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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134화 (134/200)

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34화

인원들을 대동하고 연구실로 향하는 길.

내가 없던 사이 이곳저곳 보수를 완전히 해놨는지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상한 곳 하나 없었다.

그러나…….

“아주 그냥 걸레짝이 되어버렸네.”

연구실에 도착하자, 확연히 달라지는 풍경.

깨끗한 복도와 달리, 누가 선을 그어놓은 것처럼 연구실과 창고가 있는 곳은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만큼 난잡하게 부서져 있었다.

마치 지금 비명을 지르는 내 근육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말이다.

“3년 전, 저희가 전각에 돌아왔을 땐, 이미 연구실은 초토화된 상황이었습니다.”

문을 열 것도 없이 이미 뜯어진 문짝.

어차피 털어버릴 거 잠금장치를 풀 생각도 안 했는지 아예 문짝 째로 부서져 안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처음에 복구할까도 했지만, 호현이가 공자님이 직접 상태를 파악하시게끔 해야 한다고 강하게 피력해 그냥 놔뒀습니다.”

“아무래도 형님의 개인적인 물품도 있을 테니 부서졌든, 사라졌든 간에 형님께서 확인하시는 게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혹시 복구하는 게 나았을까요?”

“아니, 잘했어. 역시 호현이야.”

옅게 미소를 지으며 호현이의 어깨를 두들겨 주자,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이는 호현이.

“감사합니다.”

칭찬을 받은 게 그렇게도 좋은지 애도 아닌데, 감복한 얼굴이었다.

‘은혜를 잊지 않고 좋아해 주는 것도 좋지만, 이러는 건 좀 부담스러운데…….’

자고로 당가의 사람이라면 은원이 확실해야 하는 법.

당연히 호현이도 이제 당가의 사람이니 은혜를 갚으려 하는 건 참으로 대견스러운 일이지만, 이렇게까지 극렬하게 반응하는 건 많이 부담스러웠다.

‘뭐, 좋은 게 좋은 건가.’

그래도 악의를 가지고 하는 건 아니니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하고 대충 넘어가고 연구실부터 들어가기로 했다.

“자, 그럼 들어가 보자.”

문이 있던 자리를 넘어 안쪽으로 들어가니 역시나 부서진 건 가구나 집기들뿐.

독이 든 병들은 모조리 사라지고 없었다.

“역시 털렸네.”

담을 공간도 넉넉하겠다.

뭐가 들었는지는 나중에 확인하면 될 일.

나라도 연구실과 창고를 보고선 일단 전부 챙길 생각부터 했을 거다.

“언뜻 봐도 남은 건 없겠군요.”

“그렇겠지? 싸움이 있던 것도 아닌데, 이렇게 일일이 부수고 다닌 걸 보면 빼먹은 게 있을 리가 없을 것 같네.”

그를 증명하듯 바닥을 슥슥 뒤적여 봄에도 보이는 건 오직 나무 조각뿐.

여러 물질이 들어 있던 병의 파편은 일절 보이지 않았다.

‘뭐, 여기까진 예상했는데 중요한 건 저쪽이지.’

이미 털렸으니 더 확인해 볼 것도 없는 연구실은 내버려 두고 창고…… 아니, 창고였었던 공간으로 이동해 비밀 문 개폐기부터 찾았다.

“여기도 산산조각이 났군요.”

일염이가 말한 대로 바닥에 흩뿌려질 대로 흩뿌려진 유리 파편.

세월이 오래 지난 만큼 원래 뭐가 있었는지 가늠도 안 갈 정도로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렇기에 나는 안도했다.

“그러게. 참 다행이다.”

평범한 수조라면 모를까.

이곳은 비밀 창고로 향하는 유리로 된 개폐기가 숨겨져 있던 곳.

상정했던 최악의 상황이 비밀 창고가 털리는 일이었기에 거기만 안전하다면 나머진 아무래도 좋았다.

‘흠, 그래도 유리가 부서진 건 안타깝네…… 유리값이 보통 값도 아니고, 금값인데, 이왕이면 부수지 말지. 털러 온 사람한테 그걸 바라는 건 좀 무린가?’

일단 개폐기가 박살 났다는 점에 안도해 시답잖은 잡생각을 하자 장하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예? 다행이라니요? 이거 비싼 거 아니었나요? 혹시 유리가 아니었나요?”

장하가 유리 조각을 하나 집어 들어 요리 보고 저리 봤는데, 도무지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는지 의뭉스러운 눈으로 나를 올려다봤다.

“아니, 유리이긴 한데…….”

이걸 설명해 줄까 말까 고민되는 상황.

원래라면 굳이 비밀 창고의 존재를 알리려 하진 않았는데, 이미 쓸모없어진 시점이라 알려줄지 말지 고민이 됐다.

‘3년 전에야 별 실력 없는 녀석들이 털어서 지나쳤을 건데, 만약, 지금 와서 턴다면 어중이떠중이를 보내지 않을 테니 여긴 더 못 쓸 거야.’

