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09화
당숙에게 속아 폐광에서 빙빙육각사를 잡고 구조된 다음 날.
이른 아침부터 삼촌의 스승이 찾아와서 여러 암기가 가득한 상자를 손수 건네주었다.
“부탁했던 물건이다. 그리고 이건 그동안 만든 추혼비독파접.”
상자의 내용물을 열어보니 한눈에 봐도 많아 보이는 암기들.
비록, 특색 없는 기본 암기가 절대다수였지만, 이 모든 게 형상기억합금이라고 생각되니 아침부터 가슴이 쿵쿵 뛰었다.
‘이것만 있으면 내 암기는 무적이다.’
자고로 무기가 생겼으면 시험해 봐야 하는 법.
시험 삼아 표창 하나를 들고 손에 올려놓은 뒤 냉기를 피어올리며 주먹을 쥐자, 그대로 구겨지는 표창.
이어서 창밖을 향해 있는 힘껏 던지자…….
-텅!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던 와중에 형상이 복원되면서 회전하며 날아가는 표창.
손기술을 아무것도 쓰지 않았음에도 쉽게 투로가 변하는 게 딱 내가 원하던 그 물건이 맞았다.
“딱 제가 원하던 겁니다. 감사합니다.”
“부탁받았으니 했을 뿐이다. 꽤 재밌는 경험도 됐고.”
만족스러움을 보이자, 덩달아 만족스러움에 고개를 끄덕이는 노인.
이번에는 일염이에게 가서 별 설명도 없이 일전에 건넨 검과 함께 상자를 건네주었다.
“…….”
“…….”
왠지 모르겠지만, 눈싸움하듯 서로를 잠시 쳐다보는 둘.
이내 노인이 먼저 고개를 젓더니 몸을 돌려 나가며 말했다.
“나는 할 일이 바빠서 이만 가보마. 만든 암기들은 부디 소중히 다뤄주길 바란다.”
“예, 조심히…… 가버리셨네.”
뭔, 인사를 건넬 틈도 없이 돌아가 버리는 노인.
조금의 쉴 틈도 없이 곧장 돌아가는 게 어지간히도 바쁜 모양이었다.
“형상기억합금을 이렇게 빨리 받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진짜 빨리 해결하셨네…….”
다른 잘 만들기만 하면 되는 무구들과는 전혀 다른 구조의 암기.
그만큼 꽤 시간이 걸릴 거라 예상했으나, 갈 때가 되니까 귀신같이 가져와서 건네줬다.
“그럼 때마침 암기도 왔겠다. 이제 슬슬 떠날 준비를 해야지.”
깨달음도 얻었고, 피치블렌드도 일염이가 챙겼다.
빙궁에서 얻을 건 다 얻은 상황.
웬만하면 맘 편히 관광 같은 것도 했으면 좋겠지만, 시간 여유가 그렇게 많지는 않기에 내일 곧장 떠나려 마음먹었다.
“저도 이제 떠나려 합니다.”
떠난다고 하자, 대뜸 자기도 떠난다는 일염이.
뭘 잘못 먹었는지 당연한 소리를 뚱하게 지껄인다.
“그래, 너도 당연히 같이 가야지.”
“그 의미가 아닙니다.”
“뭐? 그럼 무슨 의미인데?”
“당가로 돌아가고 나면 이제 저도 공자님 곁을 떠나겠다는 의미입니다.”
“뭐?!”
일염이가 떠난다고?
“이제 제 호위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훌륭히 자라셨잖습니까. 이대로 간다면 얼마 안 가서 저조차도 쉽게 뛰어넘을 겁니다. 그러니…….”
잠시 말을 멈춘 일염이가 요 근래 한 번도 보인 적 없던 미소를 보이며 말을 이었다.
“이제 저도 세상을 돌며 내키는 대로 살려 합니다.”
“……떠난다고?”
“예, 요 근래 도통 제대로 노름을 해본 적이 없잖습니까. 이제는 사천이 아니고서야 제 명성도 안 통할 정도니 말 다 한 겁니다. 그러니 이제 저도 자유를 찾으려 합니다.”
하긴 이전까지만 해도 도박판에서 활개 치고 다니던 일염이다.
하다못해 별호가 하늘이 점지해 주어 패배를 모른다는.
천점불패(天點不敗)라고 하니 말 다 한 것 아니겠는가.
비록, 이전에 어머니의 호위였다고 한들, 그건 어머니와의 연 때문일 거고, 솔직히 나는 어머니의 부탁으로 맡고 있던 건데 10년 넘게 내 뒷바라지를 했으니 자유가 궁할 때가 되긴 했다.
그러니 당연히 이해가 되는 발언이다.
