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94화
삽시간에 조용해진 대장간에서 일염이와 함께 멍하니 기다리고 있자, 얼마 안 가서 노인이 축 늘어진 삼촌을 질질 끌면서 대장간으로 돌아왔다.
“헤엑, 헤엑, 빌어먹을 이제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슬슬 따라가기도 벅차네.”
머리를 맞아 기절한 건지, 아니면 그냥 맞아서 기절한 건지 노인은 질질 끌어온 삼촌을 대장간 한구석에 던져놓고는 숨을 몰아쉬며 모루 앞에 앉았다.
“그래, 뭘 부탁하러 왔다고 했지?”
“아직 이야기 안 드렸었습니다…… 그런데 삼촌은 괜찮으신 겁니까?”
“저놈 몸이 아주 강골이야. 저렇게 때려도 일각 이내에 일어나니 걱정하지 마라. 그러니 잔말 말고 본론만 말해.”
“예…….”
추운 데서 자면 입 돌아가는 게 마음에 걸렸지만, 매일같이 봤던 스승이 괜찮다는데 어쩌겠는가.
삼촌이 겉보기에도 듬직하고 튼튼해 보이니 무시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번 건 좀 특이한 겁니다. 현철하고 오철을 이용해 만들 물건이거든요.”
“현철은 그렇다 치고 쓸모없는 오철을? 도대체 뭘 만들길래?”
“형상기억합금을 만들 겁니다.”
“형상기억합금이라…….”
한자어인 만큼 말하자마자 대충 감이 오는지 생각에 잠기는 노인.
“네가 말하는 게 어떤 금속이 훼손되었을 때, 모종의 방법으로 원래대로 되돌릴 수 있는 금속을 말하는 게냐?”
“맞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걸 냉기로 조종할 생각입니다.”
“냉기로 변형하고 이후에 원래 형상으로 돌아온다라…… 암기로 쓸 생각인가 보구나.”
노련한 대장장이인 만큼 특성만 들어도 어떻게 활용할 건지 예상이 가는 듯 노인이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던 그때.
“뭐?! 냉기로 변형하고 돌아오는 형상기억합금?!”
기절해 있던 삼촌이 튀어 오르듯 일어나 내 어깨를 붙잡으며 물었다.
“진짜?! 그런 걸 만들 수 있어?!”
“예, 가능합니다.”
가능하다고 하자, 갑자기 어깨를 붙잡은 채로 덩실덩실 춤을 추는 삼촌.
안 그래도 종잡기 힘든 사람이었는데, 이러는 걸 보면 도무지 종잡기 어려웠다.
“그래서?! 어떻게 만드는 건데?”
“현철과 오철을 1 대 1 비율로 섞으면 만들 수 있습니다.”
“오, 1 대 1. 그다음은?”
“예? 그다음이라니…….”
“특유의 제련법이라든가, 가공하는 데 주의해야 하는 점 같은 거 없어?”
일전에 언급했듯이 니티놀을 만드는 방법은 참 쉽다.
바로 니켈과 티타늄을 1 대 1로 섞어서 만드는 것.
하지만 이곳이 무림인 만큼 완전히 똑같은 방법이 통할 거라 단언할 순 없었기에 삼촌에게 확언하지는 않았다.
“사실 그걸 잘 몰라서 삼촌께 부탁드리고 싶은 겁니다. 어제 삼촌께서 만들어주신 이 추혼비독파접(追魂飛毒播蝶). 얼마나 대단한 물건입니까? 저는 차마 상상조차 못 한 물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물건을 밥 먹듯이 만들어내시는 빙궁의 보배, 대장장이의 전설이신 삼촌께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만약 제련법을 알고 있었다고 해도, 고작 범인(凡人)의 상식으로 만들어진 것이니 비범하신 삼촌의 머리를 어지럽히진 않을까 두려워 말도 꺼내지 않았을 겁니다.”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속사포로 아부를 연발하자, 삼촌이 크나큰 감동을 받았는지 곰만 한 덩치로 몸을 배배 꼬았다.
“아이참, 그렇게 얼굴에 금칠할 것까지는 없는데…….”
그리고 그걸 본 노인은 더는 화낼 힘도 없는지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아주 쌍으로 옘병을 떠는구나…….”
