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22화
숱한 전투 때문에 성한 곳이 없는 당가의 장원.
격한 싸움이 있었다는 걸 증명하듯 굳어버린 피와 못 쓰게 된 독이 이곳저곳에 흩뿌려져 있었고, 이리저리 맞부딪혀 깨져 버린 암기의 파편들이 사방에 박혀 있었다.
또한, 아예 기둥이 부서져,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위태로이 서 있는 건물들도 많았다.
그렇기에 혼자 거닐기엔 매우 으스스하고 무서운 곳.
허나, 그런 배경을 봄에도 무서운 감정보다는 한숨이 먼저 나왔다.
“하아, 맥락 없이 소가주가 되라니 이게 뭐야.”
3일 밤낮을 싸우고, 3일을 넘게 드러누운 당기룡.
크나큰 외상이나 내상을 입지는 않았지만, 고된 싸움 탓에 백호단주가 일어날 때까지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기에 다들 기력이 크게 쇠했을 거는 예상은 했다.
그런데 일어나자마자 대뜸 칭찬 한마디 하더니 소가주를 하라는 거 아닌가?
“힘든 싸움을 겪고 탈진한 만큼 멀쩡하지 않을 건 예상했지만, 설마하니 머리를 다쳤을 줄이야.”
평소의 당기룡으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
당연히 논리와 이성이 배제된 듯한 합리적이지 못한 결정에 의문을 표했다.
그러자, 당기룡은 ‘그렇게 됐다’라며 일축해 버리는 게 아닌가?
‘아무리 설명해 주는 취미가 없는 사람이어도 이건 아니지.’
이는 필시 당기룡이 머리를 다치지 않고선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다.
‘뭐, 설명해 주기도 전에 자리를 떠나긴 했지만 말이야.’
당기룡이 일어난 걸 보고 다가온 일염이.
어느새 와서 할머니의 전언이 담긴 통을 당기룡에게 건네줬고, 자연히 그걸 받아서 열어본 당기룡의 얼굴이 미미하지만, 확실하게 약간 핼쑥해졌다.
-천독림에는 근 시일 내에 데려가 주마.
그러고는 뭔 항의를 하기도 전에 말 한마디를 남기고 사라져 버렸다.
‘도대체 뭘 봤길래 얼굴이 핼쑥해졌을 정도지? 안 좋은 사건인가?’
언제나 무뚝뚝한 얼굴로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당기룡.
그런 당기룡이 전언을 읽고 약간이지만 핼쑥한 얼굴을 할 정도면 꽤 중대한 사안일 거다.
‘그래도 인원들에게 알리지 않은 걸 보면 급한 문제까진 아닌가.’
만약 한시가 급한 일이었다면 전 인원을 소집했을 터.
일염이와 뭔가를 의논한다는 것 자체가 아직은 여유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니 뭔가 결론이 나오기 전까지 나는 내 할 일만 하면 될 거다.
‘그러면 일단 수복에 집중해야겠다.’
가주전에서 보고받는 것도 좋지만, 결국 피해 규모를 눈으로 확인해야 했기에 한번 직접 둘러보기로 마음먹고 가주전을 나섰다.
그래서 직접 만독연으로 향하는 중이었는데 웬걸.
만독연같이 피해 없이 멀쩡한 곳도 있긴 했지만, 대다수는 가주전처럼 무너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뭔, 성한 곳이 하나도 없냐. 이거 다 복구하려면 돈이 얼마야.”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위태하게 세워져 있는 기둥.
슬며시 손으로 밀어보자, 그대로 밀리는 게 제 역할을 못 하는 것처럼 보였다.
“에헤이, 이건 아예 새로 지어야겠는데? 쓰읍…….”
돈 나갈 생각 하니 절로 아찔해지는 머리.
당가가 멀쩡할 땐 어디까지나 내 세력만.
오직 만독연의 연구원들만 부양하면 됐기에 어떻게든 몸을 비틀어서 돈을 벌어왔었다.
근데, 지금은 가문의 사정을 생각해야 했기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돈, 돈, 돈이 필요해.”
당가에 여유 자금이 없지는 않다.
허나, 가문이 전복될 뻔한 위기.
다른 문파였으면 곧장 봉문에 들었을 만한 위기였고, 실제로 당가도 앞으로는 대외 활동을 전부 중단해야 할 만큼 큰 위기였다.
당연히 복구하는 데 천금이 들게 될 건 말할 것도 없었고, 곳간이 비는 건 순식간이란 건 누구라도 알 수 있을 거다.
“돈이라면 저희 문에서 많이 뜯으셨는데 모자라십니까?”
