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49화
산서의 성도.
태원에 있는 신화문 산서지부.
자잘한 대형문파들이 존재하는 다른 지역과 달리, 있는 거라곤 중소문파.
그것도 자잘한 문파밖에 없는 곳이었기에 다른 곳보다 지부가 작은 편이었다.
“지부장님. 하곡 쪽에 파견된 3조가 연락 두절되었습니다.”
“하곡이라면 혈교도의 흔적을 쫓던 인원들 아닌가?”
“맞습니다. 을(乙)급을 비롯한 혈교도 다수를 발견했고, 도망칠 수 없다는 보고가 마지막이었습니다.”
“난데없이 을급이 튀어나왔다라…….”
급작스럽게 날아든 비보에 잠시 침묵을 유지하는 지부장.
가뜩이나 작은 규모에 할 일은 많은데, 조가 하나 증발해 버렸다는 이야기에 골치 아프기도 했지만, 갑자기 을급 혈교도가 튀어나와서 생각할 게 많았다.
“잠시 소강상태에 들었을 뿐, 완전히 물러난 게 아닌 걸 알았지만, 예고도 없이 나타날 줄은 몰랐군.”
그간 갑작스레 모습을 감춘 혈교도들.
어딘가 구멍이라도 파놓았는지 죄다 쥐구멍에 숨어 들어갔었는데, 을급 인원이 왜 갑자기 나왔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그나마 갑급이 아니라 다행인가.”
신화문에서는 당지독과 함께 사라진 당가의 장로들.
본신의 무력도 약하지 않으면서 온갖 사술을 써대는.
혈교도들이 흔히 ‘사도’라고 부르는 12명의 고수를 갑급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그 바로 밑이 을급 혈교도들.
종합적으로 평가했을 때, 개개인이 대문파의 장로급 정도 되는 고수들을 을급으로 분류했다.
“혹시 개방이나 다른 지부에서 온 연락은 있었나?”
분야가 조금 다르긴 하나, 엄연히 경쟁 관계인 개방과 신화문.
하지만 혈교도의 종적에 대해서만큼은 서로 정보를 공유했기에 혹시나 싶어서 물었지만 역시나.
보고자는 고개를 저었다.
“전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단독인가…….”
을급 혈교도가 움직이는데 다른 곳은 잠잠하다.
이건 다행히 혈교도들이 다시 튀어나오는 게 아닌, 단순한 개별 행동으로 판단할 수 있었다.
“일단 다른 지부에도…….”
지부장이 명령을 내리려고 하자,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문도 한 명.
긴급한 사안인지 대뜸 보고부터 했다.
“지부장님. 개방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방산 쪽에서 을급을 비롯한 혈교도 다수가 남하하는 걸 봤다고 합니다. 같이 온 용모파기를 대조해 보니 하곡에서 나타난 혈교도들과 동일 인물입니다.”
“……방산?”
3조가 사라진 하곡은 산서의 좌상단.
개방이 혈교도를 봤다는 방산은 산서의 좌측이었다.
이 두 점을 일렬로 이어본다면 혈교도가 갈 만한 곳은…….
“길현.”
당지천이 있는 곳뿐이었다.
-타닥.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지부장은 의자에서 뛰듯이 일어나며 명령했다.
“현 시간부로 1급 정보태세로 전환. 객들은 전부 내보내고, 문도들 전원 소집해. 그리고 전서를 보내기엔 늦었으니 내가 직접 간다. 부지부장에게 전달하도록.”
“전달하겠습니다.”
지부장의 명령을 받자마자 고개 숙이는 문도.
하지만 인사를 받은 지부장은 이미 길현을 향해 전속력으로 뛰쳐나간 뒤였다.
* * *
해가 저물고, 달이 떠오른 밤.
이른 새벽에 일어나 집무를 보는 만큼 관리들은 잠을 청할 시간이었지만, 길현의 현령은 버선발로 나와 한 남자를 맞이하고 있었다.
“당지천 소협 되시오? 늦은 시간에 찾아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소.”
“고생이라니, 늦은 시간을 부른 건 나이니 신경 쓰지 마시오. 되레 침소에 들 시간임에도 이리 나와서 반겨주니 내가 감사할 따름이오.”
그 남자는 바로 당지천.
아니, 당지천의 사칭범이었다.
“아닐세, 관아의 은인이라면 내게도 은인인 법. 어두운 곳에 이리 서 있지 말고 얼른 들어가시게나.”
“고맙소.”
“…….”
현령이 말하는데 계속 하오체로 답하는 사칭범.
아무리 관과 무림이 분리되어 있다고 한들, 나이 차가 워낙 많이 나면 존대하는 게 관례였는데, 사칭범은 그런 걸 모르는 듯한 모습이었다.
