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21화
자색빛 하늘.
자색빛 호수.
그리고 자색빛 나무들까지.
온 세상이 자색인 세상 속에 홀로 누워 있던 당기룡은 서서히 일어나더니 이내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여긴…….”
특이하게 생긴 독접(독나비)이 나풀나풀 날아다니며 독가루를 뿌리자 우수수 떨어지는 독충들.
독접을 피한 독충이 없진 않았는지 머리가 두 개 달린 독충이 독목(독나무)에 달라붙어 수액을 빨았다.
그리고 그런 독충을 매끈하기 짝에 없는 독사가 날아오르듯 물어 잡아먹었다.
특별할 것 없는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는 자연의 먹이사슬.
허나, 조금 특별한 점이 하나 있다면 이곳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독이 존재했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일반적인 극독과는 궤를 달리하는 진짜배기 독들이 말이다.
그렇기에 당기룡은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있었다.
“천독림(天毒林)?”
이곳은 다름 아닌 만독연 아래 잠든 당가의 금지.
천하의 모든 독물이 모인 천독림이었다.
“아니, 조금 다른 곳인가.”
천독림과 매우 유사하게.
아니, 아예 똑같게 생기긴 했다.
그러나 엄연히 다른 점이 존재했으니 그건 바로 사방이 자색이라는 점이었다.
“혈반사접이 청색이지 자색이진 않고, 또한, 제거했을 터인 산란관이 있으니 다른 곳이군.”
혈반사접(血班死蝶).
정확한 시일은 나와 있지 않지만, 과거 당가의 선인들이 크나큰 출혈을 감수하고 잡아 온 독접.
일반적인 독접과는 궤를 달리하는 무시무시한 독성에 번식력도 굉장히 뛰어나 평소엔 산란관을 제거한 채로 보관했는데, 지금 이렇게 멀쩡히 돌아다니는 걸 보면 답이 확실히 나왔다.
바로 꿈이라는 답이 말이다.
“꿈인가.”
꿈임을 인지하자 태연하게 정면을 보는 당기룡.
사실 조금 같은 풍경을 보는 거로 꿈이라고 단언하는 건 이상하게 생각될 수도 있을 거다.
허나, 당가의 가주는 대대로 천독림에 대한 꿈을 꾸고, 미리 알고 있기에 당기룡은 태연히 받아들인 거다.
왜냐면…….
“궁래심접호(窮來心接湖) 바로 앞에 있구나.”
눈앞의 보랏빛 호수.
유일하게 현실의 천독림과 같은 색을 한 궁래심접호라 불리는 호수가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를 누구보다 당기룡이 잘 알기에.
“죽을 때가 된 건가.”
씁쓸한 미소를 짓는 당기룡.
지금 눈앞의 궁래심접호는 당가의 역대 가주들이 묻히는 곳.
끝이 되었을 때, 후대를 위해 스스로 몸을 담그는 선조들의 무덤이자, 그와 동시에 자신의 무덤이 될 곳이다.
그런데 그런 궁래심접호가 꿈에 나타났다는 것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거다.
“하아…….”
궁래심접호를 보던 당기룡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천이에게 발전된 당가는커녕, 멀쩡한 당가조차 물려주지 못하는구나.”
죽을 때가 되었음을 알게 됐음에도 의연하기 짝에 없는 당기룡.
그저 자신이 죽는 것보다는 만신창이가 된 당가를.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확인조차 못 한 당가를 얼마 안 가서 당지천에게 바로 넘겨야 한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느낄 뿐이었다.
“그렇다면 조금이라도 일찍 가서 수습해야겠지.”
씁쓸한 미소를 지은 당기룡이 시간이 없음을 깨닫고, 꿈에서 깨기 위해 호수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갑자기 호수가 진동했다.
-쿠구구구궁.
굉음을 내며 물결치는 호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이리저리 넘칠 듯 좌우로 움직이며 주변의 땅을 적시다 못해 녹여 버렸다.
한눈에 봐도 굉장히 위험한 상황.
