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12화
“무, 무슨?!”
당지천이 경악으로 물든 얼굴로 물었지만, 천일염의 검에 4명의 특급 살수가 맥없이 쓰러진 상황.
잠시간 몸을 굳혔던 살수들이 전음으로 서로 의견을 주고받다가, 결론이 났는지 점차 몸을 움직였기에 천일염은 설명하기보다 다시금 검을 들었다.
-휘익.
천일염의 실력을 봤음에도 포위하며 휘파람으로 신호를 보내며 살진을 펼치는 살수들.
언뜻 보면 수적 우세를 이용해 찍어 누르려는 거 같지만, 이길 수 있겠다는 생각으로 천일염에게 대항하는 것은 아니다.
실력 차가 어중간하다면 서로 다른 방향으로 도망칠 경우 과반수가 살 가능성이 있었다.
그도 그럴 게 4명이 죽었어도 무려 16명이나 되는 인원이 남았으니 말이다.
허나, 단칼에 4명이 쓰러졌다.
이는 명백히 도망친다고 해도 과반수 이상이 죽음을 의미했다.
거기다, 만약 천일염이 천일염의 말대로 당대 무정검이라면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할 게 분명했기에 이렇게 대항하는 거다.
“그러고 보니 공자님께서 저한테 일전에 무공을 가르쳐 달라, 그렇게 이야기하셨죠.”
살진의 한가운데 갇혔음에도 여유롭기 짝에 없는 천일염.
살수들이 사방을 조여오든 말든 눈길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때, 제가 가르쳐 드릴 수 없었던 이유는 신화문의 무공이 오직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무공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공입니다. 이거.”
“마공? 아니, 중원에 마교가 사라진 적이 언젠데 마공이 남아 있어?”
“그야, 신화문의 개파조사께서 마교 사람이었으니 그렇죠.”
“마아아아교오오오?”
“이해가 안 갈 수 있지만, 백문이 불여일견 아니겠습니까. 한번 보여 드리겠습니다.”
천일염이 검을 도로 집어넣자, 살수들은 기다렸다는 듯 한순간에 진을 좁혔다.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만든 무공이라고 했지만, 실상 신화문의 무공은 공격적인 게 많습니다.”
살수 특유의 민첩함과 흐릿한 기척을 이용해 연격이 쏟아지는 살진.
그것에 대응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천일염은 오히려 살수들보다 민첩하고 흐릿한 움직임으로 살수들의 검을 피했다.
“왜냐면 최고의 방어는 공격이고, 최고의 호위는 호위 대상의 눈에 닿기 전에 치우는 것이기 때문이죠.”
말을 마친 천일염이 장갑을 낀 오른팔을 들어 올리더니 손을 활짝 펼쳤다.
그러고는 당지천에게 경고했다.
“조금 잔인해서 놀랄 수도 있는데, 절대 움직이지 마십시오.”
“알았어.”
당지천이 고개를 끄덕이며 절대 움직이지 않겠다는 듯 꼿꼿이 서자, 천일염은 입가에서 웃음을 지웠다.
그러고는 오른손을 주먹 쥐고 힘껏 당겼다.
“적혈난무.”
천일염이 초식 명을 읊자마자, 동시에 공중에 떠오르는 살수들.
그간 눈에 보이기는커녕, 존재 자체도 몰랐던 실들에 온몸이 얽힌 채 일제히 떠오르는 모습은 기괴하다 못해 무서울 정도였다.
그리고 나지막이 이어진 천일염의 한마디.
“파(破).”
-빠각! 빠각!
그와 동시에 무언가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살수들의 몸에서 피 분수가 터져 나왔다.
* * *
“쓰읍.”
생각보다도 더 잔인한 광경에 속에서 헛구역질이 치밀어 올랐지만, 차마 뱉지는 못하고 가만히 서 있었다.
왜냐면…….
“……딴 데 보다가 죽을 뻔했네.”
어느샌가 날아온 단도 하나.
그게 내 앞에 만들어진 실의 장막에 막혔기에.
‘크게 움직였으면 나도 저렇게 됐으려나?’
사람은 놀라면 본능적으로 움직인다.
그런데 웬걸.
암기를 알아채고 피하려고 보니 주변이 보이지 않는 실로 도배가 되어 있었다.
그것도 왠지 모르게 무서워 보이는 검은색 기가 맺힌 실들이 말이다.
‘반사적으로 팔만 올려서 다행이지.’
그래서 팔만 올려서 암기를 막으려다가 살짝 베였다.
물론, 어디까지나 부위가 살짝일 뿐, 두부 썰리듯 실에 팔이 뚫리는 감각은 다시는 잊지 못할 아찔한 감각이었다.
“마공이라 그런가 더럽게 세네.”
일염이의 손짓에 단번에 썰린 살수들.
