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44화
적이냐.
아군이냐.
자기가 무슨 스핑크스라도 되는지 대뜸 질문부터 던지는 아이.
평소 같으면 무시하거나 대충 대답하고 말만 한 질문이었지만, 검을 든 아이의 기세가 비범하게 짝이 없어 고민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적인가, 아군인가…… 처음엔 접선하려는 적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서 보면 그건 아닌가.’
학한객잔의 소식을 접하고, 냄새 때문에 경계를 하긴 했다.
그런데 경계심을 극도로 끌어올렸던 건 안내하던 아이가 ‘소가주님’이라고 불러서였다.
‘만약 눈앞의 아이가 적이었다면 일부러 소가주님이라고 불러서 경계심을 이끌어낼 필요도 없었겠지. 이만한 실력을 가졌는데 실수했다고 보기도 어려워. 그러니 다분한 의도가 있겠지.’
무엇보다 적이었다면 일염이가 반응 안 할 리가 없을 터.
상황을 두고 보는 걸 수도 있으나 뭔가 낌새를 알아차렸을 때부터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지금 그런 낌새는 없는 걸 보면 대충 아는 눈치인 듯했다.
‘그렇다면 답은 나왔지.’
축골공을 이용해서 몸을 줄인 건지, 아니면 무슨 부작용으로 인해 아이 같은 외견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호의적인 아군.
평범한 아이는 아닐 거라 생각해 다시 존대하며 답했다.
“아군입니다.”
“예상대로 단번에 답을 맞혔구나. 만족스러워.”
흡족한 미소를 지음에도 검을 거두지 않는 아이.
아군일 가능성이 크다는 건 상당히 고무적인 일이었으나 저렇게 검을 세우고 있는 걸 보면 상당히 괴팍한 성격으로 보였다.
“그럼 다음 문제. 내가 지금 널 공격할까? 안 할까?”
단검을 치켜세우며 당장에라도 달려들 듯 무게중심을 앞으로 쏟는 아이.
이 상태를 보면 질문의 답은 고민할 것도 없이 명백했다.
‘옘병…… 아니, 다들 왜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야! 적도 아니라며!’
삼촌도 그렇고, 이 사람도 그렇고.
아군이라면서 왜 이렇게 나와 싸우고 싶어서 안달인지…… 하다못해 호승심으로 비무를 신청하는 거면 좋은 마음으로 받아줄 텐데, 항상 나보다 강한 사람들이 이런다.
‘진짜 너무한 거 아니냐고.’
이런 상황에 대해서 속으로 한탄해도 변하는 건 없긴 했다.
그렇기에 재빨리 전투태세를 마치자, 기다렸다는 듯 아이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답. 역시 백독멸악 당지천 소협은 애송이들과 다르구나?”
말 끝나기가 무섭게 당연하다는 듯 휘둘러지는 검.
예상했던 바이기에 재빨리 뒤로 물러나며 검을 노려봤다.
‘뭐, 뭐야? 갑자기 이렇게 많이 늘어난다고?’
그러자, 놀랍게도 갈라지듯 늘어나는 검.
아무리 무림에 변화무쌍한 검이 많다고 하나, 그 숫자가 물경 백에 달하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그 변화무쌍한 검이 쾌의 묘리가 담긴 게 아니라 중의 묘리를 담았기에.
‘아니야, 잘 생각해 보자. 물경 백에 달하는 중검이라…… 상대의 수준이 내 예상보다 아득히 높다면 모를까. 지금 검에 담긴 힘을 보면 오직 단 하나만 진짜일 거야.’
까마득히 강한 고수의 절초라면 백 개 모두 진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 검격은 인사에 가까운 공격.
살초나 절초까진 아니었기에 단 하나의 검만 진짜라는 판단이 섰다.
‘하나만. 딱 하나만 막아내면 된다.’
백 개에 이르는 허초를 걸러내고, 단 하나의 실초를 찾아내는 건 매우 어려운 일.
하지만, 삼촌과 수련할 때 가장 많이 상대하고 가장 깊은 공부를 한 게 검이었다.
이 정도도 못 해내면 삼촌을 뵐 면목이 없다.
그래서 눈을 부릅뜨고 검을 찾길 잠시.
‘찾았다!’
-챙!
벼락같이 단검을 뽑아 단 하나의 실초를 막아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흡.”
-피융.