저번에야 어찌저찌 무사했다고 한들, 다음에 이런 일이 생기면 빼도 박도 못하고 털릴 게 분명했다.

적들이 쓰는 기이한 사술이 내가 아는 그것이라면 더더욱 말이다.

그렇기에 이곳은 폐기.

이왕 이렇게 된 거 아예 연구실과 함께 당지독의 주머니.

무한낭(無限囊)에 넣은 채 다닐 생각이었으니 비밀 창고를 알려주는 게 나을 듯했다.

‘혹시 모르지. 내가 없을 때 유용하게 쓰기라도 할지. 예를 들면 대피 장소라든가…… 나머진 잘 모르겠네. 뭐, 어떻게든 쓰겠지.’

어차피 무림에 나가면 한동안 돌아오지 않을 거고, 앞으로 연구는 만독연에서 진행할 생각이었다.

그러니 둘이서 알아서 잘 쓰겠거니 생각하며 알려주기로 했다.

“이곳에 비밀 창고로 들어가는 개폐기가 있어서 그래.”

“비밀 창고요?”

“그래, 비밀 창고. 일염아, 문 좀 열어줄래?”

부탁받자마자 비밀 창고가 있는 곳으로 향하는 일염이.

벽의 이곳저곳을 퉁퉁 치더니 이내 불쾌한 소음과 함께 벽이 열렸다.

-끼이이이익.

“우와…….”

벽이 열리자마자 감탄부터 터뜨리는 장하.

일차적으로 갈라진 틈조차 없던 멀쩡한 벽이 열리자 신기해하는 것 같았고, 다음으론 벽 너머의 이질적인 풍경에 놀란 듯했다.

그도 그럴 게.

일반적인 창고와 달리 비밀 창고의 안에 있는 물건들은 대부분 관리에 각별히 주의를 요하는 물건들.

3년 전의 나조차도 다루기 위험한 물건이었으니 말이다.

“하나같이 평범한 거에 든 게 없네요? 옥함부터 현철로 만든 보관함까지, 대체 뭘 쓰시길래 이렇게 넣어두신 거예요?”

“저것들?”

초강산과 초염기 물질들.

으레 그렇듯이 일반인들의 상식과 과학의 정의가 괴리가 있는 만큼 쉽게 설명할 방법이 없다.

그러나 아주 쉽고 단순하게 말하자면 닿자마자 사람을 녹여 버리는 게 산성 물질이었고 조금 시간이 걸리지만, 몸 전체를 녹여 버리는 게 염기성 물질이었는데, 그중에서도 강한 걸 모아둔 곳이다.

물론, 실제로는 초강산 중 약한 플루오린화수소산부터 황산, 혹은 초염기 중 약한 수산화나트륨(수산화 소듐) 같은 물건들뿐이었지만, 충분히 위험한 물질들이었다.

“있어, 닿으면 위험한 것들. 정말 쉽게 설명하자면 유리를 녹이는 건 물론이고, 철까지 못 쓰게 만드는 물건이거든? 지금이라면 몰라도 예전에는 나조차 다루는 게 까다로운 물건이었어.”

“형님께서도 말씀입니까?”

“그래, 실제로 이보다 더 강한 것들은 아예 보관할 병이나 상자를 못 구해서 만들지도 못했어. 뭐, 만드는 것도 문제긴 하지만 말이야.”

초강산이나 초염기 물질들은 일반적인 용기로는 절대 보관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산도가 가장 높은 물건 중 하나인 플루오로안티몬산의 경우 테플론을 제외한 모든 걸 녹여 버리기에 만드는 건 둘째치고, 보관할 곳이 없었다.

“헌데도 만드신 건 그만큼 강력한 독이어서입니까?”

“맞아.”

그런데도 이걸 만드는 이유는 딱 하나.

바로 혼합독이 되면 무시무시해지기 때문이다.

‘중원의 과학 법칙은 전생과 같으면서도 엄연히 다르다. 그러니 이걸로 혼합독을 만들면 분명 한층 강해질 수 있을 거야.’

화골산이 한 방울 부었을 때, 일각이면 시체를 녹이는 물질이라고 했다.

그런데 만약.

화골산과 플루오로안티몬산을 섞는다면?

하다못해 플루오린화수소산이나 황산을 섞는다면?

시체를 녹이는 속도는 배가 되고, 어쩌면 공격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을지도 몰랐다.

무엇보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삼촌에게 받은 암기를 쓸 때 산성 물질을 묻혀서 던진다면 피부를 베는 동시에 지져 버리는 식으로.

상처를 제대로 치유할 수 없게끔 만들 수도 있을 거다.

‘잡생각은 여기까지. 그건 차차 알아보면 될 일이고 다른 물질들도 있으니 일단 안부터 둘러보자.’

