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50화
“……혀, 혈교도?”
들어선 안 될 소식을 들었는지 현령은 입을 떡 벌린 채 멍청한 얼굴로 나를 쳐다봤다.
“다, 당 소협. 그, 그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말 그대로입니다. 혈교도가 이곳으로 오고 있습니다.”
“허허…….”
확인 사살을 해버리자,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제자리에 주저앉는 현령.
어지간히도 충격받았는지 망연자실한 얼굴로 조용히 물었다.
“여태껏 나타난 혈교도의 숫자는 많으나 질적인 면에선 수준이 낮다고 들었소. 그러니…….”
“제가 직접 와서 말한다는 게 무슨 뜻인 줄 알잖습니까.”
“…….”
말을 단칼에 자르자, 절로 입을 다무는 현령.
여간 믿고 싶지 않은 듯 부정하긴 했으나 사실 현령도 내가 이러는 이유는 알고 있었다.
“……당 소협이 내게 와 이러는 건 분명 그런 어중이떠중이는 아니어서 그렇겠지. 후…….”
현령은 한숨을 푹 쉬었다.
“차라리 사파 놈들이나 활개 치지 왜 하필이면 혈교도가…….”
자유분방을 추구함에 따라 범죄를 저지르곤 하는 사도 무리.
그래도 같은 무림인의 검이 두려워 대량 학살을 벌이거나, 현령의 목을 탐하는 정도는 아니었기에 관에선 그저 현상 수배를 걸고 마는 수준이었다.
양민들이 다치더라도 허울 좋은 ‘관무불가침’이라는 핑계를 대며 말이다.
허나, 혈교도는 달랐다.
그들은 목숨을 내놓고 사는 이들.
그야말로 피에 미쳐서 대량 학살은 기본이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현령은 물론이고, 황제 목도 서슴없이 딸 이들이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내 재산, 내 가족, 내 직위! 모두 잃어버리게 생겼잖소!”
여태껏 쌓아온 모든 게 위태로워지자 분노하는 현령.
살벌한 정치판에서 살아가는 현령이 직접 분노를 표출한다는 건 그만큼 사태가 위중하다는 의미였다.
“험험, 내 소협 앞에서 말실수했구려. 내 말은 어디까지나 길현의 백성들이…….”
그래도 곧장 정신을 차렸는지 변명하길래 단칼에 말을 잘랐다.
“상관 않습니다. 현령께서 무어라 하시든 그저 맡은 바 소임만 다 해주신다면 정말 상관 않을 겁니다.”
아까 이야기했듯이 혈교도의 문제는 관과 무림을 구분할 수 없는 문제.
그렇기에 혈교도가 몰려온다면 학한객잔 때처럼 서로 협조해 일을 해결하는 편이 편했다.
“고맙소.”
무슨 비리를 저지르든 간에 적당한 수준이라면 신경도 쓰지 않겠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현령.
이제야 한시름 좀 덜었다고 생각했는지 다시금 성을 내며 물었다.
“혹시 예의 그 독 좀 빌려주실 수 있겠소? 감히 나를 우롱한 것도 모자라, 백성들을 위험에 빠뜨리게 한 그 빌어먹을 작자를 산 채로 발밑부터 머리끝까지 푹 담그고 싶소.”
염공이라도 쓰는지 활활 타오르는 현령의 두 눈.
혈교도들이 몰려오는 이유는 몰라도, 원인은 아는 상황인 만큼 사칭범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고통을 선사해 주고 싶은 듯했다.
“불가.”
절로 나오는 험악한 목소리.
현령이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한지는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독을 달라는 소리에.
그것도 관직에 몸을 담은 사람이 그러자, 화가 끓어올라 차갑게 대했다.
“쓸데없는 농은 여기까지 하시고 할 일부터 하시죠.”
“……알겠소.”
한순간에 기도가 변한 걸 깨닫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현령.
집무실 책상에 준비된 두루마리에 뭔가를 적더니 도장을 찍고는 내게 건네줬다.
