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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137화 (137/200)

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37화

만독연 내의 개인 연구실.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탓에 바닥과 책상 위 가릴 것 없이 연구실에는 먼지가 가득 쌓여 있었다.

그래서 처음엔 청소를 할까 싶었는데, 아무래도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아 대충 집기들만 골라서 먼지를 닦아내고 무한낭에 챙겨 넣었다.

“다 챙기셨습니까?”

“어, 쓸만한 건 다 챙긴 것 같네.”

혹시라도 빠뜨린 건 없는지 연구실을 둘러보자, 전반적으로 휑해진 연구실.

무한낭의 공간이 워낙 넓어서 조금이라도 필요하다 싶으면 일단 챙겼기에 말 그대로 연구실을 때려 박은 형국이 되었다.

‘어차피 공간도 많이 남을 텐데, 이게 낫겠지.’

왜 백지장도 만들면 낫다는 말이 있지 않는가.

전생이든 현생이든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언제나 연구엔 장비가 중요했다.

그러니 가능하다면 연구실 자체를 통으로 옮기는 게 최선이었다.

‘쩝, 그래도 이럴 때 보면 전생이 그리울 때가 있단 말이야.’

국가의 지원 덕에 빵빵하다 못해 장비가 차고 넘쳤던 과거의 연구실.

질량분석기나 단결정 X선 회절 분석기 같은 싼 장비부터 국가급 프로젝트에 해당하는 장비조차도 오직 나만 쓸 수 있게끔 준비됐었기에 그 부분은 좀 아쉬웠다.

‘뭐, 그래도 원심분리기 같은 걸 안 만들어도 돼서 다행인가.’

어떠한 장비들이든 만들 수 없는 상황.

아무리 구조를 이해한다고 한들, 만드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고, 또, 큰 장비일수록 돈과 기술이 많이 들어가기에 손도 못 댈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아주 쉽게 재현 가능한 장비 하나.

그건 바로 분당 10만 회 회전하는 초고속 원심분리기였다.

‘단단한 통에 끈을 묶고 돌리면 끝이라니, 이 얼마나 편해.’

원심분리기의 원리는 중력과 유사한 원심력을 이용해 혼합물을 분리하는 것.

전생에는 조금이라도 시료의 균형이 안 맞으면 순식간에 회전축이 뒤틀려서 안전사고를 일으켰기에 신경 써서 시료를 넣어야 했는데, 지금은 그냥 단단한 용기를 준비해 끈에 묶은 뒤 빙빙 돌려주면 끝이었다.

이 얼마나 간편하고 좋은 일이란 말인가.

‘마음만 먹으면 우라늄 농축도 가능하다 이 말이야. 뭐, 사실 삐익이가 있는 시점에서 별 쓸모가 없지만.’

어쨌든, 유능하기 짝에 없는 무인들.

각 연구실마다 연구 장비로 취급해 한 명씩 배정해야 한다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낄낄대고 있자, 당지무가 열려 있던 문으로 큼지막한 보따리를 들고 들어왔다.

“소가주님. 부탁하셨던 피마자를 가져왔습니다. 찾는 인원이 아무도 없는 관계로 있는 대로 가져왔습니다.”

“번거로우셨을 텐데 고맙습니다.”

최대한 많이 가져달라는 주문대로 당지무가 피마자를 한 아름 짊어지고 왔기에 내용물을 확인하고 주섬주섬 피마자가 든 보따리를 통째로 쑤셔 넣자, 당지무가 우려스럽다는 듯 물었다.

“근데 정말로 이걸로 괜찮으신 겁니까? 소가주님을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녹주석 대용이라고 하시니 그냥 녹주석을 쓰시는 게 낫지 않나 싶어서 여쭙는 겁니다.”

“3년 전에 녹주석을 많이 썼잖습니까. 지금 당장 저 하나 쓸 양은 있다고 한들, 여유분을 확보하기 전까진 아끼는 게 맞습니다. 거기다. 피마자는 녹주석과 달리, 매 수확 시기마다 얻을 수 있으니 말이죠. 더군다나 약점이 명확하긴 하나, 단순히 독성을 따지자면 녹주석보다 피마자가 더 강합니다.”

원래라면 산화베릴륨을 썼을 테지만, 3년 전 일로 인해 많이 소모한 상황.

만독연에서 농성할 때 펑펑 뿌리듯 써댔기에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그렇기에 대체할 독이 없는 것도 아닌데, 굳이 그걸 내가 쓸 이유는 없었다.

‘지금 당장 천열운무보를 제대로 펼치진 못하지만, 펼치게 되면 많은 양의 독이 필요하니 피마자만 한 게 없지.’

이제는 천독림의 독을 쓸 수 있기에 가장 강한 독은 아니었으나, 이전에도 언급했듯이 피마자의 강점은 가성비.

