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46화
백문이 떠나고 학한객잔의 밖으로 나오자, 도떼기시장을 연상시키는 밖.
“이쪽 좀 도와줘!”
“사지육신 멀쩡한 자는 오른쪽으로! 그 이외는 왼쪽으로!”
“약에 취한 이들은 뒤로 옮겨라!”
관직에 있는 이들은 물론이고, 몇몇 낭인으로 보이는 이들도 소매를 걷은 채 상황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 백의를 입은 사람들이 있었다.
“의선문?”
“어? 당 소협?”
난데없이 나타난 의선문에 의문을 표하자, 황급히 달려오는 의선문의 사람.
대충 눈치껏 보아하니 의선문 일행의 책임자인 듯했다.
“오랜만입니다. 기억나실지 모르겠지만, 저 석곤입니다.”
“석곤이라면…… 그 의선문의 기대주였던 분? 한데, 여기엔 어떻게 오신 겁니까?”
“기대주라고 칭해주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네요. 저희는 대장로님께서 보내서 왔습니다. 정확히는 천괴도 대협께서 요청하신 거지만 말이죠. 조만간 혈교도를 색출할 터이니 지원을 가라고 하셔서 왔는데, 소협께서 계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군요.”
날 여기로 보낸 팽구용이라면 아편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걸 알았을 터.
때마침 의선문이 나타난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렇군요. 그런데 저분들은 의선문에서 요청해서 데려오신 겁니까?”
관무불가침이라고 하여도 양민들과 관련된 일이라면 관아에서 협조해야 하는 법.
의선문은 무림인보다 양민들을 더 많이 상대하기에 특수한 상황엔 관아에 협조 요청을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이들이 의선문에서 데려온 사람인 줄 알았다.
“아닙니다. 인질들을 확보했단 소식이 퍼지자마자 부리나케 뛰어온 이들입니다. 안 그래도 관리 나리께서 오셔서 ‘혈교도의 잔당들은 우리가 잡겠다’라고 말씀하고 가셨거든요.”
“먼저 나서도 모자랄 판에 이제 와서 한다는 게 그런 소립니까?”
“안 나선 게 아니라 못 나선 겁니다. 마침 오는군요.”
석곤이 보는 방향을 보자, 무관을 여럿 대동한 채 꽃을 들고 다가오는 여자아이.
“이 아이는…….”
아까 전 지하 감옥에서 봤던 여자아이.
무서웠음에도 비명을 꾹 참던 그 아이였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는 꽃을 건네주는 아이.
이전에 봤을 때완 달리, 귀티가 줄줄 흐르는 게 어디 귀한 집 자식으로 보였다.
“고마워.”
그런 생각을 하며 아이의 꽃을 건네받자, 수호대주한테서 전음이 날아왔다.
-그 아이가 서안 포정사의 딸입니다.
포정사의 딸?
섬서성의 행정권을 지닌, 도지사 같은 사람의 딸이 이 아이라고?
‘하긴, 이렇게 대놓고 하면 관리들이 모를 리가 없으니 인질부터 잡은 거구나. 그래서 못 움직인 거고.’
-이 아이뿐만 아니라, 잡혀 있던 아이들 대다수가 관직에 있던 이들의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러면 관리들이 안 움직인 건 납득이 가긴 하는데…… 종남파는? 종남파에 도움을 요청하면 되잖아.
-보고에 따르면 시도가 순탄치 않았던 듯합니다. 더군다나 현재 종남파는 제례 기간이라 외부에 신경을 끈 상태입니다. 그나마 인원을 안 보내진 않았는데, 그게 일전에 공자님이 상대하셨다던 종남파의 일대 제자입니다.
-한 명만 보냈을 것 같진 않은데…… 그러면 전부 다 약에 당해 어디 처박혀 있고, 조사 중이라는 거짓 보고만 올렸던 거겠네?
-정확합니다.
-그게 말이 되나?
-제자를 신뢰한 것도 있지만, 아까 이야기했던 것처럼 종남파에선 제례 기간이라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듯합니다.
“씁쓸하네.”
말똥말똥한 눈으로 올려보는 아이.
지금은 저렇게 보고 있어도 무서웠을 게 분명하다.
한데, 제 앞마당에 혈교도가 활개 치는데 문파의 행사를 더 중요시 여기다니…… 안전불감증에도 정도가 있지 이건 너무 심했다.
‘말세야, 말세. 속가제자도 아니고, 일대 제자가 저 모양 저 꼴이 됐는데…… 뭐, 그래도 이제는 제대로 움직일 테니 된 건가.’
