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25화
당지혁이 얼굴이 벌게진 채 계속 나를 노려보는 상황.
누가 보더라도 심히 화가 난.
속된 말로 빡친 상태로 보였기에 보다 못한 원로원장이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약관이나 됐으면 화를 다스릴 줄도…… 아니, 하다못해 숨길 줄은 알아야 하는 법이건만, 대체 저건…… 에잉.”
보기만 해도 한숨이 나오는.
기대 이하의 당지혁의 모습에 원로원장이 차마 말을 다 잇지 못하고 연신 한숨을 쉬었다.
그러나 이미 눈이 뒤집힌 당지혁은 그런 원로원장은 안중에도 없는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버지. 지금 당가의 상황이 별로 좋지 못하다고 하셨으니 괜히 뜸 들일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그러니 바로 비무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상황을 알아보긴 개뿔.
신경도 안 쓴 주제에 상황을 운운하는 당지혁.
어떻게 비무하기만 하면 지금의 상황이 바뀔 거라 생각하는 건지.
아니면, 그냥 분노가 눈을 가려서 생각 없이 들이미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좋은 이야기였다.
‘어차피 누군가 딴지 걸어주길 원한 건 어디까지나 나중에 딴말 안 나오길 바라서였어. 당지혁이 지금처럼 사소한 거에 이성을 잃는 걸 보여주는 건 내게 득이 되면 됐지, 안 좋은 일은 아니야.’
당지독이 당가를 뒤집고 가버린 지금.
소가주 후보는 단둘뿐.
그런데 그중 한 명이 상황을 알아보기는커녕, 아득바득 자기 이득만 챙기려 든다면 어떻게 보일지는 말할 필요도 없지 않겠는가.
‘어떻게 입을 열 때마다 자기 평판을 까먹냐.’
잘해도 모자랄 판에 스스로 자기 자신을 끌어내리고 있으니.
이건 완전히 내가 활약하는 게 아니라 그냥 숨만 쉬었어도 소가주 자리를 차지했을 거다.
‘뭐, 그래도 고마운 건 고마운 거니까 교정 정도는 해줘야지.’
밍숭맹숭하게 소가주가 되는 걸 원치 않았던 만큼 이렇게 당지혁이 딴지를 걸어준 건 호재다.
그러니 성질 좀 죽일 수 있도록 교정 작업도 겸하기로 했다.
‘자고로 예로부터 매가 약이라고 했지. 문제가 있다면 훈육해 주면 그만 아니겠어?’
당지혁이 이제 막 벽을 뛰어넘은 만큼 자신감이 풀풀 넘치는 거 같으니 비무를 통해 현실을 알려주면 좀 공손해질 거란 생각으로 비무에 동의했다.
“저도 동의합니다. 공간도 충분하니 괜히 미루지 말고 지금 했으면 합니다.”
“이이익…….”
당지혁의 의견에 동의해 주자, 붉어지는 당지혁의 얼굴.
얘는 감정 기복이 얼마나 자유분방한 건지, 대체 왜 자기 의견에 동의해 주는데도 성을 내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역시 폐관 수련이 문젠가? 빠르게 강해지는 대가로 사회성과 미쳐 날뛰는 감정 기복을 얻은 거고?’
하긴, 사람을 1년도 아니고, 몇 년씩이나 한 방에.
그것도 드럽게 맛없는 벽곡단만 먹으면 정신병이 안 생기려야 안 생길 수가 없을 거 같긴 했다.
‘난 절대 폐관 같은 거 하지 말아야겠다.’
아무리 힘이 좋다고 한들, 정신과 맞바꾸고 싶진 않았기 머릿속에서 폐관이란 단어를 지워 버리고 있자, 당가주가 비무를 허락했다.
“좋다. 너희 의견이 일치한다면 받아들이마. 지체할 것 없이 바로 시작해라.”
당기룡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백호단이 재빠르게 나서서 동그랗게 인원들을 통제했다.
그렇게 자연히 한가운데 남겨진 우리 둘.
누구랄 것 없이 서로 거리부터 벌렸다.
“예전처럼 방심해서 질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번에야말로 묵사발을 내주마.”
흉흉한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당지혁.
폐관에서 나오면서 이래저래 지능이 떨어진 것처럼 보여도 이전에 얻은 교훈을 잊지는 않았는지 처음부터 전력을 다하려는 듯했다.
“그러시든가.”
그러나 이미 이성을 잃고 분개하는 걸 봤는데 무서울 리가 있겠는가.
오히려 그걸 보고는 암기는 안 써도 되겠단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이번엔 니티놀 암기나 추혼비독파접은 쓰지 말아야겠다.’
솔직히 말해서 니티놀 암기를 쓴다면 쉽게 끝낼 거다.
