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87화
이미 한 번 들통났던 만큼 숨길 것도 없이 천열운무보가 담긴 비급을 꺼내 보이며 말하자, 한숨을 푹 쉬는 할아버지.
“고작 그런 일 때문에 그런 것이냐. 지금의 내게 기억은 없다만, 그건 나 또한 천열운무보를 익혔기에 가능한 일이었을 거다.”
“예?! 천열운무보를 익히셨다고요?”
“그래. 소싯적에 강호를 유랑하다가 우연히 찾아서 익혔지.”
광창신투의 비동에서 겨우 찾은 천열운무보를 젊었을 때 찾아서 익혔다는 할아버지.
설마 그런 우연 때문에 천열운무보를 익히고 있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광창신투가 안배를 여러 개 해둔 건가?’
보통 선인이 후대에 무공을 남길 때, 딱 하나만 남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하지만 엄연히 여러 개 남기는 이들도 존재했고, 무엇보다 광창신투의 비동은 입구가 셀 수 없이 많았기에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이야기였다.
‘좀 당황스러운 이야기이긴 한데…… 나쁘지만은 않아.’
원래라면 비급이 2개 존재하는 건 좋아할 일은 아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나쁘지만도 않았다.
내가 천열운무보를 쓰려는 목적은 어디까지나 개량해서 독무와 함께 쓰려는 것이었고, 무엇보다 비급만 보고서 무공을 익히는 건 눈앞이 깜깜한 일이었는데, 가르쳐 줄 사람이 생겼다는 거였으니까.
“내가 기억이 없는 탓에 비급을 한 번 본 것만으로 단번에 익혔다는 오해를 산 것 같다만, 나는 평범한 수준에 불과하단다. 거기다, 누구를 가르칠 역량이 되지 않아서 여태껏 제자를 받을 수도 없었다. 그러니 절은 안 받은 셈 치마.”
여태껏 제자도 받지 않았으니 단념하라는 할아버지의 말을 듣자니 오히려 더 마음이 동했다.
어차피 광창신투의 비동을 탐험하고 천열운무보를 익힐 정도의 실력이면 예사 실력은 아닐 거다.
그리고 무엇보다 만약 할아버지가 거짓말을 하는 거면 그 실력은 가히 상상 이상일 게 분명했기에 도무지 포기할 수 없었다.
‘물론, 그 정도 실력이면 당연히 반로환동을 했어야겠지만, 혹시 모르니까 말이지.’
아득히 높은 경지라면 반로환동은 당연한 거겠지만, 애초에 속일 생각이었다면 역용술로 나이 들어 보이게 만드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애초에 네게도 스승이 있을진대 어찌 이리도 쉽게 고개를 숙이는 게냐?”
속으로 행복한 상상을 하고 있자, 짐짓 화나 보이는 얼굴로 타이르는 할아버지.
그 말을 듣고 있자니 다소 유들유들해 보이는 할아버지가 어떤 착각을 했는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조부님. 유감스럽게도 제게는 아직도 스승이라고 부를 만한 분이 없습니다. 잠깐잠깐 도움을 받는 것 정도라면 몰라도, 무공만큼은 스스로 터득해야 했기에 그간 시행착오도 많이 겪었고, 가르침에 목마른 상황이었습니다.”
명색이 당가의 직계인데, 스승 한 명이 없겠냐는 할아버지의 예상과 달리, 진짜 없는 나.
그 상황에 대해서 설명하자, 할아버지는 어이가 없다는 듯 물었다.
“아니, 스승 한 명 없는 건 둘째치고, 무공을 스스로 터득했다니? 제대로 된 지도조차 받지 못했다는 뜻이더냐?”
“예.”
사실 스승의 연만 맺지 않았을 뿐, 무공 지도 정도는 받았지만, 최대한 불쌍한 얼굴로 연민을 사려고 구라를 치자, 할아버지께서는 황당하다는 듯 웃으셨다.
“허허허, 내 당 사위를 그렇게 안 봤거늘…….”
입은 웃고 있음에도 노기를 엿볼 수 있을 만큼 일그러진 할아버지의 눈.
그걸 보고 있자니 조금 죄책감이 들었지만, 전부 스승을 안 구해준 당가주의 탓이라 생각하며 애써 웃어넘겼다.
