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02화
연무장을 정리하고 전각 밖으로 나오는 길.
“…….”
일염이가 아까보다 더 해괴한 생물을 본다는 듯 조금 거리를 두고 걷는 게 왠지 모르게 큰 상처로 다가왔다.
“아니, 사람이 좋은 일이 있으면 좀 그럴 수도 있지. 왜 그렇게 쳐다봐?”
“…….”
“야, 너도 깨달음 얻었을 때 좋아했을 거 아니야!”
“…….”
“아아아아악!”
“…….”
“얌마! 확 그냥 눈깔을 뽑아버릴까 보다!”
“형아, 뭘 뽑아요?”
“뭘 뽑긴! 당연히 저 녀석 눈깔…….”
말을 하다가 낯선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보이는 아이들 셋.
이제 다섯 살이나 됐을까 싶은 아이들이 손에 저마다 구슬 아이스크림을 들고서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개지! 요즘 엉덩이가 시려서 쓰려는데 연무장 어딘가에 처박아놨더라고 하하하…….”
아무리 화가 나도 아이에게도 성낼 수는 없는 법.
사실 이미 그른 것 같긴 하지만, 어떻게든 둘러대자 아이들은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봐봐, 내가 무서운 형 아니랬잖아.”
“진짜 그렇네.”
“난 또 눈깔을 뽑아버리라고 하는 줄 알았단 말이야.”
“…….”
대놓고 들으라는 듯 한마디씩 하는 아이들.
요즘 애들이 머리가 일찍 큰다더니 왠지 모르게 내게 눈치를 주는 것만 같았다.
“이거 형이 만든 거라던데 진짜예요?”
“궁주님이 빙한에 만드는 거 직접 보여주셨어요!”
“오늘은 숙수님이 직접 나오셔서 만들어 나눠주고 계시던데 언제 봐도 신기하더라고요!”
그래도 아이들은 아이들인지 활기차게 조잘대는 아이들.
이제 와 자세히 보니 아이들이 저마다 손에 하나씩 구슬 아이스크림…… 아니, 옥빙과가 가득한 그릇을 들고 있었다.
‘되게 알록달록하네.’
확실히 제조법을 대충 알려주고, 아이스크림의 원료인 믹스를 건네주긴 했는데 이렇게 금방 알록달록한 옥빙과가 나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어, 형이 만든 거야.”
“진짜요?!”
“대박!”
“어떻게 만드신 거예요? 평생 빙궁에서 살면서 본 적 없던 물건인데 대단하시네요!”
내가 만들었다고 하자, 놀라는 눈으로 보는 아이들.
몇 살이나 됐다고 한평생 본 적 없던 물건이라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곧장 내게 엉겨 붙어서는 최대한 맑은 눈으로 졸라댔다.
“혀엉, 같이 가서 옥빙과 조금만 더 달라고 해주시면 안 돼요?”
“인기가 너무 좋아서 하루에 이만큼밖에 못 받아요.”
“더 받으려고 해도 어른분들이 먼저 가져가신단 말이에요.”
“그래?”
아이들한텐 인기가 많을 줄 알긴 했는데, 어른들에게도 인기가 많다니?
하긴, 맨날 딱딱한 하드만 먹다가 입에서 사르르 녹는 걸 먹으니 다들 좋아할 수밖에 없을 거다.
‘배 아프네.’
이렇게 잘 팔릴 줄 알았으면 돈 받고 팔걸.
그땐 내가 생각이 짧아서 너무 막 퍼준 것 같았다.
‘뭐, 사실 애들 먹으라고 준 거니까 별로 상관없긴 한데…….’
최대한 불쌍한 얼굴로 있는 아이의 그릇을 들여다보자, 거의 바닥을 보이는 옥빙과.
아무리 인기가 많다고 한들, 아이들에게 먼저 줄 텐데 겨우 이 정도 받았다는 건 말이 안 됐다.
“그건 네가 빙한에 손 넣었다가 혼나서 그런 거잖아!”
그런 기색을 읽었는지 곧장 태세를 전환하는 아이 하나.
도대체 빙궁의 조기교육은 어떤 거길래 고작 다섯 살밖에 안 돼 보이는 아이들이 이렇게 머리 회전이 빠르단 말인가?
“내가 손 넣었어도 안 다쳤는데 안전한 거 아니야?”
“어른분들이 위험하댔어! 그러니 네가 잘못한 거야!”
심지어 쿵짝도 잘 맞는다.
