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03화
아니, 뭔 선물을 주고서 마음에 드냐고 물어보는 것도 아니고, 좋은 선물인 것 같냐고 묻지?
빙고란 사람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좀 많이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래도 왠지 모르게 기대에 찬 눈으로 날 보는 것 같아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예.”
솔직히 내가 뭔가를 해줬다면 모를까.
개인적으로는 뭘 도와주긴커녕, 처음 보는 사이였기에 약소한 선물이어도 마음에 들었다.
……하는 행동이 좀 이해가 안 가서 그렇지.
“다행이구나. 이로써 내 머리는 안전하겠어.”
다행히 기대에 부응했는지 뭐라 혼잣말을 지껄이며 머리를 정돈하는 빙고.
연신 가르마를 넘기는 그 머릿결은 매끄럽다 못해 비단결처럼 곱기까지 했다.
“…….”
정말 이 사람.
뭐 하는 사람일까.
“어제 아버지께 전해 들었다. 깨달음을 얻었다고?”
“예, 많이 부족하지만, 조부님께서 가르침을 내려주셔서 깨달음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 그러면 폐광 근처에 갈 만하겠구나.”
“갈 만하다니…… 폐광 근처에 뭔가가 있습니까?”
“있었지.”
“……끝인가요?”
“끝이다.”
“…….”
아니, 빙궁주는 고삐 풀리면 말이 드럽게 많던데, 이 사람은 대체 왜?
그래도 눈치가 없는 건 아닌지 얼굴에 의문이 떠오른 걸 보고 부연 설명을 해줬다.
“내가 빙궁에서 자리를 비우는 이유가 빙빙육각사(氷聘六角蛇)를 잡기 위해서다.”
“빙빙육각사?”
아니, 뭔 놈의 이름이 그러냐?
“혹시 빙정을 찾아다니는 뿔 여섯 개 달린 뱀이라서 빙빙육각사입니까?”
“그래.”
허 참.
이름 한번 신기하게 지어놨네.
“어쨌든 빙빙육각사가 정말 가끔 폐광 근처에 돌아다닌다. 그 주변은 한 번 정리하긴 했으니 혹시 모르니 조심하라고 하는 거다.”
“빙빙육각사를 만나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간단하다.”
빙고는 아까 내게 건네준 주머니를 가리키더니 말했다.
“내가 준 빙정 주머니를 던지고 있는 힘껏 도망쳐라.”
“빙정 주머니를요? 상대하기엔 많이 위험한 영물인가요?”
“일전에 당가주가 와서 독을 썼을 때, 빙빙육각사는 냉기로 모두 얼려서 독을 못 쓰게 만들었다. 물론, 그 이후에 당가주가 뭔지 모를 암기로 처리하긴 했다만, 강한 녀석은 나도 못 잡을 정도니 그냥 도망쳐라. 먼저 공격하지 않고 빙정만 던지면 웬만해선 물러나는 녀석들이 대부분이니.”
그냥 상대하지 않는 게 상책이라는 빙고.
이야기하는 걸 들어보니 아마도 빙정을 먹으며 점점 강해지는 영물인 듯했다.
‘그렇다면 만약 만년빙정을 먹은 녀석이 있다면…….’
마주치는 순간 끔살행.
도망칠 새도 없이 잡아먹히지 않을까?
“혹시 십년빙정을 들고 있다가 괜히 빙빙육각사를 불러들이는 게 아닐까요? 괜히 센 애라도 만나면…….”
“빙빙육각사는 빙정 냄새를 기가 막히게 맡기는 하지만, 새끼가 아닌 이상에야 십년빙정은 있으면 먹지, 굳이 찾아가서 먹을 정도는 아니다.”
빙고가 염려할 필요 없다는 듯 고개를 젓고는 자신의 주머니를 열어서 보여줬다.
“거기다, 아까 이야기했듯이 먼저 공격하지만 않으면 웬만해선 물러나니 걱정하지 말아라. 애초에 폐광 근처는 정리하고 온 것이니.”
빙고의 주머니 안을 들여다보자, 눈에 들어오는 건 아까 전 빙정과 비슷하게 생긴 얼음덩어리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아까는 냉장고에서 볼 법한 평범한 얼음이었다면, 이번엔 지붕에 매달린 고드름을 보듯이 가시처럼 생겼다는 점이었다.
“빙빙육각사의 비늘이다. 공격할 때는 이 위에 얼음을 얼려서 쏘아내지. 빙정을 얼마만큼 먹었느냐에 따라 입으로 냉기를 뿜어낼 수도 있는데, 찰나의 순간이 아닌 이상 맞으면 끝이라고 생각해라.”
