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33화
미소를 지은 당지천이 허물어지자, 재빨리 부축하는 천일절.
“콜록, 콜록.”
당지천이 뿌린 이름 모를 독 때문에 계속 기침이 남에도 대견스럽다는 듯 당지천을 끌어안고 있었다.
“고생했다.”
천일절이 당지천을 안은 채 있자, 천일염이 부리나케 달려와 당지천을 넘겨받았다.
그러자, 나지막이 천일염을 부르는 천일절.
“형님.”
물끄러미 천일염을 바라보다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천일염에게 물었다.
“분명 천잠사가 남아 있었을 텐데, 왜 안 주셨어요?”
사술 자체가 무림에서 특이한 부류에 속하긴 하나, 다른 무공에 비하면 흔한 편이었다.
당연하게도 천일절도 사술을 익혔고, 사술도 당지천에게 경험시켜 주려 했었다.
……천일염이 줬었다면 말이다.
“그건 내 몫이다.”
그러자, 잔잔하게 답하는 천일염.
잠시 천일절과 눈을 맞추며 지긋이 바라보자, 천일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러시다면야. 충분히 양보해 드릴 수 있죠.”
지금 당장 한두 개 빼먹었다고 죽을 일도 아니고, 실력도 천일염이 더 낫다.
나중에 천일염이 보충해 준다면야 별로 걱정하지 않아도 될 일이었다.
“콜록, 콜록. 아, 이거 괜히 들이마셨나.”
연신 기침을 해대는 천일절.
당지천에게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독을 들이켰는데, 생각보다 몸 상태가 안 좋아서 독이 잘 듣는 것 같자, 당기룡이 다가와 피독주를 건네줬다.
“여기.”
“감사합니다. 매형.”
피독주를 건네받은 천일절이 독을 빨아들였고,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당지천의 주변 독도 빨아들이자, 당기룡은 나지막이 감사를 전했다.
“고맙다. 지천이를 위해 검을 들어줘서.”
“…….”
당기룡의 감사에도 천일절이 묵묵히 제독에 집중하자, 당기룡이 굳은 얼굴로 다시금 감사를 전했다.
“비록, 내가 직접 겪어보지 않아 모든 걸 헤아릴 순 없겠으나, 검을 다시 쥐는 일이 결코 쉽지 않았음은 안다. 특히나 그런 일을 겪었다면…….”
“매형이 고마워하실 필요는 없어요.”
천일절이 무미건조한 눈으로 당기룡의 말을 잘랐다.
“누님 자식이잖아요.”
그러고는 피독주를 돌려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누님의 뒤를 따르겠다고 하잖아요. 그러니 힘들어도 해야죠.”
이어서 주변에 떨어진 무기들을 하나씩 정리하기 시작한 천일절은 담담히 말했다.
“그 날 누님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겁니다. 그러니 이건 단순히 보은에 불과합니다.”
─차라랑.
천일절의 손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끌려오는 사슬 낫.
마치 뱀이 기어가듯 이리저리 요동치며 딸려오는 사슬을 보던 당기룡은 근처에 널브러져 있는 연검을 주워 담으며 다시금 감사를 전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몰아붙인 건 네 의지잖느냐. 정말 고맙다.”
“…….”
당기룡이 재차 감사를 건네자, 잠시 침묵을 지킨 천일절은 낫을 든 채 덜덜 떨리는 오른팔을 보다가 답했다.
“언제나 협객은 고달프고 힘든 법이고, 외로운 길을 걷잖습니까. 아무리 강해도 부족하고, 아무리 많이 알아도 부족하니 조금이나마 도와줄 뿐입니다.”
그러고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누님이 보시면 좋아하시겠죠?”
덜덜 떨리는 몸만큼이나 떨리는 자신감 없는 천일절의 목소리.
평소의 모습과 달리, 유약해 보이는 애처로운 모습에 당기룡이 확언했다.
“좋아할 거다. 또, 대견스러워할 거고.”
그러자, 미소를 짓는 천일절.
“그럼 다행이네요.”
안도한 탓에 긴장의 끈이 풀어졌는지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 * *
“끄응…….”
문득, 정신이 들자마자 온몸에서 느껴지는 통증.
잠든 사이 누군가 망치로 구석구석 두들기고 간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들 정도로 한 곳도 빠짐없이 쑤시는 게 팔 하나 까닥하기 힘들 정도였다.
