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35화
비밀창고를 쓸어 담고서 가주전으로 가는 길.
일염이와 나 사이엔 불쾌한 침묵이 감돌았다.
“…….”
“…….”
서로를 빤히 보면서도 묵묵히 걷는 상황.
일염이가 알아서 항변할 줄 알았는데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지 입을 삐죽 내민 채 걷고 있었고, 결국 먼저 입을 연 건 일염이가 아니라 나였다.
“일염아.”
“예, 공자님.”
“왜 열심히 하는 애들한테 초를 쳐. 평소에 안 그랬으면서 갑자기 왜 그래? 내가 없던 3년 동안 심경의 변화라도 생겼어?”
“생겼죠.”
잠시 고개를 끄덕인 일염이가 회한에 잠긴 얼굴로 말했다.
“이기지 못할 싸움을 해도 되는 건 오직 감당 가능한 자뿐입니다.”
“……뭔 개소리야. 그게.”
오늘따라 뭘 잘못 먹었는지 동문서답하는 일염이.
황당한 얼굴로 녀석을 쳐다보자, 고개를 돌리며 되물었다.
“그런 게 있습니다. 그런데 공자님은 왜 안 말리셨습니까? 애들 보고 ‘아니야, 너희도 열심히 하다 보면 언젠가 삐익이를 이길 거야’라고 하실 줄 알았습니다만?”
“일단 맞는 말이긴 하니까.”
“그럼 공자님도 똑같은 거 아닙니까?”
“같은 취급 하지 말아줄래? 난 적어도 아이들의 꿈을 생각하는 어른이거든?”
“뭐, 그러시다면야.”
“진짜라니까?”
“예, 예. 그러시겠죠.”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항변과 수긍.
어차피 가는 동안 할 일도 없기에 일염이와 농담 따먹기를 하며 걷다 보니 금방 가주전에 도착했다.
“어서 오십시오. 소가주님. 안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입구를 지키던 백호단원의 안내의 따라 발걸음을 옮기자 눈에 들어오는 분주하기 짝에 없는 가주전.
하인들부터 요직에 앉은 이들까지.
누구 하나 안 바쁜 사람이 없었고, 모두가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진 듯 바삐 움직였다.
“다들 바쁜 와중에 저희만 한가한 거 같군요.”
“진짜 한가했으면 지금쯤 퍼질러서 잤지, 곧장 가주전으로 안 왔어.”
사실 막 봉문을 해제했기에 한가할 시기는 아니다.
그런데도 내가 이렇게 돌아다닐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팽 대협과의 약속 덕분.
곧장 떠날 예정이기에 일부러 일을 안 줘서 가능한 일이었다.
“지천이 왔구나. 몸은 좀 괜찮냐?”
“아, 형님.”
집무실로 향하는 길에 마주친 당지혁.
일전에 봤던 적응 안 되는 평온한 얼굴과 어조로 내 몸 걱정해 주는 게 도통 적응이 안 됐다.
“예, 괜찮습니다.”
“안 그래도 먼 길 가야 하는 처지라 걱정했는데, 괜찮다니 다행이구나.”
괜찮다고 하니 당지혁이 슬며시 미소를 짓더니 이내 품을 주섬주섬 뒤져 뭔가를 꺼냈다.
“지천아. 팽가에 들렀다 올 거면 부디 이 서찰을 전해주지 않겠니? 어렸을 때 사귀었던 내 친우에게 보내려 하는데, 네가 간다니 굳이 돈 써서 표국을 통하기보단 네가 직접 전해줬으면 하는구나.”
한 푼이라도 아껴야 하는 상황이니 이왕 가는 길에 전해달라는 말.
나는 그게 명령조가 아닌 의문문이라는 것 자체가 놀라울 따름이었다.
‘가문을 생각하는 것도 모자라, 이렇게 격식 있게 물어보다니…… 진짜 세월이 약이구나.’
3년 전 당지혁이라면 상상도 못 할 일.