손에 쥔 단검을 놓아버리며 소매에 속 암기를 사출했고, 반대 손으로는 주먹을 뻗어 반격했다.
“허허…….”
자신의 공격과 달리, 양쪽에서 날아오는 공격.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말이 절로 떠오르는 상황에 헛웃음을 흘린 아이는 왼손으로는 암기를.
검을 쥔 오른손으로는 호선을 그리며 주먹을 막아냈다.
“몇 합 겨루고 나면 막힐 걸 예상했다만, 아무리 그래도 처음 보고 막는 건 예상 못 했다…… 더군다나, 반격하는 것도. 행여나 아이들이 맞을까 위로 향하게끔 암기를 사출한 것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대견하다는 듯 주먹을 살짝 밀어내는 아이.
어른스러운 말투와 달리, 눈은 아이처럼 한껏 반짝이며 두근거리는 얼굴을 했다.
……참으로 불길하게 말이다.
“정말…… 넌 정말 난놈이구나! 그래! 이런 맛이 또 있어야지! 이젠 진심으로 가마!”
“진심은 좀 많이 질리는데, 가볍게 대화로 해결하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검을 나누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대화 아니겠느냐!”
혹시나 싶어서 물었지만 역시나.
씨알도 안 먹히는 중재에 한숨을 푹 쉬며 빛살처럼 달려드는 검을 막으려는 찰나.
“거기까지 하시죠.”
갑자기 일염이가 끼어들며 아이의 손목을 붙잡았다.
“……한창 재밌어지려는 찰나에 왜 끼어드는 게냐?”
방해받은 게 여간 아니꼬운지 아이가 얼굴을 일그러뜨리자, 일염이가 무표정한 눈으로 아이를 보며 말했다.
“무슨 의도로 그러신지 잘 알고 있습니다만, 공자님은 그럴 분도 아니고, 한 번 겪고 오셨기에 불필요한 교육입니다.”
“이미 한 번 겪었다라…… 뭐, 그렇다면 굳이 할 필요는 없긴 한데, 요즘 대세가 반복 학습 아니겠느냐. 나도 한번 해보자꾸나.”
“저희 공자님을 어르신의 개인적인 욕구를 채우는 데 쓰려 하시지 마시죠. 무엇보다 장소가 여의치 않잖습니까.”
주변을 둘러보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우리를 보고 있는 인질들.
갑작스레 걸려온 시비를 막느라 신경 쓰지 못했는데, 사람들은 두려움에 떨며 우리를 보고 있었다.
“크흠, 나도 모르게 흥분해서 실수했구나. 거, 다들 미안합니다…… 뭐 하느냐. 너도 사과하거라.”
“……제 탓도 아닌데 제가 왜 사과를 합니까?”
“혼자 하면 어색하잖느냐. 그리고 날 흥분시킨 게 네 녀석이니, 네게도 책임이 있다.”
“그게 뭔 헛소리입니까. 혼자 하십시오.”
“…….”
“…….”
뒷짐을 지고 뻔뻔스럽게 올려다보는 아이와 어림없다며 내려다보는 내가 잠깐 불꽃 튀기는 눈싸움을 하자, 흔유가 끼어들어 보고했다.
“공자님. 수호대가 다른 곳에 납치되어 있던 사람들을 모두 구조했답니다. 대부분 아편을 대가로 피를 뽑거나, 인사불성이 되어 강제로 피를 뽑혔다고 합니다만, 생명에 지장이 있는 인원은 없다고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겠지만요.”
보고하는 와중에도 얼굴을 굳히는 흔유.
혈교 놈들이 자원봉사하는 놈들도 아니고.
생명에 지장이 있을 정도면 처분했을 게 분명했기에 흔유는 물론, 나와 아이도 안색을 굳혔다.
“내가 이럴 때가 아니었구나. 미안하다.”
“괜찮습니다. 안타까운 일이긴 하지만, 사실상 끝난 상황이었잖습니까.”
“그래도…….”
머쓱하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는 아이.
뭔가 하고픈 말이 많은 거 같았지만, 나는 조금 예의 없더라도 말을 끊었다.
“일단 인원들부터 퇴거시키고 이야기하시죠.”
그러고는 아이의 뒤를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진짜 아이들이 많이 놀란 것 같으니 말입니다.”
* * *
신화문도들이 여기서 저기서 필요 인력을 불러오고 사람들을 옮기길 잠시.