하지만 의연하기 짝에 없는 얼굴을 한 당기룡은 꿈에서 빨리 깰 요량으로 호수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탁.
땅이라도 디딘 것처럼 수면 위에서 막히는 발걸음.
“……?”
당황한 당기룡이 마저 한 발을 옮겼음에도 자색 호수에 빠지긴커녕, 등평도수를 하는 것처럼 요동치는 호수 위에 떠 있었다.
“이건 대체?”
그간 당기룡이 전해 들은 꿈에 관한 이야기는 언제나 같고, 간단한 내용이었다.
어느 날, 징조도 없이 사방이 자색인 천독림에 들어와 궁래심접호 앞에서 눈을 뜬다.
그리고 궁래심접호에 몸을 담그면 가주로서의 직무를 다할 수 있게 된다.
라는 간단한 내용 말이다.
헌데, 자신은 궁래심접호에 몸을 담그긴커녕, 이렇게 거부당하고 있었으니 심히 당황한 상태였다.
-쿠오오오!
그런데 그때.
발밑에서 들려오는 포효 소리.
“현무?”
당황한 당기룡이 밑을 내려다보자, 웬 빛나는 구슬을 물고 있는 뱀의 머리와 마주쳤고, 이내 거북이 등딱지에 당기룡을 태운 채 호수에서 일어났다.
-쿠우우웅.
“허어…….”
보자마자 감탄이 절로 나오는 크기.
고작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만으로 진동이 울려 퍼질 정도로 거체를 가졌고, 또, 기세를 드러내자, 천독림의 모든 독물이 스스로 몸을 숨기게 할 만큼 강한 기운을 뿌렸다.
“현무가 있었구나.”
비록, 꿈이라고 해도 역대 가주들이 잠든 무덤.
그런데 그런 곳에서 현무가 한 마리 솟구쳐 올랐으니 어찌 놀라지 않겠는가.
심지어 평범한 현무가 아니었다.
“여의주를 문 현무라니 참으로 독특하구나.”
눈을 멀게 할 정도로 강한 빛을 내는 큰 여의주.
흔히 용이 되기 전의 이무기가 물고 있다는 여의주를 현무가.
그것도 두 개의 머리가 물고 있는 걸 보니 참으로 기이하면서도 장엄한 형상이었다.
거기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타닥, 타닥.
저 멀리서 들려오는 뭔가가 타들어 가는 소리.
당기룡이 그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고개를 돌리자, 어느샌가 근처에 나타난 주작.
마치 현무를 주변을 정화하듯, 몇 번이나 공중에서 맴돌며 현무의 앞에 주저앉은 주작은 휘황찬란하게 울부짖었다.
-삐익! 삐익!
“삐익?”
이상하기 짝에 없는 울음소리.
순간 당기룡은 잘못 들었나 싶어 다시금 귀를 기울였다.
-삐이이익!
하지만 그럼에도 변하지 않는 울음소리.
그와 동시에 뭔가가 품을 뒤지는 감각을 느낀 당기룡은 뭔가 이상함을 느끼며 꿈에서 깨어났다.
* * *
당기룡이 눈을 뜨자 보이는 건 지붕이 뻥 뚫려 하늘이 그대로 보이는 가주전의 모습.
그리고 그 아래서 야명주를 문 채 가부좌를 틀고 있는 당지천의 모습이었다.
‘야명주? 아…….’
야명주를 문 당지천을 보자, 그제야 이해되는 꿈의 내용.
‘지천이야말로 당가가 쌓아온 최고의 기재. 현무 그 자체였구나.’
당기룡을 죽음에 늪에서 건져 올린 건 다름 아닌 당지천이었으며 실제로 당지천이 당가를 구원했다.
즉, 당지천이야말로 천년의 당가 역사가 만들어낸 최고의 인재이자 보물.
사방신에서 가장 강하다는 현무 그 자체에 비견되는 영웅이라는 의미였다.
‘그렇다면 당지독에게 날렸던 마지막 일격. 그것 또한 설명이 되는구나.’
당지독이 후퇴를 결심하고 천일염을 상대하던 당시.
