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47화
서안에서 떠나 순탄하게 도착한 길현.
의문 모를 백문의 말에 제대로 쉬지도 않고 바로 온 만큼 이번엔 쉬었다 가려고 했다.
그런데 웬걸.
길현에 도착했다고 생각한 순간 관도에서 나를 사칭하는 사람을 보게 됐다.
그것도 누군가에게 연신 감사 인사를 받으면서 말이다.
“후……. 따뜻하다, 따뜻해.”
“공자님. 따뜻한 수준이 아니라 지금 불타고 계시는데 괜찮으십니까?”
사칭범을 가만히 보고 있자, 열불이 나는 속.
지금 각도에서 얼굴을 보이지 않았지만, 옷차림만 봐도 벌써 속이 따땃해지다 못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괜찮아. 아주 괜찮아…… 저, 저, 저 옷에 자수 좀 봐라. 조잡하기 짝에 없는 걸 박아놓은 거 보여? 와…… 미친 거 아냐? 저딴 옷으로 어떻게 사칭하고 다니는 거야? 속는 놈들은 또 뭐고?”
지금 사칭범이 입고 있는 건 자색의 무복.
그래도 어느 정도 조사는 했는지 외견만큼은 동일하게 만들려 한 거 같았는데, 무복의 질이나, 가슴에 수 놓인 자수를 보면 화가 치밀어 올랐다.
“아니, 사칭할 거면 제대로 따라 하기라도 하던가. 뭔 거적때기를 입고 나라고 우기고 있어.”
불쾌한 골짜기가 굳이 사람 얼굴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전혀 안 괜찮으신가 봐요.”
“공자님, 그냥 두고만 보실 겁니까?”
“일단은…… 두고 봐야지…….”
자고로 사람이란 흥분했을 때 실수하는 법.
마음으론 당장에라도 가서 땅바닥과 진한 입맞춤을 시켜주고 싶었지만, 일단 흥분을 가라앉히고 참았다.
“어쩌면 동명이인일 수도 있어. 내가 없던 사이에 마을에 도움을 줬던 걸 수도 있고. 그리고 원래 다른 색 무복인데, 우연찮게 자색으로 물든 걸 수도 있어.”
혹시나.
정말로 혹시나.
나랑 이름만 같은 동명이인이고, 마을에 도움을 줬던 걸 수도 있잖는가?
그런데 사실관계를 확인하지도 않고, 냉큼 가서 때려눕힌다면 내 명성은 물론.
당가의 명성에도 먹칠하는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혈교도일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어. 저 녀석 사칭범치고는 수준이 너무 높아.”
“그런가요? 대체 어느 정도이길래…….”
“그쪽보단 배로 강합니다.”
“예에에에?”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놀라는 흔유.
단순히 남을 사칭하고 다니는 사람이 생각보다 실력이 있단 말에 심각한 얼굴로 바뀌었다.
“이거 심상치 않네요…….”
“혹시 길현에 나와 있는 인원은 없습니까?”
“아쉽게도 서안과 달리, 성도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혈교도가 있다는 소식도 없어서 와 있는 인원은 없는 거 같습니다. 저희가 아무리 무림에서 손꼽히는 정보 조직이라고 해도, 규모가 규모다 보니 하위 정보는 잘…….”
“소수 정예니 어쩔 수 없긴 하죠.”
인원수가 많은 개방과 하오문과 달리, 규모가 작아 고급 정보만 취급하는 신화문.
안 그래도 혈교 때문에 바쁘게 움직이는 만큼 성도에서 먼 곳일수록 정보력이 약해졌다.
“공자님. 혹시 모르니 인원 몇 추려서 정보 요청할까요?”
“괜찮습니다. 혈교가 한창 나서고 있을 때라면 모를까. 잠시 주춤한 시기이니 별로 위험하진 않을 겁니다. 무엇보다 정 정보가 필요하면 이쪽에서 사기로 하죠.”
신화문에서 눈에 불을 켜고 혈교의 정보를 모으고 있음에도 여기에 없다.
그렇다면 혈교가 아니라고 판단했거나, 아니면 아예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정보가 필요하다면 여기서 사는 게 합당하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인원을 몇 추려서 보낸다니, 수호대주님이 더 높은 직위 아니십니까?”
“그렇긴 한데요, 수호대주님께서 별 신경 안 쓰세요. 애초에 부문주님이 보내신 것도 우리 딱딱한 문파의 분위기가 불편할까 봐 그런 거거든요.”
