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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106화 (106/200)

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06화

한편, 도움을 요청하러 간다는 천일염은 그다지 다급하지 않은 발걸음으로 설산을 내려가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군.”

씁쓸하다는 듯 읊조리는 천일염.

하지만 얼굴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듯 여전히 무표정할 뿐이었다.

“싸움이 있을 걸 알면서도 자리를 떠나오다니, 나는 약속조차 지키지 못하는 건가.”

당지천과 함께 폐광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천일염은 폐광 안에 뭔가가 있다는 걸 느꼈다.

들어가면 위험할지도 모르는 상황.

그런데도 천일염은 당지천에게 어떤 경고도 주지 않고 폐광에 발을 들였다.

“그나마 기습을 당할 일은 없겠지만, 평소와는 조금 다른 모습인 게 마음에 걸리는구나.”

하지만 깨달음을 얻고 성장해서일까.

경고를 주지 않았음에도 길잡이를 묶으라고 명령하던 당지천.

뭔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는지 문답무용으로 길잡이를 포박했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

얼마나 의외였으면 천일염조차도 조금 놀랐겠는가.

언제나 합리적으로 생각하는 당지천은 명확한 근거가 없으면 사람을 핍박하진 않았는데, 무슨 영문에서인지 길잡이는 일단 붙잡고 봤다.

“차라리 잘된 걸지도 모르겠군. 고지식한 면이 조금 사라진 것이니.”

명확한 근거에 의해 움직이는 것도 좋다.

하지만 때론 위험도 감수해야 하는 법.

지금까지의 당지천은 좋게 말하면 안전주의인 체질이고, 나쁘게 말하면 겁쟁이였다.

물론, 가끔 의협심을 보일 때가 되면 사람이 달라지긴 했지만, 대부분 상황에선 당가에서조차 보수적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위험을 회피하는 경향이 보였다.

그런데 그런 당지천이 이젠 명확한 근거가 없어도 먼저 움직이는 모습을 보였다.

“한층 더 성장했구나.”

다시금 씁쓸한 말투로 읊조리는 천일염은 잠시 멈춰 서서 뒤를 돌아봤다.

“상대는 빙빙육각사와 일류 무인 하나. 이제 막 절정에 입문한 지천이에게는 어려운 정도지만, 실상 무인은 없는 것과 다름없으니 결국 빙빙육각사 하나.”

천일염은 전력을 비교하듯 말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더니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말을 이었다.

“아무리 새끼라고 한들, 빙빙육각사는 조금 벅찬 정도니 위험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 정도가 성장에 딱 좋을 거다.”

심기체란 말이 괜히 있겠는가.

무공 수련은 깨달음을 얻는다고 끝이 아니다.

합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당연히 깨달음을 몸으로도 이해해야 하고 그를 위해선 경험을 쌓는 게 제일이었다.

……허나, 통제할 수 있으면 통제하는 게 맞는 법.

“겨우 생각해 낸 게 이런 되먹지 않은 변명뿐인가.”

폐광이 무너져 내릴 때.

분명 당지천을 구해낼 수 있었음에도 천일염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 하다못해, 당지천 쪽으로 넘어가서 같이 구조를 기다려야 했는데, 그것마저도 하지 않았다.

“호위는 자신의 고용주를 지켜야 한다. 하지만 난 그러지 않았다.”

그동안 천일염은 부탁받은 대로 당지천을 지킨다는 생각으로 움직였었다.

물론, 일전에도 지금과 같이 말썽이어서 떨어진 적이 있다.

하지만, 그땐 그래도 주저 없이 당지천을 찾기 위해 움직였다.

그게 호위의 일이었으니 말이다.

헌데, 지금에 이르러선 그저 지켜야 한다는 약속을 못 지켰기에 지켜야 한다는 ‘판단’이 섰을 뿐이었다.

“지천이는 영특하고 강해졌으니 이젠 호위는 필요 없다. 그러니…….”