너무나도 기특하고 대견스러운 모습에 주저할 거 없이 서찰을 받아 들었다.
“그러죠.”
“번거로울 텐데 흔쾌히 승낙해 줘서 정말 고맙구나. 그러고 보니 네 삼촌분이 저쪽 방에 계시던데, 아버지를 뵙기 전에 뵙고 가는 게 어떻겠니? 아버지께서 지금 인원들을 데리고 회의 중이시라서 말이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럼 삼촌부터 뵙고 가는 거로 하죠.”
“그래, 몸 조심히 다녀오고, 부디 네가 당가의 대표라는 것 잊지 말아라. 그럼 난 이만 가보마.”
“…….”
당지혁이 진심 어린 작별 인사를 남기고 자리를 뜨자, 절로 떠오르는 의문.
당지혁은 겉보기와 달리, 역시 뭔가 꿍꿍이가 있는지 집무실에 곧장 가는 걸 꺼리는 듯했다.
‘설마 무슨 꿍꿍이가 있나?’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 법.
사소한 거지만, 이게 당지혁의 계략일 수도 있으니 안내하던 백호단원에게 물었다.
“혹시 지금 집무실에서 회의 중입니까?”
“예, 이 공자님 말씀대로 내부 회의 중이십니다. 다만, 가주님께서 소가주님은 회의 중에 들어오셔도 상관없다고 하셨습니다.”
“흐음, 그렇군요.”
“하지만 개인적으론 이 공자님의 말씀대로 가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이는 소가주님을 위한 것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가주님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않으려는 노력이기도 합니다.”
당지혁의 편을 들어주는 백호단원.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지만, 개인적으론 집무실로 가길 추천하지 않는다는 걸 보면 내가 괜한 걱정을 했단 생각이 들었다.
‘당지독이 활개 칠 때도 중립을 지키고 오직 가주만을 지지하던 게 백호단이다. 그런데 그런 백호단원이 당지혁의 편을 들어줄 리도 없고, 더군다나 가주의 명예를 운운한다는 건 실제로 그럴 가능성이 커.’
무슨 계략이라도 되는 줄 알았건만, 뭔지 모르겠지만 별거 아닌 일.
굳이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기에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말했다.
“그러면 삼촌께 안내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소가주님.”
가주의 명예를 지켜줘서 고맙다는 듯 잠시 고개를 까딱인 백호단원이 발걸음을 이리저리 옮기더니 손님방 앞에 멈춰서 문을 두들겼다.
-똑, 똑.
“들어오세요!”
문 두들기기 무섭게 들려오는 삼촌의 우렁찬 목소리.
누군지도 묻지 않고 일단 들어오라는 말에 백호단원이 옆으로 물러나며 문을 열어줬다.
“왔니? 형님도 같이 오셨네요?”
그러자, 문 너머로 보이는 환히 웃는 삼촌.
엄청난 덩치의 삼촌이라도 근육통은 피하지 못한 듯 침소에 곤히 누워 있었다.
“몸 상태는 좀 괜찮으십니까?”
“어휴, 그럼. 몸이야 멀쩡하지. 근육통도 하나 없고, 아주 그냥 멀쩡해.”
생기 있게 말하는 것과 달리, 도무지 침소에서 몸을 일으킬 생각을 안 하는 삼촌.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기술이나 경험에서는 삼촌이 우위를 점했어도, 단순히 경지로는 내가 위였으니 삼촌의 몸에는 상당한 충격이 갔을 거다.
“삼촌…….”
“너는 쌩쌩한 거 같네. 하긴, 젊으니 당연한 거겠지. 오늘 일어난 걸 보면 슬슬 떠나려고 하나 보네? 그러면 약속했던 보상을 줘야겠지? 저기 보따리 보이지. 저기서 네가 처음 보는 무기들 빼고 다 가져가면 돼.”
그래서 감사 인사를 전하려 하자, 단번에 끊어버리는 삼촌.
