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90화
일전에 언급했듯이 냉기가 나오는 물건이 있으면 잠시 가져다 대고 변형하면 그만.
그런 물건이 아예 없다면 모를까, 지금 눈앞에 떡하니 있는 시점이니 무리할 필요는 없었다.
“지금 빙옥을 보여주시고 그걸 물으시는 건 딱 빙옥 정도로 보면 된다는 말을 하기 위해서입니까?”
“맞다. 몸에 서로 다른 기를 쌓는 건 위험한 일이다. 통제를 벗어나는 순간 기가 얽혀서 속이 진탕되기 때문이지. 그걸 방지하기 위해서 특별한 심공을 익혀야 하는데, 솔직히 빙공을 주로 쓸 게 아니라면 독공의 효율만 떨어뜨릴 뿐이다. 그러니…….”
빙옥에 손가락을 올린 빙궁주가 말을 이었다.
“나는 너를 이 빙옥과 같은 상태로 만들 거다.”
말을 마친 빙궁주가 빙옥에서 손을 떼자, 아까 냉기를 내뿜던 빙옥은 어디 가고 평범한 구슬 하나만 남아 있었다.
‘단순히 구슬을 바꿔치기한 건 아닐 테니 아마도 구슬에 담긴 음기를 전부 빼낸 거겠지. 그리고 이걸 내게 보여주는 이유는 음기를 모두 쓰게 되면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회복할 수 없단 걸 보여주기 위해서고.’
무인들이 말하는 일반적인 방법이 운기다.
그런데 그 방법을 쓸 수 없다는 건 스스로 음기를 채울 수 없다는 걸 의미했다.
‘그렇다면 음기를 채우기 위해선 다른 매개체가 필요하겠구나.’
저 평범해진 구슬이 다시 빙옥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겠지만, 짧은 시간 내에 가능한 건 외부에서 강한 음기가 유입되어 빙옥이 될 만큼의 음기를 얻는 것일 거다.
“그 말인즉슨, 제 몸의 음기를 다루고 쓸 순 있지만, 자연적으로 회복할 순 없고, 그걸 회복하기 위해선 다른 곳에서 음기를 얻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까? 예를 들면 빙옥 같은 물건에서 말입니까?”
현대에 비유하자면 나는 30분이면 꺼지는 스마트폰이 되는 거고, 그렇기에 항상 ‘빙옥’이라는 이름의 보조 배터리를 들고 다녀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역시 잘 알아듣는구나. 이 방법을 쓴다면 효율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지만, 별도의 심법을 익힐 필요가 없어서 금방 다루게 될 거다. 어차피 효율은 중요한 것 같지 않았으니 이게 너에게 제격일 거다.”
작금의 상황을 고려해 가장 어울리는 방법을 모색해 온 빙궁주.
역시 고수는 뭐가 달라도 다른지 딱 제격인 방법을 가지고 왔다.
“그러니 이 방법으로 음기를 다루게 되면 네가 할 일은 딱 2가지. 하나는 감정을 다스리는 법을 익히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음기를 다루는 일이다.”
“감정을 다스리는 법 말입니까?”
“그래. 안 그래도 매형께…… 네 할아버지께 가르침을 받기로 했다고 들었다. 감정을 다스리는 건 한순간 배워서 되는 일은 아니니 네 할아버지께 배우기로 하고, 나는 음기를 다루는 일만 가르쳐 주도록 하마.”
분명 할아버지와 처음 만났을 때도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은데, 정확히 뭘 이야기하는 건지는 감이 안 왔다.
말 그대로 감정 조절만 배우는 것은 아닐 게 분명했으니 말이다.
“이리로 손을 내밀어 보아라.”
이것저것 생각할 틈도 없이 손을 달라는 빙궁주.
본격적으로 음기를 다루는 법을 가르쳐 주려는 것인지 손을 달라고 하기에 곧장 손을 내밀었더니, 내 손을 그대로 빙옥에 가져다 댔다.
“지금부터 빙옥을 원상태로 돌려놓을 거다. 그러니 집중해서 음기가 어떤 것인지 한 번 느껴 보아라.”
“알겠습니다.”
“그럼 시작하마.”
빙궁주가 시작한다고 하자, 텅 빈 빙옥에 차오르는 시리도록 차가운 기운.
평소에 느꼈던 독기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기운이 이질적이기 짝에 없어서 계속 손을 대고 있기 무서웠다.