“그래, 네가 앞뒤 안 가리고 고개를 숙인 건 다 이유가 있어서구나. 좋다. 내 비록 잠시뿐이겠지만, 네 스승이 되어주마.”
“감사합니다!”
“단! 우리 문파의 무공은 알려줄 수 없다. 조건도 조건이지만, 부작용이 굉장히 심하기에 무공을 모르는 이가 아니면 배울 수 없는 수준이니 말이다.”
이래저래 익히려면 제약이 따르는 게 일인전승 문파의 무공들.
할아버지가 역량이 안 돼서 제자를 안 받았다고 말하긴 했지만, 실상 조건에 맞는 제자가 없어서 안 받았을 가능성이 높았기에 당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괜찮습니다.”
“지금 네 상황이 어떤 줄은 너도 잘 알고 있을 거다. 이왕 시작한 거 제대로 봐줘야겠으니 기부터 잠재우고 수련에 필요한 게 있으면 미리 준비하고 오너라. 나도 널 가르치려면 조금 시간이 필요하니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일사천리로 결정되어 준비하고 찾아오라던 할아버지는 갑자기 할머니 이야기를 꺼냈다.
“네 할머니에겐 잘 좀 얘기해다오.”
“알겠습니다.”
겨우 무공을 가르쳐 주는 일 가지고 할머니에게 뭔 말을 해야 하나 싶었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고개를 끄덕였다.
왜냐면…….
“꼭이다.”
“예, 꼭 하겠습니다.”
“절대 잊으면 안 된다.”
“예, 잊지 않겠습니다.”
“아니다. 혹시라도 잊을 수 있으니 내 친히 손바닥에 적어주마.”
“예?”
왠지 모르게 첫 심부름을 시키는 아이를 보는 것처럼 할아버지가 몇 번이나 거듭 강조했기에.
* * *
할아버지와 헤어지고 잠시 들른 망성루.
몇 번이나 거듭 강조하다 못해 결국 할머니께 가서 말하라며 손바닥에 적어준 할아버지의 성의를 보아 곧장 찾아와서 전했더니 할머니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지 가히 굉음에 가까운 소리를 치셨다.
“이 영감탱이가 진짜!!!”
말릴 새도 없이 망성루 계단을 박차고 내려가는 할머니.
그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계단을 내려다볼 때쯤엔 이미 거의 다 내려가, 곧장 망성루를 빠져나가셨었다.
대체 할아버지가 어느 부분을 염려했고, 또 할머니는 어느 부분에서 화가 났는지 전혀 가늠이 안 됐기에 황당한 상황.
그래도 곰곰이 생각해 본 결과 내 탓은 아닌 거 같아서 대충 무시하기로 했다.
“두 분이서 알아서 잘 해결하시겠지. 나는 내 할 일이나 해야겠다.”
할아버지께서 미리 이것저것 준비해 놓으라고 하셨다.
본격적인 수련은 음기를 다룰 수 있게 되고 나서야 가능하겠지만, 그게 얼마나 걸릴 줄 모르고 빨리 끝날 수도 있기에 두 분이 저러는 건 뭔가 사정이 있어서라 생각하고 말고 내 할 일이나 하기로 했다.
그래서 도착한 곳이 이곳 대장간.
호기롭게 내 할 일 해야겠다고 이야기했지만, 기를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상황이라 운신의 폭이 좁은 상황이니 당연하게도 내가 갈 곳은 정해져 있는 것과 다름없었다.
“아니, 우리 조카님. 삼촌이 보고 싶어서 왔어요?”
대장간 문을 두들기자마자, 튀어나와선 꼭 끌어안는 삼촌.
“켁…….”
정 많은 성격인 것은 이해한다만 오장육부가 뒤틀리다 못해 척추가 끊어져 버릴 기세로 끌어안아서 숨이 턱 막힐 정도였는데, 다행히 정도를 아는지 금방 풀려날 수 있었다.
“오늘 아버지께서 정신이 드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혹시 그거 때문에 온 거니?”
“네, 할아버지께서 제 무공을 봐주신다고 해주셨어요. 그래서 혹시 시간이 되신다면 수련용으로 쓸 간단한 암기 몇 개만 만들어주셨으면 해서요.”
“어후, 그럼. 당연히 시간이 되고말고. 어떤 거로 만들어줄까? 아, 재료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웬만한 거는 대장간에 있으니 금방 만들어줄게.”
