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24화
“아버지…….”
당기룡이 한기를 풀풀 뿜어대며 등장하자 당황하는 당지혁.
단순히 당기룡만 나타난 것이라면 모를까.
항상 당가주와 함께하는 백호단을 비롯해, 마침 가주전에 들렀던 원로원장과 수석원로까지 가주와 같이 한기를 뿌리며 나타났기에 상당히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뭔지 모르겠지만 일단 뭔가 잘못된 것 같으니 당지혁은 대뜸 고개부터 숙였다.
허나, 이미 물은 엎질러질 대로 엎질러진 상황.
당지혁의 인사를 받는 당기룡은 이미 머리끝까지 화가 난 상태였다.
‘뻔뻔스럽기 짝에 없구나. 아무리 폐관에 있었다고 한들, 만독연으로 오는 길에 봤을 테고, 설령 보지 못했다고 한들 만독연만 봐도 알 수 있을 터인데 일을 벌여?’
피해가 가시는커녕, 아직 피해 규모조차 제대로 확인되지 않은 게 지금 당가의 상황.
한데, 직계라는 녀석이 폐관에서 나오자마자 가문에 피해를 알아보려고 하기는커녕, 인사조차 하러 오지 않았다.
가히 예의를 밥 말아 먹었다고 할 수 있는 상황.
그러니 당기룡을 비롯해 그 누구라도 화가 안 날래야 안 날 수가 없는 상황인 거다.
‘거기다. 뭐? 감히 지천이를 소가주로 임명한다는데 반대해?’
그리고 무엇보다 화를 부르는 점.
그건 바로 밑도 끝도 없이 감히 당지천에게 딴지를 걸었다는 거다.
당지천이 누구던가.
위기에 빠진 당가를 구원하기 위해 저 멀리 팽가에서 팽구용을 데려왔으며.
사천은 물론.
중원 전역에 명성이 자자하면서도, 아는 이들만 아는.
소수정예의 문파인 신화문을 등에 업고 당가를 구원했으며.
원로들에게 듣기로 3장로와 5장로를 패퇴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고, 공격이 일절 통하지 않던 당지독의 주머니도 빼앗고.
그것도 모자라 단신(?)으로 만년혈독신조를 길들이기까지한.
그야말로 신.
당가를 구원하기 위해 하늘이 내려준 인재였다.
그런데 불경스럽게 당지천의 행보에 방해가 되려 해?
‘아무리 자식 잘못은 부모 탓이라고 한들, 이건 도를 넘었다.’
다른 배에서 나왔다고 한들, 엄연히 둘 다 당기룡의 자식.
같은 자식인 만큼 당기룡은 공평하게 사랑해 주고 싶었다.
한데, 어렸을 때부터 신경 써줬던 당지혁은 이렇게 멍청한 행동을 보이고, 반대로 신경 써주지 못했던 당지천은 날아오르고 있지 않은가?
그렇기에 자연히 마음이 한쪽을 쏠릴 수밖에 없었다.
“당지혁. 지금 당가가 어떤 상황인 줄 아느냐?”
“…….”
당가의 상황을 묻자, 굳게 닫히는 당지혁의 입.
벽을 부쉈다는 고양감에 취해.
또, 자신을 빼놓고서 당지천을 소가주로 임명했다는 사실이 마음에 안 들어서 전후관계를 따지지 않고, 일단 반대부터 했다.
당연히 지금 상황을 알 리가 있겠는가.
“잘 모릅니다.”
“잘 모른다라…… 그런 주제에 내 의견에 반대해?”
당기룡이 노기를 여지없이 드러내자, 순식간에 얼어붙는 분위기.
원래 당기룡은 남들 앞에선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편이었는데, 이렇게 대놓고 노기를 내비치는 건 그야말로 폭발하기 일보 직전.
아니, 아예 폭발했다는 의미였으니 말이다.
“아, 아니, 그게 아니고…….”
그걸 당지혁도 모르지 않았기에 재빨리 해명하려 들었다.
하지만 채 변명도 하기 전에 당기룡이 다그치는 게 먼저였다.
“네 형인 당지독이 반란을 일으켜 당가에 성한 곳이 없고, 사람은 반으로 줄어들었다. 더 놀라운 건 뭔지 아느냐? 지천이가 없었으면 그대로 당지독에게 당가가 넘어갔을 거라는 점이다.”
“예에?”
