 송송 났을 텐데 온몸이 아리지 않고 배기겠는가.
“아이고 삭신이야.”
독에 대한 내성이 있다고 한들, 결국 독을 판가름하는 건 양.
공기 중의 불화수소를 정제해 내느라 밑도 끝도 없이 노출됐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거기다, 3장로가 폭발하면서 등에 생채기도 났으니…….
“아니, 생각해 보니 화나네. 어떻게 된 게 자폭을 해버리냐 거기서. 지가 무슨 강시인 줄 아나.”
난데없이 벌어진 자폭 공격.
거, 혈교도라면 혈술을 쓰든가.
아니면, 혈교의 무공.
‘수라혈천검’ 같은 걸 써야지.
뭔, 자폭을 하는지…….
“그렇다고 시독이 뿜어져 나오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정말 어처구니가 없네.”
호신강기를 두르는 게 조금만 늦었어도 목숨이 날아갈 뻔했다.
다시금 떠올렸을 뿐인데, 아찔했던 상황에 식은땀이 절로 날 정도.
-드르렁.
그런데 문득 어디선가 들려오는 코 고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자, 저 옆 바닥에 흔유가 대자로 뻗어 자고 있었다.
“누구는 혈교도하고 피 터지게 싸우고 왔는데, 아주 팔자 좋게 자고 있냐? 일어나 인마.”
대충 손에 잡히는 물건을 던져서 흔유를 깨우자, 벌떡 일어나는 흔유.
“헛! 공자님! 일어나셨습니까?!”
정신을 못 차리는지 허공에 대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쪽은 반대다.”
“죄송합니다. 공자님. 아침엔 약한지라…… 하하하.”
머쓱한지 뒤통수를 긁적이는 흔유.
그러면서도 눈을 제대로 못 뜨고 있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힘들어하는 모습이었다.
“일염이는 어디 갔어?”
“문주님께서는 밖에 계십니다. 급히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다고 하시더군요.”
“급히 처리해야 할 일? 혈교도 때문인가 보네.”
분명 신화문은 혈교도를 찾는 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했다.
아마도 이번 공격에서 자폭할 수 있는 걸 알게 됐으니 주의를 주고, 어떤 방식인지 확인하려는 걸 거다.
“그럼 방해하지 말아야겠네.”
“그것보다 몸 상태는 괜찮으신 겁니까? 문주님께서 흉흉한 기세를 흘리면서 들어오시길래 돌아가시기라도 한 줄 알았습니다.”
“……거 말이라고 너무 막 하는 거 아니냐.”
“그만큼 충격적이었단 소리였죠. 헤헤.”
“웃지 마라. 한 대 치고 싶어지니까.”
“옙.”
주먹을 들자, 능글맞게 웃다가 곧장 입꼬리를 원위치시키는 흔유.
자주 깝죽거리긴 해도 진짜 기분 안 좋을 땐 안 그러는 걸 보면 눈치껏 기분을 풀어주려고 이러는 듯했다.
“몸은 괜찮아. 등에 생긴 상처는 단순히 생채기였고, 독이야 뭐, 운기 한 번 하면 해결되거든. 뻗은 것도 단순히 기력이 쇠해서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일염이야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서 그런 것 같으니까 괜히 심기 건드리지 말고, 나머지 인원들은 어때? 그때 중상 입은 인원도 있던 것 같고, 해독제를 주긴 했는데, 중독된 인원들 몇 있던데.”
“몇 명 요양이 필요하긴 하나, 독으로 인한 문제는 해결됐습니다. 아, 그래서 그런지 수호대가 철수한다고 하더군요.”
“철수?”
“예, 문주님이 수호대는 철수시키고, 암혈대를 불러온다고 하셨어요. 아무래도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수호대는 방해만 될 거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렇긴…… 하지.”
본디 싸움이란 쪽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유리한 법.
허나, 당가만큼은 예외로 치는데, 그 이유는 설명할 것도 없이 독 때문.
당가 앞에서 숫자는 무의미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아예 도움이 안 된 건 아니야. 혈교도들이 자폭할 때, 잔챙이들도 전부 내게 달려들었다면 꼼짝없이 죽었을걸.”
“그렇게 생각하신다면 다행이지만, 그건 호위가 아니잖습니까. 그냥 같이 싸우는 동료 수준이지. 아, 맞다. 사칭범도 잘만 살아남았어요.”