남사스럽게 그런 거 하지 말라는 듯 방 한구석에 놓인 거대한 짐 보따리를 가리키고는 가져가라고 했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짧게 인사를 건네고 짐 보따리로 다가가자, 기본적인 암기부터 니티놀 암기와 추혼비독파접까지.
없는 게 없는 삼촌의 짐 속엔 여러 가지 특이해 보이는 물건이 있었다.
“이건…….”
사출기들.
허리를 굽히면 나가는 암기부터 시작해 손목과 발목.
팔꿈치 등 각종 부위에 착용하는 수많은 사출기가 있었다.
“이제는 너도 잘 다루지? 그거 하나하나 신경 써서 만든 거라 위력이 더 강할 거야. 아, 맞다. 보법을 밟으면서 잠깐이나마 독무를 뿌리는 장치도 만들었는데, 그건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셨다던 천열운무보인가? 그거 쓰면 되니까 안 가져왔어. 그러고 보니 비무할 때 그건 왜 안 썼어?”
“당가의 무공을 먼저 배우느라 뒷전으로 밀어둔 것도 있고, 무엇보다 너무 어려워서 아직 2성 정도 밖에 익히지 못했습니다…… 이제 와서 보면 그 탓만은 아닌 것 같지만요.”
절세의 무공이라 부를 만했으나, 그건 다른 무공도 마찬가지.
천열운무보의 성취가 낮은 건 어디까지나 직접 보면서 배우지 못했기에 그런 걸 거다.
“생각해 보니 그러네. 매형께서 익혀서 알려주시는 게 아니면 성취가 더딘 게 당연하겠구나. 근데 그거 네가 쓰면 반칙인 건 아니냐? 어중간한 독을 쓰는 것도 아니고, 더군다나 약한 것도 아닌데, 거기다. 이제 경험까지 많으니…… 이야, 이거 내가 완전 괴물을 만들어 버렸네?”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 미소를 지은 삼촌은 한동안 만면에 미소를 띤 채 나를 봤고, 나는 그 부담스러운 눈길을 받으며 필요한 걸 무한낭에 챙겨 넣었다.
“다 챙겼니?”
“예, 필요한 건 다 챙겼습니다.”
“그래, 그러면 잠시 이쪽으로 와볼래?”
삼촌의 곁으로 가자, 삼촌이 냉큼 내 손을 잡아채더니 금화가 든 작은 주머니를 쥐여줬다.
“이건 용돈. 내가 주는 게 아니라 네 할머니가 주신 용돈이야. 많지는 않지만, 군것질거리 사 먹을 정도는 될 거야.”
비록, 작은 주머니였지만, 금화가 든 걸 보면 군것질하기엔 차고 넘치는 돈이다.
안 그래도 가문에 돈이 많이 필요한 시점이라 많이 들고 나가긴 눈치 보이는 상황이었는데, 이렇게 경비까지 챙겨주니 참으로 감사할 따름이었다.
“감사합니다.”
“자, 이제 줄 거 다 줬으니 내가 당가에 온 이유를 알려줄게.”
“이유요?”
“그래, 이유. 내가 당가에 온 이유는 크게 세 가지야. 첫째, 네게 물자를 줄 겸, 교육을 하기 위해서.”
“이미 첫 번째부터 2개인데요?”
“그런 사소한 건 신경 쓰지 말고 넘어가. 둘째, 당가의 수복을 돕기 위해서.”
“당가의 수복을 도와주신다는 건 한동안 당가에 계신다는 이야기십니까?”
“그래, 예전에 말했다시피 삼촌이 이것저것 정말 잘 만들 줄 알거든. 물론, 이제는 왜 그런지 알겠지?”
“알다마다요. 그래서 귀한 암기들을 만들어주신다는 이야기군요. 하지만 빙궁에도 일손이 필요할 텐데 이렇게 오래 계셔도 괜찮으신가요?”
