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85화
자신의 기준에서는 아주 약하지만, 혹시 모르니 물어봤다는 빙궁주.
감격스러운 눈길로 찻잔을 보는 나의 시선과 달리, 빙궁주는 전혀 마음에 안 든다는 눈으로 찻잔을 내려다봤다.
“흠, 역시 이 정도는 너무 약하려나. 신경 쓰지 말아라.”
빙궁주가 괜한 말을 했다는 듯 찻잔을 치워 버리려고 하길래, 얼른 그 손을 잡고서 빙궁주에게 말했다.
“아닙니다. 이 정도면 정말 유용하게 쓸 수 있습니다. 부디 음기를 다룰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정말 유용하다고 하자, 슬며시 미소를 짓는 빙궁주.
도움 되는 제안을 한 게 만족스러운지 꽁꽁 언 찻물을 입안에 털어 넣어 으적으적 씹어 먹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저 음기를 덜어내는 일이라면 몰라도, 남겨놓으려면 준비 과정이 필요하다. 그러니 내일 와서 다시 한번 봐주마.”
“예, 그럼…….”
빙궁주가 떠나려고 하길래 일어나서 배웅하려 하자, 빙궁주가 갑자기 자리에 멈춰서더니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이후 일정이 어떻게 되느냐?”
이후 일정이 어떻게 되냐는 평범한 질문.
그 누구라도 쉽게 대답할 만큼 단순한 질문임에도 나는 쉬이 대답하지 못했다.
왜냐면 빙궁주의 얼굴에는 처음 대면했을 때처럼…… 아니, 처음엔 볼 수 없었던 옅은 살기까지 약간 서려 있었기에.
“아까 말씀드렸던 대로 할머니께…….”
“실없는 소리 그만하거라.”
할머니께 간다고 하려고 하자, 단칼에 끊어버리는 빙궁주.
갑자기 대체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서 아까 거짓말한 대로 말하려 하자, 사실대로 말하라는 듯 그저 지긋이 나를 봤다.
‘왜 이래? 설마 수다 좀 떨고 가려고 이러는 거야? 에이 그건 아니겠지.’
아무리 그래도 수다 좀 떨려고 살기를 보내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정말 혹시 몰랐기에 아프단 핑계를 대며 사실대로 말했다.
“몸 상태가 괜찮아질 때까지 쉬려고 했습니다.”
“몸 상태가 나아질 때까지 쉬려 했다라…… 그럼, 몸 상태가 괜찮아지고 나면?”
몸 상태가 안 좋다고 했음에도 차후 일정을 물어보는 빙궁주.
그 물음에 직감적으로 단순히 수다를 떨고 싶어서 그런 건 아니고, 나를 시험하는 거란 생각이 들어 순간 머리를 바짝 굴렸고, 접점이 별로 없는 탓에 쉽게 답이 나왔다.
“몸 상태가 나아지면 어머니의 묘에 가보려고 했습니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뵙는 것인데, 아픈 모습을 보이면 어머니께서 슬퍼하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냐.”
다행히 빙궁주가 원한 대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는지 순간 옅어지는 살기.
몸 상태가 나아질 때까지 쉰다고 한 이전의 답변 때문에 기지를 발휘해 몸 성히 보여 드리겠다고 한 게 유효했던 듯했다.
“당가에서 아득히 먼 빙궁이지만, 네가 얼마나 영특하고 현명한지는 소식을 들어 알고 있다.”
하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았는지 점점 짙어지는 살기.
처음 들어올 때 봤던 위엄은 작은 편린에 불과했을 정도로 강한 위압감을 주었다.
“그러니 사람들이 너에게 잘해주는 건 어디까지나 네가 설화의 아들이어서라는 것도 잘 알고 있을 거다.”
한 발.
한 발.
찍어누르는 기세와 함께 천천히 다가온 빙궁주는 이내 허리를 숙여 나와 눈을 맞추며 경고했다.
“그 점을 언제나 잊지 말아라.”
친척이기 전에 궁주라는 경고.
만약 빙궁 사람들의 호의를 우롱하려 든다면 반드시 궁주로서 조치를 취하겠다는 경고에 나는 그저 조용히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명심하겠습니다.”
은혜는 갑절로, 원한은 곱절로 갚는 게 당가의 사람이다.
굳이 어머니를 언급할 것도 없이 마땅한 호의에 마땅한 보상은 못 하더라도, 우롱하는 일만큼은 절대 없을 거라 단언할 수 있었다.
“그래, 그 대답이면 됐다.”
