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129화 (129/200)

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29화

-끼익.

지난 세월을 증명하듯 비명을 내며 열리는 문.

만년한철로 만들었음에도 주기적으로 관리를 안 해줘서 그런지 몰라도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열렸다.

“오랜만입니다. 공자님. 그사이 또 벽을 한 단계 넘으셨군요.”

문을 열고 나오자, 곧장 인사를 건네는 일염이.

마치 그간 봐왔던 건 빙산의 일각이었다는 듯.

한 번 더 강해졌음에도 닿을 수 없을 만큼 날카로운 기세가 느껴지자 절로 감탄이 나올 정도였다.

“너야말로 강해졌네.”

“전 원래 실력이었습니다. 한동안 수련에 손을 놓아 약해졌을 뿐이죠.”

“……그래, 너 잘났다.”

“아시면 됐습니다. 만독연 앞에 인원들이 모여 있다고 합니다. 바로 가시죠.”

더 지체할 필요 없다는 듯 일염이가 앞서 나가길래 자연스레 그 뒤를 따랐다.

그러자, 보이는 푸르른 독지의 모습.

“독지도 회복이 됐구나. 뭐, 수확 가능한 것만 죄다 따간 거였으니까 당연한 거긴 한가.”

“그렇긴 한데, 인원들이 공을 많이 들였습니다. 매일 같은 시간에 독지 전부를 확인하러 다닐 정도였으니 말입니다.”

“고생들 했네.”

가문이 봉문하긴 했어도, 나는 실상 수련밖에 한 게 없었다.

그런데 밖의 인원들은 가문의 세를 유지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을 걸 생각하니 당가가 어떻게 바뀌었을지 기대가 됐다.

그렇기에 발걸음을 재촉해 얼른 만독연으로 향하자, 만독연주를 비롯한 요직의 앉은 이들이 우리를 맞이했다.

“경축드립니다. 삼 공자님. 그사이 한 번 더 깨달음을 얻으시다니…… 역시 제가 사람 보는 안목이 틀리지 않았군요.”

“크, 축하한다. 이제 얼마 안 가서 우리도 쓸모없어지겠는데? 형님. 우리 쓸모없는 퇴물 될 날도 머지않았어.”

“표현이 참 천박하기 그지없으나 네 말대로 소가주의 발전이 정말 눈부시구나. 그간 고생이 참 많았구나.”

얼굴 보기 무섭게 축하 인사를 건네오는 원로님들과 만독연주.

다른 장로들도 와서 한마디씩 거들어줬기에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고 있자, 옆에서 백호단주가 나타나 보고했다.

“가주님. 가문 내 모든 인원이 밖에 대기 중입니다. 그리고 부탁하신 이 공자님의 교육도 마쳤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백호단주의 손짓에 따라 앞으로 나서는 당지혁.

이전에 항상 보이던 들끓는 열기는 어디 갔는지 아주 차분해 보였고, 감정을 다루는 법을 배웠는지 기도 자체가 안정되어 있었다.

“나오셨습니까, 아버지. 그리고 지천아. 또 한 번 깨달음을 얻었구나. 축하한다.”

“세상에…….”

예의 바르게 고개 숙여 인사하는 동시에 내 성취를 인정해 주는 당지혁.

백호단주가 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건지 3년 전 애 같던 당지혁은 어디 가고, 진중한 당지혁이 서 있었다.

“……당지혁.”

“예, 아버지.”

“나는 지천이를 소가주로 임명하고, 당가의 모든 비전을 알려줬다. 이에 대해 불만 없느냐?”

“예, 불만 없습니다.”

“왜?”

“더 뛰어난 사람이 가문을 이끄는 건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이 위기 상황이라면 더더욱 말이죠.”

“그러더냐…….”

여간 놀란 게 아닌지 굳은 얼굴로 덤덤히 읊조리는 당가주.

얼굴이 덜덜 떨리는 게 남들이 보기엔 화가 난 거처럼 보였지만, 3년간 같이하며 온갖 표정을 다 본 나는 알 수 있었다.

저게 격한 감동의 표시라는 걸 말이다.

“군유야.”

“예, 가주님.”

“정말 잘했다.”

“칭찬은 감사하나, 제가 한 게 아닙니다.”

“그럼?”

“이 공자님이 스스로 그리하신 겁니다.”

“……당지혁. 저 말이 진실이더냐?”

“예, 지천이와 주먹을 맞부딪혔을 때, 저는 처음으로 격의 차이를 느꼈습니다.”

당가주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묻자, 당지혁이 과거를 회상하듯 낯간지러운 말을 쏟아냈다.

“사실 처음엔 그저 동생보다 못하다는 사실에 분했습니다. 무려 5년이나 폐관에서 수련하고 나왔는데, 고작 일 합 겨뤘다고 나가떨어질 정도였기에 아예 지천이가 사술을 쓰진 않았는지 의심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잠시 말끝을 흐린 당지혁이 부끄럽다는 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열이 식고 나니 그제야 어떤 게 맞는 건지 보이더군요. 제가 어떤 잘못을 했고, 어떤 아집에 빠졌는지도 전부 말이죠. 그래서 백호단주님께 말씀드려 제 못된 성정을 고쳐달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 공자님께서 많이 노력하셨습니다.”