솔직히 이상한 짓은 삼촌이 혼자 다 하고, 나는 아부 한 번만 했을 뿐인데 같은 취급 받는 건 조금 불쾌했지만, 어쩌겠는가.
삼촌도 자신의 스승이 그러는 게 하루 이틀이 아닌지 무시한 채로 일염이에게 물었다.
“이참에 형님 무기도 한번 손봐드릴까요? 아무리 좋은 검이라고 해도 관리를 안 하는 것보단 하는 게 더 좋거든요.”
“신경 쓰지 마라.”
검을 넘길 생각이 일절 없는지 단호히 말하는 일염이.
생각해 보면 어머니의 묘에서 돌아왔을 때부터 말수가 확 줄어서 목소리조차 간만에 듣는 느낌이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이야기하세요. 제가 손이 느려서 그렇지, 지천이 말대로 빙궁의 보배, 천재 대장장이 아니겠습니까? 만년한철도 잘 다루는 사람이니까, 부탁만 하시면 아주 완벽하게 해놓겠습니다.”
“……내키는 대로 해라.”
삼촌의 말에 검을 풀어 모루 위에 올려놓는 일염이.
이내 귀찮다는 듯, 먼저 밖으로 나갔다.
“어어?”
그동안 무시하고 입을 다물지언정 먼저 자리를 뜬 적은 없던 일염이다.
그런데 갑자기 나가 버리니 심히 당황스러워졌다.
“에구, 나가 버렸네?”
“죄송합니다. 삼촌.”
“에이, 신경 쓰지 마. 이 기회에 수다 좀 떨려고 했는데 형님 심기를 건드려 버렸나 봐. 어쨌든, 형님 말씀대로 금방 끝날 일은 아닌 것 같으니까 완성되는 대로 부를게. 그럼 이만 가봐.”
그렇지만 삼촌은 자주 겪었던 일인 듯 개의치 않은 표정으로 풀무질을 시작했다.
거기다, 이제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하려는지 눈빛이 장인의 눈빛으로 변하는 게 일염이의 일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하긴, 의형제라고 해도 꽤 잘 아는 사이인 것 같았으니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겠지.’
평소에 안 하던 일이라도 형제한테라면 할 수도 있는 법.
태연한 삼촌의 모습 덕에 안심하고 대장간을 나올 수 있었다.
“그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 *
“같이 가!”
당지천이 부랴부랴 천일염의 뒤를 따라 나가는 모습을 조용히 보던 노인, 빙학은 풀무질을 하던 천일절에게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네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올지는 꿈에도 몰랐다.”
“…….”
“너도 저 녀석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잖느냐. 어쩌면 그렇기에 더욱이 놓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스스로 놓다니…….”
“…….”
“정말 괜찮겠냐?”
빙학의 걱정스러운 물음에도 묵묵히 풀무질만 하는 천일염.
무어라 대꾸할 법도 하건만, 그저 화덕만을 바라보며 하던 일을 이어나갔다.
-푸쉬익, 쉬익. 푸쉬익, 쉬익.
그렇게 풀무질하는 소리만 대장간을 채운 채 얼마나 지났을까.
굳게 닫혔던 천일절의 입이 열렸다.
“메마른 우물 바닥을 긁어도 나오는 건 한 줌의 흙뿐이라는 걸 누구보다 제가 잘 압니다. 그러니 괜히 구차하게 앞길 막기보단 좋은 기억이라도 남게 깔끔하게 보내주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설령 남지 않는 기억이라도 말입니다.”
“그러냐…….”
빙학이 안쓰러운 눈으로 천일절을 봄에도 천일절은 그저 모루에 다가가, 위에 올려놓은 검을 들어 한쪽에 치우더니 있는 힘껏 모루를 밀었다.
그러자, 모습을 드러내는 한 철 궤짝.
온갖 금속을 가공하는 모루인 만큼 순 철 덩어리에 무겁기 짝에 없어서 궤짝 한 곳이 찌그러졌을 법도 하건만, 휘어진 곳 하나 없이 매끄러운 모습이었다.
“흡.”
천일절이 크게 기합을 한 번 넣고 궤짝을 들어 올려 땅바닥에 내려놓자 대장간을 울리는 소리.
