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39화
살면서 처음으로 사천을 벗어나 섬서로 향하는 길.
그간 고대하고 고대하던 무림초출인 만큼 들뜬 마음으로 길을 거닐었고.
여행이라는 다소 어색한 행위에 걱정도 공존한 채로 길을 걸었다.
본디 여행이란 가끔 재밌는 일이 일어날 뿐.
보통은 같은 풍경을 보며 걷는 심심하기 짝에 없는 행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나는 도무지 심심할 틈이 없었다.
왜냐면…….
“네 이놈들! 가진 걸 내려놓고 사라지면 목숨만은 살려주마!”
한 길 건너 한 길마다 산적이 나왔기에.
“하아, 뭐 이리 많아.”
산적들을 보자마자 절로 나오는 한숨.
즐겁게 맞이해 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거의 매 길목마다 배치된 게 아닐까 의심될 정도 산적이 많았다.
그것도 당가를 못 알아보는.
산적이라고 불러주는 것조차 민망한 산적들이 말이다.
‘애초에 따지고 보면 산적도 아니지.’
아무리 산적들이라고 한들, 개방도보다는 깨끗이 입고 다니는 법.
거지꼴을 하진 않았는데, 여태껏 튀어나오는 산적들은 그야말로 거지꼴이었다.
“뭐라 궁시렁대는지 모르겠지만 서로 피를 흘려봤자 좋을 게 없는 거 알 거다! 그러니 순순히 물건을 내놓고 지나가라!”
“아니, 이쪽이 상단도 아닌데, 산적이 처음부터 그런 합리적인 소리를 하면 어떡하냐고…….”
열 명이 넘는 인원이 고작 셋을 덮치는데 처음부터 설득하려는 산적들.
비록 내가 산적은 아니지만, 산적질에 기선 제압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만큼 이게 얼마나 어설픈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백보 양보해서 당가 사람인지는 몰라도 무림인인지 보면 알잖아. 그런데 그걸 곧이곧대로 들이박냐.”
일전에 언급했듯이 은원은 둘째치고 약한 자에게 자비가 없는 게 당가였기에 산적들의 기피 대상 1순위가 당가의 사람이었다.
물론, 그걸 못 알아볼 정도로 어설픈 이들이었기에 그건 기대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무림인은 피해야 할 것 아닌가.
‘하긴, 그 정도 이성이 남아 있었으면 산적질을 안 했겠지.’
심히 한탄스러운 상황.
사실 이들이 단순한 산적이었으면 이렇게 궁시렁거릴 것 없이 바로 죽이고 말았을 거다.
그런데 내가 그러지 않는 이유.
그건 이들이 무공을 전혀 익히지 않았고.
앞의 인원들과 달리, 혈향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순수한 양민이었기였다.
“혈교가 하도 활개 치고 다니니까 다들 산적으로 전향하나?”
“아마도 그럴 겁니다. 지금은 혈교가 다소 주춤한 상황이어도, 이래저래 물가가 올라서 양민들이 살기가 안 좋은 상황이니까요. 물론, 따지고 보면 정말 최후의 수단이지만 말이죠.”
“……진짜 더럽게 나쁜 놈들이네.”
단순히 해를 입히는 것도 용서가 안 되는데, 그 여파로 양민들도 못살게 굴다니.
걸리기만 하면 아주 작살을 내버려야겠다.
“고, 공격해라!”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 갑자기 공격 명령을 내리는 도끼를 든 중년인.
혈교 때문에 얼굴을 찌푸린 게 싸우려고 마음먹은 걸로 알았는지 선빵을 치려 했다.
“공자님. 어떻게 할까요?”
신호에 맞춰 저마다 농기구를 하나씩 꼬나 쥔 산적…… 아니, 양민들이 있는 힘껏 공격해 오자, 흔유가 여유로이 검을 빼 들며 의중을 물었다.
무림에서 함부로 검을 쓸 실력은 아니나, 상대가 무공을 익히지 않은 이들이기에 이 정도는 괜찮다는 듯 자신이 앞으로 나섰다.
“일단 제압하죠. 제가 할게요.”
피를 한껏 머금은 악인들이었다면 모를까.
아직은 손에 피를 묻히지는 않은.
교화가 가능해 보이는 이들이었기에 사뿐히 왼발을 앞으로 내디뎠다.
그러고는 살짝 힘을 주며 바닥을 짓눌렀다.
-퉁!
“어? 어?”
그러자 약속이라도 한 듯 사뿐히 무릎을 꿇는 산적들.
있는 힘껏 찍어누르는 게 아닌.
마치 처음부터 그러려고 했던 것처럼 자연스레 무릎을 꿇게 만들자, 흔유가 토끼 눈을 뜨고 뒤를 돌아봤다.
“세상에나 공자님! 기를 이렇게 잘 다루시다니! 제 좁은 식견으로도 얼마나 훌륭한 기예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예요!”