“허어…….”
브레스까지 뿜는다니.
이렇게 들으니까 이름만 뱀이지 완전 용이 따로 없지 않은가.
“그래도 넌 별문제 없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 거라.”
그런데도 나한텐 아무 문제도 일어나지 않을 거라며 단언하는 빙고.
뭐, 걱정하지 말라고 하는 소리면 이해라도 하겠다만, 눈앞의 빙고가 그럴 위인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렇기에 아무리 정리하고 왔다고 해도 다시 생길 수도 있는 거고, 빙정을 던지고도 도망치지 못할 수도 있는 건데 무슨 자신감으로 저러는지 감이 안 왔다.
‘진짜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네.’
비록, 오랫동안 본 건 아니지만, 살면서 본 사람 중 가장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이 있다면 외당숙이 아닐까.
“길잡이를 붙여주마. 나타날지 안 나타날지 모르는 빙빙육각사보다 설산에서 길을 잃는 게 더 위험하니 절대 길잡이 없이 혼자 다니지 말고, 만약 길을 잃었다면 빙궁이 보이는 게 아닌 이상에야 그 자리에 가만히 있거라. 우리가 구하러 가겠다.”
하지만 빙고는 내가 그런 생각을 하든지 말든지 신경 안 쓴다는 듯, 주의 사항만 말해줄 뿐이었다.
* * *
외당숙으로부터 몇 가지 주의 사항을 추가로 듣고 빙궁의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자, 달려오는 한 사람.
“헥, 헥,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뭔가 빙궁 사람들은 하나같이 발육상태가 좋길래, 길잡이도 덩치가 좋은 사람이 올 줄 알았는데, 상당히 왜소한 사람이 왔다.
‘수준은 대충 일류 정돈가.’
“갑작스레 오셨을 텐데, 괜찮습니다. 그보다 뛰어오느라 지치신 것 같은데 좀 쉬다 가셔야 하지 않을까요?”
“체력 하나는 자신 있어서 괜찮습니다. 폐광까지 안내해 드리면 되는 거 맞나요?”
“예, 맞습니다. 그 전에…….”
산에 대해 잘 모르긴 하지만, 외당숙 말대로 길을 잃으면 위험하다는 것만큼은 알고, 몇 번이나 주의를 받았다.
그렇기에 아예 길잡이에게 천리추혼향을 발라두려고 작은 호리병을 하나 꺼내 들었다.
“힉! 히익! 도, 독?!”
그런데 호리병을 보자마자 발작하듯 뒤로 도망치는 길잡이.
체력이 많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는지 순식간에 저 멀리 사라져 버렸다.
-으아아아악!
마치 괴물이라도 본 것처럼 보이지 않는 곳에서 연신 비명을 질러대는 길잡이.
“하…… 아주 그냥 빙빙육각사라도 만나면 온갖 괴성은 다 지르면서 도망치겠네.”
정문에 덩그러니 남겨진 우리는 허망한 눈으로 그가 사라진 곳을 바라볼 뿐이었다.
* * *
당지천과 천일염이 길잡이의 안내를 받아 폐광으로 가는 길.
걸어도 걸어도 오직 눈밭밖에 보이지 않는 풍경에 멍하게 얼마나 걸었을까, 그제야 길잡이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사과를 했다.
“죄송합니다. 제가 겁이 워낙 많은지라…….”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연신 사과하는 길잡이와 연신 괜찮다고 하는 당지천.
겉으로는 아주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연출되는 중이었지만, 사실 당지천의 속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어떻게 길잡이를 안 바꿔주지?’
빙고는 별일 없을 거라고 했지만, 조금의 위험이라도 있다면 만전을 기하는 게 맞는 법.
길잡이가 도망쳤을 때, 허망하게 그가 떠난 자리를 보던 당지천이 처음 한 일은 당연히 길잡이를 바꿔달라고 부탁하는 일이었다.
‘설득도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하고 말이야.’
그런데 빙고는 단칼에 못 바꿔준다면서 상상도 못 한 방법으로 항의 자체를 틀어막았다.
바로…….
-미안하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리는 방법으로 말이다.
-다, 당숙.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너의 사정을 이해하겠지만, 내가 해줄 수 있는 일이 없구나. 정말 미안하다.
-이러지 마시죠. 제가 곤란해집니다.
-네가 곤란해질 게 뭐 있겠느냐. 다 이 내가 못나서 그런 건데.
당지천에게는 다시 생각해 봐도 아찔한 상황.
