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04화
빛 한 점 없어서 으스스한 폐광.
원래라면 설산 밑이고, 지하인 만큼 추위에 덜덜 떨고 있어야겠지만…….
‘무려 절정고수인 이 몸이 그럴 리가.’
나에겐 그저 서늘한 정도에서 그쳤다.
안 그래도 음기를 다루게 된 이후부터 추위에 둔감해진 나다.
그런데 경지까지 높아졌으니 추위를 탈 리가 있겠는가.
‘더위라면 모르겠지만, 추위는 껌이지.’
여름보다 겨울이 좋은 남자랄까.
곳곳에 고인 물웅덩이가 꽁꽁 언 폐광에서도 얇은 옷차림으로 다니는 데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어둠도 별거 아니지.’
앞으로 걷다 보니 계단처럼 툭 튀어나온 턱.
옛날 옛적에 지진 같은 게 나서 층이 나뉜 건지 살짝 위로 올라와 있었다.
예전이라면 아마 넘어지지는 않아도 발이 걸려 휘청거렸을 상황.
그러나 경지가 오른 지금은 진작에 미리 알고 잘 대처했고,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어두워지는 폐광 안도 불편함 없이 거닐 정도로 잘 보였다.
‘물론, 색깔까지 구분할 수 있는 건 아니라 광원이 필요하긴 하지만 말이야.’
피치블렌드는 보통 흑색이나 갈색으로 되어 있다.
당연히 폐광 안에서 가장 흔히 보이는 색깔인 만큼 미묘한 색 차이가 아니면 구분하기 어려웠다.
다른 구분법으로 기포가 올라온 듯한 특유의 모양을 확인하는 방법이 있긴 하나 그것 역시 좀 흔한 모양이기에 확실히 구분하려면 색깔을 보는 게 빨랐다.
-짝, 짝.
“일염아, 야명주.”
마치 집사에게 명령하듯 박수 두 번치고 일염이를 부르자, 대답 없는 일염이.
“…….”
어딘가로 신경이 가 있는지 말없이 동굴 밖을 쳐다보고만 있었다.
“일염아? 야명주 비춰달라니까?”
다시 한번 말하자, 그제야 주섬주섬 야명주를 꺼내 앞을 비추는 일염이.
“주문하신 야명주 나왔습니다.”
아주 공손한 손으로 야명주를 꺼내 앞을 비췄다.
“좋아, 좋아.”
폐광을 메우는 환한 빛.
어둡고 서늘한 폐광이 밝아지자, 무서운 폐광에 광물을 캐러 온 사람이 아니라 단순히 관광하러 온 관광객이 된 느낌이었다.
“그럼 더 안으로 가보자.”
야명주도 꺼냈겠다.
피치블렌드를 찾을 생각에 콧노래를 부르며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뒤에서 들려오는 길잡이의 목소리.
“저, 저도! 같이 데려가 주세요!”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 홀로 떨어져 있던 길잡이가 겁먹은 듯 눈을 질끈 감고 우리 쪽으로 뛰어왔다.
‘귀찮은데.’
여태껏 폐광을 찾느라 어쩔 수 없이 같이 왔다지만, 존재 자체가 너무 발암이었다.
안전할 것 같은 폐광이라고 해도 길잡이랑 같이 다니면 없던 문제도 생길 것 같은 그런 느낌?
‘그래도 데려가야 하긴 하겠지?’
폐광에 들어오는 게 목적이었다고 한들, 들어왔다고 끝일 리가 있겠는가.
빙궁까지 돌아가려면 당연히 누군가의 안내가 필요하다.
거기다, 아무리 밉다고 한들, 밖에 혼자 놔두면 무슨 문제가 생길지 몰랐다.
멀쩡한 사람 죽일 수는 없으니 별수 없이 데려가기로 했다.
‘에휴, 내 팔자야.’
너무 합리적으로 생각한 탓일까.
나도 소궁주처럼 막무가내로 나갔으면 이런 상황을 안 겪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에 다음부터는 막무가내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제발 버리지 말아주세요오오!”
“알겠으니까, 빨리 오시기나 하시죠.”
“예에에!”
안 그래도 소리가 울리는 폐광 안이다.
그런데 시끄럽게 소리를 꽥꽥 질러대니 귀가 아플 지경이었다.
‘소리 지르지 말라니까.’
속으로 한숨을 쉬며 길잡이를 기다리길 잠시.
얼마나 무서웠는지 눈 한 번 안 뜨는 길잡이가 우리 근처에 거의 다가왔을 때, 문득 코앞에 턱이 있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거기…….”
턱에 걸려 넘어질까 봐 턱이 있다고 알려주려던 찰나.
길잡이가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왔기에 순식간에 턱 앞에 섰고, 걸려 넘어지게 될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왔습니다. 헥, 헥.”
