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92화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만드는 과정에서 도움이 필요합니다.”
“알았다. 뭘 도와주면 되겠느냐?”
“간단합니다. 이 세숫대야 위에 손을 올린 채로 냉기를 뿜어주시면 됩니다.”
“이렇게 말이냐?”
당지천의 손이 이끄는 대로 세숫대야 살짝 위에 손을 떨어뜨린 채 냉기를 뿜어내자, 고개를 끄덕이는 당지천.
“예, 딱 좋습니다.”
“그리고? 뭘 하면 되느냐?”
“지금부터 제가 ‘더’라고 말할 건데, 그러면 한꺼번에 확 뿜어내지 마시고 조금씩 냉기를 강하게 해주시면 됩니다.”
“알았다.”
세숫대야 위에 손을 올려놓은 채로 그저 냉기를 뿜어내는 일.
이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전혀 모르겠지만, 빙궁주는 일단 당지천이 시키는 대로 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일단, 이거보다 갑절 정도 세게 해주시죠.”
“알았다.”
당지천이 냉기를 가늠하려는 듯, 빙궁주의 손에서 조금 떨어진 허공에 손을 댄 채 주문을 해왔다.
“더.”
당지천이 말하자, 더 강력하게 뿜어내는 냉기.
“더.”
당지천이 ‘더’라고 할 때마다 당지천이 원하는 만큼 냉기를 강하게 만들었다.
“더.”
그렇게 세 번째로 강하게 만들었을 때, 갑자기 손에 물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이건…….”
손을 타고 흘러 세숫대야에 한 방울씩 떨어지는 연하늘색의 액체들.
확실히 똑같지는 않지만, 빙궁주는 예전에 본 적 있던 액체들이었기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빙한(氷汗) 아니냐?”
* * *
빙궁주의 도움을 받아 액체질소를 만들기 위해 액체산소를 거르고 있던 와중.
빙궁주가 갑자기 액체산소를 보고는 빙한이 아니냐고 물었다.
“빙한 말입니까?”
빙궁에 와서 빙혈이나 빙과나 빙(氷)자 들어가는 건 어지간해서 다 들어본 것 같은데, 이번에 또 모르는 빙 시리즈가 하나 튀어나오니 환장할 노릇이었다.
심지어 이름도 요상하기 짝에 없는 얼음 땀이었으니…… 알 길이 있겠는가.
“빙한이란 단어는 처음 들어봅니다.”
“원래 빙궁 사람들은 땀을 흘리지 않는데, 수준 높은 빙공을 구사할 때면 몸에 물방울이 맺힌단다. 그래서 우리는 그걸 빙한이라고 부르지.”
수준 높은 빙공을 쓸 때, 맺히는 물방울?
‘아, 수준 높은 빙공을 펼치면 최소 –183℃ 밑으로 떨어지나 보네.’
산소의 끓는점이 약 –183℃다.
당연히 그 밑으로 떨어지면 산소가 액화하기에 물방울이 맺히는 게 말이 됐다.
“한번 확인해 보마.”
말릴 틈도 없이 세숫대야에 담긴 액체산소를 들이켜는 빙궁주.
빙궁에서 가장 강한 인물인 만큼 당연히 액체산소를 먹는다고 죽진 않겠지만, 그래도 엄연히 독이었기에 일단은 말리기로 했다.
“빙한이 뭔지 모르겠지만, 그거 순수한 독입니다.”
-푸후후후후후!
독이라고 하자, 단숨에 뿜어버리는 빙궁주.
여태껏 애써 정제했던 액체산소들은 한순간에 기화해 원래 상태로 돌아갔다.
“콜록, 콜록…… 독이었으면 진작 말해야 할 것 아니냐!”
“아니, 빙한인지 뭔지 확인해 본다면서 말릴 틈도 없이 드셨잖습니까…….”
자고로 땅바닥에 있는 거 함부로 집어 먹지 말라는 건 다섯 살짜리 꼬마도 아는 상식인데, 왜 아무거나 집어 먹고는 나한테 화를 낸단 말인가.
“그래서 내가 그 전에 빙한이냐고 물어봤잖냐!”
“그래서 말씀드렸잖습니까, 빙한이 뭔지 모른다고. 그리고 빙한이 뭔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지금 하는 일이 그걸 만드는 일과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아니, 아까는 독이라며?”