당지혁에게는 무엇 하나 믿기 힘든 말의 연속.
당지독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부터 이해가 안 가는데, 그 피해로 사람이 반이나 준 것도, 당가가 넘어갈 뻔했다는 것도 전부 믿기 힘들었다.
근데 그중에서도 그걸 당지천이 막았다는 말이 제일 이해가 안 갔다.
“아니, 그런 상황에 어떻게 이 녀석이…….”
당지천이 제대로 두각을 드러내기 전 폐관에 들었던 당지혁이다.
당연히 당지혁의 머릿속 당지천은 그리 특출나지 않은 인재였기에 당가의 위기를 막았다는 건 전혀 말 같지도 않은 소리였다.
“믿기 힘들더냐? 하지만 그게 사실이다. 당가에 둘러진 결계를 부수기 위해 팽구용을 데려온 것도. 당지독을 몰아내기 위해 신화문의 도움을 얻어온 것도 모두 지천이의 업적이다.”
“그게 대체 무슨…….”
“한데, 지천이가 없었으면 목이 붙어 있지도 않았을 놈이 감히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알아보지도 않고 일부터 벌여!”
당기룡이 노기를 드러내는 것도 모자라 아예 소리까지 지르자, 당지혁은 아예 아연실색한 얼굴이 되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모습.
대체 당지천이 어떻게 당기룡을 구워삶았는지 모르겠지만, 생명의 위협을 느낀 당지혁이 반사적으로 사과부터 했다.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사과가 아니어서 그랬을까.
오히려 당기룡의 화는 더 솟구쳤고, 수석 원로가 옆에서 한마디 거들었다.
“옘병, 세 놈 모이면 하나는 병X이라던데, 그 병X이 저 녀석이었네.”
“영당아, 나도 너의 의견엔 동의하는 바이나, 가주님이 말하는 중이잖느냐. 체통을 지키거라.”
“아니, 형님. 첫째 놈은 인성이 X박긴 했어도 대가리는 굴러갔는데 저놈은 그냥 상X신이야. 폐관동에서 뭔가 잘못 처먹었나 봐.”
“어허, 체통을 지키래도.”
원로원장도 일단 말리기는 했으나 매우 언짢은 눈으로 당지혁을 보는 상황.
이미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모습에 당지혁으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폐관에서 나오면 형님하고도 비벼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문이 뒤집힐 줄 알았는데 이게 대체…….’
칭찬 세례가 쏟아지며 가문이 뒤집히기는커녕.
이미 가문은 뒤집혀 있질 않나.
당기룡과 원로들은 자신을 대역죄인을 바라보듯 보는 게 몇 번이나 이해하려 노력해 봐도 이해가 안 됐다.
“후우…… 정녕 내가 너를 파문해야 정신을 차리겠느냐.”
한술 더 떠서 파문을 입에 올리는 당기룡.
폐쇄성이 짙은 당가에서 파문은 전례 없는 일로 어디 가서 당가의 비밀을 풀어버리기라도 한다면 피해가 클 게 분명했기에 실제로 된 적이 없고, 사실상 협박에 불과했다.
허나…….
‘불경하기 짝에 없는 녀석은 지천이가 꾸려 나갈 당가에 필요 없다.’
이번만큼은 10할 진심인 당기룡.
안 그래도 당가가 위기를 맞은 상황이다.
내부의 위험 요소를 계속 들고 가느니 도려내는 게 맞는 상황인 만큼 당지혁이 잘못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당가에서 내보낼 생각도 있었다.
“예? 파문이라뇨? 안됩니다!”
파문이 단순한 협박인 걸 알아도 이번만큼은 결이 다른 걸 느꼈는지 곧장 고개부터 숙이는 당지혁.
대체 일이 왜 이렇게까지 됐나 싶어도 일단 살아야 했기에 고개를 숙이며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던 그때.
“너무 그러지들 마시죠.”
갑자기 당지천이 당기룡과 당지혁 사이에 끼어들었다.
“분명 형님께서 가문의 사정을 알아보려 하지 않은 것은 잘못했으나, 저도 폐관에 들었다가 일방적으로 소가주 자리가 결정됐다면 화가 날 겁니다. 그러니 조금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죠.”
“…….”
당지혁과 날을 세웠으면 날을 세웠지, 결코 좋은 사이는 아니었던 둘.
