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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86화 (86/200)

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86화

* * *

빙궁이 훤히 보이는 그리 멀지 않은 뒷산.

그곳에 있는 천설화의 무덤은 한눈에 봐도 깔끔하다고 느낄 만큼 잘 관리되어 있었다.

“…….”

당지천은 막상 어머니의 묘에 찾아왔지만, 뭘 해야 할지 모르겠는 상황.

전생에 부모님의 묘는커녕, 친인척의 묘에도 가본 적이 없었기에 이런 상황은 어색하기 짝에 없었다.

“속으로 하고픈 말을 하시면 됩니다.”

그런 당지천의 상황을 꿰뚫어 본 천일염이 당지천에게 조언을 해줌에도 당지천은 갈피를 전혀 잡지 못했다.

왜냐면 지금의 당지천은 엄연히 따지면 당지천이 아니었기에.

‘영혼이란 걸 믿지는 않지만, 아마 보시면 천인공노할 일이라고 천벌을 내리지 않으실까.’

오히려 당지천은 할 말이 있어도 일언반구도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아닌가, 사실 일언반구도 안 하는 게 잘못된 일 아닐까?’

허나, 그 생각도 잠시.

그건 그것대로 염치없는 일이 아닌가, 고민하던 당지천은 이것저것 생각하다가 결론을 냈다.

딱 한마디만 하고 가자고.

‘비록, 지금 제가 원인 모를 이유로 당지천의 몸을 차지하고 있지만, 당지천이 바랐던 꿈. 그 꿈만큼은 꼭 이뤄주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조금만 너그러이 용서해주십시오.’

고민 끝에 쥐어짜듯 내놓은 짧은 답변.

솔직히 죄송스러운 마음에 하고픈 말도 많았고 변명도 꽤 하고팠지만, 당지천의 몸에 빙의한 게 엄연히 자신 탓은 아니었으니 적당히 간추린 답변을 내놨다.

“후…….”

속으로 할 말을 마친 당지천은 후련하다는 듯 뒤로 물러나자, 천일염이 이만 가봐도 된다며 말했다.

“하실 말씀 다 하셨으면 먼저 가셔도 됩니다. 저는 주변 정리 좀 하고 가겠습니다.”

“그런 거면 같이…… 아냐, 먼저 갈게.”

원래라면 당지천도 해야 했을 일이었기에 거들려고 했으나, 이내 혼자 있고 싶다는 말임을 깨닫고는 조용히 빙궁으로 내려갔다.

“…….”

그렇게 묘에 홀로 남은 천일염.

당지천이 저 멀리 돌아간 것을 확인하고서도 한참을 기다렸다가, 손에 들고 있던 개미취가 꽁꽁 얼어붙었을 때쯤이 돼서야 개미취를 봉분했다.

“내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이곳에 올까, 이제는 나도 모르겠구나.”

천일염이 한탄스럽다는 듯 무덤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말했다.

“소중했던 것이 단지 빛바랠 뿐이라면 그저 가지고 있으면 된다. 하지만 소중했던 기억조차 잃어버리게 된다면 그걸 대체 어떻게 할지는 난 모르겠구나.”

씁쓸하다는 얼굴을 한 천일염이 품에 고이 간직했던.

그 무엇보다도 소중히 여겼던 명패를 꺼내 보았다.

“설화야, 내가 너를 잊진 않을 게다.”

새하얀 눈보다도 더 새하얀, 순백의 명패.

그 속에 각인된 천설화의 이름을 봄에도 천일염은 더는 미소 지을 수 없었다.

“허나, 설화야. 너와 함께한 추억은 잊게 될 것 같구나.”

왜냐면 점점 옅어져 가는 세상 속.

유일하게 제 색을 빛내던 천설화의 명패마저도 이제는 꺼질 듯이 깜빡이고 있었기에.

“너의 부탁도, 그 녀석의 부탁도 잊지 않았다. 다만, 시간이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아마 지천이와 함께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을 거다.”

거기다, 점멸하고 있는 건 명패 하나뿐이 아니었다.

천설화의 묘.

주변의 설산.

심지어 저 멀리 보이는 당지천의 뒷모습마저도.

모두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태로이 깜빡이고 있었다.

“엄연히 이게 나의 업이고, 예견된 미래였다고 한들, 도무지 받아들이기엔 힘들더구나.”

말을 마치자, 기다렸다는 듯 잿빛으로 변해 버린 세상.

그런데 되레 자신이 봉분한 꽃만큼은 제 색을 되찾은 걸 본 천일염은 뭐에 홀린 듯 꽃을 향해 손을 뻗었다.

