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101화
천고천이 계속해서 울적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자, 얼마간 같이 하늘을 올려다본 천일염은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그 점은 압니다. 허나, 저는 다른 이들과 크게 다르…….”
“다르지 않다.”
천일염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는 천고천은 단번에 말을 자르고는 천일염을 보며 말을 이었다.
“내게는 크게 다르지 않다.”
“…….”
단호하기 짝에 없는 천고천의 말에 천일염은 마치 부모님께 혼나는 어린아이처럼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설령 네 말대로 끝을 고하더라도, 끝내 네게 남은 것이 없을지라도. 내게는 확실히 남을 거다.”
천고천이 천일염의 손을 붙잡아 서책을 올려주더니 가져가라며 들이밀었다.
“그러니 가져가거라. 이건 빙궁주의 매형으로서 빙궁주를 대신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건네주는 일종의 호의기도 하니 말이다.”
“…….”
천고천의 설득에 천일염은 서책을 조용히 품에 집어넣었고, 그제야 천고천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천일염의 어깨를 두드려 줬다.
“그래, 그거면 된 거다.”
“…….”
천일염이 가만히 있는 걸 보고 뭔가 할 말이 남았는지 물었다.
“왜 그러느냐?”
“처음 지천이를 제자로 받으셨을 때, 말로는 가르쳐 주지 않는다고 한들, 못 이기는 척 무공을 전수해 주실 줄 알았습니다. 헌데, 그러시지 않으셨습니다. 앞으로의 일을 함부로 재단할 수 없다만, 이번 기회를 놓치면 문파의 명맥이 끊기지 않겠습니까?”
천일염의 물음에 천고천은 별걸 다 걱정한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리 문파의 무공은 여기서 끝이다. 더는 무공을 가르친단 이유로 나랑 같은 아이를 만들고 싶지 않고, 그래서도 안 된다.”
“그렇습니까.”
“그래, 그것이 문주인 나의 결정이니 이는 결코 번복하지 않을 것이다.”
재고하라고 한 것도 아닌데 천고천이 단호하기 짝에 없게 이야기하자, 천일염은 무표정한 얼굴로 서책을 지긋이 바라봤다.
“너도 많은 생각이 드는가 보구나.”
“……조금뿐이지만 듭니다.”
“원래 족쇄는 채울 땐 쉽지만, 풀기는 어려운 법이다. 그걸 네가 굳이 감내할 필요는 없다.”
굳이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듯 잠시 천일염과 눈을 맞췄던 천고천이 이내 돌아서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끝내 족쇄를 풀고 돌아올 곳이 필요해진다면 주저할 필요 없이 돌아오거라.”
당지천의 등 뒤로 이동한 천고천이 천일염에게 마지막 인사를 건네듯 손을 두어 번 흔들며 마지막 말을 건넸다.
“우리는 늘 여기 있을 테니.”
“…….”
천고천의 인사에 묵묵히 고개를 숙이는 천일염.
천고천은 그런 천일염에게 옅은 미소를 지어준 채 당지천의 등 뒤에 손을 올릴 뿐이었다.
* * *
깨달음을 수습하기 위해 가부좌를 튼 지 얼마나 지났을까.
막힌 혈이 뚫린 듯 몰려오는 청량함에 기분 좋게 눈을 떴다.
“캬! 이게 깨달음이지…….”
속을 관조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만큼 내공이 급격하게 늘었고, 기맥이 이전과 달리 시원시원하게 뚫려 있는 게 그동안 출근길 꽉 막힌 도로에서 낑낑대고 있었다면 지금은 새벽 4시의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처럼 기가 막힘없이 쭉쭉 나아갔다.
“진짜 세상이 달라 보인다. 세상이 달라 보여…… 뭐야, 이게 냄새야?”
하지만 눈을 떴을 때 느꼈던 청량감을 한 3초 정도 느꼈을까.
곧장 몰려오는 썩은 악취.
처음엔 옅게 느껴져서 잘 몰랐으나 이내 헛구역질이 올라올 정도가 돼서 곧장 코를 부여잡았다.
‘아니, 무슨 오폐수 처리 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고, 냄새가 왜 이래?’
적당히라는 단어를 모르는 듯 몰려오는 악취.
연구실에서 2주 넘게 안 씻고 연구했을 때도 심하다 싶긴 했는데, 지금은 그보다 몇십 배는 더 심각한 냄새가 났다.
하수도에 들어가 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이런 냄새가 나는 게 아닐까?
‘이거 당장 가서 박박 씻어도 전혀 안 지워질 것 같은데…… 잠깐, 깨달음을 얻고 눈을 떴는데 몸에서 악취가 난다?’