명심하겠다고 하자, 씻은 듯이 사라지는 살기.
빙궁주가 이런 일을 벌인 건, 아마도 내게 이유 없는 호의는 존재하지 않다는 걸 꼭 명심시키고 싶었기 때문인 듯했다.
“그러면 할 말도 했으니…… .”
이제는 진짜 갈 만도 했건만, 빙궁주는 그럴 생각이 없는지 갑자기 품을 뒤적이기 시작했고, 이내 품에서 작은 약병 하나를 꺼내 들었다.
“이걸 받거라.”
“이게 무엇입니까?”
“너에게 필요한 약이다.”
“약 말입니까?”
빙궁의 약이라면 설마…….
‘공청석유?! ……일 리는 없겠지.’
약이라길래, 잠시 행복한 상상을 했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건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내 상태는 독기와 음기에 속이 뒤틀리고, 온몸이 골골대는 상태.
만에 하나, 정말 공청석유를 준다고 한들, 지금 상황에서는 먹고 죽으라는 소리밖에 안 됐으니 그건 아닐 거다.
‘아마도 몸의 활력을 높이는 약이겠지.’
그러니 빙궁주가 내미는 약은 단순히 원기 회복에 좋은 약일 거란 예상이 들었다.
하지만…….
“이 약이야말로 저주받은 우리 빙궁의 한 줄기 희망과도 같은 약.”
그런 나의 예상관 달리, 장엄하기 짝에 없는 얼굴로 약을 치켜드는 빙궁주.
예사 약이 아닌 듯 빙궁의 한 줄기 희망이라고 치켜세우며 힘차게 약의 이름을 외쳤다.
“이름하여 푸로패시아다!”
“……예?”
푸로패시아?
그거 내가 만든 탈모약 이름인데?
“너도 빙궁의 혈통이고, 얼마 전에 발현됐으니 알 거다. 우리 빙궁에 어떤 저주가 있는지 말이다.”
“빙혈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빙혈을 언급하자, 고개를 젓는 빙궁주.
얼마 전에 발현하고 저주라고 부를 만한 건 빙혈밖에 없었는데, 그게 아니라고 하니 무엇을 말하는지 도통 감이 안 갔다.
“못 알아들은 척해도 괜찮다. 가족이라고 한들, 숨기고 싶은 비밀이 어찌 없겠느냐. 나도 부끄러웠던 적이 있으니 다 이해할 수 있다.”
“예?”
도무지 무슨 소리인지 영문을 모르겠는 상황.
빙궁주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알 길이 없어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음에도 빙궁주는 다 이해한다는 듯 약을 쥐여주며 말했다.
“그러니 약만큼은 잊지 말고 복용하거라.”
“저…….”
뭔가 이상한 오해를 산 거 같아 해명하려고 하자, 그럴 틈도 없이 곧장 사라진 빙궁주.
그가 사라진 문을 보고 멍하니 보고 있자니,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뭐야 대체?”
결국, 거절할 틈도 없이 푸로패시아를 손에 쥐게 된 나는 영문도 모른 채 방치되었고, 내게 탈모가 있다는 소문이 온 빙궁에 퍼졌단 걸 알게 된 건, 그로부터 아주 뒤의 일이었다.
* * *
빙궁주에게 영문도 모른 채 푸로패시아를 건네받은 다음 날.
“끄응, 오늘 몸 상태가 괜찮은 거 같네.”
어제부터 왠지 모르게 몸 상태가 급격하게 호전되었기에 일어나자마자 찌뿌둥한 몸을 풀며 건강함을 과시했다.
“용태가 나아지시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용태가 나아지는 것 같다고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삼촌.”
“……장난은 거기까지 하시죠.”
“알았어. 화내지 마.”
삼촌이라고 부르자, 얼굴이 굳어가는 일염이.
어제 빙궁주 덕에 일염이가 내 큰외숙인 걸 알게 됐지만, 삼촌이라고 부르면 왠지 모르게 급속도로 얼굴이 굳는 일염이 때문에 그냥 평소처럼 반말하기로 타협했다.
‘사실을 알고 나니 조금 꺼려지긴 하지만, 본인이 그게 편하다는데 어쩌겠어.’
어쨌든, 그래서 삼촌이라고는 안 부르기로 했는데, 아침부터 이렇게 장난식으로 부르는 건 다 이유가 있었다.
‘이젠 슬슬 어머니에 대해서 알아봐야 할 때니까 말이지.’
빙궁주의 경고를 받은 지금.
