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96화
“그럼 가겠습니다.”
할아버지와의 대련.
사실 말만 대련이지 실상 실력 평가고 수준 차가 많이 났기 때문에 옷깃조차 못 건드릴 수 있었다.
허나, 끓어오르는 승부욕에 숨을 깊게 내뱉고서 암기부터 쥐었다.
‘처음엔 암기부터.’
당가에서 수련하는 동안 여러 무공을 익혔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손에 익은 건 암기술.
그렇기에 첫수로 암기 수법을 골랐었다.
하지만, 당연하다는 듯 막아낸 할아버지.
“암기를 굉장히 잘 다루는 편이구나.”
손주의 재롱을 보듯 씨익 웃으시고는 암기를 쳐내는 것도 아닌, 한 손으로 모두 잡아채서 옆의 눈밭에 던지셨다.
‘미쳤다…….’
날아오는 암기를 한 손으로 쳐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닌데, 암기가 상하는 걸 염려해서인지 암기에 손상이 가지 않게끔 운동량을 죽이며 잡아내셨고, 그건 어중간한 실력으로는 흉내도 못 내는 일이다.
‘이것이 진짜 고수?’
솔직히 경지가 어떻고, 이기어검을 다루느니 허공답보를 하느니 등등.
전생에 책에서 보고, 이곳에서 전해 들은 이야기들이 있다고는 하나, 제대로 된 실력을 본 적은 없었기에 누구라도 처음 보게 된다면 놀랄 수밖에 없을 거다.
……그게 내가 상대해야 하는 상대라면 더더욱 말이다.
‘답이 안 보이네.’
계란으로 바위 치기가 이런 걸 뜻하는 말일까.
고작 암기 몇 번 던져봤을 뿐인데도 수준 차이가 피부에 와닿을 정도였다.
“왜 그러느냐? 혹시 보상이 별로 마음에 안 들더냐?”
“아닙니다. 잠시 생각 중이었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포기할 수 없었다.
이건 실력 평가이기도 하지만, 그 전에 보상이 걸린 시험.
그렇다면 당연히 보상을 얻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니…….
“지금부터 전력으로 가겠습니다.”
* * *
당지천과의 대련을 시작한 지 일각.
당지천이 날리는 암기들을 빗자루 쓸듯이 모아 한쪽에 내던진 천고천은 이어지는 당지천의 권을 막으면서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기대가 너무 컸나.’
고작 일각이 채 지났을 뿐이기에 시력을 판단하기엔 이른 감이 없지 않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만큼 당지천의 실력이 명확했다.
‘무공 자체가 문제는 아닌데 너무 정석적이야.’
잠시 거리를 벌렸던 당지천이 다시금 던지는 암기.
그걸 받는 천고천은 감탄과 실망을 동시에 했다.
‘수련을 굉장히 많이, 그리고 효율적으로 했구나.’
매번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은 투로로 오는 암기들.
마치 사람이 아닌 기관이 쏘아내는 것처럼 정확하고 완벽한 게 당지천이 얼마나 많은 수련을 해 암기술을 연마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하지만…….
‘방향성이 잘못됐구나. 무재도 특출나게 뛰어난 것 같지 않고.’
제대로 잡아줄 사람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당지천의 성향 때문인지 당지천은 방향을 잘못 잡고 있었다.
‘원래라면 자신보다 강자를 상대하게 되면 고쳐지는 일인데, 왠지 모르겠지만 경험도 부족하구나.’
“흡!”
오른쪽 주먹을 뻗으면서 동시에 소매에 숨겨둔 비검을 뿌리는 당지천.
이는 한 손으로 막는다는 점을 고려해 주먹을 뒤따라오는 비검으로 유효타를 노리는 거겠지만, 당연하게도 피해 버리면 그만이기에 쉽게 막혔다.
‘지금 상황에서도 수를 하나씩 내면서 성장하는 건 참으로 기특하긴 하다만…….’
예상했던 거보다 경험이 너무 모자랐다.
마치 지금 당지천은 자신보다 강한 상대와는 전혀 싸워보지 않은 듯한 느낌이 들 정도이니 말이다.