“재료는 따로 구해 왔어요.”
품을 뒤적여 대장간에 오기 전에 구했었던 광석을 꺼냈다.
아주 친숙한 광석을 말이다.
“이건…… 녹주석이잖아? 이거 단순히 독 아니야?”
“가공하기가 까다롭고 독성이 나오는 특성이 있긴 하지만 엄연히 무기로 활용하기 좋은 물건이에요.”
“이게?”
다른 것도 아니고, 녹주석이 무기로 만들기 좋은 재료라고 하자, 금시초문인 듯 쳐다보는 삼촌.
대장장이로 오래 있었으면 알 만도 하건만, 아무래도 녹주석의 특수성 때문에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하긴, 당가의 대장장이도 모르는데, 빙궁의 대장장이인 삼촌이 아는 것도 이상하긴 하지.’
여태껏 내 주력 독으로 활용되고, 당가에는 산더미처럼 쌓여서 보관되는 중인 녹주석.
산화베릴륨의 독성이 강해서 당가에서는 다들 단순한 독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 독성이 강해서 가려질 뿐, 녹주석은 쓰이는 곳이 많았고, 단순히 금속으로 써도 굉장히 좋은 광석이었다.
‘괜히 균형 맞추려고 독성을 넣었다는 소리를 듣는 게 아니니까 말이야.’
같은 부피의 강철에 비해 무게는 4분의 1.
그런데 강성은 1.5배 정도 되는 녹주석.
그야말로 깃털처럼 가벼우면서 강철보다 강한 금속으로 특유의 독성 때문에 다루기가 힘들 뿐, 쓸 수 있으면 무조건 쓰는 게 좋은 금속이었다.
……물론, 어디까지나 현대의 이야기지만 말이다.
‘애초에 현대에서나 좋은 광석이지, 여기에선 녹주석보다 좋은 게 널리고 널렸으니 신경 쓸 이유도 없긴 하지.’
채굴하는 과정부터 가공하는 과정 내내 강한 독성을 뿜어내는 녹주석.
거기다, 녹는점은 1,200도가 넘어서 제련하기 힘든 주제에, 현철보다 좋은 건 아니었기에 쓸 일도, 알 필요도 없는 물질이 됐을 거다.
여기선 녹주석보다 좋은 게 널리다 못해 차고 넘쳤으니 말이다.
“삼촌께서 말씀하시길 웬만한 독은 버티신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가져온 거예요. 가공 난이도는 현철보다 조금 낮을 텐데 가능할까요?”
“어후, 그럼. 그 정도면 금방 만들 수 있어. 잠깐만 기다려 봐.”
호기롭게 된다며 녹주석을 들고 대장간 안으로 들어가는 삼촌.
녹주석이 가공이 까다롭다고 한들, 솜씨 좋은 대장장이 앞에선 한낱 철과 다르지 않기에 오래 걸릴 것 같진 않았다.
“공자님. 당가에서는 녹주석으로 암기를 만들지는 않으셨잖습니까? 그런데 여기서는 녹주석으로 된 암기를 쓰려고 하십니까?”
갑자기 녹주석으로 암기를 만들어 달라고 하자 의문을 갖는 일염이.
당가에서도 충분히 가능한 일을 왜 새삼스레 여기서 하는지 궁금해하는 모습이었다.
“당가에서는 그랬지. 암기로 쓸모 있다고 해도, 산화베릴륨으로 정제해서 쓰는 게 수십 배는 더 이득이거든.”
원인 모를 이유로 정체불명의 조직에게 견제를 받는 당가.
일전의 내 광산에서 녹주석을 대량으로 수급했다고 한들, 가문에서 쓰기엔 그 양이 많지 않았고, 산화베릴륨으로 정제해서 쓰는 게 더 가치가 있었다.
“그래서 당가에서는 딱히 써볼 생각은 안 했는데, 이왕이면 여러 무게의 암기를 들고 가는 게 낫지 않겠냐는 생각이 들어서 준비해 가려고.”
같은 모양에 단순히 무게만 다른 암기.
그걸 보면 모두가 같은 암기가 아니냐고 생각하곤 했는데, 암기는 단순히 무게만으로도 쥐는 법부터 날리는 법까지 다루는 법 전체가 달라지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베릴륨으로 만든 암기를 준비해 가려는 것도 그런 취지에서 가져가려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