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98화 (98/200)

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98화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있었지.”

더 묻지도 않았는데 자초지종을 설명하기 시작하는 천고천.

방금 전, 당지천을 시험하면서 있던 일을 아주 심각한 얼굴로 빙궁주에게 전했다.

“……그래서 지천이가 너무 유능해서 문제야.”

“평범하게 가르치면…… 시간이 없겠군요.”

듣고 있던 빙궁주는 천고천이 이야기를 거듭할수록 이게 이리 심각할 일인가 싶다가도 자세히 생각해 보니 천고천에게는 심각한 상황임을 알 수 있었다.

“그래. 그래서 조언을 구하러 왔네. 안 그래도 처남이 줬던 서책이 참 도움이 많이 됐거든.”

직접 집필한 책이 큰 도움이 됐다고 하자, 빙궁주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매형도 저와 같은 취향이셨군요.”

천고천은 같은 취향이라는 게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일단 도움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흡족한 얼굴로 조언을 건네는 빙궁주.

“매형, 이런 경우 속성으로 알려주는 게 제격입니다.”

“그 부분은 알고 있다. 다만,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모르겠다는 거지.”

빙궁주가 씨익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간단합니다.”

“간단하다니?”

“패면 됩니다.”

“팬다고? 지천이를?”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귀를 후비는 천고천.

“예, 자고로 유능한 제자에겐 매가 약인 법. 패면 알아서 깨닫게 되어 있습니다.”

허나, 빙궁주가 같은 소리를 하자 주저 없이 몸을 돌렸다.

“갑자기 어디 가십니까?”

“처남 누나 보러 간다.”

말을 마치자마자 내달리기 시작하는 천고천.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빙궁주는 뭔 일인지 몰라도 일단 X됐음을 깨닫고 전속력으로 천고천의 뒤를 쫓았다.

“매형! 왜 그러십니까! 저희 같은 과 아니였습니까! 지천이가 돌도 던졌다면서요!”

“그래, 그래서 나도 잠깐은 마음이 동하긴 했어.”

“근데 왜!”

“어떻게 할아비가 돼서 손주를 때리겠어. 거기다. 만약 손주에게 손찌검하라는 녀석이 있다면 징벌해야지.”

“…….”

자기 할 말만 마치고 다시금 저 멀리 뛰어가는 천고천.

이랬다가, 저랬다가.

도대체 어느 장단에 맞춰야 할지 몰라서 벙쪄 있던 빙궁주는 당지천을 패라고 한 말이 빙설린의 귀에 들어간다면 먼지가 날 때까지 맞을 게 분명했기에 필사적으로 달렸다.

“매형! 잠시만 제 이야기 좀 들어보시죠!”

하지만 끝끝내.

빙궁주가 천고천을 따라잡는 일은 없었다.

* * *

할아버지의 시험을 통과한 다음 날.

첫날부터 뭔가를 배울 거란 생각은 안 했지만, 달랑 실력 평가만 보고 끝나니 허무해서 그런지 이른 아침부터 절로 눈이 떠졌다.

“결국 저녁까지 안 부르셨네…….”

갑자기 내가 유능한 탓에 깨달음을 얻지 못했다고 하며 어디론가 가버린 할아버지.

채 한 시진도 안 되는 짧은 평가만 봤기에 나중에라도 부를 줄 알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끝내 할아버지가 찾아오는 일은 없었다.

“끄응.”

침소에서 일어나자, 몰려오는 두통.

하루 종일 할아버지가 남기고 간 말을 나름대로 해석해 보느라 머리가 계속 지끈거렸지만, 답을 찾지는 못했다.

“아니, 도대체 내가 유능한 거하고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거하고 뭔 상관인데?”

내가 깨달음을 얻지 못하는 이유.

그건 내가 유능해서라는 할아버지.

자세한 설명이라도 해주셨으면 하건만, 차차 알게될 거라며 잡을 새도 없이 가버리셔서 머리만 아팠다.

“무림계의 난제도 아니고 말이야.”

과거에 난제라 불렸던 문제들을 풀 때는 머리가 아파도 재미라도 있었지.

이건 뭐, 감도 못 잡겠고, 사실 뭔 소리인지도 잘 모르겠다.