하나, 그렇기에 번쩍 드는 정신.
적당히 아프면 모를까, 온몸에서 엄습하는 통증은 잠을 쫓아내기엔 충분했다.
“여긴…… 내 방이네?”
눈을 뜨자 보이는 익숙한 풍경.
정말 오랜만에 보긴 했지만, 결코 잊을 수 없는 전각 안에 내 방이었다.
“일염이가 옮겨줬나 보네. 하긴 봉문도 풀었으니 할 일이 많은데 가주전에 누워 있긴 좀 그렇겠지.”
상황을 파악하고 가주전에 있던 일을 떠올리자, 문득 삼촌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무공을 자신하는 것도 좋지만, 결코 독을 잊지는 말라라. 어지간히도 큰 가르침을 주시네.”
남의 무공을 보면 손쉽게 읽을 수 있는 능력.
실제로 이런 능력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고, 더군다나 그게 내 외가의 혈통에 있을 줄은 몰랐기에 처음 보고 상대할 땐 기겁했어도 크나큰 기연을 얻은 기분이었다.
가히 온 무림을 뒤집어 버릴 만한 능력이고, 실제로 삼촌이 강호에 돌아다닐 땐 뒤집어졌었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만약, 별다른 말 없이 익히기만 했다면 나도 눈이 뒤집어졌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삼촌은 어디까지나 당가의 본질은 독이니 결코 잊지 말라는 조언까지 확실하게 남겼다.
단순히 아는 것만이 아닌.
뇌리에 처절히 박히게끔 말이다.
“정말 감사한 일이야.”
기연으로밖에 여길 수 없는 능력과 경험.
그리고 뼈에 각인된 조언과 앞으로 무림에서 쓸 암기까지.
하나같이 귀한 도움을 주러 빙궁에서 먼 길을 왔으니 어찌 감사하지 않겠는가.
이는 필히 나중에 삼촌께 갚아야 할 정도로 큰 은혜였다.
‘그러면 삼촌의 조언대로 가문을 떠나기 전에 연구실부터 들러야겠네. 근데 멀쩡하긴 하려나?’
3년 전, 천독림에 들어가기 전에 주요시설의 피해를 확인하느라 전각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중요하긴 했으나 우선순위는 아득히 멀었던 곳.
더군다나 다른 곳과 달리, 습격을 받았을지 안 받을지도 확실치 않은 곳이라 사람을 보내 확인하지도 않았었다.
자연히 전각 내 연구실이 어떻게 됐는지, 털렸는지 안 털렸는지조차 전혀 알 수 없었다.
‘털렸으면 가슴이 좀 아플 것 같긴 한데, 제발 안쪽만 털리지 않았으면 좋겠네.’
어차피 바깥에는 독성이 약하고 활용도가 높은 물건들만 놔뒀었다.
진짜배기는 비밀공간 안에 있는 물질들.
무림에 나와도 별 효용이 없을 바깥의 물건들과 달리, 크나큰 충격을 선사해 줄 만한 물질들이 든 비밀창고가 털렸다면 가슴이 좀 아픈 정도가 아니라, 속이 뒤틀릴 것 같았다.
그렇기에 노심초사하며 몸을 일으키던 그때.
─드륵.
갑자기 문이 열리며 훤칠한 미청년이 들어왔다.
“형님, 일어나셨습니까? 어떻게, 정신이 좀 드십니까?”
들어오자마자 걱정 가득한 목소리로 묻는 미청년.
굉장히 오랜만에 듣는 듯하면서도 또, 그렇게 오랜만은 아닌듯한 목소리에 놀라 뻣뻣한 고개를 올려 자세히 쳐다보니 낯설면서도 어딘가 익숙한 얼굴이 아니겠는가?
“설마 호현이냐?”
“예, 호현입니다.”
“정말로?”
“예, 정말로 호현입니다.”
맞다는 말에 요리조리 뜯어보자, 어딘가 닮긴(?)한 호현이.
솔직히 어렸을 때 그렇게 썩 잘생긴 편은 아니었기에 두 눈을 비비고 다시금 봤지만, 당호현이 맞는 것 같았다.
“……오랜만이네. 근데 뭘 먹고 이리 잘생겨졌냐? 혹시 내가 없던 사이 뭔 독이라도 잘못 주워 먹었니?”