“단순히 천열운무보의 응용입니다. 뭐, 정확히 따지자면 그냥 알맹이가 없는 것뿐이지만요.”
천열운무보를 응용하기엔 내 성취가 너무 낮았다.
그럼에도 이런 기예를 선보일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천열운무보에 구름을 밟듯 사뿐히 짓누르는 묘리도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이 아니라 독을 짓누를 때 쓰는 건데 이렇게 쓸 수도 있네요.”
사방으로 운무를 흩뿌리는 천열운무보.
밀폐된 공간이라면 모를까.
개활지에서는 운무가 쉽게 퍼져 나가고, 적의 공격에 휩쓸려 날아갈 수 있기에 이렇게 날아가지 않게끔 눌러주는 초식이 있었다.
그래서 한 번 써봤는데, 생각보다 더 부드럽게 무릎 꿇리는 게 효과가 좋았다.
“히끅…….”
겁에 질렸는지 딸꾹질을 하는 청년 하나.
산적들을 둘러보자, 다른 이들의 표정도 별반 다를 바가 없는 게 그제야 자신들이 누구를 건드렸는지 감이 오는 모양이었다.
“죄송합니다. 배를 곯은 지 너무 오래되어 잠시 미쳤었나 봅니다. 제발 목숨만은 살려주십시오.”
이어서 냉큼 머리를 조아리는 중년인.
아까 명령을 내리는 걸 봐선 이들의 대표인 듯했다.
“그런 거 같긴 하더군요. 다른 곳도 아니고 사천에서 당가를 건드리려고 하다니. 녹림에서 보면 기겁할 만 일이거든요.”
“다, 당가의 분이셨습니까?!”
“의복을 보면 아시잖아요.”
당가의 직계를 의미하는 짙은 자색의 무복.
거기에 우측 가슴에는 소가주를 의미하는 적색의 현무와 묵빛의 현무가 어우러져 수놓아져 있는 걸 보면 그 누구라도 내가 당가의 소가주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당가의 무복은 연녹색이 아니었습니까?”
“……직계는 자색을 입습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전혀 모르는 눈치인 인원들.
알아볼 식견조차 없는 걸 보아하니 진짜 무림하고는 연이 없는 양민들인듯했다.
“몰랐으면 이제부터라도 알아놓으십시오. 대체 그런 안목으로 어떻게 산적질을 하겠다고 한 겁니까?”
“말씀드렸다시피 잠시 눈이 뒤집혔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소협.”
“애초에 무림과 연이 없다고 한들, 사천 사람이면 다 아는 사실인데, 모르는 걸 보아하니 타지 사람인 듯한데, 산적질을 할 거면 좀 아는 곳에서 하지 왜 굳이 사천까지 와서 산적질을 합니까?”
“그게…….”
물어보자마자 봇물 터지듯 쏟아져 나오는 중년인의 이야기.
얼마나 서러움에 복받쳤는지 천천히 시작한 이야기는 어느새 속사포처럼 쏟아졌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마을 근처에서 기이한 일이 일어나서 부리나케 떠났는데, 세상이 흉흉해진 탓에 아무리 돌아다녀도 외지인은 안 받아줬다 이 말이지?”
“예, 맞습니다.”
“서안은요? 다른 작은 지방이면 몰라도, 서안은 성도고, 종남파도 있어서 그렇게 날 세우진 않았을 텐데요?”
“서안은 이상해서 일부러 피했습니다.”
“서안이 이상하다니요? 그게 무슨 소립니까?”
“저희가 예전엔 듣기로 서안은 외지인이 오면 무조건 객잔으로 안내해 밥을 준다고 했습니다. 그것도 공짜로요.”
저 하나 먹고살기 힘든 난세에 찾아오는 이들에게 공짜로 밥을 준다.
이는 굉장한 선인이 아니고서야 무슨 의도가 있기에 하는 일이고, 당연하게도 후자의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아니, 거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실상 공짜로 주진 않았겠군요.”
“예, 저희도 당연히 무슨 의도가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저희도 여유 부릴 처지는 아니라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건장한 청년 둘을 뽑아 서안으로 들여보내 봤습니다. 그런데 돌아오지 않더군요.”
그때의 일이 생각나는지 핼쑥해진 얼굴로 말하는 중년인.
다른 이도 아닌.
자기 자신이 명령을 내렸기에 죄책감을 한가득 안고 있는 듯했다.
“객잔이라…… 혹시 거기 이름이 학한객잔입니까?”
“소협께서도 아십니까?”
“알죠.”
학한객잔.
거기다 다름 아닌 팽구용이 술을 사 와달라고 부탁한 객잔 이름 아니던가.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단순한 술 심부름이 아니었네.’
팽구용이 알고서 그랬는지.
아니면,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겠지만, 절대 순탄하게 끝날 거 같진 않은 상황.
이제는 이들도 아는 게 없어 보였기에 주의를 주고 풀어주기로 했다.