‘할멈이 말하길 광랑이라는 녀석도 단신으로 해치웠다고 들었는데 어째서 이런 일이?’
아무리 벽 앞에 서 있다고 한들, 수준은 일류인 당지천.
그런 당지천이 사천에서 이름깨나 날린다는 광랑을 단신으로 이겼다길래 기대가 컸다.
하지만 지금의 당지천의 모습을 보니, 자신보다 강한 상대는커녕, 동급의 무인만 만나도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할 게 분명했다.
‘역시 독 때문인가?’
다행히 문제점은 명확한 상황.
천고천이 파악한 당지천의 문제는 바로 독에 대한 의존이었다.
지금 반걸음 바깥에 원인 모를 액체들과 녹아 있는 눈들.
그 위에 올려진 액체들은 다름 아닌 천고천이 막아낸 당지천의 독들이었다.
‘독의 활용은 나쁘지 않아. 쓰는 독들의 종류도 다양하고, 이름 모를 독들도 많이 섞여 있어.’
독 하나만큼은 누구보다 잘 다룬다던 이야기가 거짓은 아니었는지 천고천조차도 모르는 신기한 독들도 있었다.
그러나 독은 어디까지나 독일뿐.
천고천이 생각하기엔 한계가 명확한 무기였다.
‘결국, 독이라는 것은 중독시켜야 제 위력을 발휘하는 법. 보아하니 보상은 못 가져가겠군.’
무공은 깔끔하고 노력을 많이 했으나 경험 부족.
독은 정말 잘 다루고 재능이 있지만, 의존 성향을 보임.
이게 천고천이 내린 당지천의 현 상태다.
‘조금 실망스럽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던가.
결코 나쁜 성적표가 아님에도 당지천에게 많은 기대를 했던 만큼 천고천은 내색하지 않고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그런 실망도 잠시 빙궁주가 써 줬던 책의 내용을 떠올리며 마음을 실망을 지웠다.
‘분명 유능하기만 한 제자는 재미가 없다고 했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건 잠깐은 재밌을지 몰라도, 결국 따분한 일이 된다고. 오히려 이렇게 한 부분이 유능하면서 다른 단점이 명확한 제자일수록 가르치는 맛(?)이 끝내준다고 했어.’
본디 제자란 부족해야 비로소 가르치는 재미가 있는 법.
이는 과거 천고천이 읽었던 수많은 서책에서 몇 번이나 언급됐던 점인 만큼 나쁘다고 생각할 만한 일이 아니었다.
‘제자의 부족한 점을 메꿔주는 것이야말로 참된 스승의 일이니 말이지.’
당지천에게 가르침을 내려줄 생각에 신난 천고천이 이전에 봤던 서책들을 참고하여 이런저런 계획을 세워봤지만, 별로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경험이 부족하니 그걸 충족시켜 줘야 하는데, 빙궁에선 제약이 너무 심해.’
이것도.
저것도.
막상 빙궁을 다룬 이야기는 별로 없어서 이래저래 제약이 많은 빙궁에서 할 만한 수련법이 너무 없었다.
‘마침 처남이 써 준 서책에 이럴 때 쓰는 방법이 있었지.’
하지만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게 빙궁주의 서책 아니겠는가.
천고천은 당지천의 공격을 흘려내는 와중에도 속으로 서책의 내용을 떠올리며 당지천을 굴릴 생각을 했다.
‘기대하거라. 지천아. 내가 널 아주 강하게 만들어주마.’
* * *
처음 암기를 던졌던 시점으로부터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하아, 하아.”
점점 가빠져 오는 숨과 지쳐가는 몸에 슬슬 포기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맴돌기 시작했다.
‘옘병, 어떻게 독이 하나도 안 통하지?’
여태껏 나의 주무기는 독과 암기였다.
그런데 몇 개를.
얼마나 어떻게 던지든 간에 할아버지는 우습다는 듯 둘 다 쉽게 파훼해 버렸다.
‘산화베릴륨은 물론이고, 다른 독들도 일절 통하지 않으니…….’
독을 암기에 바르면 암기에 독이 발려 있는지 진작에 구분하고 눈을 감고 피하거나, 혹은 암기를 스리슬쩍 잡아서 독만 한쪽에 털어내곤 했다.