허나, 좋은 무기는 언젠가 무인을 잡아먹는 법.
너무 니티놀 암기에 의존한다면 좋지 않았으니 암기를 배제하고 싸워보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벽을 부수고서 나와 비슷한 수준의 사람과는 처음 싸워보는 거다.
많은 경험을 쌓기 위해선 싱겁게 끝낼 수만은 없었다.
‘이번 싸움은 박투로 간다.’
마침 당지혁의 특기 분야가 박투술이었다.
그러니 이번 비무에서 얻을 게 참 많을 거란 생각에 조용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준비.”
준비됐는지 물어볼 법도 하건만 곧장 준비부터 외치는 당가주.
어째 말 좀 길게 한다 싶더니 어느샌가 원상 복귀돼서 심심하게 굴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눈앞의 당지혁이 먼저다.’
다시금 당지혁에게 시선을 돌리자, 당장에라도 뛰쳐나올 것처럼 무게중심을 앞으로 쏟고 있는 당지혁.
숨길 생각도 없는지 노골적으로 거리부터 좁히려는 심산 같았다.
‘어지간히도 자신 있나 본데? 아니, 어차피 내 주무기가 독과 암기인 이상 속전속결로 끝내는 게 맞다고 생각하는 건가.’
지금 당지혁은 내가 아직 벽을 넘지 못한 거로 알고 있다.
자연히 당지혁이 생각하기엔 내가 당지혁을 이길 방법은 독과 암기를 활용하는 것뿐이다.
그러니 여지를 주지 않고 속전속결로 끝내려는 심산인 듯했다.
‘그런데 어쩌냐. 그거 구란데.’
하지만 안타깝게도.
당지혁에게는 정말 안타깝게도 내가 좀 강하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안다고 하지만, 공력에서나 기술에서나 전심전력으로 싸운다면 10할 이상 승리를 확신할 수 있을 정도.
물론, 그것도 독과 암기를 배제한 상황에서 말이다.
‘알면 아주 까무러칠걸?’
그렇기에 내가 벽을 부쉈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을 거니 첫인사를 좀 세게 하기로 했다.
“시작!”
“흡.”
시작 선언과 동시에 기합과 함께 거리를 좁히는 당지혁.
분노한 얼굴과 달리,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관찰하는 게 작은 암기 하나 절대 안 맞아주겠다는 듯한 모습이었다.
‘애초에 던질 생각도 없으니까 빨리 오기나 하셔.’
암기를 던질 의사를 표현하기 위해 양 소매를 걷어 올리고, 현무권의 기수식을 취했다.
그러자, 당지혁은 왠지 모르게 또 성을 내며 거리를 좁혔다.
“고작 그런 실력으로 나를 얕잡아보다니! 대체 무슨 자신감인지 모르겠지만 곱게는 안 끝낼 거다!”
얘는 분노 조절 장애인가.
뭐만 하면 분노를 쏟아내.
“받아라, 천번지복!”
지근거리에 다가오자, 곧장 주먹부터 지르고 보는 당지혁.
속전속결로 끝내려는 심산이 들어맞았는지 주먹에 기를 한가득 때려 박은 게 진짜 일 합에 승부를 보려는 것 같았다.
‘그럼 나도 강하게 가줘야지.’
공력이라면 동 실력대 누구에게도 꿇리지 않았다.
그러니 당지혁이 강하게 나왔으면 나도 강하게 가면 된다는 생각으로 오른손에 있는 힘껏 기를 때려 박았다.
그리고…….
“천번지복.”
당지혁과 똑같이 현무권법 4초식을 펼치며 주먹을 내질렀다.
“무, 무슨?”
기가 잔뜩 맺힌 주먹을 보고 당황하는 당지혁.
예상과는 현저히 다른 실력에 어지간히도 놀랐는지 심한 동요를 보였다.
허나, 그것도 잠시뿐.
이미 쏘아지듯 나간 주먹이 맞부딪히기 일보직전이었기에 다시금 얼굴을 굳히며 동요를 지웠다.
-쾅!
폭발하듯 맞부딪힌 주먹들.
서로 전혀 피할 생각 없는 힘과 힘의 대결을 한 만큼, 한순간 균형을 유지했다.
허나, 정말 한순간이었을 뿐.
금방 당지혁이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졌다.
“큭…….”
신음을 흘리며 공중에 붕 뜨는 당지혁의 몸.
확실히 주먹 자체에 실린 기술적인 힘은 당지혁이 약간 우세했을지 몰라도, 공력 차이에 밀려 날아가는 모습이었다.
‘분명 당지혁을 날려 버린 건 내 쪽인데 손이 장난 아니게 찌릿거리네. 엄청난 파괴력이야.’
충격에 덜덜 떨리는 오른손.