더는 정상적인 호위를 제공할 수 없고, 그럴 필요도 없어졌다.

그걸 깨달은 천일염은 다시금 천천히.

빙궁으로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이젠 떠나야겠구나.”

* * *

언제나 인생이란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나기에 재밌는 법.

그런 의미에서 내 인생도 꽤 재밌는 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거다.

-쉬이이이익.

갑작스럽게 얼음벽을 뚫고 나온 거대한 뱀.

머리에 무려 6개나 되는 뿔이 달린 걸 보아하니 따로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이 뱀이 빙빙육각사임을 알 수 있었다.

‘아니, 대체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사방이 돌로 막힌 폐광.

나는 여태껏 바위 위에 얼음층이 쌓여서 얼음벽이 된 줄 알았는데, 저 뱀이 튀어나온 곳을 들여다보니 저기는 통로에 얼음벽이 만들어져 있었던 것 같았다.

‘그건 중요하지 않으니 대충 넘어가고…….’

빙빙육각사가 튀어나온 이상 이유 따윈 어찌 됐건 좋은 거 아닌가.

시선을 정면으로 돌려 빙빙육각사를 보니 파충류 특유의 찢어질 듯한 눈이 나를 위아래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 안녕?”

원래 대화야말로 인간의 미덕이라고 했던가.

독물학에 깊은 조예가 있던 만큼 많은 뱀을 다뤄봤던 나는 외모에 속지 않는 착한 인간이었기에 손에 쥔 암기를 던지기보다 뱀과 대화를 시도했다.

-쉬익.

그러나 쥐뿔도 안 먹히는 뱀과의 대화.

뱀은 콧방귀를 뀌듯 짧게 숨소리를 내고는 곧장 혀를 놀려 빙정 주머니를 가져가려 했다.

“이놈이?”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내 걸 쉬이 줄 수 있겠는가.

빙정을 쥐려는 뱀의 혀를 손으로 쳐내자, 혀가 한 번 튕겨 나가더니 아주 현란한 움직임으로 빙정 주머니를 노려오기 시작했다.

“얌마, 네가 그렇게 혀를 잘 써?”

말해놓고 보니 좀 그렇지만, 지금 그게 뭐 중요하겠는가.

빙정을 낚아채려 뱀의 혀 놀림이 여간 예사로운 것이 아니었기에 쳐내는 데 급급했고, 자칫 잘못하다간 농담을 던질 새도 없이 주머니를 뺏기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아…… 오면 안 됐는데…… 오면 안 됐는데…… 형이 부를 때만 나오라고 했잖아…….”

그렇게 한창 씨름을 하던 도중, 한구석에서 뭐라 중얼거리던 길잡이가 갑자기 실소를 흘리기 시작했다.

“흐흐흐…… 결국 봐버렸구나.”

실성한 듯 웃음을 흘리던 길잡이의 얼굴이 흉신악살처럼 일그러지더니 나를 보며 외쳤다.

“이미 봐버린 이상 살려 보낼 수 없다! 여기서 죽여주마!”

그전까지의 순한 양 같던 기세는 어디 갔는지 흉흉한 기세를 흩뿌리는 길잡이.

그 녀석을 보는 내 감상은 매우 단촐했다.

“……그러냐.”

“이놈! 감히 나를 무시하는 거냐!”

“아니, 그건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그렇게 손발 다 묶인 채로 그러면 무서워할 수가 없잖아.”

연신 흉흉한 기세로 위협적인 말을 내뱉는 길잡이.

허나, 손발이 묶인 채로 꿈틀대는 게 지렁이 같아서 무서워하려야 무서워할 수가 없었다.

“이이이이익!”

무서워하려야 할 수 없다고 그러자, 다시금 바닥에서 꿈틀대며 분노를 표출하는 길잡이.

마치 현대 예술의 하나를 보는 듯 온몸으로 분노가 표현하는 솜씨가 예술 그 자체였다.