조용해진 지하실에 흔유와 일염이를 포함해 총 넷만 남자, 아이가 무안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이 노구가 흥분해서 결례를 범했구나. 미안하다.”
고작 대여섯 되어 보이는 외견과 달리, 자신을 노구라 칭하는 아이.
축굴공을 썼든, 아니면 다른 수를 썼든 간에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기에 이해가 갔다.
“노구라 하시면?”
하지만 노구라 칭하는 건 좀 많이 나간 게 아닌가 싶어 되묻자, 아이는 그 질문을 무시한 채, 일염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새삼스레 인사하지만 오랜만이구나. 13대야. 구용이에게 물어서 알음알음 알게 됐지만, 이렇게 직접 눈으로 보니 감회가 새롭구나.”
“만문문(萬問門)의 문주신 천성문괴(天星問怪) 백문 어르신입니다. 올해로 백수(百壽, 100살)이십니다.”
그러자, 기 싸움이라도 되는지 아이의 인사에 화답하긴커녕, 내 물음에 답해주는 일염이.
둘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긴 했으나, 나는 그것보단 일염이의 답이 더 신경 쓰였다.
“백수? 아이면 당연히 백수지. 아니, 그게 아니고 이 아이…… 아니, 이 분…… 아니, 어르신이라고 불러야 하나?”
5살짜리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100살의 노인.
아무리 축골공과 역용술의 성능이 좋다고 해도 노인이 아이의 모습이 되는 게 가능한가 싶어 의뭉스럽게 어르신을 쳐다보자, 어르신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거, 굳이 나이 이야기할 것까진 없잖느냐. 괜시리 부담스럽게 말이야.”
“저 혹시 그게 본모습입니까?”
“호오, 좋은 질문이야. 그럼 여기서 문제. 과연 이게 내 본모습일까? 아닐까?”
“……문제 내시는 걸 참 좋아하시네요.”
“문파 이름부터 만문문이잖느냐. 우리는 그만큼 많은 질문을 하고, 그만큼 많은 질문을 던진다.”
“저게 백문 어르신의 본모습이고, 별호가 천성문괴인 건 쉴 새 없이 질문하니까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서 하늘과 별에게밖에 물을 수 없다고 붙은 겁니다. 옛날 별호는…….”
“거, 적당히 하자, 13대야.”
옛날 별호를 언급하려고 하자, 단칼에 잘라 버리는 어르신.
역시 나이가 갑이라 그런지, 여태껏 일염이를 이렇게 편하게 대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었는데 참으로 편하게 대하는 모습이었다.
“혹시 일염이랑 잘 아는 사이입니까?”
“아니, 잘 모른다.”
“예에? 근데 편하게 대하시잖아요?”
“내가 잘 아는 건 이 녀석의 사조랑 사부지. 얘는 어렸을 때 잠깐 보고 말아서 잘 몰라. 그래도 뭐, 원래 이쪽 문파 애들은 다 한결같거든.”
뭐가 그렇게도 재밌는지 낄낄 웃는 어르신.
겉모습은 이래 보여도, 100살이라는 나이가 체감되진 않았는데, 방금 그 한마디로 엄청나게 와닿았다.
“뭐, 잡담은 여기까지 하고, 이제 네가 궁금할 것부터 물어보려무나. 궁금한 게 참 많지 않느냐?”
내 속내를 안다는 듯 옅은 미소를 짓는 어르신.
이제는 시원스레 알려주려는 것 같았기에 나는 의문점들을 쏟아냈다.
“일단, 여긴 어떻게, 왜 오신 겁니까? 그리고 서안에 발을 들였을 때, 왜 저희를 안내했으며 혈교도를 상대하실 생각이셨습니까? 아니면 다른 이유로 접촉하려 하신 겁니까?”
“그 질문 모두 한마디로 답할 수 있겠구나.”
쏟아지는 질문들을 들은 어르신은 일말의 고민도 없이 바로 답했다.
“구용이가 부탁해서다.”
“구용이라면…… 천괴도 대협이 말입니까?”
“그래, 네가 물어본 거 다 구용이가 부탁해서 그런 거다. 아, 혈교도들은 원래 내가 상대하려고 했는데 구용이 부탁으로 잠시 미룬 거고.”
“대체 왜 그런 짓을?”
