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82화
* * *
천마.
천마신교, 일월신교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마교의 교주로 천하제일인을 논할 때 절대 빠지지 않는 마도 최고의 고수.
예로부터 주인공이 마도인이면 종장에 주인공이 이르는 자리로, 주인공이 정파의 사람일 경우 항상 최후에 생사결을 벌이는 인물.
가히 세계관 최강자라고 불려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이다.
“본좌는…… 천마다.”
그런데 난데없이 그런 천마를 만났다면 어떤 반응이 먼저 나올까?
사실 나도 만나보기 전까지는 잘 예상이 안 갔다만, 겪어보니 알 수 있었다.
‘미친놈.’
척수반사로 튀어나오는 욕.
나이 드신 어르신께 차마 면전에 대고 욕을 할 순 없었기에 속으로 참긴 했지만, 어이가 없긴 했다.
‘마교가 멸망한 지가 언젠데 천마 타령이야.’
무협지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 중 하나.
바로 마교.
정파와 대립한다고 한들, 낭만이 있는 곳이기에 실제로 한번 보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내가 있는 곳은 마교가 멸망한 지 벌써 몇백 년이 지났다.
당연하게도 마교가 쌓아놨던 공포도 진작에 흐려지다 못해 사라졌다.
그렇기에 이제는 무림에서 마교의 흔적이 발견되면 지우기 급급한 게 아니라, 회수해서 역사 교육을 위해 쓰일 정도로 마교의 이름은 옛말이 되었다.
그런데 자칭 천마가 나타났다?
이는 순전히 자신이 미쳤다는 걸 증명하는 말밖에 안 됐다.
“마교가 멸망해서 무림에서 자취를 감춘 지가 언젠데 천마 타령이십니까?”
“천마인 본좌에게 마교가 멸망했다고 하다니. 도발치고는 너무 수준이 낮구나.”
미치광이와는 논쟁하지 말라고 했던가, 현실을 말해줘도 순전히 도발로 치부하며 콧방귀를 뀌는 노인.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설득하려던 내가 멍청했다는 걸 깨달았고, 나는 그냥 나가는 길을 가리켰다.
“불손한 언행은 사과드리겠습니다. 다만, 이곳은 개인 연무장이니 얼른 나가주셨으면 합니다.”
나가라는 말을 공손히 했지만,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노인.
나가기는커녕, 오히려 점점 내게 다가오는 게 아닌가?
“도발이란 건 이렇게 하는 것이다.”
노인이 코앞에서 갑작스레 손을 뻗길래 곧장 쳐내려고 손을 들었다.
허나, 내 손이 다 올라가기도 전에 노인의 손이 내 품을 훑었고, 어느새 돌아간 노인의 손에는 비급이 하나 들려 있었다.
……다름 아닌, 내가 아까까지 보던 천열운무보가 말이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순간 당황해 반사적으로 금나수를 펼쳐 어떻게든 비급을 찾아오려 했다.
그러나 어떤 수를 쓰더라도 뒷짐을 진 노인에게는 전혀 닿지 않았다.
‘아무리 실력 차이가 난다고 한들, 옷깃조차 스치지 못한다고?’
비급을 단번에 탈취한 걸 보면 어느 정도 실력 차이가 났고, 지금 몸 상태도 좋은 편이 아니긴 했다.
하지만 손기술이 좋기로 유명한 당가다.
당연히 금나수에도 일가견이 있는 당가이고 나 또한 금나수만큼은 자신이 있었는데, 이렇게 옷깃조차 스치지 못한다는 건 실력 차이가 상상 이상이라는 뜻이었다.
“음? 이게 상당히 중요한 물건이었나 보지?”
다급하게 손을 뻗는 모습에서 위화감을 느꼈을까.
내가 손을 뻗건 말건 조금도 신경 쓰지 않던 노인이 비급을 열어보더니, 몇 장을 훑어보고는 오만하기 짝에 없는 발언을 했다.
“꽤나 쓸 만한 무공이군. 허나, 본좌의 무공에 비하자면 익힐 가치도 없는 쓰레기다.”
아니, 남이 개고생해서 얻은 비급인데, 그걸 보고서 뭐?
꽤 쓸 만해?
근데 내 거에 비하면 쓰레기야?
‘열 받네…….’
남이 수련하는 곳에 함부로 들어와서 시비를 거는데 어떻게 더 참겠는가.
