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111화 (111/200)

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11화

-터벅.

전혀 특별할 것 없는 작은 발걸음 소리.

허나, 당지천에게 등을 돌린 채 걷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한없이 크게 들렸다.

‘대체 왜 난 등을 돌렸을까.’

지키지 못할 말은 뱉지 않는다.

그것이 나의 법칙이었다.

그런데 수많은 약속을 했음에도 당지천에게서 등을 돌렸다.

‘대체 왜?’

일전에도 이랬던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니, 분명 이랬었다.

몇 번이나 지켜야 했었음에도.

몇 번이나 구할 수 있었음에도.

끊임없이 망설인 끝에 결국 등을 돌렸다.

‘무슨 이유에서?’

이럴 때마다 이유를 모르는 척 속으로 되뇌는 말.

하지만.

그 이유는 사실 누구보다 자신이 잘 알고 있다.

-삐이이익!

다음 발을 떼기가 무섭게 사방으로 울려 퍼지는 피리 소리.

그와 동시에 당지천의 주변으로 하얀 독무가 들어찼다.

‘역시나.’

당지천이 선택한 건 농성.

하북이 가까우니 팽구용을 부르고 있는 독을 전부 뿌려대며 농성할 생각일 거다.

당지천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 20명의 살수.

한 손으로 여러 손은커녕, 하나도 제대로 막기 힘든 상황이다.

그러니 있는 독을 전부 뿌려대며 동귀어진할 생각이 없다면 들어오지 못하게 만드는 게 제일이었다.

‘고민할 것도 없이 지금으로는 최선의 수다.’

아무리 수준 높은 독공을 구사한다고 해도 가지고 다니는 독의 양은 한계가 있는 법.

그렇기에 살수들은 지금 당장 처리할 수도 있지만, 당지천의 독무가 잦아들 때까지 기다리면 위험부담 없이 당지천을 잡을 수 있었다.

즉, 반대로 말하면 독무가 있는 동안에는 어느 정도 버틸 수 있다는 것.

‘어차피 살수들은 피리 소리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으니.’

암살 대상에 대해서 면밀한 조사한 후.

급작스럽게 튀어나오는 만큼 살수들은 피리 소리를 그저 발버둥.

주변에 지나가는 호인이 있으면 좀 도와달라는 암살 대상자의 마지막 비명처럼 취급했다.

그러니 어느 정도 시간을 끌 수는 있을 거다.

-터벅.

‘팽구용이 온다면 좋은 수겠지.’

5년 전의 경지를 벗어나지 못했다면 모를까, 경지를 넘은 팽구용.

팽가야말로 의인들의 집합소고, 살수들을 극렬히 싫어하는 가문이기에 오기만 한다면 곧장 당지천을 도와 살수들을 전부 해치울 게 분명했다.

……어디까지나 올 수 있다면 말이다.

‘이전의 보고에서 팽구용은 운남에 있다고 했다. 만약 피리 소리를 듣고 온다고 한들 최소 하루는 걸리겠지.’

아무리 날고 긴다는 경지라고 한들, 축지를 하진 못했다.

운남에 있는 팽구용이 피리 소리를 들었다고 한들, 이곳까지 올 가능성은 없다.

그러니…….

-터벅.

‘아마 당지천은 여기서 죽을 거다.’

아마 당지천은 죽을 거다.

-턱.

그 사실을 속으로 되뇌자, 뭐에 걸리기라도 한 듯 나아가지 않는 발걸음.

허나, 그렇다고 해서 뒤돌아서 걷지도 않았다.

‘지킬 수는 있다. 허나…….’

지금이라도 움직인다면 당지천은 구하는 건 일도 아니다.

살수가 20명인 만큼 웬만한 고수라면 상대하긴 힘들겠지만, 익힌 무공 자체가 살수를 상대하는 데는 가히 천적이라고 부를 만큼 상성이 좋았다.

즉, 구하려고 하는 의지만 있다면 충분히 가능하다는 이야기.

하지만 차마 다시금 뒤돌지 못했다.

왜냐면…….

‘지금 움직일 수 있다면 끝내 설화도 지킬 수 있었다는 이야기 아닌가.’

그럴 때마다 10년 전 그 날이 떠오르기에.

자신은 무능해야 했다.

그렇지 않다면 지키려는 마음도, 능력도 가지고 있었는데도 지키지 못한 과거가 우습지 않겠는가.

최소한 지킬 능력이 없었기에 못 구했다고 속으로 자위하면서 살아가기라도 한다.

