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08화
당지천이 천일염에게 구조되어 지내던 곳으로 돌아간 시각.
빙궁주의 집무실은 난장판이 되어가고 있었다.
“고모님. 제발 한 번만 봐주십시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아이를 사지로 보내놓고 그딴 소리가 입에 나와!”
빙고를 잡으려는 빙설린과 집무실을 헤집듯이 뛰어다니며 피하려는 빙고.
빙고는 집무실에서 뛰어내리지도 못하고 튀지도 못한 채 도망치고 있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대체 일이 왜 이렇게 꼬여서…….’
북풍대(北風隊)를 이끌고 빙빙육각사를 사냥하고 돌아오니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맞고 있던 빙궁주.
빙궁 밖으로 우렁찬 비명이 울려 퍼졌지만, 빙궁에선 늘상 있던 일이었기에 다들 별 신경 안 썼다.
그런데 웬걸, 나가 있던 사이에 빙궁에 객이 있다는 것 아닌가?
‘내가 직접 맞이하지 말고, 사람을 쓸걸…….’
아무리 늘상 있는 일이라고 한들, 엄연히 궁주란 자리에 있는 만큼 아버지의 추태를 보일 수 없는 법.
빙궁 입구에서 기다리며 당지천를 맞이하며 안으로 못 들어가게 했고, 그사이 비명이 들려왔지만, 당지천은 빙고의 의도를 파악했는지 애써 모른 척을 해줬다.
처음엔 빙설린이 두려워서 조심히 대했는데, 눈치껏 예의를 갖춰 대하는 걸 보니 상식적인 아이 같았다.
‘그냥 미끼로 쓸 생각이었는데!’
그래서 때마침 놓쳤었던 새끼 빙빙육각사가 생각나 십년빙정을 쥐여줬다.
보통 빙정을 보면 눈이 돌아가서 먼저 달려드는 빙빙육각사.
하지만 변종이라도 생긴 건지 새끼 빙빙육각사 한 마리는 경거망동하지 않고, 오히려 폐광 안으로 숨어들었다.
어떻게 잡으려고 북풍대 인원들이 은밀하게 폐광을 이 잡듯이 뒤졌지만, 어디에 숨었는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결국 하는 수 없이 그냥 내려왔어야 했는데, 마침 당지천이 폐광으로 간다는 것 아닌가?
딱 제격이라는 생각이 번뜩 들어서 십년빙정도 챙겨주고, 행여나 맞서 싸울 생각이라고 할까 봐, 빙빙육각사에 대해 상세히 설명해줬다.
거기다, 당지천이 도망쳐 나오면 즉시 대응할 수 있게끔 북풍대 대원들도 다수 대기시키기까지 했다.
그런데…….
‘왜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거냐고…… 크흑.’
갑자기 폐광이 무너지고, 빙빙육각사와 당지천이 같이 고립됐다고 하는 것 아니겠는가.
심지어 최악의 상황에는 천일염이 알아서 할 거라 생각했는데, 도움을 요청한 게 다름 아닌 천일염이라고 했다.
즉, 당지천이 폐광에 갇힌 채 빙빙육각사와 배신자를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 거다.
‘억울하다! 억울해!’
“왜 억울하다는 표정이지? 네가 생각 없이 벌인 일로 인해 빙궁이 얼마만큼의 손해를 입을 줄 아느냐?”
빙고가 속으로 억울함을 성토하고 있자, 둘 사이에 끼어드는 빙궁주.
당지천의 이야기를 듣고 부리나케 설산으로 튀어가 당지천을 집으로 직접 데려다준 뒤, 소궁주에게 분노한 만큼 빠르게 빙궁으로 복귀한 거다.
“거기다, 지천이가 스스로 빙빙육각사를 잡아내서 다행이지. 만약 죽기라도 했으면 우리가 얼마나 큰 손해를…….”
“뭐가 어쩌고 어째?!”
허나, 끼어들자마자 계속 얻어맞는 빙궁주.
손주가 자기보다 먼저 관에 들어갈 뻔했는데, 빙궁이 얼마만큼의 피해를 볼지부터 생각하는 게 심히 역겨웠다.
“네가 그 모양 그 꼴이니까, 자식 놈이 이 모양 이 꼴인 거 아니야!”
“켁…… 누님그냥멍청했다고설명하려한거고가족을소중히해야한다는건이따가…….”
뭔가 초점을 잘못 잡은 걸 알았을까.
빙궁주가 숨도 안 쉬고, 변명을 죽 늘어놨다.
허나, 이미 분노할 대로 분노한 빙설린은 빙궁주의 허리를 꺾여선 안 될 방향으로 완전히 접어버렸다.
“크억, 나 죽어…….”
“히익…….”
제 아비가 종잇장 접히듯 접혀 버리며 울부짖는 걸 본 소궁주는 겁에 질린 채 빙설린을 설득하려 들었다.
“이, 이게 다 빙궁을 위한 거였습니다! 솔직히 10년에 한 번 볼까 말까한 손주보다 빙궁이 더 중요한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 네 말대로 나 또한 빙궁의 사람이다.”