실력 차이고 뭐고 간에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눈이 뒤집혔다.
‘갑갑해서 안 되겠다. 설령 실력 차이가 난다고 해도 한 대 때려줘야 직성이 풀리겠다.’
속이 갑갑하다 못해 터질 것 같아 몇 대 얻어맞는다고 해도 적어도 한 대는 쳐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주먹을 휘둘렀는데…….
“화를 다스리는 법이야말로 네가 진정 익혀야 할 것인데, 어찌 겨우 이런 걸 뺏겼다고 화를 내는 것이냐.”
어느샌가 뒷짐을 진 노인은 제자리에서 발을 떼지도 않은 채 설렁설렁 주먹을 피했다.
“흠, 보아하니 당가의 아이인 것 같은데 그렇다면 더더욱 이성을 유지해야 하거늘, 어찌 이렇게 난잡스럽게 주먹을 휘두르느냐.”
“이익!”
끓어오르는 화에 비례해서 점점 빨라지는 연격.
하지만 그 어떤 공격도 노인에게는 여름날의 순풍에 불과했다.
“하긴, 이제 보니 본좌의 무공에 비하면 참으로 보잘것없지만, 네게는 아주 유용하게 쓰이겠구나. 좋다. 내 사과하는 의미에서 직접 한번 보여주마.”
말을 마친 노인이 조금 풀려 있던 왼쪽 붕대를 조금 더 풀어 늘어뜨리더니 멀찍이 뒤로 물러섰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다. 너에게 도움이 될 테니 잘 보아라.”
천열운무보를 한 번 훑은 것뿐인데 바로 보여주겠다는 노인.
그 말을 듣고 있자니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날 정도였다.
‘같잖은 소리를 지껄이네.’
아무리 고수라고 한들, 무공을 한 번 본 것만으로 익힌다?
그것도 상승무공을?
그건 실력도 실력이지만, 가히 천년에 한 번 나올 만한 재능이 아니라면 불가능한 일이다.
……허나, 노인은 그런 생각이 잘못됐다는 듯 여유롭게 운을 뗐다.
“하늘 아래 모든 것은 하늘과 같아, 힘을 주면 쉬이 갈라질지어니.”
-쿠구궁!
노인이 구절을 읊기 무섭게 진각을 밟자, 연무장을 가득 메우는 천둥소리.
“떠오르는 땅의 구름은 이내 모든 것을 포용하리라.”
이어서 다음 구절을 읊자, 노인의 주변에 안개가 꼈다.
“그러니 나의 걸음은 하늘을 걷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니…….”
-쾅!
마지막으로 안개 속에서 발을 크게 굴렀는지 굉음이 울려 퍼지자, 짙은 안개가 갈라지며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온 지천이 나의 길이니라.”
시연을 마치고 안개 속에서 여유로이 걸어 나오는 노인.
나는 그를 보면서 충격을 금치 못했다.
‘이게…… 천열운무보?’
비급을 정확히 본 적도 없고, 오직 말로 듣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 노인이 펼친 천열운무보가 완벽하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을 정도였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자칭 천마인 노인.
아까까지만 해도 단순히 실력 있는 미치광이라고 생각했건만, 천열운무보를 단번에 익힌 걸 보고 나니 천마라고 해도 믿길 정도였다.
“사과는 이만하면 된 거 같구나.”
노인이 손을 휘저어 안개를 날려 보내고 비급을 던져줬다.
그러고는 나가려는지 출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저, 저기…… 켁.”
정체가 궁금해 막으려 하자, 노인은 내가 반응도 못 할 속도로 이곳저곳에 혈도를 짚었다.
“또 보자꾸나.”
그러고는 말릴 틈도 없이 연무장 밖으로 사라졌다.
“헉…… 헉.”
시야에서 노인이 사라지자, 곧장 풀리는 혈도들.
아니, 갈 거면 처음부터 갈 것이지, 안 가고 버팅기다가 이런 걸 보여주고 사라지면 대체 어쩌자는 것인가.
“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갑자기 나타난 것도 그렇고, 실력도 그렇고 하나같이 이해가 안 됐다.
무엇보다 지금 자세히 생각해 보니 저 정도 고수들은 모두 반로환동을 하지 않던가.
그러면 당연히 노인의 모습이 아니어야 할 텐데, 분명 저 고수는 노인이었다.
‘하, 사실 미친 건 난가? 환각을 보는 건 아니겠지?’