명백히 힘으로 찍어 눌렀음에도 피해가 고스란히 전해지는 걸 보면 잘 분개하는 것과 머리가 덜 돌아가는 거에 비해 무재 하나만큼은 진짜인 듯했다.
‘역시 당지혁을 박투술 상대로 쓰는 건 잘한 판단인 거 같아.’
계속해서 이런 공격을 해온다면 결코 얕잡아 볼 수 없는 상대.
하지만 그렇다고 너무 어렵지도 않은 게 딱 내가 원하던 적당한 수준의 상대라는 생각이 들어 뿌듯했다.
그렇기에 곧장 다음 수를 준비했는데…….
“어어? 왜 안 일어나?”
도무지 당지혁이 일어날 기미를 안 보였다.
“형님?”
재차 불러봄에도 미동도 않는 당지혁.
그 이후로도 몇 번이나 부름에도 도저히 일어날 기색이 없자, 주변에 있던 백호단원 한 명이 다가가 당지혁의 용태를 살폈다.
그러고는 이상하다는 듯 말했다.
“……기절하셨습니다.”
“예? 기절말입니까?”
“예, 왠지 모르지만 기절하셨습니다.”
아니, 분명 어디를 얻어맞은 것도 아니고, 주먹끼리 맞부딪혔을 뿐인데 기절한다는 게 말이 되는가?
아니, 그건 둘째치고 그럼 내 비무는?
내 수련은?
“허…….”
황망함에 허탈하게 서 있자, 수석원로가 다가와 칭찬을 건넸다.
“캬, 이 자비로운 거 봐. 나 같으면 삼도천에 고개를 들었다 넣었다 할 때까지 패 죽였을 텐데, 그냥 한 방에 끝내다니 역시 네가 진국이라니까.”
“그러게 내가 5년 전 독물학총회에서부터 그러지 않았더냐. 삼 공자가 아주 진국이라고.”
“에이, 형님이 처음 그러진 않았잖아.”
이어서 어느샌가 비무를 보던 만독연주가 다가와 감탄을 건넸다.
“공력이 많아지신 건 이전부터 알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일격에 쓰러뜨리실 줄은 몰랐는데, 현무권의 성취가 매우 높아지셨군요.”
“예, 좋은 스승님을 만난 터라 좋은 결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그거 참 다행입니다.”
슬며시 미소를 짓는 만독연주.
할아버지께 배우기 전까지 무공 지도를 담당해 줬던 만큼 내 성취가 올랐다는 점에 뿌듯해하는 듯했다.
“훌륭한 권이었다. 당지천 승.”
마지막으로 짧은 칭찬이나마 건넨 당가주가 심심한 선언으로 상황이 종료시켰다.
그러고는 주변의 인원들을 보며 물었다.
“당지혁 말고 추가로 이의 있는 인원 있나?”
당가주의 물음에 침묵에 잠긴 장내.
안 그래도 반대가 없었는데, 이미 당지혁이 평판을 깎아먹은 대로 깎아먹은 터라 제정신이 박힌 인간이라면 반대하고 싶어도 반대할 수 없었다.
자연히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고, 당가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선포했다.
“다시금 말하지만, 오늘부터 지천이를 소가주로 임명하는 바이다. 그리고 당지천.”
“예.”
“가주전에서 천독림에 데려가겠다던 이야기 기억하느냐.”
“기억합니다.”
“마침 만독연까지 왔으니 천독림에 들르려고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전 좋습니다.”
당지혁이 어이없게 나가 떨어졌기에 조금 멍한 상태였지만, 즉시 튀어나오는 대답.
다른 곳도 아니라 천독림이라면 언제라도 들어가길 고대하던 곳이었기에 대답이 척수반사로 튀어나온 거다.
“좋다. 그럼…….”
당가주는 천독림으로 향하기 전에 잠시 고개를 돌려 일격에 날아간 당지혁을 봤다.
“하아.”
그러고는 한숨 푹 쉬더니 백호단주에게 명령했다.
“일어나면 또 정신 못 차리고 발광할지 모르니 잘 통제해라.”
“알겠습니다.”
백호단주가 쓰러진 당지혁을 업어서 만독연 안으로 향하자, 다시금 한숨을 푹 쉬는 당가주.
미우나 고우나 자식이었기에 당지혁을 참 안쓰럽게 생각하는 듯했다.
“기다리느라 고생했다. 그럼 가자꾸나.”
그러나 얼마 안 가서 다시금 예의 그 표정으로 돌아온 당가주가 앞서서 만독연 안으로 들어갔고.
“예.”
나는 한편으로는 당지혁의 충격이 사라지지 않아 황당해하면서도.
천독림에 간다는 사실에 신난 발걸음으로 그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