거기에 턱이 있다고 알고 있었다는 듯, 아무 일 없이 다가오는 길잡이.
‘대체 어떻게?’
안력을 높여 어두운 곳을 들여다보는 거랑 눈을 감은 채 기감을 이용해 달리는 건 엄연히 차이가 컸다.
전자는 기의 수발이 자유롭지 않아도 충분히 가능한 일이고, 후자는 나도 연습해야 가능할 만한 일.
그러니 이건 미리 알고 있었다고밖에 볼 수 없었다.
……아니면 길잡이가 실력을 숨기고 있는 걸 테니까 말이다.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아니요. 폐광에서 찾아야 할 게 어디에 있을까 고민 좀 해보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본 적은 없는지라…….”
“어떻게 생겼는지 이야기해 주시면 저도 같이 찾아보겠습니다.”
“무서울 텐데 괜찮으시겠어요?”
“눈 뜨고 다니면 무섭긴 하겠지만, 폐광 안에 있는 게 더 무섭습니다. 그러니 폐광에서 빨리 나갈 수 있다면 뭔들 못 하겠습니까.”
평범하게 들으면 무서우니까 폐광에서 빨리 나가고 싶다는 말.
허나, 뭔가 이상함을 느낀 내게는 내 행동을 제약하고, 폐광에서 최대한 빨리 내보내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뭔가가 구리다.’
당가가 독을 쓰는 만큼 당가를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많았다.
그래서 처음 봤을 때, 날 무서워하는 걸 보고도 별생각이 안 들었었다.
허나, 여기까지 오면서 하나둘씩 늘어가는 위화감.
폐광까지 오면서 아무런 발작도 없다가도 폐광 앞에서 무서워하거나, 혹은 찝찝할 만한 이야기를 하면서 들어오는 걸 만류했다.
그런데도 폐광에 발을 들이자, 겁에 질린 척 눈을 감으면서도 익숙한 듯 폐광의 안까지 뛰어 들어왔다.
‘솔직히 아직은 끼워 맞춘 것에 불과하니 우연일지도 몰라.’
물론, 우연일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었다.
앞의 2개는 순전히 겁이 많은 것뿐이고, 턱에 발이 걸리지 않은 건 그냥 감이 좋아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소궁주가 했던 말과 행동들이 별 의미 없다고 생각되지는 않아.’
그렇지만 명색이 소궁주씩이나 되는 사람이 아무 의미 없는 행동을 하진 않았을 것.
그때 당시에는 대체 왜 이러는지 이해가 전혀 안 갔지만, 지금 와서 하나씩 뜯어보니 얼추 앞뒤가 들어맞았다.
‘옘병. 또 이상한 거에 꼬였네.’
아직 확증은 없지만, 어느샌가 뒤가 구린 일에 엮여 버린 듯한 상황.
편하게 피치블렌드만 주워 가려고 했건만, 소궁주가 부린 수작에 골치 아픈 일이 되어버렸다.
“공자님, 안 가십니까?”
어느새 앞장서서 나가고 있는 일염이와 그 뒤를 따르는 길잡이.
여전히 겁에 질린 얼굴로 조심히 폐광 안을 걷고 있는 걸 보고 있자니 이걸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고민이었다.
그러나 그런 고민도 잠시.
‘생각해 보니 나도 이제 막무가내로 나가기로 했잖아?’
분명 일전의 나는 외당숙의 엄청난 행동 능력에 감탄한 나머지 합리적인 생각은 그만두기로 했다.
그런데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당연히 제대로 된 답이 나올 리가 없었다.
‘나도 이제 막가파야.’
생각이란 걸 포기하자 곧장 튀어나오는 답.
너무나도 시원스럽고 명쾌한 해답에 대체 이 쉬운 방법을 몰랐는지 한탄스러울 지경이었기에 망설임 없이 곧장 행동으로 옮겼다.
“일염아.”
“예, 공자님.”
“이놈 묶자.”
“……예?”
길잡이를 묶어버리자고 하자, 황당하다는 듯 되묻는 일염이.
나는 그 물음에 똑같은 말을 하기보단 직접 행동으로 보여줬다.
“고, 공자님?”
단번에 길잡이의 팔을 확 잡아채자, 애처롭게 나를 올려다보는 길잡이.
대체 왜 이러냐는 듯 억울하다는 눈빛까지 같이 보냈기에 남들이 보면 참으로 불쌍해 보였겠지만, 나한테는 어림없었다.
“묶어.”
“알겠습니다.”
묶기 좋게 양팔을 모아주자, 그제야 끈을 꺼내 묶는 일염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긴 했으나, 일단 시키니까 하는 모습이었다.
“가,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왜 이러긴. 그건 나보다 네가 더 잘 알지 않을까?”
“저, 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에헤이, 자꾸 그렇게 나오면 재미없어.”