돈이 필요하다고 혼잣말을 지껄이자, 어느샌가 모습을 드러내는 부문주.
언짢은 기색을 감추지 않으려는 건지 오른쪽 눈가가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심지어 상의도 없이 그렇게 많은 사업장을 떠넘겨서 이쪽은 미칠 지경인데요?”
“크흠. 그건 좀 죄송합니다.”
“조오오옴? 조오오오오옴?”
“아이 참, 저희 사이에 그렇게 너무 계산적으로 대하지 마시죠.”
“계산적으로 대하고 싶진 않은데, 다시금 말하지만 상의 정도는 해주실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솔직히 저야 뭐, 시키고 나면 그만이지만, 밑에 애들은 가히 날벼락이 떨어진 거라 지금도 발바닥에 불 붙은 채로 움직이고 있을 겁니다.”
“큼큼…….”
“아아, 불쌍한 우리 문도들. 하필이면 악덕 고용주를 만나서 이렇게 고생을 하다니…….”
주인에게 버려진 개처럼 애처로운 눈으로 올려다보는 부문주.
실상 그게 최선임을 알았음에도 건수를 하나 잡은 건지 아주 그냥 사골을 우려먹을 기세였다.
“필요한 일이었잖습니까.”
위기에 직면해 사업장조차 제대로 유지하지 못하는 당가.
당가가 세가 줄어든 걸 아무도 모른다면 모를까.
당지독이 멀쩡히 살아서 돌아간 판에 소식이 안 퍼지길 바라는 건 요행에 가까운 일이었고, 자연히 당가의 사업장은 압박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몸집을 줄여야만 했는데, 괜히 적대 세력에 넘겨주는 것보단 우호세력인 신화문에 가능한 많이 넘겨주는 게 당가에게 이득이었기에 내가 신화문을 언급한 거다.
그런데 실상 신화문의 입장에선 쓸모없는 짐만 넘겨받은 꼴이었으니 화를 낼 만도 했다.
“뭐, 그건 너그러이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당가에 부족한 게 돈뿐만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놀리기도 잠시.
부문주는 당가의 상황이 심히 안 좋은 걸 알기에 안쓰러운 눈으로 나를 쳐다봤다.
‘돈도 돈이지만 사람이 줄어든 게 뼈아프다.’
돈이 없으면 벌면 되고, 독이 없으면 만들면 된다.
하지만 세력의 근간인 사람.
인재들을 잃어버린 것이야말로 당가의 진짜 큰 피해였다.
‘한순간에 전력의 3분지 1이 배신해서 결국 전체의 반 이상을 잃게 됐어. 그나마 만독연이 멀쩡해서 연구 쪽은 지장이 없겠지만, 독학관이 궤멸한 게 너무 크다.’
당가의 인재를 책임지고 육성하는 독학관.
이곳은 당소예의 세가 굉장히 강했기에 아이들의 피해가 없었지만, 역설적이게도 당소예의 세가 강했기에 가르침을 내려줄 인원들이 전부 증발하듯 사라졌다.
즉, 교육을 담당할 인재가 아예 없다는 소리.
효율적인 가르침은 꿈도 꾸기 힘든 상황이라는 거였다.
‘별수 없이 도제식으로 가야 하나.’
본디 문파라면 어렸을 때부터 사제의 연을 맺는 건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니었지만, 당가에서는 조금 늦게 맺는 편이었다.
왜냐면 독을 다루기 위한 지식은 심히 방대하고 매번 실습이 필요했기에 일개 개인이 가르치는 것보다 한꺼번에 가르치는 것이 효율이 좋아서 독학관에서 먼저 용독술을 배우고 왔기 때문이다.
한데, 그게 운영이 불가능했으니 어쩌겠는가.
그런 식으로라도 해결을 보는 수밖에.
“쯧.”
순망치한인가 치망순역지였던가.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으면 된다고는 하지만, 효율이 나쁘고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혀를 차자 부문주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너무 상심하지 마시죠. 그래도 소가주가 되는 계기가 됐잖습니까.”
“……소가주가 되면 뭐 합니까. 가문이 주저앉아 버렸는데.”
내가 소가주가 되려고 했던 것.
그건 바로 당가를 천하제일의 세력으로 만들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그런데 이런 꼴.
이런 방식으로 됐으니 기쁘겠는가.
“사실 소가주가 되는 것도 이렇게 막 화아악 하고 후우욱 해서 극적으로 되길 바랐는데, 이래 밑도 끝도 없이 김새게 돼서 별로 마음에 들지 않네요.”
왠지 너무 슴슴한 느낌.