“그럼…….”
“근데 빙궁에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선 항상 내 손주가 우선이야! 애초에 빙궁에도 손해였고 말이야!”
“더, 던지지 마! 이쪽은 절벽이란 말이야아아악!”
손에 있던 빙궁주를 창문 밖으로 던져 버리고 소궁주에게로 다가가 머리채를 쥐어 잡는 빙설린.
“아악! 빙궁의 보물인 내 머리가!”
“지천이가 꼭 가야 하긴커녕, 오히려 불리한 일이었고! 애초에 빙궁 내부의 일이었고! 무엇보다 부탁도 아니라 속여서 보냈고!”
“제, 제발! 저도 일이 이렇게 될지는 전혀! 전혀 몰랐습니다! 당연히 이건 사고입니다!”
“그래? 몰랐으니 넌 아무 잘못 없다 이거야?”
소궁주의 변명이 마음에 안 들어서였을까.
빙설린이 빙고의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자, 빙고는 곧장 항복 선언을 했다.
“물론! 전적으로 제 잘못입니다! 단지 의도한 건 아니다라고 말씀드리고 싶었던 겁니다!”
빙고의 필사적인 변명.
빙궁의 갑이 빙궁주라면 신녀는 갑 중의 갑이다.
막말로 궁주는 죽어도 뒤를 이을 이가 있지만, 신녀는 빙설린 선에서 대가 끊어졌기에 파업 선언을 해버리면 빙궁이 난리가 난다.
그런데 그런 그녀의 심기를 거슬렀으니…… 목숨이 붙어있는 게 용한 수준이었다.
“그건 당연한 거지. 안 그랬다면 지금 넌 저 설산에 묻혀 있었을 거다.”
“제가 직접 가서 지천이에게 보상을 하고! 지천이가 주는 벌도 달게 받겠습니다! 친척이라는 이유만으로 이용하려 든 제가 잘못했습니다!”
“반성할 마음이 들었다니 다행이구나. 이따가 자리를 마련해 줄 테니 지천이에게 꼭 사과하거라.”
다행히 진심은 통했는지 봐주는 화를 진정시킨 빙설린.
심호흡을 몇 번 해 머리를 맑게 한 빙설린은 소궁주의 머리채를 몇 가닥 뽑더니 그대로 빙궁주가 던져졌던 창문으로 던져 버렸다.
“자비로운 처분에 감사드립니다아아아아아!”
떨어지는 와중에도 감사 인사를 전하는 빙고.
하지만 빙설린은 그러거나 말거나 아직 열불이 난 채인 속을 다스리느라 애쓸 뿐이었다.
“안 그래도 이상한 놈들이 계속 꼬이는 바람에 일만 드럽게 많이 해서 시간도 못 냈는데, 애를 잡으려 들어? 아주 그냥 은혜를 원수로 갚는구나. 하아, 내가 아주 그냥…….”
혼자서 얼마나 씩씩대며 속을 분을 삭였을까.
“에휴.”
빙설린의 얼굴에는 분노가 가시고, 안쓰러움이 자리했다.
“그 아이도 오래 버텼다 싶었더니 이제 진짜 갈 시간인가 보구나.”
천일염이 당지천과 함께 있었다면 당연히 구할 수 있었을 터.
아마도 빙고가 당지천을 미끼로 쓸 생각을 했던 것도 천일염을 미끼로 쓸 거란 계산이 깔려 있었을 테니 말이다.
허나,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천일염이 버티던 것도 결국 한계에 달했다는 이야기과 일맥상통했다.
“미리 이겨내길 바랐건만, 역시 그건 무리였나…….”
안쓰러운 마음에 기분이 울적해진 빙설린.
비록, 직접 배 아파 낳은 자식은 아니었어도, 양자로 삼기도 했고, 빙궁에서 모두와 같이 오랜 시간을 보냈던 만큼 가족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되어버리니 심히 가슴이 아팠다.
“큰 싸움이 될 텐데 밥이라도 든든하게 먹여서 보내야지.”
허나, 아이들이 오고 있는 와중에 앞에서 울적한 모습을 보일 순 없는 법.
마지막이라도 밥은 든든히 먹여서 보내야겠다는 생각에 울적함을 털어내고, 얼른 주방으로 발길을 옮겼다.
* * *
당지천이 갑작스레 모습을 감춘 지 벌써 한 달이 넘은 당가.
주변 사람들에게도 하루아침에 말도 없이 사라졌기에 이런저런 구설수에 오를 만도 하건만, 당가주가 직접 나서서 입단속을 시켰기에 별다른 이야기가 돌지는 않았다.
물론, 사람들의 근본적인 호기심까지 막을 수는 없었기에 다들 당지천이 어디로 사라졌는지 궁금해하긴 했다.
하지만, 행적을 알고 있을 만한 이들은 모두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기에 알 길이 없었다.
그런데 그들 말고도 당지천의 행적을 아는 이가 한 명 더 있었으니…….
“그래서 지천이는 빙궁에서는 언제 나올 것 같대?”