그런데 능력이 있는데 검조차 뽑지 못하고 방관했다면.

그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면 그게 고의가 아니고 대체 뭐란 말인가.

그렇기에 매번 당지천를 구하려 할 때마다 망설이며 결국 때를 놓치게 되는 거였다.

‘어차피 이것도 잠시간의 발작일뿐, 조금 지나면 사라질 터이다.’

추억은 이미 모두 잊었다.

빙궁에서 떠나는 그 순간부터 하나둘 눈 녹듯이 끝내 사라졌으니 말이다.

지금 남은 건 아주 작은 눈꽃 하나뿐.

이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녹아 흘러내릴 게 분명한 만큼 조금의 시간이 지나면 무덤덤해질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어디선가 천설화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진.

-오라버니, 이번에도 약속을 어기시는 건가요?

목소리가 나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흐릿하게 보이는 천설화.

그 모습은 ‘이번에도’라는 말과 함께 천일염을 짓누르듯 찍어 눌렀다.

“나는…….”

하지만 천일염은 입술을 짓씹지도, 그렇다고 분해하지도 않은 채.

그저 무표정으로 대답했다.

“나는 널 지키지 못했다. 헌데, 어찌…….”

-또 혼나고 싶어요? 내가 뭐랬어요. 저 혼자 불쌍한 척은 다 하면서 비 맞은 개처럼 굴고 있으면 귀신이 돼서 쫓아다닐 거라고 했죠?

장난스러운 천설화의 말에도 천일염은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무엇 하나 남기지 못했잖느냐.”

-없긴 왜 없어요.

입을 삐쭉 내민 천설화가 천일염의 손을 한 번 툭 치고는 말을 이었다.

-오라버니. 제가 오라버니께 무엇이 되어달라고 했나요?

“가족.”

-그럼 오라버니 손에 지금 뭐가 남아 있나요?

“전표…… 아.”

무심결에 대답한 천일염은 고개를 내려 두 손을 바라봤다.

당지천이 손에 쥐여준 전표.

퇴직금 명목으로 천일염에게 건네준 것이지만, 이걸 당지천이 굳이 준 이유는…….

“걱정.”

천괴도가 오지 않으면 당지천은 죽는다.

이걸 당지천도 몰랐을까.

‘그럴 리가.’

당지천은 언제나 합리적으로 생각했기에 안전주의적 성향이 강했다.

허나, 언제나 영특하게 살아왔기에 도박 수라도 가능성이 있는 걸 두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천일염조차도 당지천이 도박 수를 두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감내할 결심은 일절 무시한 채로 말이다.

-분명 지천이를 지켜달라 부탁한 것 같은데, 어느샌가 지천이가 오라버니를 지켜주고 있는 것 같네요?

천설화의 말을 듣자, 저절로 움직이는 손.

보이지 않는 어둠 속.

아주 오래전 잃어버렸던 것들을 찾기 위해선 먼지 더미 속을 한참을 뒤져야 했지만, 천일염은 끈기를 가지고 하나씩 찾아내었다.

“책.”

천고천에게 받은 서책.

“합반.”

빙설린이 챙겨준 식사.

“검과 장갑.”

천일절이 제련해 준 검과 장갑.

“그리고 이름.”

마지막으로 천설화가 준 이름.

자세히 찾아보니 무엇 하나 받지 않은 것이 없었다.

“대체 왜?”

-그저 지키고 싶으니까요.

“무슨 이유에서?”

-가족이니까요.

상소한 설명도 없이 감정에 기대는.

천일염의 입장에서 생뚱맞기 짝에 없는 이유.

허나, 천일염은 수긍했다.

“그래, 가족이지.”

혹자가 이르길 연이란 끊고 싶다고 쉽게 끊기는 게 아니고.

잊고 싶다고 해서 쉽게 잊히는 건 더더욱 아니라고 했던가.

“가족이었어.”

그 말이 결코 틀리지 않았음을 깨닫자, 천설화 주변이 물결치듯 변해갔다.

천설화의 눈빛에 담긴 아련함이.

가냘픈 손길에 담긴 애타는 그리움이.

소매 속에 감춰진 빛바랜 추억이.

세상 모든 것이 제 색을 되찾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종장에 이르러선.

10년 전 색을 잃어버렸던 땅과 하늘이 제 색을 되찾기 시작했다.

“지…… 천…… 이구나.”

지나간 세월.

설화의 그림자가 너무 컸기에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은 전혀 보지 못했다.

애초에 설화 하나만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살았기에.