“걔가? 어떻게?”
“어느샌가 수호대원 하나로 위장해서 섞여들었다고 하더군요. 근데 연기 솜씨가 얼마나 기가 막혔는지 수호부대주님이 보실 때까지 못 알아차렸다고 했답니다.”
“수호대원이 못 알아차렸다고?”
신화문이 사람을 호위하기 위해 만들어진 문파라고 한들, 부업으로 정보를 사고파는 단체다.
당연히 정보원들이 많고, 사람 보는 눈썰미가 확실할 텐데 그 짧은 시간에 수호대원조차 못 알아볼 정도였다면 꽤 쓸 만한 재능인 듯했다.
“불러올까요?”
“불러와 봐.”
불러오란 소리에 방을 빠져나가는 흔유.
잠시간 기다리자, 사칭범으로 추정되는 이를 후미에 달고 방으로 복귀했습니다.
“불러왔습니다. 들어와.”
흔유의 손짓에 천천히 걸어 들어오는 사칭범.
이내 방에 들어오자마자 납작 엎드리며 말했다.
“저 강이장. 태어날 때부터 부처님께 대협을 모시라는 명을 받은 존재. 제가 태어난 건 위대하신 대협의 수발을 들기 위해서였습니다. 비록, 제가 대협을 사칭하며 이런 일이 벌어지기 시작했지만, 이 또한 시련. 일찍이부터 대협을 찾아가지 않아 대로하신 천지신명님의 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 저 강이장. 이제부터라도 대협의 개가 되어 대협을 모셔 받들겠으니 부디, 저를 거두어주시기 바랍니다!”
“…….”
딱히 해코지하려고 부른 게 아닌데, 술술 말하는 강이장.
“와, 이거 난잡하고 앵앵대게 말하는 것도 아닌 걸 보면 어디서 따로 연습하고 왔나 본데요?”
흔유가 혀를 내두를 정도로 납작 엎드리는 게 기가 막힐 정도였다.
“길현일검 강이장이라고 했던가?”
“예, 대협. 제 이름이 강이장입니다. 하지만 대협의 고귀하신 입으로 불리기엔 하찮기 짝에 없는 인간이니 이전처럼 단순히 ‘사칭범’이라고 편하게 부르셔도 됩니다!”
“……너 정말 살고 싶구나.”
“아닙니다! 대협의 처벌이 그러하시다면 달게 받겠으나, 그래도 부처님께서도 제게 하찮은 재능을 내려주셨으니 부디 위대하신 공자님 밑에서 무림의 대의를 위해 일하고 싶습니다!”
“그래? 너 꽤 자신 있는 거 같은데 여태껏 몇 명으로 변장해 봤냐.”
“정확히 세긴 어려우나 백 명은 넘는 것 같습니다.”
“그동안 한 번도 안 걸렸고?”
“맞습니다!”
“근데 나는 왜 그렇게 했냐?”
“다른 이들은 정보가 차고 넘쳤는데, 대협만큼은 별다른 정보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서안에서 있던 일을 생각해 정보를 모아서 했습니다만…… 아무래도 말투는 고풍스러운 게 더 잘 먹힐 거 같아서 그렇게 바꾼 겁니다.”
“호오…….”
단순히 따라 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더 호감을 살 만한 방향으로 간다라…….
“전혀 안 어울렸는데?”
“당연합니다! 대협은 저따위가 따라 할 수 없는 분. 길현에선 그게 더 잘 먹히고, 제가 여기 토박이라 잘 안다고 한들, 지금 와서 보니 참으로 멍청한 짓이었습니다!”
안 어울린다고 하자, 동의하면서도 이게 더 효용이 좋았다는 사칭범.
왠지 모르게 기분이 조금 나쁘긴 했으나 사칭범이 꽤 쓸 만한 녀석이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곧장 이 녀석을 채용하기로 했다.
“좋아. 정 그렇다면 실력을 좀 봐야겠어. 너 나랑 일 하나만 하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대협! 뭐든 시켜만 주시면 완벽하게 수행하겠습니다! 제가 어떤 일을 하면 되겠습니까?”
“아주 간단한 일이야.”
사칭범이 환희에 찬 미소로 나를 올려다보길래, 씨익 미소를 지어주며 말을 이었다.
“날 사칭하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