“빙빙아! 집어삼켜!”

-쉬이이!

무슨 포X몬도 아니고, 죽이 척척 들어맞는 둘.

참으로 우스운 상황임에도 한입에 꿀꺽 삼켜질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뱀의 아가리를 보고 있으니 전혀 웃음이 나지 않았다.

왜냐면…….

“옘병!”

크게 열린 뱀의 아가리 속.

그 속은 살이 아닌 얼음으로 보이는 것들이 가득 차 있었기에.

‘역시 영물이라 성문이 없는 건가?’

과거부터 독과 연관 깊은 생물을 꼽자면 빠짐없이 나오는 것이 뱀.

당연히 독물학에 조예가 깊었던 나인 만큼 뱀에 대해서도 꽤 잘 알았다.

‘아니, 그럼 숨을 어떻게 쉬는데?’

뱀은 자신의 머리보다 훨씬 큰 먹잇감을 삼킬 수 있다.

그렇기에 ‘성문’이라는 인간의 기도에 해당하는 부분이 입 쪽에 있었고, 나는 그 부분을 노리려고 했다.

……물론, 영물이라 없는 것 같지만 말이다.

‘그래. 영물이라 성문은 없을 수도 있긴 해. 근데 왜 안쪽까지 얼음 덩어리지?’

원래 거대한 생명체일수록 몸 내부로 들어가서 약점을 찾는 게 기본이고, 특히나 입안은 약점으로 꽂히는 곳이 아니던가.

나 또한 빙빙육각사…… 빙빙이를 처음 봤을 때, 그 크기를 보고 막연히 입안을 노리면 되겠거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단단해 보이는 얼음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 당황을 금치 못했다.

“흡!”

하지만, 겉모습만 단단해 보일 수도 있었기에 최대한 기합을 넣으며 입안으로 뿌렸다.

“빙빙아?”

그러자, 다가오다가 말고 입을 다무는 빙빙이.

암기가 입안으로 들어가는 건 확인했어도 박히는 건 확인 못 했기에 단정 지을 수는 없었지만, 대충 상태를 보아하니 치명적이진 않아도 무시하긴 어려운 정도인 듯했다.

-쉬이익.

아까와 같이 잠시 혀만 튕겨 공격한 빙빙이가 이번엔 머리를 조금 더 밀어 넣더니 비늘과 뿔에 얼음을 맺히게 해 얼음 가시를 뿜어냈다.

‘이게 소궁주가 말하던 그건가?’

물경 백을 헤아리는 제각기 다른 위력인 얼음 가시들.

특히나 머리에 달린 뿔에 맺힌 뒤 날아오는 가시들은 하나같이 크기도 크고, 위력도 강해 보였다.

하지만…….

“이 정돈 쉽지.”

내가 명색이 당가의 사람인데 암기 하나 제대로 못 피하겠는가.

안 그래도 경지가 올라서 기감이 날카로워진 만큼 수월하게 피할 수 있었다.

‘생각보다 제대로 날아오는 가시가 적어. 이 정도면 공격도 할 수 있겠는데?’

추뢰신보를 펼쳐 얼음 가시를 하나씩 피해 나가며 이번엔 눈을 향해 암기를 날렸다.

그러자, 이번엔 눈을 질끈 감는 빙빙이.

그와 동시에 얼음 가시가 날아오는 게 멈췄기에 나는 곧장 튀어 나가며 주먹에 기를 쏟아부었다.

‘이게 권강?’

기를 쏟아붓자, 보랏빛 기운이 맺히는 주먹.

이전에 내기를 주먹에 담을 때 보이던 아지랑이와 달리, 응축된 기의 집약체가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뭐든 부술 수 있을 거 같아.’

상대가 영물이고, 단단하기 짝에 없는 얼음이고는 다 필요 없었다.

지금 내 손에 응집된 기운은 그야말로 패도.