언제까지고 창고 앞에서 노가리 깔 수는 없는 법.

생각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비밀 창고 안으로 들어가 주변을 찬찬히 뜯어봤다.

“멀쩡하네.”

“예, 별다른 흔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개폐기가 없어졌어도 행여나 문을 열진 않았을까 조금 걱정되긴 했는데, 이렇게 멀쩡한 모습을 보게 되니 안심이 됐다.

“그럼 챙겨볼까나.”

초강산과 초염기는 물론.

다른 것들도 하나하나 확인하며 무한낭에 집어넣자, 갑자기 튀어나오는 삐익이.

-삐이익! 삐이익!

뭔가 흥분한 듯한 울음소리를 내고 이곳저곳을 맴돌더니 현철로 된 상자에 부리를 박고 내용물을 들이켰다.

“얌마, 독기 새어 나오지 않게 조심히 먹어.”

누가 영물 아니랄까 봐 상자째로 뚫어버리고 흡입하는 삐익이.

예전이라면 모를까.

이젠 이런 것쯤은 손쉽게 만들 수 있었기에 곱게 내줬는데, 아무래도 장하와 호현이가 옆에 있는 만큼 독기가 새지 않게끔 부탁했다.

그러자, 호현이가 충격받은 눈으로 삐익이를 쳐다봤다.

“현철을 저렇게 쉽게 단번에…… 아직 내겐 불가능한 일인데…….”

고작 주먹만 한 새한테 졌다는 게 어지간히도 충격적인지 호현이가 눈꺼풀을 파르르 떨더니 이내 고개를 떨구곤 물었다.

“형님. 스승님께 이야기 들었습니다. 곧 팽가로 떠나신다지요?”

“어, 만독연으로 가서 연구실부터 챙기고, 필요한 거 있으면 추가로 챙기고, 삼촌 뵌 뒤에 떠나려고.”

“떠나신다니요? 몸 상태도 안 좋으신데 어디 가시는 겁니까?”

떠난다고 몸부터 걱정해 주는 장하.

눈으로 쉬었다 가는 게 낫지 않냐며 묻는 듯했는데, 아까부터 약효가 제대로 도는지 통증이 씻은 듯이 사라졌기에 바로 출발해도 될 듯했다.

“3년 전에 팽 대협께서 봉문이 끝나자마자 찾아오라고 하셨거든. 물론, 며칠 늦는다고 뭐라 하실 분은 아니니까 천천히 가도 되지만, 아무래도 약속은 약속이니까.”

누가 감시하지 않아도 약속은 지켜야 하는 법.

더군다나 그것이 은원과 관련된 일이라면 더더욱이 지켜야겠다.

나는 당가의 소가주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뵐 수 있다면 남궁세가에 가서 뇌의님도 뵈려고.”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오래됐다.

그간 도움받은 게 많고, 약값도 잊지 않고 꼬박꼬박 보내주신다 하니 인사도 할 겸 찾아갈 생각이었다.

“너희랑 얼굴 마주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바로 가야겠네. 미안하다.”

“아닙니다. 다 저희가 약해 형님 곁에 있을 수 없어서 그런 것이잖습니까. 고작 형님의 애완조조차 이기지 못할 정도로 약한데, 어찌 그 험한 무림을 헤쳐 나가겠습니까. 번번이 형님의 발목만 잡을 게 분명합니다.”

“아니, 그렇게 자책할 필욘 없는데…….”

“비록, 이번엔 남지만, 다음엔 꼭 형님을 따라나서겠습니다. 고작 애완조 따위에게 지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겁니다.”

“저도요.”

“…….”

아무래도 하나만 듣고, 둘은 못 들은 듯한 호현이.

아주 호기롭게 삐익이를 넘어서겠다고 말하는 걸 보면 삐익이가 영물인 건 못 들었나 보다.

‘냉정하게 말해서 평생 가도 못 이길 텐데…….’

만년혈독신조가 밥으로 보이나.

솔직히 말해서 삐익이가 헛기침만 해도 장하와 호현이는 증발하듯 사라질 거다.

‘뭐, 그래도 저렇게까지 의지를 불태우는데 말해줄 필요는 없나.’

때로는 선의의 거짓말도 필요한 법.

자책하는 입과 달리, 두 눈에는 열정이 가득한 게 어떻게든 극복하려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그러니 현실이 냉정하기 짝이 없어도 초장부터 의지를 꺾고 싶진 않았다.

“고맙다. 애들아. 얼른 챙겨서 나가자.”

그렇기에 내가 선택한 건 그저 웃으며 독을 챙기는 일.

안타까운 진실은 잠시 숨기기로 결정했다.

“평생 수련해 봐라. 너희가 이기긴커녕, 그림자 하나 제대로 못 밟을 거다. 그러니 헛된 생각 말고 공자님께 폐나 끼치지 말아라.”

“…….”

일염이가 초 치기 전.

한 3초 정도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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