그러나 집중하라는 빙궁주의 말을 다시 떠올리고는 가만히 눈을 감고 빙옥에 음기가 차오르는 걸 느꼈다.
“느꼈느냐?”
“예, 느낀 것 같습니다.”
“그러면 이거와 똑같은 기운이 네 몸에도 있을 거다. 한번 움직여 봐라.”
움직여 보라는 빙궁주의 말에 눈을 감고 내부를 관조하자 느껴지는 음기.
독기가 가득한 단전 근처에 응집된 채 가만히 있었는데, 기를 움직이는 건 옛날 옛적에 했던 일인 만큼 음기를 움직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오, 나온다. 나온다.’
움직이라는 의지를 보내자 쉽게 딸려 나오는 음기.
‘어쩌면 쉽게 끝날 수도 있겠어.’
음기를 느끼고 끄집어내는 데 성공한 만큼 고지가 코앞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때.
‘옘병, 왜 쉽게 가나 했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튀어나오는 독기.
빠져나온 음기를 손으로 보낸다는 생각을 하기 무섭게 독기도 같이 따라 올라왔다.
‘아니, 독기가 거기서 왜 나와.’
통제를 해보려 해도 마치 약지와 소지(새끼 손가락)처럼 얽힌 듯 동시에 움직이는 두 기운.
이대로 계속 기를 운용하면 필시 두 기운이 얽히면 난리가 날 상황.
당연하게도 기를 운용하는 걸 멈추고 돌려보낼 수밖에 없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잘 안 되나 보구나.”
“예, 음기를 꺼내 쓰려 하니 독기가 같이 따라 올라옵니다.”
“당연한 일이다. 네가 단번에 익힐 것 같았으면 내가 어떻게 다루는지 알려줄 필요도 없었을 게다.”
이럴 줄 예상했다는 듯 피식 웃는 빙궁주.
애초에 안 될 걸 알고 있으면 미리 좀 일러줄 것이지 일부러 반응을 보고 즐기는 얼굴이었다.
“그런 눈으로 너무 보지 마라. 어차피 필요한 과정이긴 했다.”
“대충 예상은 갑니다만,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왜 필요한 과정이었습니까?”
“그거야 당연히 네가 천재일지도 모르니까 그런 거 아니겠냐? 물론, 아쉽게도 천재는 아니었지만 말이다.”
퍽이나 재밌다는 듯 다시금 실소를 흘리는 빙궁주.
일부러 골탕 먹이려고 한 건 아닌 듯하지만, 재밌다는 듯 웃음을 흘리는 게 속을 벅벅 긁는 느낌이었다.
“떽, 그런 눈으로 보지 말래도. 만약 내가 진짜 너를 속일 생각이었다면 처음부터 빙옥을 꺼내는 게 아니라, 이걸 먹으면 음기를 다룰 수 있다면서 대충 아무 독이나 얼리고 던져줘서 골탕 먹였을 거다.”
“아니, 겨우 독을 얼렸다고 제가 못 알아보겠습니까?”
“네 아비가 그러길 평범한 사람들은 얼은 상태의 독을 보면 독기를 느끼지 못한다고 하더구나. 그러니 대충 색깔 잘 바꿔서 내주면 모르겠지.”
‘당가주가 그랬다고?’
사실인지 거짓말인지 가늠이 안 됐지만 제대로 생각해 보니까 독을 얼려서 독기를 감춘다는 게 꽤 말이 됐다.
왜냐면 독은 인체에 작용해야 비로소 독인 법.
만약 꽁꽁 얼어 있는 협죽도 같은 걸 보면 사람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분명 독기보다 음기를 먼저 느끼겠지.’
평소라면 바로 알아차릴 수 있어도 얼어 있는 상황이라면 대게 음기를 먼저 인식할 거다.
왜냐면 녹지 않은 협죽도는 인체에 작용할 수 없어서 독이라 부를 수 없고, 무엇보다 독기는 안에 갇혀 있는 반면, 냉기는 주변으로 뿜어져 나오기 때문이다.
즉, 쉽게 말하자면 독 위에 얇은 얼음층이 생겨 인식을 막아버린다는 거다.
‘잠깐, 그러면…….’
그걸 듣고 있자니 문득 떠오른 방법 하나.