“일시적으로 관병들에게 명령권을 부여했소. 또한, 길현 내부의 관리들을 원하는 대로 차출할 권리를 주었소. 편히 쓰시오.”
“명령권……?”
“맞소. 명령권.”
황당하다는 얼굴로 쳐다보자, 방긋 웃으며 두루마리를 건네는 현령.
아무리 협조를 구한다고 해도 그렇지, 사람 됨됨이를 알아보는 것은 물론이고, 혈교도가 오는 사실조차 확인하지 않았는데 대뜸 명령권을 주는 게 말이나 되는가?
그것도 권력욕이 없는 사람도 아니고, 철철 넘치는 사람 같던데?
“혈교도가 온다는 건 교차 검증도 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쉽게 내주셔도 되는 겁니까?”
“당 소협께서는 포정사님의 패를 너무 물로 보는 것 같소. 솔직히 이런 종이 쪼가리가 없어도 그 패 하나면 관직에 앉은 이라면 그 누구라도 움직일 수 있소. 물론, 어느 정도 선은 있지만 말이오.”
“그 정도입니까?”
“내가 이러는 거 보면 알잖소.”
어깨를 으쓱인 현령이 내 뒤에 선 일염이를 보며 말을 더했다.
“그리고 비록 무공을 익히진 않아 무림인을 구별할 순 없지만, 사람 보는 눈은 있다고 자부하오. 그렇기에 당 소협 뒤의 사람 또한 범상치 않은 이라는 걸 느낄 수 있소.”
일염이를 보다 잠시 말을 멈춘 현령은 다시금 내게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자고로 인망이야말로 사람을 판가름하는 척도. 그게 모든 걸 대변할 순 없어도 휘하에 저런 대단한 이를 둔 걸 보면 당 소협의 수준도 대략 알 수 있소. 그러니 편히 가져가시오.”
부담스러워할 것 없다는 듯 현령이 빙그레 웃으며 두루마리를 건넸다.
“감사합니다.”
권력욕과 재물욕이 넘친다고 한들, 그 또한 한 지방을 다스리는 관리.
마냥 탐관오리처럼 무능하기 짝에 없지만은 않았다.
아니, 적어도 일 처리만큼은 믿고 맡겨도 될 정도로 유능한 사람처럼 보였다.
“이것 이외에도 무림인들의 협조를 구한다든가, 다른 지방에 도움을 청하든가,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겠소. 혹시 무림인들의 도움이 필요하오?”
“수준에 따라 다릅니다. 적어도 사칭범보다는 강한 녀석이 있어야 손을 빌릴 정도는 되는데…… 시간 맞추기가 어려울 겁니다. 그러니 놓치거나 우회한 혈교도를 막는 데 그들을 쓰십시오.”
말을 마치자마자 곧장 돌아서서 집무실을 빠져나가려 하자 현령이 다급히 붙잡듯이 물었다.
“놓치거나 우회하다니? 당 소협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
“사칭범 때문에 혈교도가 몰려오긴 했어도 그 원인은 저 때문입니다. 그러니…….”
저 녀석들이 찾아온 건 아마도 나.
내가 나가야 무고한 이들의 피해를 막을 수 있을 테니 제발로 길현을 나가주기로 했다.
“제가 직접 나가서 맞이하겠습니다.”
* * *
대녕에서 길현으로 향하는 문 앞.
이미 짙은 어둠이 내려앉아 조용하기 짝에 없어야 할 문 앞은 오늘따라 유독 병사들이 많았다.
“잘 부탁드립니다. 백인장님.”
“아닙니다. 비록 가시는 길뿐이겠지만, 안전하게 모시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삿갓을 쓴 무인을 대동한 채 현령의 명령서를 가져온 당지천 때문.
혈교도가 오고 있고, 직접 막아설 테니 안내해 달라는 말에 부리나케 백인대를 소집해 대녕으로 향하는 관도를 막아서기 위해 안내하기 위해서 나온 거다.
“정말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저희가 직접 혈교도들을 상대해 본 적은 없으나 매우 잔악무도하다고 들었습니다.”