다들 언제 흉흉한 기세를 내뿜었냐는 듯 싸늘한 시체가 되어 땅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아니, 진짜 이게 뭔…….”
어이가 없어서 육성으로 터져 나오는 감탄.
한눈에 봐도 강해 보이는 살수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살수들을 상대로 몇 합을 겨루는 것도 아니고, 단칼에 썰어버려?
“아니…… 허, 참.”
아니, 대체 얼마나 강한 거냐고.
전생에 주인공 옆에 힘을 숨긴 채 숨어 있는 호위 무사 이야기는 꽤 많이 나온 이야기인 만큼 많이 봤었다.
당연히 나도 의심해 봤던 상황.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특수한 경우고, 천일염이 뭐 행적이 묘연한 고수가 아니었기에 빙의하고 8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보니 고수였다?
“허허…….”
어이가 가출한 느낌이었다.
거기다, 뭐?
신화문주?
그럼 내가 여태껏 봐왔던 신화문주는 뭐란 말인가?
‘아니, 애초에 진짜 신화문주였으면 살수들이 튀어나왔을 때, 바로 막았으면 되는 거 아니야?’
20명의 특급 살수에게 둘러싸인 상황.
내가 일염이를 보내고 독무 속에서 홀로 버틴 것은 어디까지나 살수들을 막으며 이길 방책을 갈구하기 위해서다.
‘처음엔 시간을 벌고 혼합독이라도 만들어보려고 한 건데…….’
여태껏 두 가지밖에 섞어본 적 없는 혼합독.
아직 여러 가지를 실험해 봤음에도 어떤 기준으로 섞이는지 명확히 규명할 수 없었다.
허나, 어디까지나 실험을 위해서 2가지씩만 섞어보려고 했던 것이지 3가지 이상 섞는 게 불가능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요행.
섞일지 안 섞일지는 둘째치고, 살수들을 죽일 수 있을 만큼 독성을 가지고 있을지는 몰랐다.
‘이도 저도 안 되는 것 같아서 폴로늄이라도 써보려 했지.’
그렇기에 내 안전을 버리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피치블렌드에서 폴로늄을 추출해 보려고 했다.
깔끔하게 정제하면 참으로 좋겠지만, 급박한 상황인 만큼 어떻게든 독성만 확보한다는 생각으로 에어로졸 형태로 뿌리려고 했다.
그래서 일염이를 먼저 보낸 것인데…….
‘뭔, 일초지적도 안 되냐?’
대뜸 일염이가 나서서 단칼에 썰어버리는 것 아닌가?
그것도 가장 강해 보이는 4명을 단칼에 썰어버렸다.
‘거기다, 나머지도 한 번에 처리했지.’
심지어 뒤이어 달려든 16명의 살수도 뭔지 모를 무구를 이용해 단 한 수에 모두 처리했다.
“이게 뭐냐고 대체…….”
여태껏 한 게 모두 뻘짓이 되어버린 상황.
속았다는 배신감보다는 그냥 황당함에 치가 떨릴 정도였다.
‘뭐, 그래도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일단 넘어갈 수 있어. 그것보다 문제는 팽 대협을 불렀다는 거야.’
진짜 일찍 좀 나서지.
혹시나 싶어서 팽구용이 준 피리를 불었는데, 안 오면 다행이지.
만약 오자마자 봤는데 상황이 정리되어 있으면 뭐라 하겠는가.
‘지나가던 은둔 고수가 도와주고 갔다고 둘러대? 생각보다 먹힐지도?’
생각해 보면 팽구용은 멍청하기보단 머리 쓰는 걸 자체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니 어떻게 잘 둘러대면 먹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여간 당황스러운 게 아닌가 보군요.”
“너 같으면 멀쩡하겠냐?”
“저는 지금 공자님이 전생에 무림일통한 천마였다가 다시 태어났다고 하셔도 믿을 겁니다.”
“어떻게 알았어?!”
“…….”
놀라는 척하자 황당해하는 일염이.
멀쩡하긴 개뿔, 얼척이 없다는 얼굴이었다.
“……재미없는 농담한 건 미안하니까, 설명부터 해봐. 대체 왜 그런 거야?”
설명해 보라고 하니 안색을 굳히는 일염이.
지금 이럴 시간이 없다는 듯 아까 한편에 던져놨던 짐을 챙겨 들고 있었다.
“맘 같아선 천천히 설명해 드리고 싶긴 합니다만, 그건 나중에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왜?”
“공자님을 노리고 온 특급 살수만 20명입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옘병.”
천일염이 말하고 나자 그제야 머릿속에 그려지는 상황.
특급 살수 20명.
이 인원은 무림 전역에 있는 특급 살수 과반수 이상.
아니, 거의 전부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많은 인원이다.