“잠깐은 괜찮아. 근데 조금만 더 있어도 손이 꽁꽁 얼게 될 테니까 절대 하지 마렴.”
“왜요?”
액체질소 같은 거에 손을 잠깐 넣었다가 빼도 되는 건 라이덴프로스트 효과 때문이다.
허나, 어른한테도 설명하기 힘든 걸 아이들한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냥 그런 게 있어.”
“왜요?”
“그런 게 있다면 그냥 그런 줄 알아.”
“왜요?”
“…….”
초롱초롱하고 순수하기 짝에 없는 눈으로 올려보는 아이들.
조금 컸으면 대충 무시하고 갈 길 가거나 몸소 손 하나를 꽁꽁 얼려서 체험시키는 방법을 쓸 수 있었을 텐데, 차마 다섯 살짜리한테 그럴 순 없었으니 끊임없는 ‘왜요?’의 굴레에 갇히기 전에 재빨리 도주를 택했다.
“그럼 난 이만.”
“형! 어디 가요!”
“야! 잡아!”
“하여간, 넌 맨날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분위기를 망쳐!”
도주를 택하자, 재빨리 뒤따라오는 아이들.
역시 요즘 애들은 머리가 일찍 큰다고, 날 본 순간 잡아서 옥빙과를 더 받으려 이용할 생각이었나 보다.
‘뭔가 기분이 미묘하네.’
겨우 구슬 아이스크림 받으려고 꿍꿍이를 꾸미다니 이걸 영악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순수하다고 해야 할지.
어쨌든, 아무리 영악하게 군다고 해도 반로환동한 고수가 아닌 이상에야 따라올 수가 없었고, 금방 아이들을 따돌릴 수 있었다.
“공자님. 어디로 가십니까?”
“일단 대장간부터 들르려고 하는데 왜?”
“아까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대장간은 아주 바쁘다고 하더군요. 다른 곳부터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바쁘다고?”
하긴, 원래 할 일도 있을 텐데 니티놀까지 맡겼으니 바쁠 만도 하지…….
갈 길을 잃은 탓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가 다음 갈 곳이 생각나 곧장 발걸음을 옮겼다.
“어쩔 수 없겠네. 그럼 빙궁으로 가자.”
어차피 깨달음도 얻었겠다.
마지막으로 남은 피치블렌드를 구해놓고 떠날 준비를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 빙궁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 *
전생에 무협지를 읽을 때면 북해빙궁의 사람들은 백발이나 은발로 나오는 경우가 많았다.
아마도 음기가 가득한 탓에 그런 이미지가 생겼던 것 같은데, 아쉽게도 내가 직접 본 빙궁 사람들은 모두 다 평범한 흑발 아니면 갈색 머리였다.
……지금 눈앞의 한 사람을 제외하면 말이다.
“불가. 허락할 수 없다.”
고운 비단결 같은 은발을 휘날리며 빙궁의 문 앞을 막아선 채 절대 용납할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라리는 한 남자.
그는 다름 아닌 빙궁주의 아들이자, 다소 특이한 이름의 소유자.
빙궁의 소궁주 빙고(氷固)였다.
‘분명 저번에 설산에 나가서 자리를 비웠다고 했는데, 왜 여기 있지? ……하긴, 소궁주가 빙궁에 있는 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
빙궁주의 혈통인 만큼 한 덩치 하는 빙고.
그런데 빙궁주보다 전체적으로 날카로운 인상에 말투도 무뚝뚝했기에 안 그래도 무서운 얼굴인데, 나를 보고는 한층 더 인상을 쓰며 말했다.
“아버지께서는 지금 사람을 만날 수 없는 상황이다.”
얼굴과 말투를 보아하니 명백한 문전박대.
솔직히 빙궁주도 자리가 자리인 만큼 원할 때 쉽게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일단은 가족인데 이건 아니지 않나 싶어 항의하기로 마음먹었다.
“저…….”
“미안하다.”
그러나 항의를 하기도 전에 갑자기 그 큰 덩치로 고개를 숙이면서까지 사과하는 게 아닌가?
“예?”
“내가 말주변이 없어서 본의 아니게 심기를 불편하게 했구나.”
무슨 이유인지 진짜 영문을 모르겠는데 재차 고개를 숙이는 빙고.
분명 처음에 문전박대당한 건 나인데, 어느샌가 내가 빙고를 핍박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소궁주님도 불쌍하셔라.”
“아무리 그래도 조카한테 저러는 건 좀…….”