18살의 나이에 걸맞게 훤칠하고 곱상한 외모를 가진 당호현.
어디 가서 좋은 시술(?)이라도 받고 왔는지 얘가 갑자기 꽃미남이 되어서 나타난 게 아닌가?
나도 어디 가서 꿇리지 않은 정도는 됐지만, 당호현은 뚜렷한 이목구비는 물론이고, 잡티 하나 없는 피부까지.
가히 옥면공자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변했다.
“칭찬 감사합니다. 이게 다 형님의 은혜 덕 아니겠습니까? 멋지고 잘생기신 형님을 닮고자 하는 마음으로 한결같이 노력했더니 어느샌가 형님을 닮아가나 봅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내 덕이라며 겸손 떠는 당호현.
봉문한 기간은 물론이고, 빙궁에 가 있던 시간까지 포함하면 3년을 더 넘게 얼굴조차 제대로 못 봤는데도, 진심으로 내 덕이라고 치켜세우는 모습은 큰 감동이었다.
‘긴 시간 동안 못 봐서 조금 거리감이 있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치켜세워 주다니 짜식…… 감동이다.’
물론, 진심도 진심이지만, 말재간도 상당한 게 상인의 면모도 돋보였다.
그래서 뿌듯한 미소를 짓고 호현이를 보자, 또 하나 변한 점을 발견했다.
“이제 보니 저번보다 많이 강해졌구나?”
“이것도 형님 덕입니다. 형님이 천독림에 계셨던 동안 스승님…… 연주님께서 신경을 많이 써주셨습니다.”
“만독연주님이 스승님이라고?”
“예, 형님 덕에 좋은 평가를 받은 듯합니다.”
“…….”
이번에도 내 덕이라는 호현이.
그러나 연이 있다고 해도 만독연주가 혜택을 줬으면 줬지, 제자로 받아들이진 않았을 거다.
즉, 백호현이 진짜로 만독연주의 마음에 들었다는 거고, 당연하게도 백호현이 그만큼의 재능을 가졌다는 이야기였다.
‘역시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호현이의 재능이 진짜배기구나.’
예전부터 꽤 탐나는 재능을 가졌던 당호현.
한때, 인성만 괜찮다면 진짜로 화학을 가르쳐야겠다고 생각했을 정도로 재능이 뛰어났다.
그래서 그런지 만독연주가 냉큼 데려간 듯했다.
‘장한 녀석. 좋은 스승을 만나는 것도 능력이지. 어느 정도 찝찝하긴 하지만, 팽가로 가야 하니 연주님께 배우는 건 참 잘된 일이야.’
화학만 익힌다면 모를까, 엄연히 용독술과 합쳐야 하는 상황.
팽구용과의 약속으로 인해 지금 당장 팽가로 떠나야 하는 내가 일일이 다 가르쳐줄 순 없으니 만독연주에게 용독술을 배우는 건 나쁘지 않았다.
하나, 그래도 내가 가르치려던 녀석이 기초교육이 다른 사람에게 받고 온다는 건 조금 불쾌한 감이 없지 않았다.
“혹시 잘못한 일입니까? 그럼 지금이라도 가서 의절하고 오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의절 선언을 해버리는 당호현.
본디 스승과 제자란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와 비슷해 별다른 이유도 없이 의절한다는 건 천벌받을 짓.
인간의 도리를 저버린 일이었다.
그래서 황당해하며 이유를 묻자, 당호현은 기상천외한 답변을 내놨다.
“뭐? 갑자기 의절을 왜?”
“빤히 보시기에 마음에 안 들어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니까 연주님을 좀 소중히 여겨줄래?”
이건 내가 뭐 신도 아니고.
말 한마디도 안 했는데, 표정 하나 잘못 지었다고 사제의 연을 끊어버리려는 건 좀 어이가 없다 못해 황당했다.
─똑, 똑.
마침 그때, 들려오는 문 두들기는 소리.
“공자님. 호위 분을 모셔왔습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이번에도 아까처럼 오랜만에 듣는.
그와 동시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그렇기에 냉큼 허락하자 들어오는 인영 둘.
하나는 평범하게 일염이였으며, 다른 하나는 당호현보다는 작지만 꽤 키가 커진 장하였다.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어, 괜찮아. 근육통이 좀 심하긴 한데…….”