“예, 빙한이 뭔지 모르겠지만, 제가 만드는 건 독입니다. 혹시 빙한인지 뭔지는 안 드셔보셨습니까?”
“너는 수련하다가 네 주먹에 땀이 맺히면 핥아먹고 그러냐?”
“저는 안 그러는데, 아무거나 막 주워 드시는 분이면 그럴 만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애초에 빙한을 드셔보신 적도 없으면서 마셔서 구분하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잖습니까.”
“그건…….”
논리적으로 반박하자, 갑자기 입을 다무는 빙궁주.
이내 자신이 흥분했다는 걸 깨닫고, 사과했다.
“크흠, 미안하다 잠시 흥분했구나. 내가 먹어보려 했던 건 단순히 영약인지 아닌지, 판단해 보려 했던 거다. 빙한은 송글송글 맺혀 있을 뿐, 금방 사라졌거든.”
무안한지 고개를 돌린 채 몇 번 더 헛기침한 빙궁주는 이내 다시 평정을 되찾았다.
“그럼 계속하자꾸나.”
다시금 세숫대야 위에 손을 올리고 냉기를 뿜어내는 빙궁주.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액체산소가 만들어지게끔 냉기를 뿜어냈다.
“그래, 내가 이걸 얼마나 모으면 되겠느냐.”
“세숫대야에 가득 모을 때까지 해주시면 됩니다.”
“이걸?”
세숫대야 가득 모아달라고 하니 고개를 갸웃하는 빙궁주.
“네가 이건 독이라고 했잖냐. 그런데 굳이 이걸 모으는 건 모종의 과정을 거쳐서 영약으로 쓸 수 있게 만드는 게냐?”
“아닙니다. 그건 그냥 버릴 겁니다.”
액체산소는 아까 말했듯이 독.
제아무리 빙궁의 사람들이 –183℃의 온도를 견딜 수 있다고 해도, 고농도의 산소는 현대에서도 독극물로 분류되는 만큼 독에 내성이 있는 게 아니면 견디기엔 무리였기에 쓸 방법이 없었다.
“이걸 일부러 만드는 이유는 산소를 덜어내려고 하는 겁니다.”
일전에 언급했듯 산소의 끓는점은 –183℃이고 질소가 끓는점은 –196℃다.
산소와 달리, 상대적으로 안전한 질소를 추출하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공기 중의 산소를 덜어내는 과정을 거쳐야 했고, 지금 우리가 하는 행위가 그것이었다.
“완전히 덜어낼 순 없는 만큼 어느 정도 선에서 멈출 겁니다만, 많이 걸러낼수록 일이 편해집니다. 물론, 지금은 단순한 시연이기에 적당히만 덜어내고 말 겁니다.”
“알았다.”
알았다는 빙궁주의 말을 끝으로 잠시 찾아온 침묵.
다들 묵묵히 빙궁주의 손에 떨어지는 액체산소만을 바라봤다.
“……이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느새 세숫대야는 하늘색 액체 산소로 가득 차 냉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이제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
“기존의 액…… 아니, 걸러놨던 빙한은 액체 상태를 유지하게끔 해주시고, 반대 손으로 아까와 똑같은 일을 해주시면 되는데, 아까보다 조금 더 강하게 해주시면 됩니다.”
“냉기를 뿜기만 하면 되는 게냐?”
“예.”
“알겠다.”
알겠다는 말과 함께 빙궁주가 곧장 냉기를 뿜어내자, 아까와 같이 송글송글 맺히는 물방울들.
하지만 액체 산소 때와는 달리, 하늘색이 아닌 무색의 액체들이었다.
“이게 네가 말한 그?”
“예, 이게 바로 제가 말한 영약입니다.”
“오…….”
아까와 달리 다소 신기하다는 얼굴로 보는 빙궁주.
“지금 보시면 연청색의 물방울들이 같이 떨어지는데, 제가 말한 영약은 무색입니다.”
대기 중의 산소를 완전히 액체로 만들어 분리하지 못했기에 조금씩 액체산소가 섞여 들어가 있긴 했지만, 어차피 빙궁주를 먹일 거기에 딱히 신경 쓰진 않았다.
“그럼 이건 걸러내지 못한 것들이 같이 떨어지는 거냐?”
“예, 하지만 염려하지 마시죠. 시간이 촉박했던 탓에 미처 준비하지 못했지만, 따로 분리해 낼 방법은 있습니다.”