아니나 다를까, 옆에서 소궁주를 보고 가여워하는 문지기들.
아니, 문전박대가 조금 화나긴 했지만, 그렇게 위압적으로 말하진 않았는데 대체 왜 이런단 말인가?
“아니, 제가 뭘 했다고 그러세요. 편하게 하세요.”
“아니다. 내가 이런 면에서 많이 서툴다. 그러니 조금 이해해 주려무나.”
편하게 하라고 함에도 여전히 저자세로 나오는 빙고.
마치 회장님 아들을 모시는 부장을 보는 것처럼 이상하게 안쓰러운 모습이었기에 나도 더 이상 뭐라 못 하고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예, 충분히 이해하니 신경 안 쓰셔도 됩니다.”
“고맙다.”
신경 안 쓴다고 하니 그제야 고개를 든 빙고는 문전박대한 걸 해명하듯 곧장 말을 쏟아냈다.
“사실 아버지께선 너를 보니 오랜만에 수련을 하고 싶다고 하시더구나. 그리하여 빙궁 지하에 있는 개인 연무장에서…….”
허나, 말하다 말고 갑자기 들려오는 비명 소리.
-끄아아아악!
“뭐, 뭡니까?!”
“…….”
빙고는 못 들은 듯 아무 반응 없었기에 한순간 환청인가 싶었지만, 이내 환청이 아니었다는 듯 다시금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아악! 나이 좀 처먹었으면 그만 좀 괴롭힐 때도 됐잖아! 머리 건드리면 화낸다! 나 화낼 거야!
그것도 빙궁주의 비명이 말이다.
“……수련하고 있을 테니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하셨다.”
“…….”
허나, 아무 일 없다는 듯, 제 할 말만 마치는 빙고.
분명 빙궁주의 비명을 들었을 텐데, 아무 일 없다는 듯 태연하게 대처하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닌 듯했다.
-으허어어어억! 그렇다고 허리를…… 나 죽어! 나 죽는다고!
“뭔가 비명이 계속…….”
“착각이다.”
“아니, 빙궁주님께선…….”
“착각이라고 했잖느냐.”
애써 시선을 외면하며 딴청 피우는 빙고.
빙궁주의 비명이 빙궁 밖으로 계속 새어 나옴에도 필사적으로 모르는 척하는 걸 보니 대충 상황이 이해가 됐다.
‘누군지 몰라도 빙궁주를 쥐 잡듯이 쥐어 잡는 사람이 있구나.’
빙궁주는 무림 어디에 가도 결코 꿇리지 않는 강자다.
그런 사람을 쥐 잡듯이 잡을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있겠는가.
당연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은 빙궁주의 가족뿐일 테고, 궁주 체면이 있는데 그 모습을 누구한테 보여줄 순 없어서 이렇게 소궁주가 막고 있는 걸 거다.
-크아아악!
“확실히 착각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
“예.”
애써 들려오는 빙궁주의 비명을 무시한 채 착각인 것 같다고 하자, 다행이라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빙고가 대뜸 주머니 하나를 내밀었다.
“선물이다.”
“선물 말입니까?”
“그래.”
선물이라니, 모르는 척하고 넘어가는 것에 대한 보상인가?
그런데 그건 또 아닌 것 같은 게 빙고는 마치 이게 정답이라는 듯 이상한 야시꾸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사람.
하지만 호의는 거절하는 게 아니라고 배웠기에 빙고가 건넨 주머니를 곧장 받아 들었다.
‘시원하네.’
전체적으로 한기가 감도는 주머니.
뭐가 들어 있을지는 까봐야 알겠지만, 얼음과 관련된 물건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한 느낌이었다.
“열어봐도 되겠습니까?”
“상관없다.”
상관없다는 말에 곧장 주머니를 열어보자 눈에 들어오는 건 얼음 덩어리.
마치 냉장고에서 막 꺼낸 듯한 각기 다른 모양의 얼음 덩어리가 들어 있었다.
“이게 뭡니까?”
“십년빙정이다.”
“십년빙정 말입니까?”
“그래. 만 년은커녕 백 년도 채 버티지 못하고 갈라져 버린 빙정들이다. 영약으로는 크게 쓸모없으나 음기가 떨어졌을 때, 급하게 먹으면 도움 될 거다.”
“감사합니다.”
“좋은 선물이라고 생각되느냐?”
“예?”
“좋은 선물인 것 같냐고 물었다.”
“…….”
‘뭐 하는 사람일까 대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