일염이가 들어오자마자 내 상태를 살피길래, 상세히 알려주려고 하자, 대뜸 치고 들어오는 호현이.
“근육통이 있으셨습니까? 제가 지금이라도 의약당에 가서 근육통에 좋은 약을 받아오겠습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프신지 상세히 이야기해 주시면…….”
숨도 안 쉬고 자신의 충섬심을 드러내자, 장하가 덥석 당호현의 입을 막아버렸다.
“쉿, 공자님이 말씀하시잖아. 눈치 챙겨.”
“…….”
반항도 못 하고 장하에게 입이 막히자, 장하를 노려보는 당호현.
별로 내키지 않는 얼굴로 장하를 쳐다보다가 손을 쳐내며 말했다.
“형님이 아프시다는데, 약을 대령하지 못할망정 가만히 있으라고?”
“그게 아니라 좀 조용히하고 있으라고. 안 그래도 피곤하신데, 옆에서 조잘대고 있으면 피곤하지 않겠니?”
“형님께선 겨우 이런 걸로 피곤해하시지 않으신다. 오히려 너야말로 형님을 뵙고도 제대로 된 인사조차 하지 않는 건 심히 불경스러운 일이라 생각하지 않느냐?”
“그래서 너처럼 공자님께 민폐 끼치라고? 하이고, 고지식한 녀석 같으니라고. 그런 생각으로 무슨 연구를 하겠다는 거야?”
“고지식하긴, 그냥 지식이 많은 거겠지. 너처럼 무식한 녀석하고 비교당하는 것 자체가 내겐 실례다.”
“뭐야? 아니, 공자님 앞에서 눈치 있게 행동하라는 말이었는데, 왜 이야기가 그쪽으로 새?”
“화두를 돌린 건 네가 먼저다.”
장하와 티격태격하는 당호현.
무식한 놈이라며 뭐라 하고, 고지식하고 손재주 없는 놈이라고 뭐라 하면서도 질색하는 얼굴은 하지 않았기에 서로 형제같이 생각하며 애증의 관계인 걸로 보였다.
“이게 진짜 보자 보자 하니까…….”
“그만.”
둘이 다시금 입을 놀리려고 하자, 일염이가 무시무시한 기세를 뿌리며 단번에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공자님이 피곤하다고 하시잖느냐. 둘 다 내 허락 없이 입 열지 마라.”
“…….”
“…….”
교통정리를 마친 일염이가 대뜸 환단 하나 내밀어줬다.
“근육통에 좋은 약입니다. 의약당에서 제일 좋은 거라니 맘 놓고 드셔도 될 겁니다.”
“고마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일염이가 주는 약이다.
의심할 것 없이 약을 냉큼 집어삼켰다.
그러자, 온몸에 퍼지는 듯한 따뜻한 기운.
마치 화기를 머금은 것처럼 온몸을 찜질해주는 기분이었기에 문득, 삼촌과의 대련에서도 부족한 점이 떠올랐다.
‘잠깐, 삼촌과의 대련에서 온갖 무공을 상대해 보긴 했는데, 결국 삼촌도 기운 자체는 베끼지 못했어. 그러면 나중에 상대할 때 그것도 감안해야 하잖아?’
일전에 삼촌이 보여준 건 어디까지나 무공뿐.
처음에 봤다시피 화산파의 이십사수매화검법을 베낄 때, 매화가 아닌 빙공의 특성인 눈꽃이 피어올랐으니 다른 기운은 아직 겪어본 적이 없었다.
‘미리 대비할 수 있는 건 대비해야 좋은 법. 마침 비밀창고에 쓸 만한 게 있으니 상태부터 확인하러 가야겠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절로 일어서지는 몸.
“지금 일어나셔도 괜찮으시겠습니까?”
“끄윽…… 어, 중요한 게 떠올랐어. 그러니 연구실로 가자.”
약을 먹은 지 얼마 안 돼서 통증이 남은 상태였지만, 중요한 건 떠오른 순간에 처리하는 게 내 철칙이었기에 곧장 연구실로 발걸음을 뗐다.
“하윽……. 더럽게 아프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뇌리에 박힐 정도로 통증이 몰려오는.
끔찍하게 아픈 몸을 이끌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