“이렇게 작은 것 하나라도 가져가고 싶었거늘…….”

꽁꽁 얼어 단단하기 짝에 없어 보이는 보라색 개미취.

어떤 충격을 받더라도, 누구의 손길이 닿더라도 변함없이 그대로일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그런 꽃조차도 천일염이 손을 가져다 대는 순간…….

“……나는 그럴 수조차 없으니 말이다.”

너무나도 쉽게 바스라져.

먼지처럼 변해 버릴 뿐이었다.

* * *

빙궁의 서쪽.

대략 이각 정도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당장에라도 쏟아져 내릴 듯한 아주 웅장한 얼음 폭포가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는 빙설린과 양팔에 붕대를 찬 한 노인이 서 있었다.

“영감, 정말로 괜찮겠어요? 이번에 무리하고 나면 한동안은 제 몸도 못 가눌 거예요.”

“어쩌겠어. 이미 엎질러진 물인 것을.”

“그래도…….”

“기억 안 난다고 사실대로 이야기한다고 한들,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알겠지. 그러니 방도가 없어.”

“하아…….”

한숨을 푹 쉰 빙설린이 노인에게 다가가 양팔의 붕대를 풀어주고는 주먹으로 옆구리를 한 대 쥐어박았다.

“하여간, 그놈의 천마류 소설 좀 작작 좀 읽으라니까…… 결국 나이 먹으니 이래 됐잖아요.”

“누군 이럴 줄 알아서 그랬겠어?”

“모르긴 뭘 몰라요. 내가 몇 번이나 점쳐서 알려줬는데 이제 와 발뺌하기예요?”

“흠, 흠…….”

빙설린이 힐난이 담긴 눈으로 째려보자, 재빨리 눈을 피한 노인은 애써 말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지천이의 점괘를 보는데, 사성이 나타났다고?”

“그랬어요. 잠깐 있다가 사라졌지만 말이에요.”

“역시 설화와 관련된 문제인가?”

“글쎄요. 자세한 내막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어요.”

그때를 생각하니 아찔한지 빙설린이 한숨을 푹 쉬고는 말했다.

“단순히 수정구의 문제이면 좋겠지만, 정말 극히 일부라도 점을 보고서 미래가 변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겠죠.”

점이란 어디까지나 미래를 엿보는 것.

아무리 수정구가 고장 났다고 판단했다고 한들, 그 행위 자체만으로도 미래가 변하는 경우가 드물게 있었기에 당지천에게 사성이 없다고 단언할 순 없었다.

“알겠어. 그 문제는 내가 책임지고 해결할 테니까 할멈은 맘 놓고 준비나 해줘.”

문제는 자신이 해결할 것이니 걱정일랑 말라는 노인.

그런 노인의 말에 빙설린은 안쓰럽다는 듯 노인의 손을 맞잡았다.

“진짜로 괜찮겠어요?”

“나 참, 이미 다 끝난 이야기 왜 또 시작해?”

“아무리 아이들을 위해서라지만…….”

“할멈도 알잖아. 할아비로서 해줄 수 있는 게 이런 것뿐이라는 걸. 손주가 엇나갔으면 모를까, 이렇게 잘 커서 왔는데, 어떻게 아무것도 안 해주겠어?”

노인이 빙설린을 슬며시 안아주며 달래듯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단순히 무공 좀 봐주는 것뿐이야. 그 정도는 늘상 했던 일이니 무리라고 부를 것도 없잖아.”

“거기서 끝나지 않을 수 있으니까 하는 이야기죠.”

“걱정하지 마. 그리 쉽게 내줄 거였으면 이미 여기저기 다 주고 다녀서 남은 게 없었을 테고, 아무리 그걸 단번에 보여줬다고 한들 손주도 대문파의 사람이 아니겠어. 자존심이 강할 게 분명하니 작은 가르침이라면 모를까, 다짜고짜 고개부터 조아리진 않을 거야. 그러니 안 그래도 바쁠 텐데, 걱정은 거기까지 하고 이만 가봐.”

당지천도 당가의 일원이니 쉬이 자존심을 굽히지 않을 거다.

그러니 괜한 걱정 말고 떠나라는 듯 노인이 빙설린의 등을 밀어주자, 자연스레 떠밀려 난 빙설린.

“알겠어요. 그럼 이따가 봐요.”

노인이 한 고집하는 걸 알기에 더는 별말 안 하고 물러났다.

……부디, 무리만 하지 않기를 바라며 말이다.

