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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83화 (83/200)

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83화

‘당가에서 알면 기겁을 하겠지만, 숨기면 되겠지.’

물론, 당가에선 직계가 다른 문파의 무공을, 그것도 제자로 들어가서 배웠다고 하면 난리가 날 것이다.

허나, 어차피 뭐 심법을 가르쳐 달라고 할 것도 아니고 무공 지도만 좀 받고 싶다는 건데 어쩔 건가.

무엇보다 가르칠 사람 한 명 배정 안 해주면서 그러는 건 쪼잔하다 못해 정떨어지는 일이다.

만약, 그런 식으로 나온다면 나 또한 더는 가만있지 않을 거다.

“일염아.”

“예, 공자님.”

“구배지례라는 거 어떻게 하는 거야?”

“구배지례 말입니까?”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일염이가 의뭉스러운 눈으로 날 잠시 쳐다보더니 뚱한 얼굴로 답했다.

“저는 안 받아드릴 겁니다.”

그런 거 안 산다는 듯 손을 휘젓는 일염이.

그 행동을 보고 있자니 화가 절로 났지만, 할아버지와 단란하게 무공 수련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며 애써 조용히 말했다.

“……해달라고 사정해도 안 해줄 거니까 알려주기나 해.”

* * *

할아버지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한 지 2일째.

일염이에게 구배지례하는 법도 배웠겠다, 당장 가서 할아버지께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절하고 싶었지만, 아무래도 제자이자, 손자의 예를 취하는 건 맨정신에 하는 게 낫겠다 싶어 할아버지의 용태가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할아버지께서도 제정신일 때 데려오라고 하셨으니 말이지.’

그래서 회복에 전념하기로 마음먹고 멍하니 누워 있다 보니 어느새 빙궁주가 오기로 약속한 시간이 되었다.

‘작은할아버지께서는 어떤 분이시려나?’

빙궁주.

엄연히 새외무림으로 분리되는 빙궁의 주인인 탓에 무림십대고수에 이름을 올리진 못했으나, 그에 필적하는 실력을 가진 고수.

엄동설한이 가득한 빙궁의 왕인 만큼 빙공에 한해서는 이길 자가 없으며 빙궁 주변엔 경쟁자 또한 없기에 냉정하다고 한들, 당기룡과는 다른 성격을 가지지 않을까란 예상이 들었다.

‘일염이가 있을 때 조금 물어볼걸.’

아까까지만 해도 옆에서 말 상대를 해주던 일염이는 갑작스레 빙궁주가 온다 하니 부리나케 자리를 비웠다.

그래서 빙궁주에 대해 제대로 물어볼 틈을 놓쳐 버렸다.

“들어가마.”

후회가 끝나기 무섭게 밖에서 느껴지는 인기척.

이어서 문이 열리고 사람 한 명이 들어왔는데…….

“크다.”

진짜 크다는 소리밖에 나오지 않을 정도로 장난 아니게 컸다.

‘아니, 저 정도면 거인족 아니야?’

삼촌도 어마어마한 떡대를 가졌고, 할머니도 풍채가 좋긴 했다.

그렇기에 빙궁주도 클 거라고 예상하긴 했는데, 이 정도로 클지는 몰랐다.

‘베르그만의 법칙이 무림인들에게도 통용되는 거였어?’

베르그만의 법칙.

정온동물 중 같은 종의 동물이 서로 다른 환경에서 살 경우, 더 추운 지방에 사는 동물이 체격이 크다는 주장으로 엄연히 예외가 존재하긴 하나, 어느 정도 맞는 이야기이기에 자주 언급되는 법칙이다.

‘아니면 음기에 성장호르몬이라도 있는 거야?’

그런데 여태껏 내가 본 빙궁 사람들은 모두 평균보다 컸다.

특히나 무공 성취가 높은 사람일수록 체격이 크고, 아이들은 평범한 걸 보면 진짜 빙궁에 뭐가 있긴 한가 보다.

“멍하니 보고 있는 걸 보니, 역시 기억은 나지 않는가 보구나. 마지막으로 본 게 10년도 전이니 기억이나 날지 모르겠지만, 난 네 외종조부 되는 사람이다.”

멍하니 쳐다보고 있자, 조용히 손을 내미는 빙궁주.

한 마디, 한 마디 묵직하기 짝에 없는 게 위엄이 철철 넘쳤고, 온전히 기를 통제하고 있음에도 체격에서 나오는 압도적인 위압감이 나를 짓누르는 게 감탄이 절로 나왔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외종조부님.”