“……그걸 그렇게 대놓고 말해도 됩니까?”
모습은 보이지 않아도,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수호대.
당연히 수호대주도 흔유의 말을 들었을 거기에 아연실색했는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아무 반응이 없었다.
“괜찮은 듯하네요. 그러고 보니 공자님. 이 기회에 말씀 편하게 해주시죠. 문주님께 하대하시는데 저한텐 존대해 주시니 불편했거든요. 이제 슬슬 저도 익숙해지셨잖아요?”
“……별로 내키지 않네요. 저희는 좀 거리감을 유지해야 할 것 같거든요?”
“에이, 섭섭하게 그러시기에요? 저희가 어떤 사이입니까. 같이 혈교도도 때려잡고. 또, 여행도 하고. 또, 앞으로 찐득하게 붙어 있다가 미래를 함께할 사이 아니겠습니까. 저는 부문주 자리로 만족할 테니 공자님께서 문주 자리를…….”
“헛소리는 거기까지.”
“아이참, 문주님. 제가 영업을 이렇게 열심히 하는데…….”
“사칭범이 마을 안으로 들어가려고 합니다.”
“진짜?”
일염이의 말에 부랴부랴 고개를 돌려보자, 서로 인사를 나누곤 함께 걸어 들어가려는 사칭범과 피해자.
“들어가시죠. 당 소협. 오늘 제가 진득히 대접하겠습니다.”
“내 원래 이런 청은 받지 않으나, 성의를 보아 이번만 함께하겠소.”
드디어 그 잘난 얼굴을 보겠다는 생각에 안력을 돋워 사칭범을 쳐다보는 순간.
“쿨럭…….”
주화입마에 빠질 뻔했다.
“고, 공자님? 갑자기 왜 그러세요?”
“저, 저걸 봐…….”
“예? 사칭범이라면 저도 보고 있습니다.”
“아니, 저 얼굴을 자세히 보라니까?”
내가 사칭범을 보자마자 주화입마 빠질 뻔한 이유.
그건 바로…….
“어떻게 저딴 얼굴로 감히 날 사칭할 생각을 하지?”
못생긴 사칭범의 얼굴 때문이었다.
잘생긴 나와 달리, 못생기다 못해 빨래판에 얼굴을 벅벅 갈고 온 건지 아작 난 얼굴.
심미안이 부족한 내가 봐도 추남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런 얼굴로 감히 날 사칭하고 있다는 게 너무 괘씸해 각혈할 뻔했다.
“아니이이이…… 나랑 닮은 점이 단 하나도 없는데, 대체 왜 속는 거야.”
“돈 밝히는 건 공자님하고 비슷…….”
“닥쳐.”
“예에에에?”
대뜸 욕을 박아버리자, 애달프게 되묻는 흔유.
헛소리를 지껄이기에 반사적으로 내뱉은 거였는데, 어지간히도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편하게 해달라고 하니 진짜 편하게 하시네요…… 하긴, 당연한 일이긴 하죠. 저야 뭐, 문파에서도 말단이고, 실력도 없는 편이고, 허드렛일 하러 온 거니까요…… 당가의 소가주이시면서 무림에서 손꼽히는 실력이신 공자님과는 메울 수 없는 간극이 있겠죠…… 하아, 나름대로 부문주님의 명을 지키려고 꽤 노력하고 있는데…….”
뒤에 주저앉은 채 뭐라고 구시렁구시렁 대는 흔유.
그러면서도 시야에 잘 들어오는 자리를 선정하는 걸 보면 좀 달래달라며 떼쓰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나는 흔유를 달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왜냐하면…….
-정지! 신분을 밝히시오!
-소인은 사천당가의 소가주 당지천이라고 하외다.
-다, 당지천 소협? 혹시 그 서안에서 혈교도를 물리치셨다는 당지천 소협 되십니까?
-허 참, 그걸 관인의 입에서 들을 줄은 몰랐는데 벌써 소문이 퍼졌을 줄이야……. 맞소. 소인이 한 일이오.
-저, 정말이십니까?!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길현을 지키는 관인들이 사칭범이 나인 줄 알고 어딘가로 부리나케 뛰어가고 있었기에.
“저, 저거 뭐야?”
“흡사 귀빈을 대우할 때의 모습이군요. 공자님의 위명을 널리 알리겠다는 서안 포정사의 말이 허언이 아니었나 봅니다.”
“아니, 그건 보면 알아! 근데 왜 속냐 이 말이지!”