한 명, 한 명이 섭외하기 힘든 살수들.
그런 이들이 20명이나 같은 임무를.
그것도 당가를 건드리는 임무를 받아들인 건 분명 엄청난 뒷배가 있단 소리였다.
“당가가 위험하구나.”
왜냐면 의뢰하는 돈도 돈이지만, 원래 살수들은 제 안위가 위험해지는 임무는 받지 않는 법.
당가의 직계인 나에 대한 의뢰를 받았다는 건, 적어도 후환 걱정은 안 해도 된다는 의미였다.
“빨리 자리 먼저 뜨자. 굳이 당가가 아니더라도 팽 대협이 오실 수도 있어.”
“천괴도는 오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얼마 전, 보고에 의하면…….”
말하다 말고 갑자기 입을 다무는 일염이.
인상을 뻑 쓴 채로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길래 나도 같은 곳은 봤더니 익숙한 인영이 하나 달려오고 있었다.
다름 아닌 천괴도 팽구용이 말이다.
“……안 온다며?”
“……저희 애들도 사람인데, 정보가 잘못됐을 수도 있죠. 아니면 무슨 일이 있어서 하북에 왔거나.”
일염이가 무안한 얼굴로 나를 한 번 보더니 이내 바닥에 떨어진 장검을 들어 패용하며 말했다.
“공자님이 부르신 거니까, 변명은 부탁드립니다.”
“…….”
‘네가 일찍 나섰으면 내가 팽구용을 안 부르지 않았을까?’라는 말이 목 끝까지 차올랐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대충 아까 생각했던 변명을 늘어놓으면 이상함을 느낄지언정 팽구용은 쉽게 넘어갈 거라 생각해 변명할 준비를 하려던 찰나.
‘당가가 위험한 상황이다. 팽 대협을 모셔가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문득, 팽구용을 당가로 데려가면 큰 도움이 될 거란 생각에 곧장 전략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아니,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팽구용은 오자마자 보이는 피바다에 잠시 당황하며 물었지만, 이내 주변을 둘러보고는 대충 상황을 파악했다.
“살수들에게 습격받았는데, 지나가던 기인이 도와주셨나 보구나.”
이어서 처음 일염이가 죽였던 살수의 시체를 들춰보고는 씁쓸하게 웃었다.
“이제 어깨 좀 펴고 다닌다 했더니만, 이런 검을 보게 되다니…….”
하지만 그것도 잠시.
팽구용은 곧장 일어나 내 몸 상태부터 살폈다.
“많이 힘들었겠구나, 너는 괜찮냐?”
자고로 도움을 청할 땐, 가장 불쌍한 모습으로 있어야 효과가 있는 법.
아이들이 장난감을 사달라고 조를 때마다 우는 이유가 그러하듯이 나 또한 최대한 불쌍한 얼굴로 팽구용을 불렀다.
“팽 대협…….”
이어서 아까 일염이 덕에 생긴 상처가 잘 보이게끔 다쳤던 팔을 앞으로 내밀며 동정을 유도했다.
“아주 멀쩡해 보이는구나. 별문제 없는 것 같으니 이만 돌아가 보도록 하마.”
허나, 팽구용은 이상한 낌새를 귀신같이 알아채고 되돌아가려 했기에 나는 그런 팽구용에게 달려들면서 매달렸다.
“팽 대협! 그러지 말고 저 좀 도와주십시오! 당가가 위험합니다!”
“싫다! 원래 의인은 남의 일에 함부로 끼지 않는 거 알잖느냐! 애초에 위험하지도 않은데 갑자기 사람 불러내 놓고 말이야!”
“푸로패시아라면 넉넉히 드릴 테니까!”
“나 이제 풍성하거든! 무시하지 마라!”
삿갓도 안 쓴 머리를 자랑스럽다는 듯 쓰다듬는 팽구용.
이게 다 내 작품임에 뿌듯한 마음이 같이 들었지만, 이내 정신을 차리고 힘껏 매달렸다.
“예전에 저한테 중요할 때 한 번 도와주신다고 하셨잖습니까!”
“아니, 그건 백화상단 건 때 썼잖냐!”
“그때 도움을 요청하라고 준 피리를 그냥 주셨잖습니까! 그럼 도와준다는 이야기지!”
“이놈이!”
화난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 팽구용.
허나, 그때 당시에는 그런 의미로 준 것도 없지 않았기에 거의 다 넘어온 모습이었다.
“저희 사이가 어떤 사인데, 한 번만 도와주시죠.”
최대한 불쌍한 얼굴로 피를 흘리며 애걸복걸하자, 이젠 맘이 약해졌는지 혀를 차는 팽구용.
이내 고개를 두어번 젓더니 화를 내듯 말했다.
“에휴, 이번 한 번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