역시 사람 위의 군림하는 이들은 그에 걸맞은 품격을 가진 법.

한순간에 불과하지만, 그 위엄을 보여준 빙궁주에게 예를 취하자, 빙궁주는 자연스레 예를 받았다.

“딱딱하게 굴 것 없다. 작은할아버지라고 불러라.”

“예, 작은할아버지.”

작은할아버지라 불러 드리자, 말없이 옅게 고개를 끄덕이는 빙궁주.

호칭이 마음에 드신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인상을 찌푸리더니 뭔가가 마음에 안 드는 듯 말했다.

“그리고 너도 편하게 해라.”

“……예?”

“너를 말하는 게 아니다.”

난데없이 ‘너도 편하게 해’라는 소리에 반문하자, 나한테 하는 말이 아니라는 빙궁주.

아니, 여기에 나하고 빙궁주 둘밖에 없는데 내가 아니면 대체 누구한테 편하게 하라고 하는 거지?

“괜찮긴 뭐가 괜찮아. 내가 하나도 안 괜찮은데.”

심지어 이번엔 누구와 대화하듯 말하는 빙궁주.

처음엔 대체 왜 이러나 싶었지만, 유심히 그 모습을 보면서 곰곰이 생각해 보자, 빙궁주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예상되는 게 있었다.

‘설마 일염이?’

빙궁주의 말을 들어보면 면식이 있으면서도 꽤 가까운 사이인 것 같은데, 그러면서도 어느 정도 거리감이 있는, 오랜만에 보는 사이로 추정됐다.

거기다, 내 눈에 띄지 않게끔 숨어 있을 만한 사람이 강호에 널렸긴 해도 위의 추론과 종합해 본다면 숨어 있을 만한 사람은 일염이밖에 없었다.

“이미 눈치채신 것 같군요.”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인기척도 없이 천장에서 떨어져 내리는 한 인영.

예상했던 대로, 그건 다름 아닌 일염이었다.

“허…….”

예상했다곤 하나, 확신과는 엄연히 다른 법.

실제로 일염이가 튀어나오는 걸 보고 어이가 없었다.

“이런…… 아직 말을 안 한 상태였나.”

“미리 하려고 했는데, 까먹었을 뿐입니다.”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지만, 까먹을 게 따로 있지.

범상치 않은 인간관계를 설명 안 해주고 까먹는 건 뭐란 말인가.

“제가 공자님의 큰외숙입니다. 다만, 어디까지나 공자님의 어머니와는 의남매에 불과하니 신경 쓰지 마시고 평소처럼 대해주시면 됩니다.”

그런 생각을 읽었는지 곧장 인간관계에 대해 설명해 주는 일염이.

그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대략 정신이 멍해짐을 느꼈다.

‘의남매? 핏줄이 이어진 건 아니라 해도 의남매라는 건 결국 삼촌이라는 건가? 그럼 빙혈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했던 것도, 삼촌이…… 아니, 작은삼촌이 말 잘 듣던 것도 의남매라서 그런 거야?’

일염이…… 아니, 이제는 큰삼촌이 되어버린 천일염 씨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서 황당한 얼굴로 보고 있자, 빙궁주는 그런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천일염에게 말했다.

“뭐, 지금 말했으니 아무래도 좋은 일이겠구나. 어쨌든, 지천이는 몰라도 넌 좀 찾아올 수 있는 거 아니냐? 예전이라면 몰라도 몇 년 전만 해도 사람이 많아졌으니 잠시 자리를 비우면 되잖아? 거, 지천이가 직접 올 순 없어도 편지라도 하나 들고 오고 그러면 우리도 이것저것 챙겨서 보내줄 텐데, 얘 소식 한 번 들으려면 아주 그냥 한세월을 기다려야 하니까 우리가 애가 타, 안 타?”

아까까지의 위엄의 기세는 어디 갔는지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의 향연.

천일절과 같은 핏줄이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는 듯 쉴 새 없이 말이 쏟아졌다.

‘허허허…….’

8년 가까이 지내온 호위 겸 시종이 큰외삼촌이란 걸 알게 된 것도 머리가 아픈데, 빙궁주는 그런 나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내 귀에 이야기를 때려 박고 있었다.

“저…… 작은할아버지께선 바쁘신 분 아니십니까? 저희 아버지께선 매일 일에 치이며 사시던데…….”