‘아니면 그만큼 나이가 많다는 거겠지.’
불쾌하지만 현령에겐 어찌 됐든 좋은 일.
‘진짜’ 당지천이 이 사칭범을 작정하고 털어버릴 생각인 듯했으니 조금 불쾌한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이쪽으로.”
그렇기에 미소를 지으며 사칭범을 안내한 현령은 이리저리 빙빙 돌 것 없이 바로 접견실로 발을 옮겼다.
“들어가시게나.”
현령이 문을 활짝 열고 들어가길 종용하자, 사칭범은 망설임 없이 접견실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좀 더 일찍 올 줄 알았는데, 늦었네?”
사칭범이 접견실에 발을 들이자마자 마주하게 된 한 사람.
“목이 빠져라 기다렸다고.”
그는 다름 아닌 당지천 본인이었다.
“…….”
진짜 당지천과 눈을 마주치자, 석화라도 된 듯 얼어버리는 사칭범.
“…….”
“…….”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 당지천을 마주하고 있다가, 이내 재빨리 도망치려 했다.
“뭬, 뭬야!”
하지만 사칭범은 나가기 무섭게 뒷걸음치며 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정지.”
일염이가 문 앞을 막고 서 있었기에.
“…….”
문을 막은 채 가만히 서 있는 일염이.
하지만 예리하기 짝에 없는 기세에 사칭범은 입을 다문 채 한마디도 내뱉지 않았다.
“돌아가라.”
일염이가 주의를 주자, 순순히 뒤돌아서는 사칭범.
그대로 당지천의 앞에 다가가더니 무릎부터 꿇었다.
-쿵!
“죄송합니다! 대협! 제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눈치가 빠른 건지, 아니면 당가의 악명을 알아서 이러는 건지 모르겠지만, 대뜸 무릎부터 꿇는 사칭범.
아예 고개를 조아리며 당지천에게 용서를 빌었다.
“죽을죄라…… 죽을죄를 지긴 했지.”
다행히 화가 많이 나진 않았는지 덤덤하게 읊조리는 당지천.
품에서 예의 철함을 꺼내 들더니 거기에 오른손을 담그며 말했다.
“그래도 피치 못할 사정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어디 한번 변명해 봐. 물론, 그럴듯한 이유가 없으면…….”
철함에 든 오른손을 꺼내 사칭범 앞에서 흔드는 당지천.
그러자, 당지천 손에 묻어 나온 투명한 액체가 사칭범의 앞에 떨어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치이이익.
한눈에 봐도 범상치 않아 보이는 독.
느껴지는 독기부터가 극독임을 짐작한 사칭범이 겁에 질리자, 당지천이 말을 이었다.
“얼굴이 매끈매끈해지게 이걸로 세수하게끔 해줄게.”
당지천이 불산(플루오린화수소산)이 든 철함을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사칭범은 겁에 질린 채 외쳤다.
“말하겠습니다! 제발 말하게 해주십시오!”
* * *
그렇게 시작된 사칭범의 최후의 변론.
어떻게든 불산으로 세수하는 것만큼은 피하고 싶었는지 아주 처철하게 항변했다.
“그러니까 길현일도 강이장. 네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너는 혈교도는 아니고, 요즘 세상이 흉흉하니까 길현을 지키기 위해 내 행세를 했다는 거지? 그 이전엔 반복적으로 다른 사람들 행세를 했고?”
“맞습니다…….”
“허 참,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냐? 애초에 역용술을 쓰는 것도 아닌 거 같은데, 얼굴을 어떻게 변하게 하는 거고?”
“그게…….”
난처하다는 듯 얼굴을 굳힌 강이장.
그러나 당지천이 슬그머니 철함을 밀자, 재빨리 목걸이를 벗어 내밀며 말했다.
“이것 덕입니다.”
“이게 뭔데?”
여러 복잡한 문양과 각인이 박힌 목걸이.
정중앙에는 혈옥을 연상시키는 핏빛 구슬이 달려 있었다.
“용모파기를 보고 남의 얼굴을 베낄 수 있게 해주는 물건입니다.”
“용모파기를 보고 베껴? 그런 물건이 있어?”
당지천이 금시초문이라는 듯 반문하자, 강이장이 설명했다.
“그때는 바야흐로 2년 전쯤. 제가 어느 날 근처 산에서 길을 잃었는데, 거기서 우연히 혈교도들의 소굴을 발견했습니다.”
“설마 거기서 얻어온 거냐?”