채집 난이도에 비해 독성이 굉장히 강하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아직 성취도가 낮아 독을 뿜어내는 단계에 이르지 못했고.

또, 성취가 낮을수록 독의 소모가 심한 천열운무보를 쓸 때 쓰기엔 매우 적합했다.

“소가주님께서 그러시다면 알겠습니다. 이전과 같은 일이 없도록 무림에 나가계시는 동안 아주까리를 각별히 관리하겠습니다.”

“예,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저희 호현이도 좀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뭔가 미묘하게 반응이 늦으시는 거 같은데 호현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좀, 사제가 많이 독특해서 말입니다.”

호현이 이야기를 꺼내자,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웃는 당지무.

표정을 보아하니 큰 사고를 친 것 같지는 않으면서도 그다지 반기지 않는 듯한 얼굴이었다.

“혹시 연주님께 예의 없게 굴거나 혹은 대들거나 합니까?”

“아닙니다. 사제는 언제나 예의 바르게 제게 깍듯이 대해줍니다. 단지, 소가주님을 광신도마냥 섬기는 게 좀 거부감이 들게 만들 정도라…….”

죄송하면서도 난처하다는 듯 당지무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도대체 뭘 얼마나 심하게 했길래 제 사형에게 저런 반응이 나온단 말인가?

“……그건 저도 어쩔 수 없는 부분인지라. 잘 좀 부탁드립니다.”

“예, 그 부분을 제외하곤 굉장히 뛰어난 아이라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어떻게 내가 해결해 줄 만한 일은 아니었기에 다시금 잘 좀 부탁한다고 하자,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여주는 당지무.

그렇게 서로 예를 취하고 있다 보니 당지무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이야기했다.

“아, 장로님들께서 혹시 대장로님 소식을 들으신다면 곧장 연락 달라고 하셨습니다.”

“대장로님이요? 제가 알기로 10년 넘게 가문에 안 돌아오셨는데, 자리를 유지한다고 합니까? 하다못해 봉문했을 때도 못 뵀잖습니까.”

생각해 보니 어렸을 때부터 한 번도 본 적 없는 대장로.

듣자 하니 무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정말 간간이 연락한다고 하긴 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10년 넘게 자리를 비웠으면 새 대장로를 선출하는 게 낫지 않나 싶었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대장로님이 가주님 다음가는 고수시니 얼른 돌아오셨으면 하는 눈치이십니다. 대장님이 혈교에 투신할 인물은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면서 말입니다.”

“흐음, 그렇군요.”

혈교에 투신할 만한 인물이 아니라면 감투 따윈 어찌 돼도 좋으니 합류해 줬으면 한다는 말.

그러니 찾는 대로 당가에 돌아오게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겠습니다. 소식 듣는 대로 모셔오도록 하죠.”

연구실도 다 챙겼고, 이야기도 다 들었겠다.

이제 떠나려고 연구실 밖으로 걸어나가자, 뒤에서 당지무가 고개 숙였다.

“감사합니다. 부디 몸 성히 다녀오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나랑 일염이는 배웅해 주는 당지무를 뒤로하고, 만독연을 떠났다.

* * *

떠날 채비를 마치고, 정문 앞에 들어서는 길.

평소 같았으면 몇 명 나와서 배웅해줄 법도 하건만, 이제 막 개문한 시기라 누구 하나 바쁘지 않은 사람이 없어서 배웅하는 이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맞이해주는 사람도 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이야, 공자님. 오랜만이네요. 세상에, 안 본 사이에 이렇게나 강해지셨어요?”

정문 앞에 발을 내딛기 무섭게 인사를 건네는 흑의인.

열댓 명의 흑의인들 제일 앞에서 나를 반겨주는 그는 당연하게도 신화부문주였다.

“오랜만이네요. 그간 건강하셨나요?”

“뭔가요? 그 어르신들이나 들을 법한 인사는. 일단, 답을 하자면야 저는 잘 못 지냈죠.”

“예?”

“아유, 문주라는 사람은 일을 던지고 지는 맘 편히 수련하러 가지 않나…… 어떤 공자님, 이제는 소가주가 된 분도 일을 산더미로 주고 가서 이리저리 바빠 죽겠는데. 그 와중에 또 혈교도는 온 무림에 날뛰지. 제가 제 명에 못 살겠다니까요?”

툴툴대며 눈살을 찌푸리는 신화부문주.

일을 떠넘긴 거야 그렇다 쳐도 혈교도가 얼마나 많았는지 치를 떠는 모습이었다.

“혈교도가 그렇게 심하게 활개 쳤나요?”

