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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88화 (88/200)

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88화

“단순히 무게 때문이라면 다른 금속으로 만들어 달라고 하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그치. 사실 가벼운 다른 금속을 써도 되긴 한데, 아무래도 손님으로 있는 만큼 함부로 빙궁의 재료를 달라고 하긴 좀 그래서 일부러 녹주석으로 해달라고 한 거야. 어차피 빙궁에서 안 쓸 광석이니까.”

고작 암기 조금 만들 분량에 아무리 가족이라고 한들, 가족의 것을 제 것마냥 펑펑 써대는 인간이 곱게 보일 리는 없는 법.

인간은 돈과 관련되어 있으면 민감하게 반응하기에 일부러 돈 안 되는 재료를 선정했다.

-텅.

일염이와 대화를 나누던 도중 갑자기 부서질 듯이 열리는 대장간의 문.

“이거 쉽게 될 일이 아닌데? 조금 걸릴 것 같으니까 어디 산책이라도 다녀올래?”

-쾅!

삼촌이 문밖으로 고개를 빼꼼 내민 채로 할 말만 하더니 대답은 듣지 않은 채로 문을 닫았다.

“……쉽게 될 일이 아니라니 완벽주의자이신가?”

자고로 장인들이란 완벽주의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법.

신입 대장장이라면 모를까, 연차가 쌓일 대로 쌓인 삼촌이 제대로 단시간에 암기를 못 만든다는 건 말이 안 됐기에 삼촌이 완벽주의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조카에게 처음으로 만들어주는 암기인 만큼, 공을 들이려 하나 봅니다.”

“뭐, 그럴 수도 있고.”

어쨌든, 애매하게 시간이 붕 떠버린 상황.

달리 할 일도 없었고, 만날 사람도 없었기에 빙궁의 풍경을 감상하며 한가로이 걷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서넛 되어 보이는 아이들이 쪼르르 내게 달려왔다.

“형, 형! 형이 그 유명한 백독멸악이에요? 신녀님 손자라던?”

“하얀 독무 보여주세요!”

“야! 그러다 우리 다 죽어!”

“잠깐 보는 거면 괜찮지 않을까?”

시끌벅적하게 다가와 한마디씩 내뱉는 아이들.

아직 빙공의 수준이 낮은 만큼 추울 법도 하건만, 저마다 손에 꽁꽁 언 막대기를 하나씩 들고 있는 게 아이스크림 같은 먹을 거로 보였다.

“얘들아, 손에 든 건 뭐니?”

“빙과예요. 형도 하나 드릴까요?”

빙과에 관심을 보이자, 곧장 손에 든 빙과를 내미는 아이.

원래 자기가 좋아하는 거면 잠깐 고민이라도 해볼 텐데, 그런 기색 없이 오히려 잘됐다는 듯 빙과를 내미는 게 딱히 먹고 싶어 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별로 맛이 없니?”

“맛이 없는 건 아닌데, 매일매일 일정량 먹어야 해서 싫어요!”

“맛도 몇 가지 없어서 질려요!”

“매일?”

“이거 먹으면 우리가 강해진대요!”

“근데 이빨은 아픈 느낌이에요!”

“아하.”

독공을 익힐 때 독을 먹어서 내공을 늘리듯, 빙궁의 아이들 또한 꽁꽁 언 빙과를 먹음으로써 내공을 늘리는 듯했다.

‘이빨이 아픈 게 문제면 구슬 아이스크림 같은 걸 만들어서 먹이면 되는데. 맛도 다양하게 늘릴 수 있고 형태도 다르니까 말이야. 심지어 다른 곳이면 몰라도 빙궁이니까 보관 온도는 될 거고, 액체질소도 충분히…… 잠깐, 생각해 보니까 아예 액체질소를 영약으로 쓸 수 있지 않을까?’

일반적인 얼음들과 달리, 섭취 시 냉기만 몸에 남기고 기체로 화해서 사라지는 액체질소.

더군다나 다른 기체들과 달리 질소는 인체에 무해하기에 영약으로 손색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만드는 법도 어렵지 않아.’

액체질소를 만드는 법은 간단하다.

그냥 공기를 얼리면 끝.

공기 중의 78% 질소고, 약 21%가 산소인데, 여기서 산소의 끓는점이 –183℃인데 반해, 질소의 끓는점은 –196℃라 액체산소가 만들어지면 걸러내고 나머지를 얼리면 액체질소가 나오는 방식이다.