“여기는 사건이 터지는 게 아닌 이상 조용하단다. 뭐 볼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는 데다가 춥고 멀기까지 하잖니. 그래서 별다른 사건 사고가 없는 편인데 갑자기 네가 들어와서 다들 기대 중이다. 하하하!”

시끄러우니까 할 일만 빨리해 주고 가면 안 되냐고 애써 돌려 말했지만, 뭔 궁주라는 인간이 바쁘지도 않은지 그런 걱정 안 해도 된다고 하고는 끝나지 않는 수다를 이어갔다.

“……그래서 말이야. 네 할머니가 노발대발하면서 ‘빌어먹을 제갈 놈들. 이번에 제대로 된 놈 안 보내면 재앙이 뭔지 제대로 보여주마!’라면서 날뛰는 걸 겨우 막았다니까? 아, 참고로 이것도 많이 순화한 거야. 누님의 언어는 말 그대로 자연 그 자체라 도무지 막을 수가 없거든. 아무튼, 누님이 날뛰는 건 둘째치고 수정구에 문제가 있으면 바꿔야 하긴 하는데, 아무리 보증기간이 남았다고 한들, 제갈 놈들이 순순히 바꿔주겠냐고. 온갖 이유를 들어서 보증기간 끝날 때까지 질질 끌다가 우리 책임 아니라고 잡아뗄 게 분명하단 말이지. 그러면 누님은 또 노발대발해서…….”

훈계도 아닌 한탄을 둘이서 듣고 있는 기이한 상황.

‘빙궁주가 입을 열면 막을 사람이 없구나.’

떠드는 사람이 천일절일 때는 그나마 일염이가 입을 다물게 할 수 있었으나, 이번엔 손윗사람이라 그런지 일염이는 미동도 않고 듣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이야기 속에 해답이 있어서 천만다행이야.’

폭포처럼 쏟아지는 말의 향연.

그걸 자세히 듣다 보면 영 쓸모가 없는 것만도 아닌 게, 무려 빙궁주를 제어할 방법이 그 안에 숨겨져 있었다.

“작은할아버지. 이야기를 나누는 것도 좋지만, 이따가 할머니를 뵈러 가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많이 지체되면 할머니께서 서운해하실 것 같습니다.”

바로 그 방법은 빙궁주의 누님.

할머니를 거론하는 것.

여태껏 빙궁주가 한 이야기를 뜯어보자면 결국 할머니를 말리지 못해 한참 고생했다는 이야기였다.

그 말인즉슨, 빙궁주로선 할머니를 통제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니 나는 할머니 핑계를 대며 수다를 끊기로 했다.

“뭐, 그래도 작은할아버지의 말씀을 들어드리느라 늦었다고 하면 할머니께서도 이해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

대놓고 가서 이르겠다고 말하자, 곧장 입을 다무는 작은할아버지.

역시나 예상대로 할머니껜 기를 펴지 못하는지 인상을 퍽 썼다.

“눈치 빠른 아이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말이야…….”

말을 하다가 만 게 영 내키지 않는지 말끝을 흐린 빙궁주는 그래도 하루 이틀 당한 게 아닌지 입맛을 다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그래도 간만에 오래 떠들었으니 해야 할 일을 해야겠지.”

일을 하겠다고 선언하자, 다시금 위엄을 풍기는 빙궁주.

“지금 네 상태에 대해서는 얼마나 알고 있느냐?”

“빙혈이란 게 각성해서 독기와 음기가 충돌했다가, 지금은 잠잠해진 상태로 알고 있습니다.”

“그래, 제대로 아는구나.”

수다스러운 면모와 달리, 공과 사는 철저히 구분하는지 아까에 비하면 한없이 짧은 설명을 해줬다.

“빙혈은 우리 빙궁 사람들의 혈통에 새겨진 일종의 유산 같은 거다. 당가로 치면 일종의 독단을 몸 안에 품고 태어난다고 볼 수 있지.”

“독단 말입니까? 그러면 태어날 때부터 영약을 몸에 지니고 태어난다는 겁니까?”

“그렇다. 빙공을 익히는 과정에서 그걸 온전히 수습하게 되면 자연히 내공이 늘어나고, 우리는 그걸 빙혈을 각성했다고 말한다.”

“그럼 지금 제 상태가…….”

“맞다. 지금 너의 경우는 몸에 두 기운이 융화되지 못해서 서로 충돌하는 상황인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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