일대 제자들이 어떻게 약에 취한 건지는 몰라도 엄연히 종남의 명예가 실추된 일.
지금까진 신경 안 쓰고 있었다고 해도, 한동안은 종남파가 나설 테니 어찌 보면 다행이다.
“당 소협 되십니까?”
혼자서 종남파에 대한 생각을 하던 와중, 자신을 정천호라고 소개한 관리는 대뜸 고개부터 숙였다.
“제 아들을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아비 된 자가 간수를 제대로 못 해서 잃을 뻔했는데, 공자님 덕에 몸 성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조금 더 일찍 왔으면 좋았을 텐데 늦게 와서 아쉬울 뿐입니다. 부디 아이가 크게 충격받지 않았길 바랍니다.”
“그…… 그것만큼은 괜찮은 듯합니다. 시간이 없어 자세히 듣진 못했으나 나비가 나풀나풀 날아다녔다고 좋아하는 걸 보니 별문제는 없을 것 같더군요. 오히려 내일 당장 나비를 잡으러 갈 거라고 하는 걸 보니 충격은커녕, 당 소협의 무공에 완전히 반한 듯합니다.”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이는 정천호.
아비과 무관인데, 아들이 무림인에게 반해 있으니 마음이 싱숭생숭한 듯했다.
“충격받지 않았다면 다행입니다.”
“포정사님께서 바삐 움직이시느라 나오시진 못했지만, 제게 대신 이걸 드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주섬주섬 품에서 뭔가를 꺼내는 정천호.
그게 뭔가 자세히 봤더니 은(恩) 한자가 조각된 옥패였다.
“관에 큰 도움을 준 이에게 하사하는 옥패입니다. 이걸 관에 제출하면 한 번. 웬만한 깡촌이 아니고서야 관아의 도움을 받으실 수 있을 겁니다.”
“뭘 이런 걸 다…… 감사합니다.”
언제든 관에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일종의 소원권.
솔직히 무력만 보면 무림인들이 더 낫긴 했으나, 다른 부분에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테니 참 좋은 물건이었다.
“또한, 포정사님께서 전서를 띄워 공자님의 위명을 널리 알리셨답니다. 앞으로 공자님의 행보에 도움이 되길 바랍니다.”
“하하하…… 그것까진 필요 없는데…….”
무림인인 만큼 명성이 널리 퍼지면 좋긴 하다.
하지만, 지금은 혈교도가 날뛰는 상황.
혈교가 당가의 반란 세력이었던 걸 생각해 보면 당연히 위명이 널리 울려 퍼질수록 귀찮은 일에 꼬일 가능성이 컸기에 난색을 표했다.
허나, 정천호는 어느샌가 옆에 다가온 부하의 보고를 받고 있었고, 송구스럽다는 이야기했다.
“죄송스럽지만 저는 인원들을 통솔해야 해서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혹시 서안에 머무실 거라면 수행할 인원들을 따로…….”
“아니요, 괜찮습니다. 일이 정리되는 대로 떠날 생각입니다. 그리고 수행할 인원도 있으니 신경 쓰지 마시죠.”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부디 좋은 여행 되시길 바랍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인사하고 손을 흔들며 떠나가는 아이와 정천호.
난잡하기 짝에 없는 사람들 속으로 다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는 뒷모습을 조용히 보고 있자, 석곤이 내게 말했다.
“소협. 제 예상으로는 저희를 도와주시려고 하는 거 같은데, 그러지 말고 바로 떠나셔도 됩니다.”
“예? 일손이 모자라지 않겠습니까?”
“모자라지 않습니다. 의선문엔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을 구할 순 없다. 그러나 구해진 사람을 살릴 순 있다’.”
잠시 의선문의 의원들을 바라본 석곤이 다시금 나를 보며 말했다.
“소협께서 의무를 다하셨으니 이제 저희 차례입니다. 뒤처리는 부디 저희에게 맡겨주시지요.”
빙그레 웃음을 짓는 석곤.
이게 자신들의 일이니 뺏지 말고 가라는 듯 나를 바라봤다.
“……알겠습니다.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시면 말씀하십시오. 제가 비록 의술엔 조예가 깊진 않아도 약 정도는 쉽게 만들어 드릴 수 있습니다.”
“대장로님께서 챙겨주신 약이 있어 괜찮습니다. 것보단 소협이야말로 저희 도움이 필요하시면 이야기하시죠. 가시는 길이 순탄치만은 않을 겁니다.”
“예?”
“하하, 별거 아닙니다. 저도 하던 일이 있으니 이만 가보겠습니다.”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의원들에게로 돌아가는 석곤.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어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 흔유가 내게 물었다.