그 장면을 빙궁주를 비롯한 외가 사람들이 보기라도 했다면 어떤 취급을 받았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몸을 부르르 떨게 됐다.
‘진짜 고단수 중의 고단수야.’
폐광의 위치를 알려달라고 한 건, 당지천이 억지를 쓴 게 아니라 빙궁주와의 약속이었다.
그렇기에 길잡이를 바꿔달라고 하는 건 당지천의 당연한 권리였다.
하지만 당연한 걸 요구하는데도 사람을 쓰레기로 만들어 버리는 듯한 기분이라 당지천은 도저히 뭐 협상을 할 수가 없었고, 결국 울며 겨자 먹기로 지금의 길잡이의 안내를 받기로 한 거다.
‘빙궁의 미래는 밝구나. 참 다행이긴 한데…… 하아.’
그래도 빙궁의 미래가 밝다는 사실만큼은 다행이라 생각하는 당지천.
소궁주가 체면이고 뭐고 간에 이득이 되는 일은 거리낌 없이 하는 모습을 보고, 이 정도 억척스러움이면 외가가 망할 일은 없다는 생각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며 안도하는 동시에 한숨을 쉬었다.
……적어도 지금의 당지천은 이 길잡이를 데리고 폐광에 들어가야 했기에.
“저기가 폐광 입구입니다.”
길잡이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자, 당지천의 눈에 들어온 건 온통 눈.
대체 어딜 보는 걸까 싶어 한참을 주위를 둘러보던 당지천은 길잡이가 손가락으로 입구를 가리키자 그제야 9할 이상이 눈에 파묻힌 동굴의 입구를 볼 수 있었다.
“파묻혀 있군요.”
“예, 마지막으로 들어가신 게 빙궁주님이실 정도로 오랫동안 방치되어서 그렇습니다. 다행히 아무 흔적도 없이 깨끗한 걸 보면 다른 생명체가 들어간 것도 아닌 듯합니다.”
겁이 많긴 하더라도 길잡이는 길잡이.
당지천은 길잡이가 할 법한 말을 길잡이에게 듣자, 다행히 능력이 없는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게 돼서 안도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뒤이어지는 길잡이의 말에 머리를 부여잡았다.
“들어가실 건가요?”
“들어가려고 온 건데요?”
“역시 그렇겠죠…….”
폐광에 들어가겠다고 하자, 지진이라도 난 듯 좌우로 흔들리는 길잡이의 두 눈.
그걸 보고 있자니 당지천은 머리가 아파옴을 느꼈다.
‘아니, 폐광에 들어가려고 오지. 무슨 관광이라도 하러 와? 생각해 보니 관광하러 와도 들어가야 하는 건 마찬가지긴 하네.’
어쨌든, 길잡이가 너무 겁을 먹는 것 같자, 답답해진 당지천이 앞서서 폐광의 입구로 다가갔다.
“제가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당지천이 앞서 나가자, 냉큼 당지천을 말리는 길잡이.
“공자님. 이 폐광에는 대대로 불가사의한 이유로 죽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대대로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조화경에 든 고수가 이 폐광에 들어갔다가 갑자기 내공이 역류해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온갖 괴담을 늘어놓으며 당지천의 발걸음을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짜증이 극에 달한 당지천은 무시로 일관하며 폐광 안으로 들어갈 뿐이었다.
“그리고 막!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폐광 안에 한 시진쯤 있자! 주화입마에 빠졌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천일염 또한 당지천의 뒤를 따라 들어갈 때 동안 온갖 괴담을 늘어놓던 길잡이는 둘의 모습이 저 멀리 사라질 때쯤 체념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역시 안 되나.”
최대한 당지천을 말리려고 귀가 솔깃할 만한 이야기를 던져봤지만, 씨알도 안 먹힌 상황.
사실 길잡이도 통할 거라 생각하진 않았지만, 막상 막을 방법이 없었기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읊조렸다.
“아직, 아직은 숨길 수 있어. 아까 어떤 광석만 찾으려고 한 거라고 했으니까 주의를 끌지도 않을 거야. 설령 들킨다고 해도…….”
어느샌가 흉흉한 얼굴을 하고 있던 길잡이가 애써 뒷말을 삼켰다.
자고로 말이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듣는 이가 존재하는 법.
굳이 언급할 필요 없다고 생각한 길잡이는 얼굴을 한 번 쓰다듬어 다시금 겁먹은 얼굴을 만들었다.
“가, 같이 가요!”
그러고는 겁에 질린 척 폐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