무슨 사술을 쓴 것인지 천일염이 공격에 공격을 거듭했음에도 당지독에게 그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았다.
분명 압도적인 실력 차이를 가졌기에 천일염이 도륙해도 몇 번을 도륙해야 했던 상황.
하지만 공격이 통하지 않았기에 작은 피해조차 입히지 못하고 돌려보낼 뻔했다.
‘지천이는 파마의 기운을 가진 게야.’
한데, 뒤늦게 지원 온 당지천의 암기는 당지독에게 통했고, 무엇보다 왠지 모르게 당지천은 당지독의 기이한 사술을 읽었다.
그렇기에 자신도, 천일염도 한참을 놀랐었는데, 비로소 오늘 꿈을 통해 알게 됐다.
……바로 당지천이 신이라는 것을 말이다.
‘근데 주작은 대체?’
당기룡이 의문을 품기 무섭게 밑에서 들려오는 울음 소리.
-삐익!
그건 다름 아닌 멋대로 당기룡의 품을 뒤지며 독을 꺼내 먹고 있는 삐익이의 울음소리였다.
-삑! 삑!
마치 며칠 굶은 사람…… 아니, 새처럼 고개를 처박고 독을 빨아대는 삐익이.
당지독과의 결전으로 인해, 남은 극독이 별로 없어서 한 줌의 독도 아쉬운 상황이었기에 제지할 법도 했건만, 당기룡은 아예 삐익이가 노리던 주머니를 꺼내 내어줬다.
‘지천이에게 도움이 된다면 이까짓 독쯤, 다시 만들면 그만이다.’
최고의 기재라 불리는 용도 아니고, 사방신인 현무를 보았다.
그러니 당연히 당지천을 위해선 그 무엇이든 내줄 수 있다는 마음으로 선뜻 독주머니를 꺼내줬는데…….
-비잇, 비잇.
당기룡의 손이 탄 것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주머니를 차버리고는 날아가는 삐익이.
-찌르르.
아예 재수 없다는 듯 뭔가 이상한 액체를 뱉어내기까지 하는 걸 보면 정말 역겨워하는 듯햇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당기룡은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역시 만년혈독신조가 지천이를 따른 건 특이 개체여서가 아니었어. 오롯이 지천이가 신이었기 때문이야.’
인간의 손에는 절대 타지 않는다는 만년혈독신조.
지금 삐익이가 자신이 건넨 주머니를 차버리고, 못 쓰게 만든 걸 보면 특이 개체는 아니었다.
그런데 당지천은 그런 영물을 참으로 쉽게 길들였으니.
역시 당지천은 자신 같은 범인과는 궤를 달리하는 뛰어난 존재라 생각하며 속으로 당지천을 찬양하는 중이었다.
“일어나셨습니까?”
당기룡이 속으로 자신을 찬양하는 걸 들었는지, 어느새 운기를 마치고 안부를 묻는 당지천.
그 인사에 당기룡은 근엄함을 되찾은 채로 짧게 답했다.
“그래.”
찬양하는 속내와 달리, 짧디짧은 대답.
길게 좀 얘기하면 어디 덧나나 싶을 정도로 단호하게 잘라는 말에 맥이 빠질 법도 하건만, 늘상 있는 일이었기에 당지천은 개의치 않은 채 말했다.
“생각보다 오래 주무셨습니다. 자리라도 옮겨드릴까 했지만, 또 괜히 단잠을 깨우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어차피 인원들이 상주하는 곳이 만독연과 가주전뿐이었기에 딱히 옮기진 않았습니다.”
“흠흠……, 잘했다. 정말 잘했다.”
“…….”
“…….”
당기룡이 말을 마치자 다시금 조용해지는 가주전 내부.
당지천은 당기룡이 아무것도 묻지 않자, 혹시 어디 아픈가 싶어서 조용히 당기룡을 살피느라 그랬고.
당기룡은 본능적으로 당지천을 칭찬해 준 탓에 그냥 속으로 덜덜 떨고 있는 거였다.
그런데 그때, 밖에서 들려오는 문 두들기는 소리.