이건 뭐 쾌감도 없고, 감동도 없는 소가주 임명식에 차라리 대뜸 누군가가 나타나서 딴지라도 걸어주길 바랐다.
허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어쩌겠습니까. 이게 다 공자님이 유능해서 생긴 일인데. 그렇게 활약하고도 누군가가 딴지 걸기를 바라는 게 이상한 거 아닙니까?”
“맞죠…….”
위기에 빠진 당가.
그곳을 구원하기 위해 천괴도 대협을 모셔오고, 신화문의 협조를 구해왔다.
이것만으로도 가히 어마어마한 전공을 세운 것과 같은데, 모두의 눈에 참으로 인상 깊은 장면을 새겨줬으니 그 누가 반대를 하겠는가.
‘하아, 당지독의 말은 왜 들려 가지고 말이야.’
가주전에 돌입했을 때 문득 들려오던 당지독의 이상한 언어.
분명 3장로를 상대할 때 한번 들었던 해석 불가능한 언어였는데, 웬걸 갑자기 머릿속에서 해석이 되는 게 아닌가?
그래서 반사적으로 당지독의 공격을 피하고 암기를 던졌다.
그런데…….
‘거기다, 무슨 약을 쳤길래 내 공격은 제대로 들어가냐?’
분명 천일염의 공격조차 무효로 되돌리던 당지독.
그런 당지독이 내 암기에 스쳤을 땐, 이상하게도 무효화를 못 해서 주머니를 떨구게 됐다.
결국 이유는 불문하고 어쨌든 간에 적 우두머리의 주머니를 강탈한 상황.
아주 혁혁한 공로를 세운 만큼 그 누구도 함부로 딴지를 걸 수가 없었을 거다.
“하아, 그래도 한 명쯤은 반대할 법도 한데…….”
안타까움의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부문주가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원하시면 제가 좀 반대해 드릴까요?”
“됐습니다. 장난으로라도 그러시면 사달 납니다.”
“에이, 재미없게…… 뭐, 그래도 가면 적어도 한 명쯤 반대하지 않을까요? 원래 어딜 가나 근엄진지한 사람들 한 명씩 있잖아요. 예를 들면 ‘소인은 두 눈으로 보기 전까지 인정할 수 없소이다’같이 말하는 사람이라든가요.”
“글쎄요.”
딴 곳이라면 몰라도 만독연이다.
남의 집에서도 없었는데, 제집 앞에서 있을 리가.
“일단 가보면 알지 않겠어요?”
* * *
부문주와 농담 따먹기를 하며 도착한 만독연.
원로원같이 건물이 멀쩡하면 모를까.
대부분 아까 본 건물처럼 수리하지 않으면 사용하기 어려웠기에 대다수 인원이 몰려 있던 만큼 지체 않고 소가주가 됐음을 알렸다.
“……해서 제가 오늘부터 소가주로 임명됐습니다. 혹시 이의 있으신 분?”
“…….”
이의 있는 사람을 구함에도 잠잠한 만독연 내부.
‘끙, 역시나.’
역시 텃밭이라 그런지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 하나 없었고, 왠지 모르게 연구원들이 날카로운 눈으로 그런 사람이 없나 찾는 듯한 눈이었다.
“흑룡대 3조장님? 자풍대 부대주님? 집법원 1부장님? 이의 없으십니까?”
“없습니다.”
“진짜 없어요?”
“예, 진짜 없습니다.”
“지이이이인짜 없어요?”
“지이이이이인짜 없습니다. 소가주님.”
참으로 끈질기게 딴지를(?) 구해봤지만, 결국 나오지 않는 반대표.
내가 오기 전에 모두 짜기라도 한 건지, 사람 말을 너무 잘 들었다.
그래서 실망스러웠다.
“그렇군요…… 그럼 어쩔 수 없이 제가 소가주 해야죠.”
특유의 화아아악 하고 후우우욱 한 행사를 기대했지만, 역시나 슴슴하게 끝나 버린 만독연.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기에 시무룩하게 체념하고 받아들이려던 바로 그때.
“이의 있소!”
만독연 입구에서 어디선가 들어본 적 있던 우렁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의 있다고?”
“뭐야? 대체 누가?”
난데없이 날아든 반대표에 모두의 시선이 만독연의 정문으로 쏠렸다.
그리고 그곳에서 천천히 들어오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는 다름 아닌…….
“이 공자?!”
5년 넘게 폐관에 들었던 당지혁이었다.
“감히 내가 폐관에 들었다고 소가주 자리를 꿰차려고 들어! 승부다!”
그것도 심히 혈기왕성해 보이는.
잘 무르익은(?) 당지혁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