“괜찮으니 안내해 주시죠.”
“예, 당 소협께서 그러하시다면 안내하겠습니다.”
“켁켁…… 살려주십시오…… 대협.”
물론, 그 옆엔 사칭범도 꽁꽁 묶은 채 같이 데려왔었다.
사건의 주범이 사칭범인 만큼 절대로 빼놓을 수 없었으니 말이다.
-저자 때문이지? 우리가 이 오밤중에 튀어나온 게.
-맞아, 현령님 말씀으론 저 녀석이 혈교도의 중요한 물건을 훔쳐서 이 사달이 났다고 하더군.
-시부럴…… 이러다 잘못되는 거 아니야?
사칭범을 보고서 흉흉한 얼굴로 쳐다보는 백인대원들.
오밤중에 비상이 걸려 끌려 나온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자칫 잘못하다간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사칭범을 죽일 듯이 쳐다봤다.
“케, 켁. 내, 내가 사칭범이긴 해도! 혈교도는……!”
그 상황에 두려움을 느낀 사칭범이 무어라 변명하려 했지만, 곧장 당지천이 제지했다.
“시끄러, 이놈아.”
“악!”
-삐익! 삐익!
“크아아아악!”
당지천이 귀찮다는 듯 뒤통수를 후리자, 따라서 머리를 한 번 쪼는 삐익이.
그저 나무를 두들기는 딱따구리처럼 부리로 머리를 살짝 쪼았을 뿐인데, 비명을 지르는 걸 보고 백인대원들은 한심하다는 듯한 얼굴로 사칭범을 쳐다봤다.
-아무리 무림인이 기르는 새라도 그렇지. 고작 새 한 마리도 못 이기는 놈이 뭔 무림인을 사칭했대?
-모르지. 한 가지 확실한 건 그 정도 생각할 줄을 알았다면 혈교도를 부르진 않았다는 점이겠지.
기가 막혀 화가 가라앉는 기이한 상황.
상대해 줄 가치를 못 느낄 만큼 한심한 사칭범을 보고는 백인대원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그들을 모르는 것이 있었으니.
“새, 새 주제에 내가중수법을 쓰다니!”
삐익이가 사칭범의 머리를 칠 때 매우 아프게.
그와 동시에 다치지 않을 만큼 고도의 힘 조절을 하며 부리로 쪼았다는 거다.
-개소리를 참 태연하게도 지껄이는군.
-한 대 더 맞으면 저 새가 아예 천하십대고수에 든다고 하겠어.
허나, 그 사실을 알 리 만무한 백인대원들은 사칭범이 헛소리를 지껄인다고 치부하고, 고개를 저으며 시선을 돌렸다.
“혹시 그자가 현령님께서 이야기하신 사칭범입니까?”
“그렇습니다.”
“바로 저 무뢰배 때문에 길현이 위험이 처했군요. 하…….”
한숨이 나오는 건 백인장도 마찬가지.
수준이 한참 낮아 보이는 녀석 때문에 이런 일이 벌어졌다니 도무지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자신이 맡은 바 소임을 다하기 위해 당지천에게 공손히 물었다.
“저, 당 소협.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저희에게 독을 조금만 주십…….”
“무림인에게 무기를 달라고 하는 게 얼마나 큰 실례인 줄 아십니까?”
파르르 떨리는 눈으로 백인장을 노려보는 당지천.
단순히 끓어오르는 화가 아닌, 시리도록 차가운.
날카롭다 못해 베어버릴 듯한 기세에 백인장은 절로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실언을 했습니다.”
백인장에게는 혹시나 싶어서 물어본 것일 뿐, 별다른 의도가 없었다.
영민한 당지천 또한 그걸 알지만, 가히 당지천의 역린을 떠오르게 하는 말.
다른 이들을 몰라도 군인들에게만큼은 독을 절대 내주지 않겠다 다짐한 당지천에게 그런 소리를 지껄였으니 좋은 대답을 듣긴 힘들었다.