“설마 환골탈태?!”
부리나케 주변을 둘러보니 진짜로 보이는 흉측한 오물 덩어리들.
허나, 안타깝게도 그렇게 양이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하긴, 이제 막 절정의 벽을 넘었는데 환골탈태가 가당키나 하냐고.”
절세의 영약을 먹은 것도 아니고, 더 윗줄의 경지에 이른 것도 아니니 환골탈태를 한 건 말이 안 됐다.
그래도 주변에 이렇게 오물 덩어리가 널려 있는 건 뭐든 내 몸에서 안 좋은 게 빠져나갔다는 의미였기에 굉장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잠깐, 내 오른발! 오른발이…… 멀쩡하네?”
깨달음을 얻기 전 할아버지께 흠씬 두들겨 맞아서 망가진 몸들.
행여나 잘못된 방향으로 치유되면 어쩔까 싶었는데, 오른발뿐만 아니라 왼팔과 코까지 전부 완벽한 상태로 돌아와 있었다.
“다행이다. 휴…….”
“뭐 하십니까……?”
혼자서 생난리를 치고 있자,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물어오는 일염이.
세숫대야 한가득 물을 떠 온 걸 보면 내가 일어났을 때 막 자리를 비웠던 것 같았다.
“큼, 별거 아니었어. 그보다 할아버지는?”
“공자님의 조부님께서는 다시 치매 증세가 악화되셔서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이거 받으시죠.”
세숫대야를 내려놓은 일염이가 품에서 이름 모를 비급을 하나 꺼내 내게 건네줬다.
“이게 뭐야?”
“약속했던 천열독무보라고 합니다.”
천열독무보?
천열운무보를 개량해 주시겠다던 그건가?
“기다려 봐.”
자고로 기의 수발이 자유로워진 걸 체감하려면 당연히 허공섭물 정도는 써봐야 하지 않겠는가?
일염이가 다가오지 못하게 하고 비급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합!”
힘을 빡 주며 기를 운용하자, 화살처럼 날아오는 비급.
그걸 반사적으로 집어 든 나는 굉장히 얼떨떨한 기분이 되었다.
왜냐면…….
“얼레? 나 내공이 왤케 많냐?”
허공섭물을 썼음에도 내공이 반의반도 안 달았기에.
허공섭물.
말 그대로 멀리 떨어져 있는 물건을 옮기는 기예이자, 현대로 치자면 염동력과 비슷한 기술.
사실 말만 기술이지, 따로 배울 필요 없이 누구나 깨달음 한 번만 얻으면 자연히 쓸 수 있게 되는 기예다.
어쨌든, 염동력이라고 생각하면 참 멋진 허공섭물은 누구나 쓸 수 있다는 장점에 반비례하게 크나큰 단점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내공 소모가 극심하다는 점이었다.
‘솔직히 허세 부릴 때 말고 실전에선 아예 안 쓰는 기예니까 말이지.’
옮기는 물건의 무게와 속도에 반비례해 드는 공력이 다른 허공섭물.
흔히들 말하길 이제 막 절정 초입에 들어섰다면 찻잔 하나 옮기는 데 무려 10년 치의 공력이 든다고 했다.
생각해 봐라.
겨우 찻잔 하나 옮기는 데 10년 치 공력이 드는데 바위는 대체 얼마나 들겠는가?
그러니 저 위에 고수들이 아닌 이상에야 실전에서 쓰는 경우는 없었고, 주로 보게 되는 경우는 누군가가 객잔에서 허세 부릴 때가 전부였다.
그런데…….
‘왜 나는 안 그러지?’
찻잔보다 배는 무거운 서책.
그걸 옮겼으니 당연히 20년 치 이상의 공력이 소모됐어야 하는데, 지금 전체 공력의 3분의 1은커녕, 반의반도 안 사라졌다.
‘당황스럽네? 안 되겠다. 안을 들여다봐야지 원.’
예상과 다른 상황에 다시 제자리에 주저앉아 내부를 관조하자, 느껴지는 오묘한 기운들.
‘얘넨 또 뭐야? 그리고 2갑자?’
뭔가 내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으면서도 내 것 같은 알쏭달쏭한 기운이 단전에 꽉꽉 들어차 있어서 무려 2갑자라는 말도 안 되는 양이 단전에 자리 잡고 있었다.
‘거기다, 혈도도 이상해.’
처음 눈을 떴을 땐, 기의 수발이 자유로워져서 이렇게 기운이 시원스럽게 지나다닌다고 생각했다.
아니, 솔직히 나뿐만 아니라 누구라도 시냇물처럼 졸졸 흐르다가 장강마냥 콸콸 흐르는데 누가 달리 생각하겠는가.