“솔직히 내가 무재가 있는 편도 아니고 말이지…….”

혹시 내가 무재가 뛰어나서 그런 게 아닐까.

그런 의심을 과장 좀 보태서 백만 번쯤 한 것 같은데 아예 없는 수준은 아니어도 누군가 감탄할 정도는 아니라는 걸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물론, 독공이야 누구보다 뛰어난 만큼 재능이 있는 게 맞지만, 무공 수련을 해야 하는데 독공을 이야기할 리가 없지 않겠는가.

“하아. 안 알려줄 거면 그냥 가시지. 왜 이렇게 고민거리를 던져주고 가시냐고.”

갈 거면 그냥 갈 것이지 왜 화두를 던지고 떠나서 이렇게 머리를 아프게 한단 말인가.

“모르겠다. 오셨을 때 물어보면 되겠지.”

어제 스스로 답을 알았다면 모를까.

이미 날짜가 지났다.

굳이 아픈 머리 부여잡고 짜낼 이유는 없으니 오셨을 때 물어보면 되겠다는 생각에 옷을 챙겨 입고 나갈 채비를 했다.

“그래도 연무장이라 돌아올 걱정은 안 해도 되겠네.”

어제 떠나기 전, 할아버지는 오늘부터는 연무장에서 보자고 하셨다.

아마도 얼음 폭포가 운치가 있긴 했어도, 주변 땅이 완전히 고르지 않았기에 본격적인 무공 수련을 하기 위해선 연무장이 더 적합하다고 생각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었다.

“공자님. 준비 다 하셨습니까? 조부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벌써? 바로 갈게!”

내 기상 시간이 결코 늦은 시간이 아닌데, 할아버지가 벌써 도착하셨다는 소식에 부랴부랴 채비를 마치고 연무장으로 뛰어나갔다.

그런데…….

“잘 잤느냐.”

부드러운 인사말과 달리, 다소 심각한 얼굴로 서 계시는 할아버지.

마치 무슨 문제라도 있는지 나를 바라보는 눈이 심상치 않았다.

“예, 스승님께서도…….”

“지천아, 너는 유능하다.”

인사를 하려 하자, 그럴 시간 없다는 듯 할아버지가 말을 자르시고는 바로 본론을 꺼내셨다.

“그래서 이대로 무공을 익히기만 하면 깨달음을 얻지 못할 거다.”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이대로라면 백 년이 지나도 깨달음을 못 얻는다는 겁니까?”

“어디까지나 지도를 받지 않는다는 가정하에 말이다.”

순간 깨달음을 얻지 못할 거란 소리에 당황했는데, 다행히 지도를 받아지면 나아질 수 있다고 했다.

“다행이군요.”

“허나, 안심하긴 이르다. 제대로 된 지도를 받더라도 얼마나 걸릴 줄은 모른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한 건 근 시일 내에는 무리라는 점일 거다.”

“그런…….”

당장 급박하게 빙궁을 떠나야 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여유 부리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그런데 근 시일 내에는 무리라니…….

‘안 돼애애애애애!’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도대체 뭐 때문에 그런 겁니까? 제가 유능하다는 건 또 무슨 소리고요.”

“너는 그저 무공을 무공으로만 익혔더구나.”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말 그대로의 의미다.”

아니, 그럼 무공을 무공으로 익히지 대체 뭐로 익힌단 말인가?

분명 전생에 읽었던 무협지에선 삼재검 같은 기초 무공을 극으로 익혀서 천하제일인이 되는 내용도 있긴 했다.

그렇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숨겨진 구결이나 오의를 깨달아야만 하는 거고, 그마저도 고작 절정의 벽을 부수는 거하곤 크게 관련 없어 보였다.

그런데 말 그대로의 의미라니?

“잘 모르겠다는 눈치구나. 하나 물으마. 너는 현무권법을 대성하고 나서 그 이후로 얼마나 더 수련했느냐?”

“대략 2년 정도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면 그동안 진전은?”

“…….”

당연히 없었다.

어차피 더 나은 상승무공을 익히게 될 텐데, 이미 대성한 현무권법에 시간을 쏟는 건 하등 쓸모없는 낭비.

그저 검이 녹슬지 않게 날을 벼리듯, 매일같이 적당히 수련하고 말았다.