“…….”

너무나도 정상적인 말을 늘어놓는 당지혁.

아니, 한 대 맞는다고 진짜 치료가 되는 거였어?

겨우 한 대인데?

‘하긴, 혈기왕성할 나이는 지나긴 했지. 거기다. 폐관 후유증이 사라지니 제정신이 된 걸 거야.’

비록, 스물셋이 많은 나이는 아니지만, 상대적으로 이전보다는 혈기가 죽을 때가 맞긴 했다.

그러니 당지혁이 정신을 차리는 것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지금이라도 당가를 위해 최선을 다하려고 합니다.”

그를 증명하듯 끝까지 사람처럼 구는 당지혁.

그걸 보던 당가주는 너무나도 대견스러운지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이 되었지만, 다른 이들에게 내색하지 않기 위해 곧장 화두를 돌리며 문으로 향했다.

“잘 생각했다. 인원들이 기다릴 테니 가자.”

만독연의 문을 열고 나가자, 바글바글 모여 있는 사람들.

한낱 하인부터 아이들까지.

당가의 인원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모여서 만독연을 나서는 우리를 조용히 쳐다봤다.

-터벅, 터벅.

모두가 침묵하자, 울려 퍼지는 발소리.

많은 인원이 몰린 만큼 뭔가 나서서 연설이라도 할 법도 하건만, 당가주는 그런 허례허식은 필요 없다는 듯 그저 갈라지는 인파 속을 걸어 천천히 나아갔다.

“…….”

어디로 가는지도.

그렇다고 인원들 앞에서 멈추지도 않은 당가주가 인파를 완전히 관통해서 지나쳐 버리자, 하나둘 그 뒤에 따라붙었다.

그렇게 자연히 만들어진 행렬.

모두가 말하지 않아도 안다는 듯 조용히 우리의 뒤를 따랐고, 우리는 대문까지 조용히 이동했다.

-터벅, 터벅, 턱.

잘 걷던 당가주가 대문 앞에서 멈추자, 자연히 따라 멈추는 인원들.

오직 백호단원 몇 명만 눈치껏 대문 앞으로 나왔다.

그러자, 좌중을 돌아본 당가주.

“…….”

아까와 같이 일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사람들과 눈을 한 번씩 마주쳤다.

그러고는 나지막이 한마디 했다.

“모두 3년 전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누구나 다 알 거다. 그리고 지금 개문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도 다들 잘 알겠지.”

당가주와 눈을 마주친 인원들이 하나둘 고개를 끄덕이자, 당가주는 말을 이었다.

“나는 너희를. 그리고 당가를 믿는다. 그러니 이번에도 모두 합심해 이겨내도록 하자.”

심심한 연설을 마친 당가주가 대문을 돌아보더니 힘차게 선언했다.

“개문!”

당가주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움직이는 백호단원들.

빠른 손놀림으로 문에 달린 잠금장치를 모두 해제하고 슬며시 문을 밀어젖혔다.

-끼이익.

천독림의 문처럼 비명을 내며 천천히 열리는 대문.

굳게 닫혔던 당가의 대문이 다시금 열리는 기념비적인 순간이었기에 인원들이 감동에 찬 눈으로 대문 너머를 봤는데, 이상하게도 빛이 아니라 웬 거적때기가 눈에 들어오는 게 아니겠는가?

“개방?”

이제 와 보니 사람같이 생긴 형체.

개방도를 보는 듯한 모습에 누구랄 것도 없이 의문을 품자, 기다렸다는 듯이 걸어 들어오는 엄청난 덩치의 개방도.

-쿵, 쿵.

등 뒤에 그 큰 덩치만큼이나 큰 짐을 들고 있었기에 걸을 때마다 육중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누, 누구십니까?”

솔직히 누가 있더라도 개방도 일지는 상상도 못 했기에 다들 당황하는 눈치였지만, 당가주만큼은 묵묵히 앞으로 나서며 외인을 맞이할 뿐이었다.

“왔느냐.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다.”

“감사합니다.”

당가주가 반기자, 곧장 고개를 숙이는 개방도.

다들 언질도 없던 인사가 나타나서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쳐다봤는데, 나는 왠지 모르게 그 목소리를 들어본 느낌이었다.

‘분명 어디선가 들어본 거 같은데…….’

근엄한 듯한 하지만, 좀 잔망스러운 듯하면서도.

왠지 모르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들을 것 같은 목소리…… 잠깐, 설마?

“삼촌?”

“이야, 우리 조카님. 여윽시 바로 알아보네? 어? 근데 그사이에 또 엄청나게 강해졌는걸? 하기사, 우리 매형이 어떤 분이고, 우리 조카가 어떤 사람인데, 안 강해졌겠어.”

정체가 들통나자 곧장 머리에 쓴 거적때기를 넘기는 삼촌.

“오랜만이야. 우리 조카님. 내가 보고 싶어서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다는 줄 아니? 안 그래도…….”