즉, 빙궁주 같은 고수가 공기를 얼리면 영약이 나온다는 소리였다.

‘이거 한번 자세히 알아보고, 작은할아버지께 제안해 볼 만하겠어.’

식객보단 도움이 되는 사람이 호감을 사는 법.

딱히 베푼 것도 없는데 호의를 얻은 만큼, 나 또한 도움이 될 수 있으면 도움을 주는 게 맞았다.

‘무엇보다 작은할아버지 맘에 들면 이것저것 구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될 테니까 말이지.’

대장간에 니티놀을 부탁하려면 빙궁주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할 건 불 보듯 뻔한 상황.

그런 상황에서 빙궁주의 호감도를 올릴 수 있다면야 이 정도 일쯤은 기쁘게 할 수 있었다.

“애들아, 고맙다!”

빙과를 내미는 아이들에게 대충 연막을 뿌려주며 부리나케 대장간으로 도주했다.

맘 같아선 놀아주고 싶긴 한데, 이제 슬슬 삼촌이 다 만드셨을 시간이 다 됐기에 적당히 팬서비스로 대체했다.

‘이쯤이면 진짜 다 만드셨겠지?’

풍경 구경도 할 만큼 했겠다.

이번에야말로 삼촌이 공을 들인 암기를 볼 수 있겠단 생각에 흥얼거리면서 대장간으로 찾아갔다.

허나,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도 다시금 대장간을 찾아가니 삼촌은 얼굴만 빼꼼 내민 채로 축객령을 내렸다.

-쿵!

“내일 와! 내일!”

-쾅!

뭐라 말할 틈새도 없이 닫혀 버리는 문.

“……뭐야?”

분명 내가 맞긴 건 니티놀이 아니라 단순한 녹주석인데, 삼촌은 무슨 역작을 만드는 중인 사람처럼 날이 곤두서 있는 모습이었다.

“아니, 대체 뭘 만들길래 이래?”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전혀 짐작조차 못 했다.

삼촌의 손에서 만들어질 암기는 내 상상을 아득히 초월할 암기일 거란 사실을 말이다.

* * *

삼촌에게 녹주석으로 암기를 만들어 달라 의뢰한 다음 날.

대장간에 암기를 찾으러 가는 내내 불안했다.

“설마 오늘 갔는데 또 내일 오라고 그러시진 않겠지?”

잠시면 될 거란 생각과 달리 암기를 찾으러 가니 내일 오라던 삼촌.

비록, 문이 열리고 닫힌 시간은 잠시뿐이라 제대로 보진 못했지만, 문틈으로 보였던 삼촌의 눈은 진지하기 짝에 없는 장인의 눈이었다.

그렇기에 오늘도 암기를 받긴커녕, 축객령을 받진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어차피 오늘 빙궁주님이 오시기로 하셨잖습니까. 그리고 빙혈을 거두는 것도 얼마나 걸릴 줄 모르니 천천히 생각하시죠.”

“아니, 그건 그렇긴 한데, 매번 뭘 맡길 때마다 완벽을 추구하는 것도 상당히 골 때리는 문제라서 말이지.”

“아무리 완벽을 추구한다고 한들, 간단한 암기 정도는 잠깐 사이에 완벽하게 만들 실력은 됩니다. 분명 다른 문제가 있어서 그런 것일 터이니 그건 염려치 않으셔도 될 듯합니다.”

“그렇다면 다행인데…….”

일염이의 말에도 영 지워지지 않는 불안함.

솔직히 지금은 상관없긴 했다만, 나중에 니티놀을 맡겼을 때, 제때 못 받을 수 있었기에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뭐, 보면 알겠지.”

그렇지만 어쨌거나 결과물이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하루나 걸린 만큼 훌륭한 결과가 나왔다면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을 거다.

-텅!

대장간 앞에 도착하자마자, 부서질 듯이 열리는 문.

그와 동시에 삼촌이 뛰쳐나오며 나를 부술 듯이 끌어안았다.

“하하하! 역시 우리 조카님이야! 이렇게 재밌는 물건을 가져왔다니! 이런 걸 몰랐으면 인생의 절반을 손해 볼 뻔했지 뭐야! 이야, 대장장이도 아닌데 대체 어떻게 안 거야?”

“켁…….”

“그만.”