허나…….
“왜 그러십니까?”
믿을 사람 없던 시절부터 유일하게 믿을 수 있던 일염이.
그 누구보다도 가족같이 여겼던 일염이하고 헤어진다고 하니 속이 울적해졌다.
‘그렇다 해서 말릴 수도 없고 말이지.’
말리려면 말릴 수 있겠지만, 일염이가 아무 생각 없이 편히 말했겠는가.
분명 큰 고심 끝에 나온 말일 거다.
그걸 알기에 나는 차마 말리지는 못했다.
그저…….
“그냥. 네가 편히 살 거 생각하니 배알이 꼴려서.”
틱틱대듯 대충 둘러댈 뿐이었다.
* * *
빙궁을 떠나기로 마음먹은 만큼 이것저것 정리하며 떠날 채비를 하던 와중.
떠나기 전에 밥이라도 먹고 가라며 손수 밥을 차려주신 할머니 덕에 간만에 포식할 겸, 빙궁에 발을 들였다.
……그곳이 현세의 지옥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할머니, 너무 많아요.”
“많이 먹어야 많이 크지. 부족하면 더 말하려무나.”
부족하면 더 말하라면서 이미 러시아식 만두를 내 앞으로 미는 할머니.
그걸 보고 있자니 나는 대략 정신이 멍해짐을 느꼈다.
‘식고문이란 게 진짜 존재하는 거구나…….’
할머니가 손수 밥을 해주시겠다며 진수성찬을 차려주셨다.
안 그래도 어제 힘을 써서 배고팠던 상황.
사천하고는 확연히 다른 음식들을 보자 식욕이 확 돌았고, 색다른 맛에 좋다며 열심히 먹었다.
하지만, 그게 잘못된 걸까.
“왜 더 안 먹니?”
할머니의 음식은 끊이질 않았고, 손은 또 얼마나 크신지 나오는 양이 상상을 초월했다.
‘아니, 옆에 빙궁주랑 소궁주도 있는데 왜 나한테만…….’
장소가 빙궁인 만큼 같이 자리한 빙궁주와 소궁주.
덩치 큰 둘이 나란히 내 건너편에 자리 잡고 있음에도 어째서인지 할머니는 수많은 만두 중 딱 한 개씩만 접시에 올려줄 뿐, 음식을 전혀 주지 않았다.
“너무 배불러요…….”
“아이고, 내 새끼. 어제 일 때문에 놀라서 밥도 제대로 못 먹는구나.”
도저히 배불러서 못 먹겠다고 하자, 대체 무슨 오해를 하는지 할머니의 눈가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아니, 원래 할머니들이란 다 이러신 분들인가?’
전생에 부모도 없었는데, 할머니가 있었겠는가.
당연히 조부모님의 관심은 처음 받아보는 만큼 심히 부담스러웠다.
……특히나, 위장이 제일 부담스러웠다.
“그런 게 아니에요. 할머니. 어제 일을 당황스럽긴 했는데, 잘 이겨내서 그런지 충격적이진 않았어요.”
“정말 네가 유능해서 천만다행이지. 빙빙육각사가 어떤 존재인지 아니? 네 빙고조차도 단신으로 상대하기 버거운 애들이 대다수여서 북풍대 애들이 떼로 가서 겨우 정리하는 놈들이야. 그런데 아무리 새끼라도 해도 그걸 혼자 잡았으니…… 참으로 기특하구나!”
“그렇게 대단한 일인가요?”
“그럼!”
“비록, 새끼라고 할지언정 네 수준으로 상대하려면 적어도 네다섯 명은 필요했을 거다. 아니, 그렇다고 한들, 빙식(氷息)을 버텨내기엔 어려웠겠지.”
“빙식이라면 그 냉기 가득한 숨결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그거다. 근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너는 빙식을 어떻게 버틴 것이냐? 북풍대조차도 사냥할 때 사상자가 생기는 이유가 빙식 때문인데, 너는 아는 눈치인데도 멀쩡하구나. 좁은 동굴 안인데 대체 어떻게 살아나온 것이냐?”
“간단합니다. 물을 뿌렸습니다.”
“물? 물을 뿌리다니?”
“빙빙육각사가 내뿜는 빙식이 빙한하고 같은 거라는 건 아십니까?”
“아니, 전혀.”
“그럼 자세히 설명해 드리긴 그렇지만, 실험해 보시면 알 겁니다.”
실험해 보라고 하자, 빙궁주는 액체질소를 만들었다.
이어서 곧장 물을 뿌려 액체질소를 막아봤고, 이내 라이덴프로스트 효과를 경험하자 어이가 없다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고작 물로 막을 수 있었다니…… 허 참.”