“노력은 해봤지만, 전혀 알 수 없었습니다. 대공자님.”
그건 바로 당지천의 큰형인 당지독이었다.
“왜?”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당지천이 사라진 후부터 어떤 수를 쓰든 간에 제대로 된 정보를 얻을 수가 없었습니다.”
“흠…… 그건 안 좋은데.”
당군성의 보고를 받자마자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걸음을 멈추며 인상을 찌푸리는 당지독.
하지만 이내 골똘히 생각하더니 인상을 풀고 다시금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뭐, 어쩔 수 없나. 당가에 돌아왔을 때 한 번에 처리하는 게 좋긴 한데, 군성이 네가 노력을 안 한 건 아닐 테니까.”
“무능력해서 죄송합니다.”
“아니야. 최선을 다하지 않는 놈은 몰라도 군성이 네가 얼마나 노력하는지 누구보다 내가 잘 아는데 널 욕하겠어.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거니까 넘어가자고.”
“감사합니다.”
“그래서 당지천은 어떻게 하기로 했어?”
“특급 살수 20명에게 의뢰를 넣어놨습니다.”
“20명? 그 정도면 무림에 있는 전부 아니야?”
숫자를 듣자, 화들짝 놀라는 당지독.
특급 살수가 어떤 존재이던가.
5명이 모여야 절정고수를 잡는 갑급 살수들과 달리, 개인이 절정고수를 암살 가능한 존재들.
특급부터는 인원수가 적기에 등급보다는 호수로 더 많이 불리고, 그만큼 몸값도 천차만별인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그런 존재를 20명이나 섭외했다니…….
“과잉투자라고 생각되실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당지천의 성장세가 심상치 않잖습니까. 최악의 경우를 상정해서 이쪽 인원을 보내지 않기로 결정한 만큼 확실한 칼이 필요하다고 생각됐습니다.”
“뭐, 그건 아무래도 좋은데…… 순순히 받아? 아, 저번의 실험 결과를 이용했나?”
“예, 당가를 척지는 임무인 만큼 받으려는 인원은 아예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전의 실험 결과를 이용해 전부 받아들이게끔 유도했습니다.”
“그럼 호위의 건은?”
“호위의 실력이 미지수이긴 하나, 가능하다면 회유나 협박으로 물러나게 하게끔 했습니다. 개죽음당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순순히 물러날 겁니다.”
“잘했어. 치워야 한다고 하더라도 신화문주와 연이 있는 이상, 살수들을 소모하는 것보다 연이 없는 사파 고수들 끌어다 쓰는 게 낫지. 어차피 그쪽 애들은 우리가 쓰기 힘드니까 말이야.”
당군성의 일 처리가 흡족하다는 듯 당지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헌데, 팔은 다 나으셨습니까?”
“아유, 그럼. 당연히 나았지.”
당군성을 향해 왼팔을 들어 보여주는 당지독.
팔을 걷자, 흉터 하나 없는 매끈한 피부가 드러났다.
“시기가 안 맞을 수도 있다 생각했는데, 참 다행입니다.”
“그러게. 어떻게 막아보려 했는데 아주 그냥 죽을 기세로 헤집어서 못 막은 게 좀 컸어. 뭐, 그래도 때는 맞췄지만 말이야.”
참 다행이라는 듯 작게 한숨을 내뱉은 당지독은 소매를 다시 내리며 당군성에게 물었다.
“근데 그것보다 주머니는? 다 채웠어?”
“예, 공자님의 주머니를 제외하곤 다 채웠습니다.”
“그래, 그럼 준비가 끝났구나.”
당군성이 고급스러운 가죽 주머니를 건네주자, 당지독은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연무장으로 발을 들였다.
“““천하의 중심을 뵙습니다!”””
연무장에 도착하자, 빽빽하게 들어서 있는 인원들.
이들은 하나같이 당가에서 당지독만을 지지하고,
당지독을 위해 죽을 수 있는.
오늘 벌어질 대계에 참여할 인원들이었다.
“그동안 다들 고생 많았어.”
오자마자 웃는 얼굴로 공로를 치하하는 당지독.
하지만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얼굴에 웃음기를 지우며,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듯 낮고 단호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궐기의 때가 도래했다.
낮은 걸 넘어서 스산함까지 느껴지는 목소리.
허나, 그 목소리를 듣는 사람들 중 그 누구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았다.
-오늘 우리는 당가를 흡수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중원 침공의 서막을 올릴 것이다.
당지독이 말을 마침과 동시에 오른팔을 높게 들어 올리자, 두둥실 떠오르는 반투명한 구체 하나.
정체 모를 구체는 구름처럼 날아올라 점점 높이 올라가더니 금방 당가의 중심에 자리했다.
-가라! 나의 아이들아!
이어서 당지천이 손짓하자 구체는 아무 소리 없이 터지듯 당가 전체를 투명한 막으로 에워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삐이이이이이이!
-삐이이이이이이!
-삐이이이이이이!
당가 내부에선 적색경보가 동시다발적으로 울려 퍼졌고.
-우리가 왔음을 온 세상에 알리거라!
“““존명!”””
역천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