-쿵.
철 궤짝이 어지간히도 무거운 것인지 육중한 굉음을 내며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곧장 다시금 기합을 넣는 천일절.
“흡.”
힘찬 기합과 함께 궤짝의 뚜껑을 열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이번엔 아까와 달리 꿈쩍도 하지 않았다.
“끙…….”
얼굴이 시뻘게지고, 온몸의 근육이 터질 듯 부풀어 오를 때까지 용을 씀에도 열릴 생각은커녕, 궤짝이 미동도 하지 않자, 보고만 있던 빙학이 천일절을 옆으로 밀어냈다.
“아직 혼자선 못 드는구나. 옆으로 가봐라. 흡.”
빙학이 짧은 기합과 함께 뚜껑을 들어 올리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입을 벌리는 궤짝.
그 모습을 천일절은 자조 섞인 한숨을 쉬면서도 곧장 궤짝 안부터 확인했다.
“검도, 장갑도 이상 없군요.”
장검보다 짧고, 단검보단 긴.
흑색 일색의 중검을 들어 살며시 뽑아보자 만년한철으로 만들어졌음을 증명하듯 빛나는 눈처럼 새하얀 검신.
그 귀하디 귀한 만년한철로 만든 만큼 궤짝에 처박아놨어도 변함이 없어 보였지만, 빙학의 눈에는 뭐가 달랐는지 냉큼 중검을 뺏었다.
“검을 벼리는 건 내가 할 테니 장갑은 네가 하거라.”
말릴 틈도 없이 검을 가져가 모루에 얹는 빙학.
천일절이 하기로 한 일임에도 냉큼 중검을 뺏어 간 건 빙학 특유의 배려라는 걸 알기에 쓴웃음을 짓고 다시금 궤짝 안으로 시선을 돌렸다.
중검이 자리를 비운 탓에 덩그러니 놓인 장갑과 그 밑에 깔린 하얀 실뭉치.
한눈에 봐도 사술사가 쓰는 물건임을 증명하듯 구조가 굉장히 복잡했다.
만년한철을 다루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 만큼 검을 벼리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이지만, 사실 이것에 비하면 새 발의 피.
이 장갑은 복잡하디 복잡하기 짝에 없는 구조를 가졌으면서도 재료들이 하나같이 귀하고 다루기 힘들어서 손이 많이 갔다.
“후…….”
그런 만큼 크게 심호흡한 천일절이 장갑과 실뭉치를 조심히 들어 올려 모루 위에 올려놓고는 다짐하듯 읊조렸다.
“마지막인 만큼 모든 것을 담아드리겠습니다. 형님.”
비장한 눈으로 모루를 원래 위치로 되돌린 천일절이 본격적으로 작업에 들어가자, 얼마 안 가서 대장간에는 풀무질하는 소리와 철 두드리는 소리만 가득했다.
* * *
대장간을 나와 일염이의 뒤를 부랴부랴 쫓아가자, 대장간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일염이.
검만 툭 던지고 왔음에도 평온하기 짝에 없는 모습을 보아하니 역시 내 예상대로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던 듯했다.
“넌 검도 없이 어떻게 하려고 그냥 나오냐?”
“어차피 빙궁인데 뭔 일 있겠습니까. 그리고 준비도 얼추 끝난 것 같으니 조부님께 가시려는 것 아니셨습니까?”
“……맞긴 한데 왜 맞히냐. 기분 나쁘게.”
“눈빛만 봐도 통하는 사이 아니겠습니까.”
일염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입꼬리를 슬며시 말았다.
니티놀은 완성되려면 시간이 걸리는 상황이었기에 당장에라도 피치블렌드를 구하러 갈까 싶었던 상황.
하지만 결국 구한다고 해도 폴로늄을 추출해서 보관하려면 당가에 있는 연구실에 가야만 했다.
즉, 지금 당장 구해봤자 쓸모없는 돌 쪼가리에 불과하다는 이야기.
그렇기에 시간 관계상 다음으로 미루고, 할아버지께 찾아가기로 마음먹긴 했다.
‘잠시 자리를 비운다고 해서 문제 생기진 않겠지만, 아무래도 오래 자리를 비우면 비울수록 불리할 테니까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