“수련과 실전은 엄연히 다른 법. 네가 현 무림에서 협객 노릇을 하려면 실전을 겪어봐야 한다고 하더구나. 그 과정에서 단순한 무력이 아닌 해결 능력도 필요하고 말이다. 그래서 네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면 내가 뒤처리를 해주고, 몇 가지 가르쳐 줄 생각으로 온 건데…….”
말을 흘린 어르신은 잠시 주위를 둘러보고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뭘 가르치긴커녕, 괜히 나만 흥분해서 민폐만 끼쳤구나.”
“…….”
쓴웃음 조금.
그리고 감동 많이.
다채로운 감정을 나타내며 눈물을 찔끔 흘리시는 어르신을 보고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자, 문득 어르신이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럴 때 위로하는 건데, 위로가 없구나.”
“엄연히 사실이잖습니까. 민폐였던 건.”
“그래도 사람이 우는데 선의의 거짓말 정도는 해줄 수 있는 거 아니냐?”
“제가 그런 거 별로 안 좋아합니다.”
“……협객 노릇한다고 해도 당가는 변하지 않는구나.”
“제가 소가주인데 함부로 변해서야 되겠습니까? 당연한 겁니다.”
“…….”
한마디도 지지 않고 받아치자, 입을 다무는 백문 어르신.
뭔가 감동에 벅찬 얼굴로 눈물을 닦던 아까와 달리, 빈정 상했다는 듯 입을 삐쭉 내밀고는 품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자면, 널 가르치러 온 거긴 한데, 가르칠 건 없을 것 같으니 혈교에 대해서만 알려주마. 일단 이걸 보거라.”
어르신의 주먹만 한 핏빛 구슬.
보고 있자니 절로 피가 떠올라 섬뜩하기까지 한 핏빛 구슬을 내게 보여주신 어르신이 얼굴을 굳히며 설명했다.
“이게 바로 혈교도들이 활개 치는 가장 큰 이유. 혈옥이다.”
“혈옥? 사람들의 피를 매개로 기운을 빼앗아 만든 겁니까?”
“맞다. 혈교에서 혈진의 재료나 영약으로 쓰이는 만큼 네가 생각하는 과정을 거쳐서 만드는 물건이다. 사람을 인신공양하는 것보단 효율이 낮으나, 운반과 보관이 용이해 혈교도들이 강호 곳곳에서 만들어내는 물건이지. 옛날에 이런 게 없어서 혈교도들을 잡기 쉬웠는데, 이것 때문에 꼬리 자르기도 쉽고, 지부를 많이 내서 본교에 있는 놈들은 잡기가 더더욱이 어려워졌지.”
“끔찍하군요.”
사람을 운반할 땐 흔적이 남으니 추적이 됐는데, 이제는 물건으로 바꿔 가니 추적이 안 된다는 말.
쉽게 혈교도는 세를 불리기 쉬워진 반면, 잡기는 힘들어졌다는 소리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래, 끔찍하지. 참으로 끔찍해.”
마찬가지로 끔찍하다며 인상을 찌푸린 어르신.
그러면서도 손에 든 혈옥은 매우 조심히 잡고 있었기에 위험한 물건이 아닐까 싶어 혈옥에 대해 물었다.
“그런데 이 혈옥은 어떻게 처리합니까? 보아하니 조심히 다뤄야 하는 물건인 듯한데…….”
“처리하다니, 갑자기 무슨 말이냐?”
“예? 악인들의 손에 들어가면 위험한 물건이고, 그 이전에 인의를 벗어난 물건이잖습니까?”
“한데?”
정말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듯 되물는 어르신.
“안타깝게 희생된 이들이 있으나, 혈옥도 결국 좋은 영약. 복수는 나중에 하면 되는 일 아니겠느냐. 우리가 좋게 써주는 게 순리에 맞다.”
이미 만들어진 물건인 이상, 쓰는 게 더 값진 일이라고 했다.
“아니, 그게 무슨…….”
논리로는 이해하나, 전혀 이해할 순 없는 말.
그거에 순간 화가 끓어오르자, 어르신은 내 손에 핏빛 구슬을 쥐여주며 말하셨다.
“억울하게 이승을 떠난 령을 다스리는 일은 혈교도를 잡아서 갚으면 되는 일이다. 그러니…….”
말끝을 흐린 어르신은 다소 의미심장한 얼굴로 명령하듯 말을 이었다.
“먹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