“이거면 성도로 갈 때까진 버틸 겁니다. 어디 자리를 알선해 주진 못해도 사천 성도엔 대문파만 셋이라 인심이 그리 각박하지 않으니 적어도 먹고 누울 곳은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소협.”
무한낭에 든 식량을 조금 꺼내 나눠주자 연신 고개를 조아리는 사람들.
얼마나 배고팠으면 감사 인사를 하는 와중에도 식량을 향해 쉴 새 없이 눈이 돌아갔다.
“가는 길에 설령 식량이 부족해졌다고 한들, 산적질만큼은 하지 마십시오. 악행인 건 둘째치고, 그 실력으론 이류 무인만 만나도 전멸합니다.”
무공을 배웠다면 모를까.
평생 농사만 짓던 양민들이 무기를 들어봤자다.
삼류라면 인원수로 밀어붙이면 어떻게 될지 몰라도, 이류 무사만 만나도 궤멸은 못 피한다.
아니, 그 전에 산적질이 나쁜 일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죽을 뻔했다는 걸 상기하자, 침을 꿀꺽 삼키는 인원들.
아까의 상황이 떠오르는지 몸을 부르르 떠는 인원도 있었다.
“그럼 가보시죠.”
“감사합니다. 소협. 비록, 가진 거 하나 없더라도 소협의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연신 인사를 하며 자리를 뜨는 인원들.
떠나가는 동안에도 흘끗흘끗 내 무복과 얼굴을 번갈아 보는 걸 보면 은혜를 잊지 않겠다는 말이 빈말은 아닌 듯했다.
‘그나저나 당가의 직계가 자색 무복을 입는 걸 모른다라…… 확실히 무림인들과 양민은 거리감이 있구나.’
고작 의복 하나로도 구분되는 무림인과 양민.
그걸 체감한 게 신기해서 자색의 무복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문득 옛날에 백의를 입고 다녔던 게 떠올랐다.
“일염아.”
“예, 공자님.”
“그러고 보니 색깔이 안 보이는 건 좀 괜찮아졌어? 자색의 무복 입고 있는데, 괜찮나 싶어서.”
“괜찮습니다. 그때는 그럴 만한 일이 있어서 그랬던 거고, 지금은 다 잘 보입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네.”
그때는 별호에 백(白)이 들어가고, 솔직히 가문에서 신경 쓰는 사람이 적어서 마음대로 백의를 입고 다녀도 뭐라 하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엄연히 소가주 자리에 앉았기에 다른 무복을 입긴 요원한 일.
일염이를 배려해서 다른 무복을 입기 힘들 거다.
물론, 일염이가 제 실력을 드러낸 지금은 별 효용 없는 문제지만 말이다.
“근데 색맹인 건 신화문의 무공 때문이야? 그러면 문도들도 색맹이고?”
“제가 색맹이 된 건 무공의 부작용인 건 맞지만, 문도들은 아닙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문주 비전인 색유(色遊) 때문에 그런 겁니다.”
“색 놀이? 그게 무공 이름이야?”
“예.”
“이름이 뭐 그리 독특하냐?”
아니, 별의별 무공 이름이 다 있긴 해도 색 놀이라니.
도대체 뭐 하는 무공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무공이었다.
“무림에 별의별 이름이 있는데 색유 정도는 양호한 거 아니겠습니까.”
“아니, 그렇긴 한데, 그래도 문주만 익히는 무공이면 좀 더 멋있는 게 있지 않나 해서.”
“남의 문파 무공이라고 너무 막말하시네요. 그것도 제일가는 절기인데.”
뾰루퉁한 얼굴로 노려보던 일염이는 마음에 안 든다는 말을 이었다.
“그리고 마공은 부작용이 강할수록, 더 강력해집니다. 대충 들으면 짐작 갈 텐데 그걸 아시는 분이 그러십니까?”
“색맹이 되는 게 부작용이라며? 그것보단 감정이 없어지는 게 더 치명적이니까 더 약한 거 아니야?”
“…….”
정론을 이야기하자, 입을 다무는 일염이.
딱히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는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더니 속삭이듯 이야기했다.
“평범하다면. 평범했다면 그랬겠죠.”
마치 자신은 평범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이야기하는 말.
일염이는 그 말을 하곤 조용히 있던 흔유를 한참을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앞을 향했다.
“사담은 여기까지 하시고, 귀찮은 녀석들 더 꼬이기 전에 얼른 출발하시죠. 그냥 산적이라면 모를까. 이도 저도 아닌 녀석들 만나는 거 귀찮아 죽겠습니다.”
자리를 뜨듯이 앞서 나가는 일염이.
평소에는 잘하지도 않던 짓을 하는 걸 보면 뭔가 내가 모르는 게 있는 듯했고, 그렇기에 일염이의 말을 곱씹으며 그 뒤를 따랐다.
“그래, 얼른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