“이야기는 나중에. 일단 자리부터 옮기자꾸나.”

“매형, 저는 여기도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으니 따라오거라.”

삼촌이 오자마자 숨 쉬듯 속사포로 말을 늘어놓으려 하자, 단칼에 잘라낸 당가주.

수다쟁이 처남이 부끄럽기라도 했는지 뭐라 인사를 나눌 새도 없이 일단 자리부터 떴고, 자연히 우리도 가주전으로 자리를 옮겼다.

* * *

당가가 봉문을 끝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서 있던 삼촌.

도대체 언제 봉문을 풀 줄 알고 왔는지는 모르지만,

부랴부랴 수리가 끝난 가주전 내의 응접실로 안내했다.

“삼촌, 어떻게 알고 오신 거예요? 그 거적때기는 뭐고요?”

“아, 이거? 요즘 혈교도가 싸돌아다녀서 말이야. 괜히 눈에 띄면 안 좋을 거 같아서 거지인 척했지. 그리고 오는 거야 뭐. 너도 알잖니. 네 할머니께서 문이 언제 열리는지 알려주신 거고.”

“아, 할머니…….”

사람의 미래를 보는 신녀이신데, 당가의 봉문이 언제 풀리는지야당연히 아시겠지.

“그건 이해가 됐어요. 근데 짐을 그렇게 한가득 들고 거지인 척이라니 그건 좀 아니지 않아요?”

“아이, 괜찮아. 내가 개방에도 연이 좀 있거든. 그래서 개방도로 위장해서 들어올 생각을 한 거야. 자 봐. 여기 매듭 보이지? 이게 개방에서는 신분을 나타내는 거거든. 원래 제일 낮은 애들이 백의개라고 해서 아무 표식 없는 걸 입고 있고, 장로급이 칠결 정도가 되거든? 그래서 내가 오결. 육결부터 간부급으로 취급하는데 그럼 너무 눈에 띄잖아. 그래서 눈에 안 띄게 매듭을 다섯 개만 했어. 그래서 그런지 건드리는 사람이 없더라고. 아, 물론, 그렇다고 아무도 안 건드린 건 아니야. 아까 말했다시피 요즘 혈교가 너무 많이 돌아다녀서 그런지 그놈의 산적이 왜 이리도 많은지. 녹림도도 아닌 것들이 너무 활개 치더라고. 이거이거 완전히…….”

“처남. 거기까지 하지.”

“에이, 매형. 얼마 안 말했잖아요. 제가 빙궁에서 오는 동안 조용히 있느라 얼마나 죽을 맛이었는 줄 아세요? 안 그래도 개방 애들이 이왕 이렇게 된 거 빙궁의 정보라도 빼려는지 말을 걸길래 신나서 이야기해 줬더니 어느샌가 제 곁으로 안 오더라고요. 아니, 원래 개방도들이 말이 좀 많은 녀석들이 아닌데, 비실비실한 녀석들만 뽑아놨는지 제가 정보를 술술 풀어대는데도 들을 생각도 안 하는 게 요즘 개방은 대체 교육을 어떻게 하는 건지…… 나중에 가서 형님께 언질 좀 드려야지. 아, 맞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형님이 어떤 분이시냐면 말이야…… 잠깐, 생각해 보니 그 이야기를 하려면 내가 안휘에 있었을 때 이야기부터 해야 네가 이해할 수 있을 거야. 그러니…….”

“일절아.”

“예, 형님.”

“닥쳐라.”

“옙.”

천일염의 일갈에 합죽이가 되는 삼촌.

당가주는 드디어 벗어났다는 듯 식은땀을 닦아냈고, 천일염은 골이 아픈지 삿갓을 매만졌다.

“……삼촌의 수다 실력은 여전하시네요. 그런데 삼촌은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매형이 말씀 안 하셨어?”

삼촌이 당가주를 쳐다보자 고개를 젓는 당가주.

나한테 알려주지는 않았어도 뭔가를 아는 눈치인지 얼굴을 굳혔다.

“차라리 모르는 게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게 더 도움이 될 테니까.”

“매형이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그게 맞겠죠. 근데 시간 없으니 지금부터 할게요.”

“알겠다.”

당가주가 고개를 끄덕이자, 곧장 만면에 미소를 지워 버리는 삼촌.

뭔가 중요한 이야기라도 하려는지 나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지천아, 내가 여기 왜 왔냐면…….”

말을 하다말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삼촌.

-스릉.

그와 동시에 갑자기 검을 빼 들고는 냅다 휘두르며 말했다.

“너랑 생사결을 하러 왔어.”

“예?!”

-챙!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했지만, 실상 인사에 가까운 공격이었기에 여유롭게 쳐냈다.

하지만 뒤이어 오는 검격.

인사는 아까 한 번 했으면 됐다는 듯 한기를 풀풀 뿌리며 목을 향해 날아왔다.

그것도…….

“큭…….”

“목을 노렸는데, 어깨만 베인 걸 보면 실력이 상당한데?”

날카롭기 짝에 없는.

진짜 죽이려는 생각이 가득한.

살초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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