“아닙니다. 제가 거기에 발을 들였을 땐, 이미 소탕된 뒤. 누군가가 혈교도를 모두 죽였던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거기서 쓸 만해 보이는 것만 가져오려던 찰나. 이걸 발견한 겁니다.”
“발견? 단순히 봤다고 해서 어떻게 쓰는지 알 것 같진 않은데?”
“그게 길현에 파견된 혈교도들은 이걸 만들기 위해 파견된 거였습니다. 일반 교도들도 쓸 수 있게끔 양산하려던 계획인 듯했습니다.”
“한데? 그걸 막 집어 왔단 말이야?”
“처음엔 쓰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저 누가 무림맹에 연락했겠거니 싶었을 뿐이죠. 한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드는 겁니다. ‘강호에 명성이 자자한 이들을 사칭한다면 혈교도들이 길현에 안 오지 않을까?’란 생각이 말입니다.”
“그래서 나를 사칭했다?”
잠시 말을 멈춘 강이장은 눈을 내리깔며 말을 이었다.
“길현은 제가 나고 자란 곳입니다. 비록 배운 게 칼질뿐이고, 실력도 미천해, 할 수 있는 게 없긴 했어도, 지키고픈 마음에 그런 일을 벌였습니다.”
“그럼 그때부터 2년 동안 이런 행위를 반복했다고?”
“맞습니다.”
“허 참…….”
믿기 힘든 이야기에 당지천이 기가 막혀하면서도 몸을 숨기고 있는 수호대주를 빤히 쳐다보자, 수호대주가 전음을 보냈다.
-하루 종일 따라다녀 보니 결과, 악행을 저지르진 않았습니다만, 얍삽하고 자존감이 심히 떨어지는 사람이었습니다.
-하긴, 그러니 절정고수나 된 놈이 남을 사칭하고 다니지.
당지천이 한심한 눈으로 강이장을 보자, 강이장은 더 고개를 푹 숙이며 변명했다.
“한 협객이 마을을 떠나면 다른 협객이 와서 길현을 지킵니다. 비록, 사칭이지만 그런 방식으로 길현을 지켰습니다. 물론, 그 와중에 공짜로 얻어먹는 게 없진 않습니다만…… 나름 그것도 사람들을 도와주고 얻어먹은 겁니다.”
그래도 나름 자신만의 규칙은 지켰다며 자기변호 하는 강이장이었지만, 사칭한 건 결국 사실이었기에 당지천은 아니꼬운 눈으로 강이장을 쳐다봤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사람 하나.
그가 점점 다가오자 수호대 한 명이 재빨리 뛰어가는 걸 느꼈는데, 얼마 안 가서 전음이 날아왔다.
-공자님. 급보입니다.
-급보?
-을급…… 그러니까 대략 대문파 장로에 비견될만한 혈교도가 다른 교도들을 데리고 길현으로 오고 있습니다.
“뭐어어?”
당지천이 화들짝 놀라서 육성으로 말하자, 의뭉스럽게 쳐다보는 강이장.
“무슨 일 있으십니까?”
“너 혹시 나를 사칭하기 전에도 길현에 왔다고 소문내고 다녔어?”
“예, 조금 그랬습니다.”
“망했네…….”
당지천이 이마를 탁 짚으며 한숨을 쉬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을 끔뻑이는 강이장.
당지천은 그저 그런 강이장을 보고는 혀를 차며 말했다.
“너 지금 무슨 짓을 한 줄 알아?”
“사칭한 건 정말 죄송…….”
“아니, 그거 말고.”
강이장의 말을 딱 잘라버린 당지천은 사태가 심각하다는 걸 나타내듯 굳은 얼굴로 말했다.
“사람을 사칭하려면 최소한 상대를 알아보고 했어야지.”
“예?”
“내가 혈교도랑 사이가 아주 나쁘거든? 어느 정도냐면 만약 내 소식이 들려오면 당장 추격조가 붙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야.”
“예에에에?”
입을 떡 벌리는 강이장.
도무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멍하니 당지천을 쳐다보자, 당지천은 쐐기를 박듯 강이장에게 말했다.
“잘 들어. 넌 지금 혈교도를 부른 거야.”
“그런…….”
그간 지키려 했던 것과 달리, 혈교도를 불러들여 버렸다는 점에 망연자실하는 강이장.
당지천은 그런 강이장은 내버려 두고 집무실에 있는 현령을 찾아갔다.
“누구……. 당 소협이었소? 이야기는 다…….”
“준비하십시오.”
“……뭘 말이오?”
당지천이 난데없이 들이닥쳐 준비하라고 하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되묻는 현령.
당지천은 그런 현령에게 매우 심각한 표정으로 지금 상황을 말했다.
“저 사칭범 때문에 혈교도들이 들이닥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