정보가 느린 시골이고, 촌뜨기들이야 무림의 일을 모른다고 하지만, 관인들만큼은 달랐다.
관무불가침이라 하여도 잔악무도한 사파의 고수를 함부로 들일 수는 없는 법.
당연히 무림에 대한 교육을 조금이나마 받고, 그 과정엔 명문세가의 복식에 대해서도 들어 있었다.
그런데 이걸 속아?
“일개 현령하고 포정사하고는 하늘과 땅 차이니 과민반응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다행히 포정사가 이런 상황을 예측했는지 용모파기를 같이 보냈나 봅니다.”
일염이가 가리키는 쪽을 보자, 무슨 두루마리를 가진 채 부리나케 뛰어오는 관인 하나.
도착하기 무섭게 두루마리를 좍 펼쳐서 얼굴을 사칭범과 내 얼굴을 비교했다.
“이상한 놈을 함부로 들이지 않아서 다행이네. 저놈이 사칭범인 게 드러나면 행패를 부릴 수도 있으니 우리가 가서 좀 도와…….”
-확인됐습니다! 번거로울 텐데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
“그럴 필요는 없겠군요.”
말도 채 끝나기 전에 사칭범이 진짜라고 말하는 관인.
순간, 사칭범인 걸 알아보고도 지원 요청하느라 시간을 끄는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었지만, 뒤이어지는 대화에 내 기대는 산산조각 났다.
-번거로울 것까지야. 다 필요한 과정 아니겠는가.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혹시 묵을 곳은 정하셨습니까?
-원래라면 초행길이라 한참을 헤맸겠지만, 다행히 호인을 만나 묵을 곳을 구했다네.
-그러셨군요……. 혹시라도 당지천 소협께서 방문하시면 꼭 모시라는 현령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시간을 내주실 수 있다면 부디 한번 들러주셨으면 합니다.
-흠…… 선약이 있으니 해시(21시~23시) 이후에도 괜찮다면 가도록 하지.
-그럼 그렇게 전달 드리겠습니다!
-용무가 끝났으면 이만 들어가 봐도 되겠나?
-예, 바로 열어드리겠습니다. 통과!
-고맙네.
과할 정도로 저자세를 보이는 병사들과 그들의 인사를 받으며 안으로 들어가는 사칭범.
도무지 시간 끌기로 보이지 않는 병사의 행각과 대우에 결국 속에서 뭔가 끊어지는 느낌이 났다.
“저 녀석 혈교도다.”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그냥. 느낌이 그래.”
“……그런 감은 대개 틀렸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아니면 어쩔 건데. 내가 그렇게 만들면 되지.”
두고 보는 것도 여기까지.
감히 나를 사칭하는 것도 모자라 뻔뻔스럽게 얼굴을 내밀고 통과해?
저런 못생긴 얼굴로?
‘진짜 이건 못 참는다.’
이건 부처가 와도 빨래판에 벅벅 간 듯한 사칭범의 면상에 침을 한가득 꽂아주지 않고선 절대 못 참는다.
그래서 재빨리 뒤따라 가려 하자, 병사들이 나를 가로막았다.
“정지! 신분을 밝혀라!”
“…….”
“신분을 밝히라는 소리가 안 들리나!”
“…….”
“왜 아무 말이 없지?”
“……제 복장이 보이지 않습니까?”
“신분을 밝히라고 했다. 그게 대체 무슨 상관……이 있네?”
위협하면서 고개를 점차 내리자, 점점 굳어가는 병사의 얼굴.
한눈에 봐도 심각할 만큼의 아찔함이 스쳐 지나가는 걸 보면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든 듯했다.
“자, 잠시만 기, 기다려 주십시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용모파기가 그려진 두루마리를 펼치더니 이내 눈이 빠질 듯 바쁘게 내 얼굴과 비교했다.
“이, 이게 대, 대체 무슨?”
두루마리 한 번.
내 얼굴 한 번.
두 곳을 수차례 왕복한 병사의 눈은 그 이후로도 수 번을 더 왕복하더니 이내 사시나무 떨리듯 덜덜 떨렸다.
“다, 당지천 소협께선 분명 아까 들어가셨는데…….”
이제야 상황 파악이 되는지 점점 병사의 얼굴에는 핏기가 가셨다.
그렇기에 나는 당가의 소가주임을 증명하는 패를 내밀며 말했다.
“본 은인은 관에 실망했습니다.”
이어서 쐐기를 박듯 정천호에게 받은 옥패까지 꺼내 던지며 외쳤다.
“본 은인은 관에 실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