“안내는 됐습니다. 이만 돌아가 보시죠.”
“저, 저 그래도 밤이 깊었으니…….”
“항명하시는 겁니까?”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당장에라도 목을 날려 버릴 듯한 흉흉한 기세에 뒤로 물러나는 백인장.
괜히 심기를 건드렸다는 생각에 마땅한 인사도 없이 인원들을 끌고 당지천의 시야에서 도망치듯 벗어났다.
“후…….”
그러자, 혼자서 분을 삭이는 당지천.
옆에 있던 천일염은 그간 지내온 세월 덕에 그게 당지천에게 얼마나 심각한 문제인지 알았다.
그래서 가만히 있었는데, 사칭범은 그런 당지천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지 몸부림치기 바빴다.
“어쩌자고 저를 이곳까지 데려오신 겁니까! 저는 별 도움이 안 됩니다!”
그렇게 남 사칭하고 다녔으면서 제 목숨은 소중한지 꾸물꾸물하게 움직이는 사칭범.
그를 보고 당지천은 나지막이 말했다.
“0점.”
“……뭐가 말입니까?”
“네 점수.”
“예?”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사칭범이 되묻자, 당지천은 사칭범에게 다가가 포박을 풀어주며 말했다.
“어느 정도 능력이 있음에도 제 실력으로 지키지 않으려 한 게 0점. 이런 상황이 되었음에도 책임지기보다 도망치려는 점도 0점. 그런 면상으로 나를 사칭한 점에서 0점. 무엇보다 눈치 하나만큼은 빠를 거라 생각했는데 나를 실망시킨 점에서 0점.”
“그게 대체 무슨 말씀입니까?”
사칭범에게 원치 않는 성적표를 발급해 준 당지천이 대뜸 물었다.
“혈교도들 상대해 봤지?”
“몇 번 해봤습니다.”
“그럼 잊어.”
“예에?”
“지금까지의 혈교도들하고는 다를 거야.”
“아니, 그게 무슨…….”
“온다.”
당지천이 경고하기 무섭게 나타나는 혈교도들.
사칭범은 그들을 보자마자 당지천이 했던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달았다.
“기척을 못 읽었어……?”
솔직히 골목대장 수준에 불과하나, 수준 낮은 별호라도 가진 사칭범.
그가 기척조차 읽지도 못할 만큼 개개인의 수준이 사칭범보다 높았다.
“대, 대협! 서, 설마 저보고 저들을 상대하라 하시는 겁니까?!”
“…….”
사칭범의 애절할 물음에도 묵묵히 서 있는 당지천.
이내 품에서 피독주를 하나 던져주며 말했다.
“내가 저놈을 상대하는 동안. 네가 혈교도가 아닌 걸 증명해.”
이어서 당지천은 여유롭게 걸어 나오는 혈교도를 마주 보고는 불쾌한 기색을 내비쳤다.
“처음 찾아온 게 네놈이라…… 이거 내가 너무 평가절하당한 게 아닌가 싶네.”
“어라, 아직 얼굴도 안 보여 드렸는데, 아시는 건가요?”
“당연히.”
“하긴, 저번에도 눈치 하나는 빨라서 우리 일을 망쳤었죠. 저는 개밥으로 던져지고 말이죠.”
“개밥으로? 잘만 살아 있는데?”
“그거야, 다 비법이 있고요.”
그늘진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
아주 재밌다는 듯 방긋 웃은 혈교도는 얼굴을 가린 천을 뒤로 넘기고.
당지천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간 강녕하셨나요, 삼 공자님? 아니지. 이제는 바뀌었다고 했나?”
혈교도가 얼굴을 드러내자, 긴장을 끌어올리는 당지천.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그인 걸 알게 되자, 인상이 절로 구겨졌다.
왜냐면…….
“오랜만이네요. 소가주님?”
얼굴을 천 쪼가리 꿰매듯 꿰맨 혈교도.
그는 다름 아닌.
천하제일독가 사천당가의 전 3장로였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