-똑, 똑.
-삼 공자님. 당지무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당지무가 가주전으로 들어와도 되는지 허락을 구하자, 자연스레 당기룡을 보는 당지천.
당기룡은 속으로 덜덜 떨면서도 어색하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자, 당지천이 그제야 허락을 내렸다.
“들어오시죠.”
허락이 떨어지자, 문을 열고 들어오는 당지무.
“아, 가주님. 일어나셨습니까?”
“그래.”
“…….”
뭘 물어볼 법도 하건만, 당기룡이 단답으로 끝내버렸기에 혹시 어디 아픈데 내색하진 않는 건가 싶어서 자연스레 당지천에게로 고개를 돌려 보고했다.
“……참 다행입니다. 삼 공자님. 만독연주님께서 연구실 가동률은 약 6할 정도로 독 확보에 차질이 생기진 않을 거라고 하십니다.”
“독지에는 피해가 없었습니까?”
“예, 반란 전에 수확할 수 있는 건 모조리 수확하긴 했지만, 당가를 집어삼키려 했던 만큼 해를 입히진 않았기에 약간의 시간만 지나면 평소처럼 돌아올 겁니다.”
“알겠습니다. 6장로님부터 10장로님들도 복귀하시면 독 확보 좀 거들어달라고 하십시오.”
“예, 공자님.”
당지무가 삼 공자에게 명령받고 자연히 가주전을 떠나자, 뒤어어 백호단주가 들어왔다.
“일어나셨습니까, 가주님. 몸 상태는 좀 어떠십니까.”
“괜찮다.”
“…….”
역시나 당지무 때와 똑같이 단답으로 끝내 버리는 당기룡.
그리고 역시나 백호단주도 당기룡이 어디 아프다는 판단이 들어 자연스레 당지천에게 보고했다.
“군사부와 협의한 결과 사업장 자체는 건재하지만, 이 일이 새어 나가는 대로 아득바득 달려들 거라는 판단이 일치했습니다. 그래서 삼 공자님의 상세한 의견을 듣고 싶어했습니다.”
“일단 중요도가 떨어지는 사업장 먼저 철수합시다. 외부에 소식이 퍼지기 전에 제값 주고 팔 수 있는 건 팔아넘기고, 때를 놓쳤다면 그건 그때 가서 두고 보도록 하죠.”
“그럼 얼마나 철수시킵니까?”
“인력이 반 이상으로 줄었습니다. 그러니 적어도 4분지 1은 쳐내야죠.”
“7할 이상이나 남기는 겁니까?”
“안 그래도 불경기인데 신화문에서도 고정 수입 한두 개 있으면 좋아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렇게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당지천의 명령을 받고 자연스레 가주전을 떠나는 백호단주.
그 이후로도 하나씩 이어지는 인원들의 보고와 착각에 자연히 당지천이 명령을 내리는 형국이 되자, 당기룡은 깊은 오해를 했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이미 당가의 모두가 지천이의 능력을 알아보고 지천이에게 의견을 구하는구나.’
작금의 상황은 모두 당지천이 유능했기에 벌어진 일.
당가의 수복을 위해선 이미 자신보다 당지천이 더 적임자라고 모두가 판명했기에 일어난 일이라고 말이다.
그렇기에 당기룡은 더는 고민하지 않고, 곧장 당지천을 불렀다.
“지천아.”
“예.”
“네가 다음 대 소가주다.”
“예?”
맥락 없는 소가주 임명에 심히 당황하는 당지천.
당기룡이 이럴 사람이 아닌데, 갑자기 이상행동을 보이니 사실 머리를 다친 게 아닐까 심히 걱정되기까지 했다.
“지금부터 말입니까?”
“그렇게 됐다.”
“아니, 뭐가 그렇게 돼요?”
“그렇게 됐다.”
“아니, 뭐가 그렇게 됐냐니까요?”
환장하겠다는 듯 당지천이 당기룡을 쳐다봤지만, 당기룡은 그저 무덤덤한 표정으로 같은 말만 되풀이할 뿐이었다.
“그렇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