하지만, 지금 자세히 관조해 보니 그것도 그거지만, 혈도 하나하나가 깨끗하다 못해 마치 새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마치…….
벌모세수를 한 번 더 받은 것처럼 말이다.
“이상하네.”
생사현관이 타통돼서 임독양맥이 뚫린 것도 아닌데 대체 왜 이렇게 내공이 많단 말인가?
‘생사현관이 아예 타통됐으면 내가 환골탈태를 했을 텐데 그것도 아니고.’
환골탈태가 뉘 집 개 이름도 아닌데 벌써 하겠는가.
만약 절정 고수가 됐다고 환골탈태하는 세상이 온다면 저 위에 있는 고수들은 가재나 게 같은 갑각류처럼 뭐만 하면 허물을 벗는 수준이 될 거다.
“뭘 그렇게 골똘히 생각하십니까?”
“아니, 갑자기 내공이 확 늘어서 당황스러워서.”
“원래 깨달음을 얻으면 내공이 확 늘어납니다.”
“아니이, 그건 아는데 양이 너무 많지 않나 해서.”
“그간 공자님 몸에 축적하고도 흡수하지 못한 독기들이 많이 남아 있었나 봅니다.”
“아니이이, 아무리 그래도 이 정도 양은…….”
“뭔가 이상한 것 같아도 받아들이시죠. 원래 처음은 낯설기도 하고, 사람마다 편차가 굉장히 큽니다. 그리고 흡성대법 같은 무림의 금기를 어긴 것도 아닌데 무공 좀 늘어나면 어디가 덧납니까? 좋은 게 좋은 거니까 적당히 넘어가시죠.”
“그래? 그렇다면야 뭐…….”
경험자가 그렇다는데 어쩌겠는가.
거기다, 일염이 말도 일리가 있었다.
내가 뭐 잔악무도한 혈교의 무공을 써서 내공을 늘렸나, 아니면 무림의 금기인 흡성대법을 익혀서 내공을 늘렸나.
수준이 낮다고 해도 깨달음을 얻는다는 건 엄연히 내공이 확 늘어날 기회.
이렇게 내공이 배로 많아진 것도 가능성이 없진 않은 일이다.
“축하드립니다, 공자님. 이야, 이제 어디 가서 공자님 모신다고 말해도 안 쪽팔리겠습니다.”
“그래, 참 눈물겹게 고맙다.”
일염이의 개떡 같은 축하 인사는 참 그지 같았지만, 어쨌든 중요한 건 나도 이제 어디 가서 안 꿇린다는 것.
‘나도 드디어 절정 고수구나.’
근 5년간 그토록 염원하던.
무림에서 꽤나 이름 날려주는 그런 경지에 다다랐다는 점이다.
‘당가에 가면 추혼비접을 시작으로 이것저것 암기도 익혀야지.’
천 년의 역사를 가진 당가인데 암기가 얼마나 많겠는가.
굳이 당가가 아니라도 살수들의 문파인 적혈문도 꽤 오랫동안 세를 유지했기에 이것저것 신기한 듣도 보도 못한 암기들이 많았다.
‘그런데도 익힐 수 있는 건 비수나 표창 같은 흔해 빠진 것뿐이었으니…… 이제야 좀 익힐 맛 나겠네.’
금속 줄로 만든 그물을 사출하는 통부터, 허리를 굽히면 쏘아져 나가는 화살이나, 손목을 굽히면 튕겨져 나가는 단검과 같이 상대의 빈틈을 노리는 암기들.
이것들은 모자환과 구천현녀 같은 특이한 암기들과 달리, 굳이 벽을 넘지 않아도 연습만 한다면 충분히 다룰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러나 구조가 복잡하고 다루기가 까다로워 사고가 많이 나는 탓에 약관을 넘기지 않거나 절정의 경지에 이르지 않는 이는 직접 다룰 수 없게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젠 이 몸도 다룰 수 있다는 말씀.’
안 그래도 독 하나만큼은 꿇리지 않기로 소문난 나다.
그나마 무공이 약하고 정형적인 암기만 쓰는 게 내 약점이었는데 무공은 이미 보완했고, 암기마저 보완한다면?
아주 그냥 끝장나는 거다.
“크으, 취한다. 취해.”
“…….”
한순간 나의 강함에 취해 있자, 왠지 모르게 일염이가 해괴한 걸 보는 듯한 눈으로 보고 있었지만, 절정 고수인 이 몸은 한낱 호위의 눈길에 굴하지 않는 법.
당당하게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바로 나갈 테니 준비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