* * *

어머니의 묘에 들렀다 온 다음 날.

눈이 뜨자마자 드는 상쾌함에 기지개를 켜며 일어났다.

“오늘은 몸이 처지는 느낌이 아예 없네?”

잠깐 묘에 다녀온 것을 제외하고는 하루 종일 회복에 전념해서 그런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몸이 찌뿌둥하기는커녕, 개운할 정도였다.

“그간 휴식에 전념하셨으니 그럴 만도 하죠.”

“뭐야? 언제 들어왔어?”

“방금 들어왔습니다. 세탁한 옷들이 다 말라서 넣어놓으려던 참입니다.”

한 손 가득 가져온 하얀 옷들을 옷장 안에 차곡차곡 정리해 넣는 일염이.

순전히 옷을 정리할 뿐, 별로 특별하지 않은 일을 함에도 그 모습은 왠지 모르게 씁쓸함이 가득해 보였다.

“왜 이렇게 궁상맞게 있어? 누가 보면 여자한테 차인 줄 알겠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아니긴 뭐가 아니야. 딱 비 맞은 생쥐 꼴인데.”

하도 궁상맞게 있길래 농을 하자, 눈을 흘겨보는 일염이.

이내 가져온 옷들을 모두 정리하고 옷 한 벌을 가져오며 말했다.

“공자님께 중요한 소식을 가져왔는데, 자꾸 그러시면 안 알려 드릴 겁니다.”

“중요한 소식?”

빙궁에서 한 거라곤 사람 만나는 일밖에 없는데, 내게 올 만한 중요한 소식이 대체 뭐가 있단 말인가?

그럴 만한 건 아무것도…….

“설마?!”

“맞습니다. 공자님의 할아버지께서 일어나는 대로 속히 오라는 전언을 남기셨습니다.”

“오우, 쉣!”

드디어 고대하고 고대하던 맨정신의 할아버지와 만난다고 생각하니 절로 벅차오르는 가슴에 방방 뛰며 일염이가 건네주는 옷으로 갈아입었다.

“가자!”

* * *

방에서 부리나케 뛰쳐나와 뛰어가길 잠시.

빙궁의 서쪽.

얼마 멀지 않은 곳에 웅장하기 짝에 없는 얼음 폭포가 있었고, 그 밑에는 가부좌를 틀고 명상을 하는 할아버지가 있었다.

이전에 봤던 것과 같은 흑의를 입은 채로 고풍스러운 자태를 뽐내고 있는 할아버지.

그 모습은 그야말로 무협지에서 나올 법한, 머릿속으로 그리던 스승의 모습하고 똑같았다.

“오…….”

그래서 그런지 절로 감탄사를 내뱉자, 할아버지는 기척을 느꼈는지 슬며시 눈을 떴다.

자신을 천마라고 지칭하며 패도적인 기세를 내뿜던 저번과 달리, 이번엔 마치 고요한 호수를 보는 듯 잔잔하면서도 깔끔한 옅은 기운만 느껴질 뿐이었다.

“어서 오너라.”

환영한다는 듯 일어나 슬며시 미소를 짓는 할아버지.

이전에 봤을 때와 달리, 이번엔 양팔의 붕대가 모두 풀려 있었지만, 딱히 할아버지는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기에 그건 무시하고 냉큼 다가가 절부터 했다.

“절 받으시지요.”

본디 구배지례란 횟수에 상관없이 사제지간의 예법에 맞게 격식을 차린 계수배(稽首拜)를 의미하는 것.

굳이 아홉 번 할 필요 없이 부모와 자식 간의 예를 취하며 계수배를 한 번.

사제지간의 예를 취하며 계수배를 한 번.

마지막으로 두 번만 하면 찝찝하니까 그냥 한 번 더 하자, 할아버지는 이럴 줄은 몰랐다는 듯 짐짓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뭐 하는 게냐? 나는 천고천. 네 할아버지 되는 사람이다.”

“예, 조부님. 부디 이 못난 손자에게 가르침을 주십시오.”

“자고로 무인에게 있어서 자존심이란 떼놓을 수 없는 건인데, 너는 내가 어떤 실력일 줄 알고 그렇게 쉬이 고개를 숙이는 게냐?”

“조부님. 며칠 전 조부님께서 천마라는 이름으로 제 앞에 나타나셨을 때, 제가 보던 이 비급을 빼앗아 보시고서는 단번에 천열운무보를 보여주셨습니다. 그것도 완벽하기 짝에 없는 천열운무보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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