무엇보다 화가 나서 이성적인 판단을 못 했다.
그래서 무리한 운동은 하지 말라는 경고를 잊고 노인을 공격했는데, 몸이 아프기는커녕, 오히려 아까보다 몸 상태가 좋아진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하…….”
어안이 벙벙한 채로 출구만 눈으로 뒤쫓고 있자, 갑자기 뒤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저분이 공자님의 조부님이십니다.”
“아이씨, 깜짝이야.”
황급히 놀라서 뒤를 돌아보자, 아까 전 노인과 같이 뒤를 가리며 서 있는 일염이.
“제가 없는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질 줄 전혀 예상치 못했습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안 가고 몰래 숨어서 공자님이 당하는 걸 좀 더 지켜봤을 텐데…… 참으로 아쉽군요.”
“뭐, 이 자식아? 아니, 근데 뭐?! 할아버지?!”
천열운무보를 잠깐 살펴본 걸로 완벽하게 익히는 자칭 천마가 우리 할아버지?
“우리 할아버지가 천마라고?”
“이전에 말씀드렸다시피 공자님의 조부님께선 치매이십니다. 젊으실 적에 천마류 소설에 심취하신 적이 있으셨다는데, 치매가 생기고 나서부터 자신을 천마라고 지칭하고 다니시는 겁니다.”
“허허허…….”
도무지 믿기지 않아서 한 번 더 물었건만, 역시 진짜 천마는 아니었다.
하긴, 마교가 멸망한 지가 언젠데.
“그런데 날 왜 찾아오신 거야?”
“그건 아마 우연일 겁니다. 저 상태가 되시면 항상 무공을 익히는 이들을 찾아가 훈수를 두는 게 일상이십니다.”
“훈수를 둬?”
무림에서 남의 무공 수련을 엿보는 건 크나큰 실례로, 문파에 대한 선전포고와 다름없을 정도로 민감한 사안이다.
그런데 수련을 엿보는 걸 넘어서 훈수를 둔다고?
미친 거 아닌가?
‘아, 치매라고 하셨지?’
어쨌든, 치매 증세가 있다고는 하나, 원래는 무림인이었던 만큼 이해할 수 없었다.
“아시다시피 빙궁에 오래 계시기도 했고, 본신의 무력도 약하신 편은 아니라 도움이 되는 조언만 하신답니다. 그래서 대부분 반기는 분위기입니다.”
“도대체 얼마나 강하시길래?”
“적어도 저보단 강하실 겁니다.”
“그거야, 그렇겠지.”
할아버지가 얼마나 강한지 모르겠지만, 비급을 한 번 보고 익힐 정도면 당연히 일개 호위보다는 강하지 않겠는가.
“그럼 저 상태로 하루 종일 계시는 거야?”
“아닙니다. 그나마 저 정도가 멀쩡한 정도인데 안타깝게도 요즘 들어서는 점점 치매가 심해지시는지 천마로 계시는 시간조차 길지 않다고 합니다.”
“저런…….”
이왕이면 시간이 길었으면 했는데, 그렇지 않다는 사실에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왜냐면…….
‘무공 스승으로 모시려 했는데, 안 되려나?’
이미 내 머릿속은 할아버지를 무공 스승으로 점했기에.
본디 무공이란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
사람들이 문파에 발을 들이는 이유는 그 물결에 자신을 끼워 넣기 위해서다.
그런데 기우하게도 사천당가의 직계인 나는 스승이 없었다.
‘안 구하려고 한 것도 아니고, 여기저기 부탁해도 아무도 안 도와줬지.’
왜인지 모르게 무공과 관련되면 일염이는 꺼리면서 도와주려 하지 않았다.
만독연주를 비롯한 장로들도 기초 무공 정도는 지도해 줘도 스승의 연을 맺으려 들지 않았다.
-제가 공자님을 가르칠 역량이 되지 않습니다. 괜히 어쭙잖은 가르침을 드렸다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을 만든다면 이미 죽은 목숨과 다름없을 터이니 양해해 주십시오.
……같은 왠지 모르게 뭔가 애절한 말과 함께 말이다.
하여튼, 그래서 제대로 된 스승도 없고, 가주조차도 일전에 시집 같은 무공만 줬을 뿐, 제대로 된 무공을 주진 않았다.
그렇기에 나는 결심이 섰다.
할아버지께 무공 스승이 되어달라고 부탁하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