발광하는 길잡이와 움직이지 못하게 고정하는 일염이.
길잡이는 정말로 억울하다는 듯 뭐라뭐라 외치며 사시나무 떨듯 떨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흔들리는 동공 속에 침착함이 엿보이는 게 역시 뭔가가 있는 듯했다.
‘역시 위험 요소는 미리 배제하는 게 맞지.’
자고로, 사고는 미연에 방지하는 게 최고인 법.
길잡이가 문제일 것 같으면 허튼짓 못 하게 막아버리면 되는 거 아니겠는가.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단순히 의심만으로 사람을 구속하는 건 굉장히 잘못된 일이지만, 뭔가 촉이 왔다.
“공자님.”
길잡이가 몸부림치는 걸 멈추자 나지막이 나를 부르는 일염이.
따로 할 말이 있는 건 아니고, 시키니까 일단 묶긴 묶었는데, 이건 길잡이한테 실례가 아니냐고 묻는 듯한 느낌이었다.
‘실례면 어쩔 건데. 내 할머니가 빙궁신녀고, 작은할아버지가 빙궁주야.’
일방적으로 갑질을 해도 충분히 찍어 누를 수 있는 지위.
그런데 내가 일방적으로 갑질하는 것도 아니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길잡이를 포박해서 지켜준다는(?) 훌륭한 명분까지 있다.
즉, 정말 모든 게 우연의 일치고, 길잡이나 소궁주가 꿍꿍이가 없었다고 한들, 빠져나갈 구멍은 있다는 거다.
“어디로 튈지 모르잖아. 폐광에서 갑자기 뛰쳐나가면 못 찾을 가능성 커. 거기다. 그렇게 되면 우리도 위험해지잖아.”
거짓된 명분을 입에 담자,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를 보는 일염이.
반면에 길잡이는 겨우 그런 이유냐는 듯 눈을 이상하게 찡그렸지만, 그사이 한순간이나마 안도가 스쳐 지나갔다.
‘이거 남 속이는 데 재능이 별로 없는 사람 같은데…….’
제 딴에는 숨긴다고 하지만, 조금씩 엿보이는 단서들.
확신까진 주지 않지만, 긴가민가한 정도는 됐기에 이런 사람이 대체 무슨 짓을 하려고 하는 걸까 궁금해졌다.
‘고독이라도 있었으면 먹였을 텐데 아쉽네.’
고독(蠱毒).
사람을 독으로 저주하는 주술과 주술적인 방법으로 만든 독을 의미하는 단어.
흔히들 아는 수천 마리의 독충을 작은 방에 가둬놓고 싸우게 시켜, 가장 마지막에 남은 독충에게서 독을 뽑아내는 방법이 고독을 만드는 대표적인 방법 중 하나였다.
물론, 그런 걸 쓰고 싶다는 이야기는 아니고, 내가 말하는 고독은 여기에 속하지 않는 평범한(?) 음양고였다.
흔히 음고와 양고로 나뉘어서 양고를 먹은 쪽은 음고를 먹은 사람의 말을 듣게 되는 그 음양고 말이다.
‘음양고는 당가에도 얼마 없으니 어쩔 수 없나.’
먹이는 순간 생사여탈권을 쥐고, 고통도 마음대로 줄 수 있는 정신 공격 병기.
심문은 기본이며 고문도 별도의 기술 없이 가능하게 만들어주고 무엇보다 내부자를 첩자로 잡입시킬 수 있다는 굉장히 매력적인 물건이었던 만큼 당가에 위기가 올 때마다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렇기에 그 숫자가 급격하게 줄어들어 이제는 장로급이 아니면 만지기도 힘든 물건이 되어버렸다.
‘뭐, 그건 말 그대로 불가항력.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그렇다 치지만…….’
속내가 궁금한 건 길잡이뿐만 아니라, 한 명 더 있었다.
‘소궁주가 이 점을 알고 그런 걸까?’
길잡이를 바꿔달라고 하자, 대뜸 무릎을 꿇은 소궁주.
그때는 워낙 경황이 없어서 아무 생각도 없이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간의 언행을 되짚어보니 뭔지 모르겠지만, 손 안 대고 코 풀려는 냄새가 났다.
‘몰랐다면 모를까. 만약 알고서 그랬다면…….’
공짜를 좋아하면 대머리가 되는 법.
머리카락을 어지간히도 소중히 여기는 것 같던데 그 사실을 망각한 외당숙에게는 내 친히 형벌을 내릴 것이다.
‘내가 기필코 탈륨을 먹여서 대머리로 만들어주마.’
바로 원소 번호 81번 탈륨(Thallium).
반수치사량은 0.8g 정도로 높지 않지만, 무려 부작용으로 머리가 빠지는 독을 소궁주 주둥이에 가득 쑤셔 넣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