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95화
빙궁에서 쏟아지듯 나오는 물건들에 정신 못 차리고 기뻐하느라 그간 생각을 못 했지만, 사실 나는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았다.
왜냐면 엄연히 소가주 경쟁을 하는 중이었기에.
‘아무래도 공정을 추구하는 당가주 특성상 빙혈은 부모의 책임이기에 두둔하고 있을지도 모르고, 당지독도 성품상 굳이 찍어누르려 하진 않겠지만…….’
애초에 찍어누르려고 했다면 이미 약관(20살)이 되었을 때, 기회조차 잡지 못하고 끝났을 거기에
공정이라는 틀에서 벗어난 인물이 당가에 한 명 존재했다.
그건 바로 아직 폐관에서 나오지 않은 당지혁.
‘어중이떠중이라면 모를까, 폐관에 들기 전만 해도 나하고 비슷한 세력은 진작에 일궜었어.’
무려 5년이 넘는 세월 동안 폐관에서 나오지 않은 탓에 여태껏 없는 사람 취급했는데, 만약 지금 시기에 폐관을 마치고 나온다면.
그리고 내가 없는 이때를 틈타 온갖 수를 써서 가문의 세력을 불린다면 필시 골치 아파질 게 분명했다.
‘그래도 만독연주님도 그렇고, 장로님들도 힘이 없으신 건 아니니까 어느 정도 여유는 있을 거야.’
물론, 우리 쪽 인원들도 순순히 당해주진 않을 거다.
당가에서 제일 중요한 만독연의 연주를 포함한 인원 대다수가 내 세력이고, 무엇보다 장로의 절반인 6~10장로가 이쪽 세력이었으니 말이다.
다만, 그렇다고 너무 여유 부릴 수도 없는 게 지금 당지독과 균형을 이루는 건 장로들의 영향이 컸기에 당지혁이 힘을 실어버리면 힘들 게 분명했다.
그러니 이제는 빙궁에서 딱 얻을 것만 얻고 돌아가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할아버지께 지도를 받아 빠르게 경지를 올린 뒤, 피치블렌드를 구하고 가문으로 돌아간다.’
명확한 목표가 생긴 만큼 이전과 같이 한가로이 거닐 순 없는 법.
이전의 편안했던 마음과 달리 조금 조급해진 마음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당지천이 폭포를 향해 발을 바삐 놀리던 그 시각.
폭포 밑에 있던 천고천과 빙설린은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영감, 진짜 무리하지 말아요. 알겠어요?”
“좀! 안 한다고 몇 번을 말해! 한 번만 더 들으면 천 번도 넘겠어, 알아?”
“지금 나한테 소리친 거예요?”
“아니, 그건 아니고…….”
빙설린이 표독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자, 급하게 눈을 피하는 천고천.
한때 강호에서 이름깨나 떨치고 다녔던 무인이며, 한 문파의 문주였지만, 제 마누라 앞에서 기가 죽는 건 매한가지였는지 눈을 피한 채로 사근사근 이야기했다.
“지금이 벌써 며칠째야. 내가 막 고집부리는 것도 아닌데 계속 찾아와서 이러니 나도 조금 화가 나서 그랬지.”
여간 답답한 게 아니라는 듯 천고천이 가슴을 치자, 빙설린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나도 이렇게 닦달하고 싶진 않아요. 하지만 몇 번을 말해도 점괘가 도통 변할 생각을 안 하는 걸요?”
“아니, 내 건 이제 아무것도 안 보인다면서 그걸 어떻게 아는데?”
“지천이 점괘를 보면 알 수 있어요. 비록, 수정구가 망가진 것 같아서 약식으로 했다고 해도, 그 정도는 정확하거든요? 근데 내가 몇 번을 찾아와도 점괘가 변하지를 않으니 이렇게 하는 거잖아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다시금 한숨을 푹 쉰 빙설린이 타이르듯 말했다.
“제정신이 아닌데 오래 살면 뭐 해요. 적어도 증손주 볼 때까지는 맨정신으로 있기로 했잖아요. 지천이에게 마음 쓰는 것도 좋지만, 얼굴도 제대로 기억 못 하게 되면 그게 무슨 소용 있겠어요.”