그 무엇이 오더라도 단번엔 산산조각낼 수 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어딜 눈을 감아!”

-쩡!

있는 힘껏 빙빙이를 후려갈기자, 단번에 깨지는 소리와 함께 빙빙이의 대가리가 동굴 천장에 처박혔다.

-쉬쉭!!!

역시 주먹이야말로 훌륭한 대화수단이라고 했던가.

비늘은 물론이고 피부까지 있는 대로 깨져나간 빙빙이가 온몸에서 푸른 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방언을 쏟아냈다.

-스스스스!

허나, 일격에 쓰러뜨리기엔 역부족이었는지 급히 정신을 차린 빙빙이는 눈과 입을 앙다문 채 급히 머리를 벽 속으로 집어넣었다.

“빙빙아! 산 채로 먹기 부담스러우면 아예 얼려 버려! 그래야…… 켁.”

“시끄러워!”

원래 병사와 지휘관이 있으면 지휘관부터 쏴야 하는 법.

잠시 틈이 난 사이 뒤늦게라도 길잡이를 향해 암기를 던졌지만, 이미 길잡이의 말을 들은 빙빙이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있었다.

‘아니, 지가 무슨 용인 줄 알아.’

용은 물론이고, 이무기는커녕, 손발도 안 달렸는데 용의 숨결을 쓴단 말인가?

-쉬이이.

하지만 안타깝게도 빙빙이는 용이 아니어도 쓸 수 있는지, 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어디 몸을 숨길 데가 없나?’

본디 브레스를 뿜고 나면 그로기에 걸리는 게 드래곤의 정석.

여긴 무협이지 판타지도 아니고, 빙빙육각사도 드래곤이 아니었지만, 혹시 쓰고 나면 무기력한 상태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기에 어디 피할 곳이라도 없을까 싶어서 주위를 둘러봤지만, 원래부터 막힌 길.

원한다고 해서 갑자기 뿅 하고 새로운 길이 나타날 리가 없지 않겠는가.

“인생 망했네.”

이미 빙빙이의 볼은 부풀 대로 부푼 상황.

지금 와서 땅을 파고 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이대로 가면 단번에 급속 냉동되어 폐광의 명물이 되어버릴 것이다.

……만약 강시제조자가 본다면 공중제비 돌며 감탄할 만큼 잘 보존된 상태로 말이다.

“에라이.”

이제야 깨달음 좀 얻었는데, 죽을 수 있겠는가.

피할 곳이 없다는 걸 깨달은 나는 품을 뒤져 주머니 하나를 꺼낸 뒤, 곧장 빙빙이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눈을 번쩍 뜨는 빙빙이.

-스스스.

눈가를 좁히며 입꼬리를 말려 올리는 게 가소로운 듯 나를 보는 느낌이었고, 숨을 들어 마신 채로 혀를 낼름대며 소리를 내는 게 마치 죽을 자리를 찾아왔다며 비웃는 듯했다.

‘뱀이 이렇게 감정 표현에 능숙한지는 처음 알았으면 진작에 연구해서 학회에 보고하는 거였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일.

하지만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었기에 품에서 큰 주머니 하나를 더 꺼내 들며 빙빙이에게 달려들었다.

“아까 맞은 건 기억 못 하니? 뱀 대가리라 그런가?”

뱀 대가리라고 하자, 빙빙이는 기다렸다는 듯 냉기를 쏟아냈다.

-샤아아아아!!

모든 것을 얼려버릴 듯 쏟아지는 냉기.

동굴을 완전히 메우고 피할 곳조차 없는 극강의 공격이었기에 누구나가 버틸 수 없다고 생각할 거다.

허나, 나는 그 속에서 태연히…… 아니, 정확히 태연히까지는 아니지만, 어쨌든 전진하고 있었다.

바로…….

“효과는 미미했다! 이 자식아!”

물을 뿌리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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