“하하…… 분명 빙궁엔 우리가 더 오래 살았는데 어찌 이렇게 모르는 것이 많은지…….”
빙식을 막아낼 수 있는 게 고작 물이었다는 사실이 여간 충격이 아니었는지 도무지 허탈한 웃음이 끊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건 옆에 있던 소궁주도 마찬가지였다.
“아이고, 우리 손주 그런 것도 알고 고생이 많았구나. 이 할미가 밥 좀 더 갖다주랴?”
“아뇨.”
이대로 있다간 내 위장이 위험하겠다 싶어 만두를 빙궁주와 소궁주 쪽으로 밀어서 짬 처리를 맡기자, 허탈한 얼굴 그대로 빨아들이듯 음식을 집어삼키는 빙궁주와 소궁주.
어째 할머니가 날 보고 음식을 별로 못 먹는다고 하더니, 빙궁 사람들이 죄다 덩치만큼이나 대식가여서 상대적으로 소식가로 보이는 거였다.
“아유, 이놈의 자식들은 어른이라는 것들이 얘 먹일 것도 부족한데, 지들이 다 처먹으려고…….”
“아니요. 할머니. 진짜 괜찮아요.”
부족하기는커녕, 차고 넘치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그러니, 성내는 할머니를 말리며 빙궁주와 소궁주가 밥 먹는 걸 기다리길 잠시.
어느 정도 식사가 이뤄지고 나서야 본론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어제는 내가 결례를 범했다 사과하마.”
비단결 같은 고운 머리카락을 늘어뜨리며 사과하는 소궁주.
“일을 쉽게 처리하겠다는 안일한 생각으로 아무 설명 없이 사지에 밀어 넣은 건 사과한다고 용서하기 힘든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 네가 뭘 요구하든 간에 최대한 들어주려 노력해 보마.”
솔직히 말해서 어제 당했던 걸 생각하면 황당하다 못해 화가 나서 곧장 대머리로 만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머리카락을 소중히 여기는 걸 보니 마땅한 보상만 해준다면 그냥 넘어갈 의향도 있었다.
“이번 일에 대해서는 이 녀석을 제대로 관리 못 한 내 책임도 크다. 이는 엄연히 빙궁의 잘못인 만큼 원하는 보상을 말하면 최대한 들어줄 수 있도록 노력해 보마.”
그런 내 속내를 알았을까.
곧장 합당한 보상을 하겠다는 빙궁주.
그 태도만큼은 마음에 들었으나, 당장은 필요하거나 받을 것이 없었기에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사양하진 않겠습니다만, 지금 딱히 받을 것도 없거니와, 짐이 너무 많아서 들고 가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러니 궁주님께서 말씀하신 호의는 가문에 돌아가서 꼭. 잊지 않고 꼭 받겠습니다.”
솔직히 지금 받을 만한 게 있다고 해도 냉큼 집어삼키기보다 여지를 남기는 게 낫다.
왜냐면 내가 당가의 소가주는 아니더라도, 직계인 만큼 가문의 문제로 키우면 털어먹을 수 있는 돈의 자릿수가 달라지기에.
‘물론, 가문 문제로 넘길 생각은 없지만 말이야.’
원래 인생은 독식이다.
아무리 가문이 좋고, 다 같이 커야 한다고 한들, 내가 가주가 아닌 이상에야 내 쪽 인원들부터 챙기는 게 맞았다.
‘생각해 보니 일염이 몫은 여기서 챙겨주는 게 낫겠다.’
갈 땐 가더라도 돈이라도 쥐여주는 게 고용주의 도리다.
안 그래도 도박판에서 놀려면 돈이 필요한 법.
어차피 내겐 별 쓸모없는 빙빙육각사의 내단도 있겠다, 뭐든 해준다는 소궁주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도 할 겸 내단을 꺼내 내밀었다.
“소궁주님. 제가 빙빙육각사의 내단을 채취해 왔는데, 솔직히 쓸데도 없을 것 같고, 딱히 팔 곳도 없을 것 같으니 빙궁에서 사주셨으면 합니다.”
“이걸?”
내가 내민 내단을 받아 들자, 고심에 빠진 소궁주.
얼마를 불러야 내 기분도 풀면서 빙궁에 출혈이 적을지 고심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빙빙육각사의 내단은 빙궁이 아니고서야 쓸 곳이 많지 않은 탓에 제대로 된 가격은 없다만…….”
그렇기에 고심하던 소궁주는 끝내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합당한 가격을 내놨다.
“금 300냥으로 쳐주마.”
금 300냥이라는.
탈륨 마렵게 하는 아주 째째한 가격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