“아니, 난 그럴 생각이 없대도…….”
“됐고, 손이나 줘봐요.”
답답하다는 듯 천고천이 항의했지만, 전혀 신뢰하지 않는 빙설린.
천고천의 손을 낚아채듯 잡아서 양쪽의 붕대를 단단히 묶고는, 작은 끈을 이용해 한 번 더 풀리지 않게끔 단단히 묶었다.
“이거 풀면 앞으론 국물도 없을 줄 알아요. 알겠어요?”
빙설린이 걱정 가득한 눈으로 손등을 매듭 부위를 후려치자, 천고천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이야기했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적당히 지천이를 가르쳐 주고, 사성에 대한 것도 잘 해결할 테니 어여 가봐. 이제 애들 오는 것 같으니까.”
“믿어요. 영감.”
“그려.”
입으론 믿는다고 하면서도 도통 못 믿는 눈치인 빙설린이 몇 번이나 천고천을 째려보다가 자리를 뜨자, 천고천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아, 오늘도 겨우 넘어갔네. 하여간, 그놈의 점괘가 문제야. 뭘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가 없다니까?”
빙설린에게 무리하지 않겠다고 매일 약조했지만, 점괘가 변하지 않는 이유.
그건 당연히 천고천이 그럴 마음이 없기 때문이었다.
“자고로 스승 노릇을 하겠다고 했으면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어야 하는 법. 내가 오늘을 위해 얼마나 노력을 했는데 그걸 막으려 들어?”
여태껏 신념 탓에 제자를 들이지 않은 천고천.
사제의 연을 맺기를 청하는 이들이 참 많았어도 사문의 무공은 여기서 명이 끊어지는 게 맞다고 생각해 일평생 제자를 들이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런 신념도 손주 앞에선 무의미한 법.
제대로 된 스승 하나 없이 홀로 무공을 익혔다며 눈물을 뚝뚝 흘리는 당지천의 모습에 마음이 약해져 사제의 연을 맺기로 했다.
“적당히는 무슨. 어림도 없지.”
아예 시작도 안 했으면 모를까, 이미 시작한 일을 대충 한다?
천고천으로서는 절대 용납할 수 없는 행위.
빙설린이 뭐라고 하든, 뒷일이 어떻게 되든 간에 스승 노릇만큼은 제대로 하기로 했다.
“이런, 지천이가 벌써 거의 다 왔구나.”
당지천의 기척을 알아차린 천고천이 품을 뒤적이더니 꺼낸 서책 하나.
[좋은 스승이 되기 위한 27가지 방법.]
그건 바로 천고천의 처남.
빙궁주가 오직 천고천만을 위해 집필한 서책이었다.
‘솔직히 스승님께 배우긴 했어도 남을 가르치는 건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가늠은 안 갔는데 처남이 도와줘서 참 다행이야.’
천마 상태일 때는 여기저기 훈수하고 다녔지만, 기억도 안 나거니와 맨정신에는 누구를 가르쳐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괜히 잘못 가르칠까 봐 걱정됐는데 이야기를 전해 들은 빙궁주가 단 하루 만에 자신이 제자들을 가르쳤던 경험을 담은 서책을 가져다줘서 천고천은 크게 감동했다.
그러니 절대 허투루 가르칠 수 없다고 다짐한 천고천은 몇 번이나 읽었던 서책을 다시금 펼쳐서 처음에 뭘 해야 할지 복습했다.
[처음은 최대한 근엄하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실력 파악부터.]
“실력 파악이라…….”
실력 파악이란 단어를 보자 감상에 잠기는 천고천.
아예 밑바닥부터 가르치는 게 아니니 실력 파악은 당연한 일.
누구를 가르쳐 본 없는 천고천도 그 점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감상에 잠기는 이유는 당지천에게 큰 기대를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고작 17살에 거창한 별호를 가졌으니 당연히 실력은 기대해도 될 정도겠지?’
무릇 스승이라면 강한 제자를 원하는 법.
비록, 스스로 얻어낸 별호가 아닌 만들어진 별호를 가졌긴 했으나 벽에 막혔을 뿐, 엄청난 성장 속도를 보이며 성장했다고 들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처남한테 음기를 다루는 법을 배워 오라고 하니 단 하루 만에.