삼촌이 너무 흥분한 나머지 진짜로 척추를 부숴 버릴 듯 끌어안자 몰려오는 고통.

순간 주마등이 한 번 스쳐 지나가고, 저번에도 보고만 있던 일염이조차 당장 말리는 걸 보면 그 기세가 얼마나 무시무시했는지는 따로 설명 안 해도 다 알 정도였다.

“으헥…….”

“하하하, 미안 나도 모르게 흥분해 버렸네. 하지만 굳이 내가 아니라도 무릇 대장장이라면 이렇게 흥분하는 건 당연할걸? 멀리 가지 않아도 우리 스승님께서도 놀라다 못해서 넋을 놓고 보시더라고.”

죽을 뻔한 탓에 숨을 고르고 있자, 이상한 말을 하는 삼촌.

독이 나올 뿐 현철 같은 광석에 비하면 딱히 우월하거나 특이할 것 없는 녹주석인데, 대장장이라면 누구나 흥분하고 하다못해 자신의 스승도 놀랐다는 것 아닌가?

“대체 뭘 만드셨길래 그러십니까?”

직감적으로 내가 원하던 암기는 아니지만, 뭔가 대단한 물건이 나왔음을 알 수 있었기에 물어보자, 백문이 불여일견인 듯 삼촌은 곧장 안으로 안내했다.

“들어와서 봐봐.”

삼촌 뒤를 따라 문으로 들어가자, 대장간답게 몸을 덮치는 후끈한 열기.

여기저기 전시된 수많은 무기를 감상하며 조금 더 안으로 들어가자, 모루 앞에 앉아 있는 덩치 큰 근육질의 노인.

삼촌의 스승으로 추정되는 대장장이가 심각한 얼굴로 모루 위를 쳐다보는 걸 볼 수 있었다.

“네가 녹주석을 가져온 녀석이냐?”

“예, 접니다.”

“자. 봐라.”

별다른 설명도 없이 모루를 가리키는 노인.

도대체 뭐가 나왔길래 저러나 싶어 모루 위를 바라보자, 웬 손가락만 한 나비 모양의 철 쪼가리가 있었다.

“추혼비접 아닙니까?”

간단한 암기를 만들어달라고 했거늘, 삼촌이 만들어낸 건 나비 모양의 암기인 추혼비접.

고급 암기인 만큼 만들기가 조금 까다로운 편이었고, 더군다나, 처음 써보는 녹주석으로 만들었으니 오래 걸리는 것도 이제 이해가 갔다.

“역시 모르는 눈치구나.”

허나, 그게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젓는 노인.

마치 단순한 추혼비접이 아니라는 듯 암기를 들고는 눈앞에서 흔들었다.

“뭐가 다른 점이 있습니까?”

“있지.”

말을 마침과 동시에 냅다 암기를 집어 던지는 노인.

따로 암기술을 배운 적은 없었는지, 참으로 볼품없이 날아갔지만…….

-퍽.

추혼비접은…… 아니, 추혼비접 같아 보이던 암기는 대장간 벽에 닿자마자 폭발하듯 파사삭 부서져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에?”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

아무리 현철 같은 금속에 비하면 약한 녹주석이라고 한들, 이렇게 가루가 되어 비산하는 건 말이 안 됐다.

‘뭐, 항상 고수들은 상상 그 이상의 실력을 가졌으니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만…….’

노인의 볼품없는 암기 수법을 보면 그건 아닌 듯했다.

“따로 손을 쓰시지 않은 상태 맞습니까?”

“보면 알지 않느냐.”

“근데 왜 암기가 부서집니까?”

“낸들 알겠느냐.”

“…….”

암기가 제 기능은커녕, 금속의 기능도 못 하는 상황에 황당함을 금치 못해 입을 다물고 있자, 삼촌이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네가 원하던 게 이런 거 아니었어?”

“예?”

아니, 제 역할을 못 하는 암기가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추혼비접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당연히 내가 원한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되레 삼촌은 내 반응을 보고 황당해했다.

“제가 녹주석을 드린 건 녹주석이 철보다 강하면서도 가벼운 금속이라 드린 겁니다. 그런데 단단해야 할 암기가 저렇게 힘없이 가루가 되어버리는 건…….”

삼촌에게 내가 녹주석을 준 이유를 설명하던 와중 문득 몰려오는 이상함.

“어? 가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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