어쩌면 위험한 방법일지도 모르겠지만, 제대로만 된다면 별문제 없을 거고, 행여나 잘못된다면 빙궁주가 어떻게 해줄 거란 생각에 곧장 실행해 봤다.
그러자…….
‘된다!’
아까 전, 독기와 얽히지 않을까 염려됐다는 게 거짓말인 것처럼 음기를 다룰 수 있게 됐다.
마치 수도꼭지를 연 것처럼 줄줄 흘러나오는 음기.
그리고 반면에 수도꼭지를 잠근 것처럼 전혀 새어 나오지 않는 독기.
두 기운이 얽힐지 모른다는 처음의 염려와 달리, 허무할 정도로 쉽게 음기를 다룰 수 있게 되자 기쁨이 몰려오기보단 어이가 없었다.
‘이 쉬운 방법이 있었는데, 그걸 몰랐네.’
쉬운 문제를 어렵게 풀어서 맞혔는데, 답안지를 보니 쉽게 푸는 방법이 있던 상황.
당연히 어이없고 허탈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도 잠시.
어떻게든 풀었으면 장땡 아니겠냐는 생각으로 곧장 손으로 냉기를 뿜어봤다.
“어쨌든, 내가 좀 웃었다고 너무 상심하지 마라. 비록 네가 천재가 아닌 둔재라고 해도 지금부터 내가 가르쳐 주는 방법을 하나씩 하다 보면 언젠가는 음기를 수족처럼 다룰 수…….”
훈계하다 말고 갑자기 떡 벌어지는 빙궁주의 입.
내 손에 맺힌 음기가 빙궁주가 보여준 것처럼 강한 냉기를 뿜어내진 않아도, 엄연히 음기였기에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그, 그게 뭐냐?”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아까 전 빙궁주가 보여줬던 속을 벅벅 긁는 웃음이 생각나 똑같은 웃음을 지으며 답해줬다.
“뭐긴 뭐겠습니까. 이게 다 제가 천재라는 증거 아니겠습니까?”
“거짓말하지 마라! 네놈이 천재였으면 진작에 누님이 만년빙이 녹을 때까지 자랑했을 거다!”
아주 재수 없는 표정으로 실실 쪼개자,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손을 덥석 낚아채는 빙궁주.
“쯧.”
다른 속임수를 쓴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하자, 김빠지는 듯 혀를 찼다.
“좀 더 이러쿵저러쿵해서 극적인 고비를 넘기며 익히는 걸 원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다니. 그것 때문에 이틀 동안 얼마나 열심히 계획을 세웠는데…… 에잉, 쯧쯧. 다 허사가 되어버렸구나.”
날 굴릴 생각에 얼마나 신났으면 이틀 동안이나 계획을 세운단 말인가.
진짜 극적으로 다루는 법을 알아내서 다행이지, 잘못했으면 빙궁주는 놀잇감이 될 뻔했다.
‘빙궁 뒤에 있는 설산을 맨몸으로 등반한다든가, 눈 밑에 파묻혀서 하루를 보내게 하는 그런 계획이었을 것 같은 건 기분 탓인가.’
자고로 무림의 스승 중에는 제자를 괴롭히기 위해 사는 인물도 있는 법.
왠지 모르게 빙궁주가 세운 계획들이 근성 타령하며 날 생고생시킬 계획으로 가득했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거, 허사로 만들어 버려서 죄송합니다.”
“그래, 알면 됐다. 안타깝지만 어쩌겠느냐. 이미 음기를 다루게 되어버렸으니 포기하는 수밖에.”
비꼬듯 말함에도 태연하게 웃는 빙궁주.
지위가 지위인 만큼 뻔뻔하다 못해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넘겼다.
“그래서? 분명 처음에는 감을 못 잡는 것 같았는데 어떻게 단번에 해결한 게냐?”
“간단합니다. 얼렸습니다.”
“뭘 얼려?”
“독기가 새어 나오지 못하게 그쪽 혈을 잠깐 얼렸습니다.”
처음에는 감도 못 잡았는데 단번에 음기를 다루게 될 수 있던 이유.
그건 바로 얼린다고 생각해 일종의 막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
혈도를 얼렸다고 하자,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벙 찐 표정을 짓는 빙궁주.
내가 생각해도 기발한 방법이긴 했지만, 그래도 빙궁주쯤 되면 충분히 예상할 만하다고 생각하던 찰나…….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