‘그게 문제라는 건가?’

고수의 짧은 조언 한마디에도 깨달음을 얻는 사람들도 있다.

허나, 안타깝게도 나는 머리만 조금 맑아졌을 뿐, 깨달음까진 얻지 못했다.

“당연히 없었겠지. 너는 그저 무공을 무공으로 익혔으니 말이다.”

대충 눈치를 보면 적당히 수련한 게 문제인 듯한데, 천고천은 명확하게 설명해 주지 않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너는 독이 어떤 무어라 생각하느냐?”

독.

독이 뭐냐는 질문.

일전에 나는 세상 모든 물질이 독이라고 했지만, 할아버지가 묻는 독이 그걸 말하는 게 아닌 걸 알기에 나는 일말의 고민 없이 바로 내뱉었다.

“고결한 무공도, 입신의 경지에 다다른 무인조차도 한순간에 무로 돌리는 게 독입니다.”

지상 최강의 병기인 동시에 가장 위험한 병기.

현대와 다른 무림에서조차 다루는 사람에 따라 최악의 상황을 초래할 수 있는 아주 강하고 위험한 물질.

그게 내가 생각하는 독이었다.

“네 대답이 그럴 줄 알았다.”

마치 예상했다는 듯 대답을 듣자마자, 할아버지는 한숨을 쉬었다.

“굉장히 오만한 발언인 건 아느냐?”

“압니다.”

오만하긴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게 사실인데.

“…….”

안다고 하자, 지긋이 나를 쳐다보는 할아버지.

여전히 뭔가 내키지 않는 얼굴로 보는 게 도통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게 이러다 내 얼굴에 구멍이 뚫리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가 됐을 때, 할아버지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알면 됐다. 혹시 모를 가능성을 놓쳤을 수도 있으니 일단 수련을 먼저 해보자꾸나.”

* * *

할아버지의 지도에 따라 현무권법을 얼마나 펼쳤을까.

“헥, 헥…….”

호흡이 힘들 정도로 굴려진 탓에 땅바닥에 주저앉자, 할아버지의 냉엄한 소리가 들려왔다.

“다시.”

아니, 사람을 대체 얼마나 굴리는 거야?

무공 지도라고 하면 처음에 뭐라도 보여줄 법도 하건만, 할아버지는 옆에서 그저 현무권법의 구결만 반복해서 읊을 뿐, 아무 도움도 주지 않으셨다.

“후.”

잠깐이나마 숨을 골랐기에 다시 일어나 펼치는 현무권법.

비록 지쳤긴 했지만, 그동안 해온 짬밥이 있기에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고 정확하게 펼쳐 나갔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는데…….’

내가 할아버지께 스승이 되어달라고 한 건 어디까지나 새로운 무공을 익히거나, 혹은 깨달음을 얻게끔 도와달라는 의미에서였다.

그런데 이미 대성한 현무권법만 주구장창 연마하고 있으니 시간이 아까울 수밖에 없었다.

“그만.”

그런 내 생각을 읽었을까 귀신같이 멈추라고 하는 할아버지.

‘아차.’

당연하게도 생각을 읽은 건 아니고, 잠시 딴생각을 하는 동안 자세가 흐트러졌기에 집중하지 않고 있다는 걸 들켰을 거다.

호통을 들어도 할 말이 없는 상황.

그러나 할아버지는 나를 다그치지 않고 조용히 물으셨다.

“왜 이렇게 조급해하는 게냐?”

자고로 고수들은 무공으로 대화가 된다고 했던가.

할아버지도 그게 가능한지 내 무공에서 내 감정을 엿보신 듯했다.

“그게…….”

‘빨리 깨달음을 얻고 당가로 돌아가고 싶어서 그랬다’라고 구구절절 설명하면 할아버지가 섭섭해하실 것 같아 짧게 요약했다.

“제가 아직 약해서 그렇습니다.”

“약해서라…… 지금 네 수준을 알고도 그런 소리를 하는 게냐? 고작 열일곱에 너만 한 성취를 이룬 아이는 강호에서도 손에 꼽을 거다. 그런데 약하다니?”

“동년배들보다는 강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무림말학들 중에서잖습니까.”

“그럼 다르게 물으마. 왜 강해져야 하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