이제는 어머니에 대해서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일염이는 어머니에 대해서 말해주기 싫어하는 것 같으니 삼촌이라 부르면서 점점 가족 간의 거리를 줄이면 알려주지 않을까 싶어서 이렇게 부르는 거다.
‘솔직히 인간관계에 대해선 잘 모르니 이게 맞는 방법인지는 모르겠지만…….’
뭐든 안 하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해보다가 안 되면 그때 전략을 바꾸면 되지 않겠냐는 마음으로 계속 일염이를 스며들게 하려 했다.
“일염아. 오늘은 어머니의 묘에 한번 가보려고 해.”
어머니에 대한 언급을 꺼리는 일염이에게 묘에 가겠다고 하자, 순간 굳어버리는 일염이의 얼굴.
몇 년이나 같이 살면서 언급을 꺼린 걸 보면 분명 뭔가 이유가 있을 터이니 거절하면 굳이 데려갈 생각은 없었다.
“……알겠습니다.”
허나, 그런 얼굴과 다르게 일염이는 순순히 알겠다는 대답하고는 주섬주섬 나갈 채비를 했다.
“…….”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이것저것 챙기며 내 외투를 가져다주는 일염이.
별다른 말 없이 무표정하게 짐을 챙기는 그 모습은 익숙하기 짝에 없었고, 정말 평소와 다른 점이 하나도 없었음에도 왠지 모르게.
왠지 모르게 오늘따라 조금 슬퍼 보였다.
* * *
“가기 전에 들를 곳이 있습니다.”
방에서 나오자마자, 묘에 가기 전에 들를 곳이 있다면서 앞서 나가는 일염이의 뒤를 따라, 빙궁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길 잠시.
규모가 크진 않지만, 천장이 유리로 된 건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유리가 얼마나 비싼데 이걸로 건물을 지었어? 빙궁도 돈이 더럽게 많나 보네.’
현대야 유리 가공 기술이 발달했기에 유리 궁전이란 말이 있을 정도로 유리를 많이 사용하긴 했다.
허나, 그건 현대라서 가능한 일이었고, 이곳은 유리의 가격이 상당히 비쌌기에 이렇게 건물 천장을 도배할 정도면 어지간히도 중요한 건물이라는 소리였다.
“여긴 뭐 하는 곳이야?”
“들어가 보시면 알 겁니다.”
일염이가 별다른 설명도 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길래 나도 곧장 그 뒤를 따라 들어갔다.
그러자, 보이는 충격적인 광경.
“꽃밭?”
유리로 된 건물 안에는 무려 빙궁에 어울리지 않게 꽃밭이 있었다.
“고작 꽃밭을 만들려고 유리 천장을 만들어놓은 거야? 아니 근데, 그 전에 꽃들은 어떻게 살아 있는 거야? 이 날씨면 다 얼어 죽어야 정상 아니야?”
설마하니 빙궁에서 꽃밭을 보게 될 줄은 몰랐기에 호기심이 일어 물었지만, 일염이는 대답 없이 그저 묵묵히 발걸음을 옮겨 꽃밭의 한쪽으로 이동했다.
“…….”
그렇게 걷던 일염이가 발걸음을 멈춰 선 곳은 보라색 꽃이 만개해 있는 화단 앞이었다.
“개미취? 이게 무슨 꽃이야?”
전생에 꽃에는 연이 없었기에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이름.
그래도 독초만큼은 남들보다 빠삭하게 알고 있었으니 적어도 독초는 아닌 듯했다.
“공자님의 어머니께서 가장 좋아하던 꽃입니다.”
“어머니가 좋아하시던 꽃이라고? 보니까 그렇게 예쁜 꽃은 아닌 것 같은데?”
“이유는 모르겠습니다만, 가장 예뻐하시던 걸 보면 상당히 마음에 드셔했습니다.”
“흠…….”
내 심미안에 큰 문제가 있나?
그렇게 못생긴 건 아닌 것 같은데, 또, 그렇다고 예쁜 건 아닌 것 같은데…….
‘뭐, 꽃이야 개인 취향 차이니까.’
어차피 미적 감각은 사람마다 다르지 않던가.
굳이 의문을 가질 이유가 없었기에 꽃말을 물어봤다.
“근데 이거 꽃말이 뭐야?”
“꽃말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개미취를 유심히 살펴보던 일염이가 앞으로 몇 발자국 다가갔다.
“추억, 그리움, 먼 곳의 너를 그리워하다. 그리고…….”
천천히 손을 뻗은 일염이가 조심히 개미취 한 송이를 꺾으며 말을 이었다.
“너를 잊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