“저, 공자님 괜찮을까요?”
“뭐가요?”
“저거 공자님 공을 가로채려는 게 아닌가 싶어서요.”
“괜찮아요. 다른 곳이라면 몰라도 의선문이라면 믿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문파 이야기고, 저 사람이 나쁜 마음을 먹을 수 있잖아요.”
“의선문에서 쫓겨나고 싶은 게 아니면 그러지 않을 겁니다. 제가 대장로님하고 좀 친해야 말이죠. 단지 순탄치 않을 거란 게 무슨 말인가 싶은데…….”
“가보면 아실 겁니다.”
뭔가를 안다는 듯 말을 자르는 일염이.
퍽이나 재밌다는 듯 실소를 흘리며 나를 보는 게 꿀밤을 한 대 먹여주고 싶었지만, 순순히 맞아줄 녀석도 아니었기에 빠르게 포기했다.
“알면 좀 얘기해 주지?”
“그럼 재미가 없지 않겠습니까?”
뭐가 그렇게도 재밌는지 낄낄 웃어대는 일염이.
참으로 얄밉게 웃어대며 먼저 앞서서 나가길래, 뒤이어 학한객잔을 벗어나자, 갑자기 사람들이 하나둘 몰려들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소협!”
누가 소문이라도 낸 듯 삽시간에 앞을 메워 버리는 인파.
한 걸음 내딛기 무섭게 달려와 인사를 건네는 게, 순식간에 완전히 포위된 형국이었다.
“뭐, 뭐야?”
“뭐긴 뭐겠습니까. 공자님의 업보죠.”
당황한 나와 달리, 익숙하다는 듯 앞을 조금씩 가르고 나아가는 일염이.
거기다, 어느샌가 주변에 나타난 신화문도들이 원을 그리며 내 주변을 막아서고 있었다.
“소협! 내 이 은혜는 꼭 잊지 않겠소! 언제 한번 백가를 찾아주시오!”
“형! 아까 나비 날리는 거 멋졌어요! 나중에 다시 한번 보여주세요!”
누군가의 외침에 슬쩍 주변을 보자, 언뜻 본 듯한 얼굴.
아까 혈교에게 잡혀 있다 나온 이들이 힘껏 외치며 감사를 전하고 있었다.
“소, 소협! 정말 감사합니다! 소협 덕에 저희 아이가…….”
“소협 덕에 어머니께서 그 지옥에서 벗어났습니다! 감사합니다!”
거기다, 약에 취한 가족들을 풀어줘서 감사하다며 감사 인사를 건네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크흥. 감동적이에요…….”
“일은 제가 했는데 왜 감동은 그쪽이 합니까.”
“그치만 신화문에선 이런 광경 본 적이 없는걸요.”
마치 자기 일이라도 되는 듯 눈시울을 붉히는 흔유.
사람 한 명이 감사를 전할 때마다 콧물을 들이켜는 게 시끄럽긴 했어도 나도 조금 별반 다르지 않은 느낌이었다.
‘내가 전생에 그런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이런 광경을 볼 수 있었을까?’
이전 삶에선 겪어보지 못한 성취감과 가슴을 가득 메우는 따뜻함은 낯설기 짝에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서안을 떠나는 동안 계속 이어지는 감사의 행렬.
우리는 그 정중앙에서 뿌듯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길현으로 향하는 내내 절로 미소가 나올 만큼 큰 정을 느꼈었다.
……길현에 도착하기 전까진 말이다.
* * *
“감사합니다. 당 소협! 정말 감사합니다!”
서안에서 지겨울 정도로 들었던 소리.
그러면서도 전혀 지겹지 않던 감사 인사.
몇 번이나 들어도 가슴을 뭉클하게 만드는 주술이 걸려 있던 인사를 재차 듣자, 다시금 속이 따뜻해지는 느낌이었지만, 이전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따뜻해졌다.
왜냐면 여기는 내가 혈교도를 잡은 서안이 아닌 길현이었고.
무엇보다…….
“감사할 것 없소. 협객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 아닌가.”
“어린 나이에 뛰어난 실력도 모자라 겸손하시기까지 하다니…… 아, 소협. 제가 가진 건 없어서 약소하나 부디 이걸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아니, 이건 금 원보가 아닌가? 이런 귀한 걸 내어줘도 괜찮은 건가?”
“물론입니다. 당지천 소협같이 의로우신 분이라면 분명 좋은 곳에 쓰시겠죠. 그러니 부담스럽더라도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험험, 그렇다면야 내 기꺼이…….”
누군가 나를 사칭해 삥을 뜯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