그래서 다가가 산화베릴륨으로 독무를 만들어내자, 팔을 휘저어서 깔끔하게 독무를 저 멀리 날려 보냈다.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할아버지.
무엇을 만들든 간에 닿는 것조차 허용하지 않으면서 기분이 좋은 듯 산뜻한 미소를 유지하는 모습을 보면 누구라도 의지가 꺾여 나갈 것이다.
‘심지어 독도 많이 떨어졌어.’
거기다, 괜히 공격한다고 이 독, 저 독 다 썼는데 유효타는 주지 못하고 소모만 했다.
당가라면 몰라도 독을 수급할 수 없는 빙궁인 만큼 이는 뼈아픈 실책이었다.
‘발출하는 기예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어림도 없는 소리지.’
독공을 익힌 무인들 중 특출난 이들은 단전에 저장된 독을 꺼내서 쓸 수 있었다.
내게도 그런 기예가 있으면 독을 좀 여유롭게 쓸 수 있었을 텐데, 당연하게도 아직 내겐 그런 능력은 없었기에 이제는 독 한 줌도 함부로 써선 안 됐다.
‘하아, 하다못해 쳐내기라도 하셨으면 어떻게 해낼 수 있지 않을까.’
할아버지께서 단순히 쳐내기만 하셨으면 일전에 삼촌이 만들어주신 추혼비독파접을 날리면 영향은 미미해도 조건은 만족할 수 있었을 거다.
그런데 일일이 붙잡거나 피하면서 암기조차 손상시키지 않았으니 도무지 답이 보이지 않았다.
“멈추는 걸 보니 그만할 생각이냐?”
“후우, 아닙니다.”
솔직히 답도 없는 문제에 포기하고 싶긴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 쓴 독의 양을 생각해 보니 이미 포기하긴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고, 무엇보다 할아버지께 실망을 드릴 순 없었다.
‘최소한 가진 기술이라도 다 보여 드려야 해.’
보상이 걸린 시험이라고 해도, 엄연히 평가다.
너무 질질 끄는 것도 좋지 않겠지만, 괜히 쉽게 포기하고 주저앉는 모습을 보여선 좋을 게 없었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자.’
할아버지는 눈을 감고 있고, 제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암기가 날아오면 암기를 잡아채서 옆에 던지고, 독이나 독이 발린 암기는 피한다.
이걸 대체 어떻게 아는 걸까?
‘아마 기와 감각이겠지?’
자고로 고수란 기와 감각만으로 뭐든 할 수 있는 법.
멀리서 날아오는 암기의 위치는 감각만으로도 알 수 있고, 독기는 기를 느껴서 알 수 있는 걸 거다.
‘잠깐, 기?’
그때, 문득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빙궁주의 말.
-네 아비가 그러길 평범한 사람들은 얼은 상태의 독을 보면 독기를 느끼지 못한다고 하더구나.
할아버지가 평범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시험해 볼 가치는 충분하거니와 어차피 달리 할 일도 없어서 곧장 시험해 보기로 했다.
“왜 갑자기 제자리에 주저앉는 게냐?”
“잠시 다리가 풀려서 그렇습니다.”
“그럼 그만할 테냐?”
“아닙니다.”
다리가 풀렸다며 주저앉는 동시에 매의 눈으로 바닥에 굴러다니는 적당한 크기의 돌 하나를 주워 주변의 눈에 굴려 눈덩이를 하나 만들었다.
자고로 눈싸움의 오의는 짱돌 아니겠는가.
게다가 인류 역사상 가장 역사가 깊은 암기 역시 짱돌이다.
그러니 나는 돌 박힌 눈덩이가 아주 아름다운 암기라고 합리화하며 정성껏 제조했고, 그 뒤에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은 평범한 눈덩이도 하나 만들었다.
“계속하겠습니다.”
일부러 할아버지께 예고까지 해드리고 평범한 눈덩이를 던졌다.
“눈덩이를 던지다니, 독이라도 묻혀놨느냐?”
그러자, 고려할 가치가 없다는 듯 단번에 피해 버리는 할아버지.
혹시 독을 얼렸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지 아예 받을 생각도 하지 않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