“그럼요. 말도 마세요. 공자님의 삼촌 분이 와 계시던데, 안에서 이야기 들으셨을 테니 간단히 요약하자면 무림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튀어나와 양민들에게 피해를 입혀 가지고, 무림맹에서 비상사태를 선언하고 토벌에 나섰고, 3년이나 흐른 지금이 돼서야 잠시 소강상태에 이르렀답니다.”

“……그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면 황실에서 나설 법도 한데, 별 움직임 없습니까?”

“관심이 없지는 않은데, 황실 내부에서 권력다툼이 있어서 뒷전인가 봐요. 어휴, 밖은 어떤 상황인 줄도 모르고 지들끼리 싸우기 바쁘니 애들도 아니고 말이죠.”

당장 황실모독죄로 목이 잘릴 만한 소리를 하는 부문주.

뭐, 실상 목을 자르러 올 사람이 없긴 했지만, 태연자약하게 이런 소리를 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실망을 했는지 여실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어쨌든, 공자님은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번처럼 우리 애들이 나설 거거든요. 저 없어도 알아서 잘 공자님을 호위할 겁니다.”

부문주가 손짓하자, 앞으로 나서는 흑의인들.

다들 눈만 내놓았기에 전혀 구분이 가지 않았지만, 왠지 모르게 일전에 한 번 봤던 듯한 이들이 다가와 목례를 하더니 주변과 동화되듯 사라졌다.

“부문주님은 같이 안 가십니까?”

“이전에는 특수한 상황이었고, 누군가는 문파 살림살이를 도맡아 해야 하니 움직일 수 없죠. 더군다나, 저 인간이 가는 시점에서 제가 뭔 도움이 되겠습니까. 따흑흑…… 내 팔자야. 왜 나는 이런 문주를 만나서 고생해야 하는 거지?”

잠시 눈시울을 붉힌 채 애처롭게 구슬피 운 신화부문주는 천 쪼가리를 꺼낸 눈물을 닦고는 뒤로 손짓했다.

“그래도 대신 이 친구가 같이 붙을 겁니다.”

부문주의 손짓에 따라 앞으로 나서는 또 다른 흑의인.

이번에는 앞으로 걸어 나오면서 복면과 두건을 벗어버리는 게 얼굴을 드러내도 상관없는 사람인 듯했다.

‘근데 어디서 본 거 같은데?’

옛날에 본 듯한 얼굴.

신화문도들의 얼굴을 본 적이 없기는 한데, 눈앞의 사람은 왠지 모르게 익숙한 얼굴이었다.

“흔유라고 합니다. 벌써 8년이나 지나서 기억하실지는 모르겠지만, 잘 부탁드려요. 공자님.”

친화력 높은 듯 생기 가득한 미소로 인사하는 흔유.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신화문도들과 달리, 대놓고 생글생글 미소를 짓는 게 어딘가 부문주를 닮은 구석이 있는 듯했다.

“8년? 아, 어렸을 때 청성파 장로에게 현철을 뺏겼던 그 아이입니까?”

“원래 다들 보이지 않게 숨어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멀리 나가면 허드렛일 할 아이가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겸사겸사 세상 구경도 시켜줄 겸 데려가 주셨으면 해요.”

“흠…….”

“앗, 설마하니 거절할 생각이신가요? 상의는커녕, 언질도 없이 일은 일대로 던져서 애들 고생시키며 단물을 쪼오오옥 빨아먹고 이렇게 내쳐버린다고요?”

“아니, 그건 아니고…… 그냥 신화문도치고 상당히 약해 보여서 그런 거였습니다.”

솔직히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흔유는 여태껏 본 신화문도들 중 가장 약해 보였다.

‘일류 수준의 무인이 약한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강한 편도 아니지.’

나보다 어린 걸 감안하면 결코 성취가 느리진 않으나 절대 평가를 한다면 호위는커녕, 방해만 될 것 같은 상황.

갈 길이 먼데, 굳이 짐을 달고 가고픈 생각은 없었기에 거부감을 드러낸 거였다.

“히익, 공자님. 너무하십니다…….”

“그러게요. 그걸 본인 앞에서 대놓고 이야기하시다니 이 얼마나 잔악무도하신 건지…….”

죽이 딱딱 들어맞는 둘.

마치 부문주의 아들이라도 되는 듯 둘이 비슷한 성향을 보였다.

“무엇보다 부문주님이랑 비슷해 보여서 왠지 모르게 꺼림칙하네요.”

한창 신화문에 다닐 때, 부문주를 상대하는 건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여행할 때 달고 다닐 생각을 하니 골치가 아팠는데, 대뜸 일염이가 끼어들며 전음을 보냈다.

-당연한 겁니다. 흔유는 신화문의 유일한 모방 대상이니까요.

모방 대상이라는.

영문 모를 단어를 써가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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