당지천을 그저 설화의 대용품으로 생각했던 것도 없지 않았으리라.

-제가 비록 오라버니의 업을 다 이해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죄책감만큼은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천설화가 삐뚤어진 삿갓을 원상태로 돌려놓으며 말을 이었다.

-알잖아요. 나도, 지천이도 오라버니께선 상상도 못 할 방법을 어떻게든 해낸다는 거.

천일염에게 환한 미소를 보여준 천설화가 천일염의 어깨 너머로 당지천을 보며 말을 이었다.

-지천이가 오라버니가 그러했듯이, 저 또한 오라버니를 지키고 싶었을 뿐이니까요.

천설화를 따라 천일염이 시선을 돌리자, 어느샌가 가득 피어오른 독 안개.

아직 독무가 사라지지 않은 탓에 살수들이 가벼운 암기만 던지며 당지천을 상대하고 있었지만, 이미 당지천은 체력이 빠질 대로 빠졌는지 다소 힘겹게 피해내고 있었다.

-그러니 우리 지천이 잘 부탁해요. 이왕이면 상공도.

천일염의 시선이 잠시 당지천에게 머문 사이 어느샌가 증발하듯 사라져 버린 천설화의 모습.

“…….”

천설화가 사라진 자리를 잠시 조용히 보고 있던 천일염은 하늘을 한 번 올려다보고는 단언했다.

“그러마.”

-텅!

말을 마친 천일염이 허리춤에 매단 검을 저 멀리 던져 버렸다.

이어서 짐에서 검과 장갑을 꺼내 착용하고는 이전과 달리 망설임 없이 뒤돌아섰다.

“뭐야? 가라니까 왜 돌아왔어?”

“공자님. 언젠가 제가 말씀드렸었죠. 세상엔 당연한 것을 잊어서 실수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아니, 지금 그게 무슨…….”

다시금 당지천에게로 향하자, 대체 왜 왔냐는 듯 당황하는 당지천.

허나, 천일염은 그런 당지천을 무시한 채로 말을 이었다.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누군가의 호위임을 망각했던 것도.

되레 지켜야 할 이가 목숨 걸고 구해준 것도.

잿빛의 세상 속 색을 일깨워 준 것도.

모두 두 번째였다.

“하지만 두 번째는 없을겁니다.”

누군가를 흔적 없이 잊던 기억도.

찾았던 색을 다시금 잃는 것도.

무엇보다 지킬 이를 지키지 못한 업을 쌓는 것도.

모두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그러니…….

“결코, 반복하지 않겠습니다.”

-쿵!

천지를 울리는 발걸음을 내디딘다.

“크윽-.”

삽시간에 주변을 짓누르는 기세에 신음을 삼키는 살수들.

“실력을 숨기고 있었군…… 이래서 배제하라고 했던 건가.”

한순간에 뒤집혀 버린 상황에 잠시 당황했지만, 이미 명백히 적의를 보이는 상황.

회유는 포기하고 곧장 대응했다.

“가능한 인원은 살진을 펼친다. 나머지는 사방으로 전개해 포위해라.”

살수들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협업을 자주 하는 살수들인 만큼 굳이 훈련하지 않아도 대부분 오래 일한 사이처럼 손발이 잘 맞았다.

그렇기에 천일염은 긴장될 법도 하건만, 그것보다는 당지천에게 진실을 알려준다는 사실에 약간 긴장이 됐다.

“공자님. 예전에 과거의 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물어보신 적이 있으셨죠.”

-스릉.

근 십 년 만에 허리춤에서 중검을 뽑아내자, 소리 없이 달려드는 네 명의 살수들.

네 명 모두 초절정고수인 만큼 공격 하나하나가 단칼에 산을 베어버릴 듯 날카롭게 그지없었으나, 천일염은 그 앞에서 초연히 말을 이었다.

“이번 기회에 알려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피할 틈새 없이 4방향에서 달려드는 살수들의 합격.

팽구용이 오더라도 어디 한 군데 내줘야 할 만큼 강력하고 연계가 잘 된 공격이지만, 천일염이 무심하게 검을 한 번 휘두르자……

-털썩.

살수들은 베이는 소리도 없이.

그렇다고 비명도 없이 동시에 쓰러졌다.

“13대 신화문주 무정검(無情劍) 십칠호.”

찰나의 순간, 경악으로 인해 얼굴이 일그러지는 당지천과 눈을 맞춘 천일염은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게 설화를 만나기 전까지의 제 이름이었습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