그것도 단 한 번만 듣고 배웠다는 게 아닌가.
이는 필시 당지천이 범상치 않은 재능을 지녔다는 의미.
그러면서 가진 내공 또한 많았으니 자신이 가르친다면 일취월장할 게 분명하다는 기대감에 천고천은 애써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오매불망 당지천을 기다렸다.
“빨리 오너라. 지천아. 이 스승님이 기다리다가 늙어 죽겠다.”
* * *
평소보다도 더 발걸음을 재촉해 도착한 얼음 폭포.
딱히 시간을 정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근처에 머물 곳이 있는 것도 아닌데 당연하다는 듯 할아버지가 서 있었다.
“어서 오거라.”
가까이 다가가자, 읽고 있던 책을 여유롭게 집어넣는 할아버지.
책 자체가 관리가 잘됐고, 굉장히 고급스러운 게 뭔가 고상한 책이라고 읽고 계셨던 듯했다.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스승님.”
“그래, 그래.”
오늘은 단순히 할아버지를 뵈러 온 게 아니라, 가르침을 받기 위해 왔기에 깍듯이 인사를 하자, 흡족한 얼굴로 인사를 받는 할아버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뭔가 점수를 딴 느낌이라 기분이 매우 좋았다.
“준비는 다 마쳤느냐?”
“예, 궁주님께 음기를 다루는 법도 배웠고, 수련용 암기도 넉넉히 챙겨 왔습니다.”
“좋다. 그럼 시작해도 되겠구나.”
잠시 숨을 고르듯, 품에 손을 넣은 할아버지께서 목을 한 번 가다듬으시더니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문파에 새로운 제자를 들인 거라면 그저 처음부터 가르치면 되겠지만, 너는 우리 문파의 제자로 들인 게 아니며 단순히 무공 지도를 원하는 것이니 우선 너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겠다. 그러니 대련부터 하자꾸나.”
말을 마친 할아버지가 품에서 긴 끈을 하나 꺼내시더니 곧장 눈부터 가리셨다.
“나는 이 끈으로 눈을 가리고, 이 자리에서 반보 이상 벗어나지도 않으마. 또한, 공력도 일절 사용하지 않겠다. 그러니, 맘 편히 나를 공격해 보거라.”
“오…….”
눈을 가리고, 제자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으며 공력조차 쓰지 않는 것.
이거야말로 자주 보던 스승님들의 단골 재료 아니겠는가.
‘명확한 실력 차이를 보여줘서 기를 죽이는 거지.’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아득히 실력 차이가 나는 스승과 제자.
그런데도 제 분수를 모르고 나대는 제자에게 명확한 실력 차를 체감시켜 주기 위해 주로 하는 일이다.
물론, 나는 애초에 스승과 맞먹으려 들지도 않거니와 설령 지더라도 수준 차이를 잘 알기에 기죽진 않을 거다.
다만…….
“독을 써도 됩니까?”
조금 승부욕이 생기긴 했다.
“그럼. 네가 가용할 수 있는 수단은 전부 동원하거라.”
당연히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할아버지.
한술 더 떠서 최선을 다하라는 듯 조건을 걸었다.
“사람은 목표가 없으면 본신의 힘을 내지 못하는 법. 만약 네가 내 옷깃이라도 건드린다면 내 손수 준비한 작은 선물을 주마.”
“작은 선물 말입니까?”
“네가 원하는 건 천열운무보를 개량해서 쓰는 거겠지?”
“예.”
“만약, 네가 내 옷깃이라도 스친다면 내가 가르칠 때 처음부터 천열운무보가 아닌, 직접 독무를 쓸 수 있게끔 개량해서 알려주마.”
“처음부터 개량한 걸 말입니까? 가능한 이야기입니까?”
기존의 계획은 천열운무보를 극성까지 익히고 독무를 뿌리려던 계획이었다.
그런데 처음부터 독무가 뿌려지는 천열운무보를 익히게 된다면?
시간 절약이 어마어마할 거다.
“보법 전체를 손보는 게 아니라, 단순히 독무만 뿌리는 거라면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러니…….”
발로 작은 반원을 그린 할아버지가 왼손을 내밀고 까닥이셨다.
“어디 한번 제대로 와보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