당연히 당지천이 당지혁의 편을 들 거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았는데, 나서서 편을 들어주자, 당지혁은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당지천을 쳐다봤다.
‘대체 무슨 의도로?’
편 들어줘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는 상황.
더군다나 당가주에게 ‘저도 그랬을지 모르니 이해해 달라’라는 설득은 과거부터 금기시되는.
당기룡의 성깔만 돋우는 영양가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그런 소리를 태연히 내뱉고 있었으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건 그것뿐이 아니었다.
“크흠, 네 뜻이 그렇다면 그러도록 하마.”
뭘 잘못 먹었는지 당지천의 말에 금방 화를 가라앉히는 당기룡.
무슨 술수를 부린 건지 비이성적인 단어에 휩쓸리듯 설득되는 게 아닌가?
“하지만 이 일에 대해서는 분명히 해야 한다. 네가 일방적으로 소가주 자리를 받는 게 공평하지 않다고 하긴 했으나, 이는 엄연히 공로에 따른 일. 반대로 네가 소가주를 맡지 않는다면 그것이야말로 공평하지 않은 일이다.”
심지어 그것도 모자라서 설명을 듬뿍 곁들여서 점잖게 설득하려 들기까지 했다.
“그것도 맞는 말씀입니다. 허나, 굳이 형님이 아니더라도 제가 어떤 일을 했는지는 직접 보지 못한 이들이 많을 겁니다. 지금 분위기에 휩쓸린 탓에 내심 반대 의견을 내고 싶어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인원이 있을 수도 있고요.”
당지천이 활약하는 모습을 실제로 보지 못한 인원들이 꽤 존재하긴 했다.
당지천이 활동한 건 만독연과 원로원.
그리고 가주전이었는데, 다른 곳에 있던 이들은 당지천이 싸우는 걸 직접 보지 못했었다.
허나, 단순히 전해 들은 거로도 이미 차고 넘치는 상황.
조금의 의심을 품었던 이들도 만독연에 팽구용이 자리 잡고 드러누워 있는 걸 보면 사실임을 알 수 있었기에 누구도 반대표를 던지지 않은 거다.
“그러니 뒷말 나오기 전에 인원들도 납득시킬 겸, 소가주 자리를 형님과 비무를 통해 정하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공평하게 하기 위해서 비무를 하겠다는 당지천.
그 이야기를 듣던 이들은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데 대체 왜 비무를 하려 하는가에 대해서 토론을 했다.
그러나 끝내 답을 찾진 못했지만, 당지혁만큼은 확실히 이길 수가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
“흐음……. 네 뜻이 정 그러하다면 좋다.”
이번에도 당지천이 말하자, 귀신같이 승낙하는 당기룡.
언짢음이 사라지지 않은 얼굴로 당지혁을 보고 말했다.
“네놈이 큰 결례를 저질렀지만, 지천이가 넓은 마음으로 너그러이 이해한다고 하니 특별히 봐주도록 하마. 또한, 비무도 허가하마.”
비무란 말을 언급함에도 언짢은 기색만 있을 뿐, 담담하게 그지없는 당기룡.
지금 느껴지는 기운으로는 당지천과 당지혁의 실력 차이가 명확하게 보일 텐데도, 전혀 상관없다는 듯 말하는 게 당지혁은 뭔가 뒤가 구림을 감지했다.
‘……뭔가 구리다.’
너무나도 자신에게 유리하게 흘러가는 상황.
미움을 산 만큼 당지천에게 편의를 봐줄 법도 하건만, 별다른 사족을 붙이지 않는 걸 보면 분명 뭔가 자신이 모르는 게 더 있고, 유리하기만 한 상황이 아님을 느꼈다.
그러나 이미 발언권을 잃은 상황.
뭔가를 알아차렸다고 한들, 할 수 있는 게 없었기에 당지혁은 그저 의기소침하게 입을 다물어야 했다.
하지만 의기소침했던 것도 잠시.
자신이 대체 왜 이런 푸대접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해 화가 난 당지혁은 속으로 욕을 지껄였다.
‘니X럴, 내가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해?’
자신은 이런 취급을 받으려고 그 폐관에서 5년이나 버틴 게 아니었다.
그렇기에 작금의 상황에 분노가 차올랐고, 자연히 그 분노는 당지천을 향하게 됐다.
‘저번에는 내가 방심해서 졌을 뿐인데, 내가 만만해 보인다 이거지? 오늘 전각에는 기어가게 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