“물론, 괜찮지 않지. 하지만 예전에 네가 빙궁에서 당한 일이 있잖니? 그래서 그때 보상을 주기로 한 거 생각해서 내가 직접 온 거야. 어쨌든, 그래서 회복이 되는 대로 대장간 일부터 해서 필요한 일이 있으면 한 일주일 정도 도와줄 예정이었어. 비록, 지금은 무기한 연장됐지만, 말이야.”
“무기한 연장이라니요? 오가는 시간을 생각하면 일주일도 충분히 긴 시간 아니에요?”
“맞긴 해. 근데 내가 당가를 도와주는 건 어디까지나 너에게 빙궁을 대신해 사죄하는 것도 있지만, 내가 매형을 좋아해서 그런 것도 있거든. 그래서 일당이라고 할까나? 내가 당가를 하루 더 도와드릴 때마다 한 시진씩만 소담을 나누자고 했어. 안 그래도 매형도 쉴 시간이 필요할 텐데, 너무 바쁘게 움직이시면 없던 병도 생기잖니.”
쉴 시간이 필요하다는 건 전적으로 동의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고문을?
그건 좀 너무하지 않나?
‘이건 아무래도 거절하셨겠지.’
삼촌의 수다가 좀 심해야지.
개방도들도 도망갈 정도다.
아무리 당가가 도움이 필요한 상황이라고 해도, 내가 가주였다면 단칼에 거절했을 것 같다.
“아버지께선 거절하셨죠?”
“아니, 받아들이셨어.”
“예에에에에?!”
“솔직히 매형께서 거절할 줄 알았거든? 네가 잘 모를 수도 있지만, 매형이 보기보다 마음이 약하셔서 남 고생시키는 거 함부로 못 하시거든. 근데 예상과 달리, 매형께서 뭔가 한참 고심하시더니 승낙하는 거 있지? 분명 민폐 끼치는 게 싫어서 거절하려고 했던 것 같은데, 아마 내 생각보다 당가의 상황이 너무 안 좋아서 어쩔 수 없던 것 같아. 그 증거로 승낙하던 시점에서 죽을상을 지으셨거든.”
“당연하시겠죠…….”
“아 참, 참고로 오늘 네가 가져간 분량. 그거 스물네 시진어치였거든? 그래서 매형이 요양하는 동안에도 틈틈이 찾아오시는 거야. ‘차라리 날 죽일지언정, 네가 하루 종일 말하게 놔둘 순 없다’라고 하시면서 말이야. 아무래도 매형께선 요양이 끝났다고 해도 아직 회복이 덜 됐을 수도 있으니 무리하게 만들고 싶진 않으셨던 거 같아. 정 많고 배려심이 넘치는 분이니까 말이야.”
“아니…….”
스물네 시진이라면 이틀?
개방도들조차 혀를 내두르고 도망가는 삼촌의 수다를 무려 이틀씩이나?
‘그걸 알고도 추가로 받은 거야?’
그야말로 존경심을 넘어서 경외가 절로 생기는 거래 조건.
모르고 당했으면 모를까.
삼촌의 수다가 어떤 건지를 알면서도.
또, 자신도 몇 번이나 도망친 전적이 있음에도 혈육들을 위해 스스로 지옥으로 걸어 들어간다니…….
‘이게 가문의 짊어진 자의 무게. 그리고 아버지의 무게인가.’
“킁…….”
절로 눈물이 나는 상황.
상상만 해도 끔찍한 말에 삼촌의 말을 더 듣자니 아버지가 너무 안쓰러워 없던 감수성이 생길 것 같았기에 애써 화두를 돌리려 다음을 물었다.
“마지막 셋째는 뭔가요?”
“셋째는 어머니의 말씀을 전하러 온 거야.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잠시 말을 멈춘 삼촌이 품을 뒤적이더니 고풍스러운 두루마리를 꺼내 펼치며 말을 이었다.
“빙궁신녀의 점괘. 혼란스러워진 무림에 발을 디딜. 오직 너만을 위한 점괘를 전하기 위해 온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