사람들이 대부분 잘 모르지만, 사실 산소는 상자성을 띤다.
그렇기에 자석이 있으면 액체산소들은 따라오는데, 웃기게도 액체질소는 반자성이다.
즉, 자석 하나만 있으면 액체질소와 산소를 분리할 수 있단 이야기였다.
“그러면 나보고 그냥 먹고 죽으란 소리냐?”
“아까 보니까 잘만 드시던데, 한 번 더 드시는 것 어떠시겠습니까?”
“예끼, 어른에게 버릇없이 그게 무슨 말버릇이냐.”
아까의 일 때문에 조금 비꼬듯 이야기하자, 마치 훈장 선생님처럼 엄한 표정을 짓는 빙궁주.
그러면서도 곧장 액체질소를 마셔보려는지 세숫대야를 들어 올렸다.
‘이렇게 보니 진짜 크시긴 하네.’
모든 건 상대적이라고 했던가.
분명 내게는 커다란 세숫대야였는데, 빙궁주가 드니까 과장 좀 보태서 냉면 그릇처럼 작아 보였다.
-꿀꺽, 꿀꺽.
아까와 달리, 제지가 없자 액체 질소를 들이켜는 빙궁주.
일반인이 먹었다간 혀부터 위장까지 전부 얼어붙어 위천공이 생기는 액체질소를 별미라도 되는 양 시원스레 마셨다.
“캬.”
그렇게 빙궁주는 마치 퇴근 후 먹는 생맥주 한 잔마냥 액체질소를 단숨에 비워 버렸다.
“어떠십니까?”
이미 액체질소를 만들어낸 이상 영약으로 쓸 수 있는 건 기정사실.
허나, 제조하는 데 손이 꽤 가는 만큼 기대 이하의 효율을 보이면 못 써먹을 게 분명했기에 빙궁주에게 물어보자, 빙궁주는 고심 끝에 뜻밖의 대답을 내놨다.
“시원한데? 어린 시절이 떠오르는 맛이야.”
무려 끓는점이 -196℃에 달하는 액체질소.
잠깐이라면 모를까, 나는 손만 넣어도 꽁꽁 얼어버릴 그 액체질소를 마신 빙궁주의 소감은 어이가 없었다.
“어린 시절…… 말입니까?”
“그래, 어린 시절.”
과거를 회상하듯 아련한 눈빛으로 천장을 올려다보는 빙궁주.
추억에 서서히 잠기는지 채 말리기도 전에 예전에 한 번 봤던 수다스러운 모습을 보였다.
“그때가 13살, 딱 너만 한 덩치를 가졌을 때였는데, 점점 커지는 몸과 달리 정신은 미성숙하기 짝에 없었지. 아, 고작 13살이 뭔 성숙을 논하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헌데, 너도 알다시피 나는 빙궁의 직계잖느냐. 당시엔 할아버지께서 아버지께 빙궁주 자리를 물려주신 탓에 나도 소궁주의 자리에 앉게 되었을 때지.”
“그게 빙한과 무슨 관련이 있습니까?”
“원래 이야기를 하기 위해선 서두가 필요한 법이다. 차차 설명해 줄 테니 말 끊지 말고 들어보거라. 이 배경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해 주지 않으면 이야기를 들어도 제대로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생길 수도 있잖느냐. 그럼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제대로 이해 안 가도 상관없으니까 본론을 바로 좀 꺼내주면 좋으련만, 빙궁주는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지 아주 길고 긴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돌아버리겠네.’
아까까지만 해도 액체질소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는데, 왜 갑자기 이야기를 산으로 보내서 시간 낭비를 한단 말인가.
‘할머니께 이른다고 할 수도 없고…….’
저번에는 할머니께 이른다고 하니 알아서 입을 다물었던 빙궁주.
하지만, 지금은 저번과 상황이 달라서 할머니께 이른다고 할 수 없었다.
‘괜히 말했다가 삐지기라도 하면 대장간을 빌려주긴커녕, 훼방이나 놓겠지. 애초에 그러니 이러는 거겠지만.’
사실상 할머니의 부탁으로 일 처리를 하러 왔던 저번과 달리, 이번에는 내 개인적인 일이었다.
그렇기에 할머니 이야기를 듣고 멈췄던 빙궁주가 이번에는 잔말 말라며 말을 늘어놓는 거다.
‘자세히 들으면 정신 나갈 게 분명하니 대충 흘려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