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79화
그건 옆에서 같이 설명을 듣던 일염이도 마찬가지였는지, 화난 듯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그만.”
“아, 형님 죄송합니다. 제가 말이…….”
“그만하라고 했다.”
“옙.”
일염이가 말하자, 곧장 입을 다무는 삼촌.
도대체 무슨 마법을 부린 건지 그 말 많던 사람이 입을 꾹 다물고 조용 있었다.
‘형님이라고?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인가?’
생각해 보면 어머니가 빙궁 사람이시고 천씨다.
일염이도 마찬가지로 천씨고, 어머니의 호위다.
강호에 천씨가 드문 성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삼촌에게 형님 소리 들을 정도면 아는 사이인 건가?
설마 일염이도 빙궁의 사람이라던가?
‘에이, 그건 아니겠지.’
잠깐 일염이가 빙궁의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여태껏 빙공을 쓴 적이 없던 일염이다.
그러니 호위로 오래 있었다고 했으니 단순히 아는 사이인 걸로 보였다.
‘그래도 신기하긴 하네.’
어떤 사이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여태껏 살면서 일염이와 이만큼 친분이 있는 사람은 신화문주밖에 본 적 없었다.
인맥 자체는 도박판에 꽤 자주 가기에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대놓고 반말을 하는 경우는 신화문주를 제외하면 없다고 봐도 무방했으니 말이다.
“공자님. 물어보시려던 것이 있는 게 아니셨습니까?”
잠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느라 가만히 있자, 뭘 물으려 했던 게 아니냐는 일염이.
‘원래는 실력이나 광물에 대해서 물어보려고 했는데, 물어보지 않는 게 낫겠네.’
처음엔 대장장이라길래 실력은 어떻고, 빙궁에서 어떤 광물을 주로 수급해서 쓰는지 등을 물어보려 했다.
허나, 심히 수다스러운 삼촌의 모습에 나중에 시간 내서 알아보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아무래도 예의 있는 모습을 보이는 게 좋다는 생각에 이름을 먼저 물었다.
“부끄럽게도 제가 아직 성함조차 모릅니다. 그래서 성함 먼저 여쭙고 싶습니다.”
“아이, 그럴 수도 있지. 뭘 부끄러울 것까지야. 아무리 빙궁이 오지라고 해도 네가 얼마나 바쁘게…….”
“잡설은 넘기고 본론만.”
“……크흠, 천일절이라고 한다. 이름의 의미는…….”
“거기까진 필요 없다.”
“옙.”
단호하게 끊어버리자, 언제 그렇게 수다스럽게 굴었냐는 듯 굳게 닫히는 삼촌의 입.
무슨 술수를 부린 것인지, 내가 말할 땐 귓등으로도 안 듣다가도 일염이가 말하면 철석같이 듣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좀 늦었지만 인사드리겠습니다. 외숙. 저는 당지천이라고 합니다.”
예를 차리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 새삼스레 포권을 취하며 인사하자, 손사래 치는 삼촌.
“외숙이라니 너무 거리감이 드는 단어를 쓰는 게 아니니? 그냥 삼촌이면 돼. 우리 사이에…… 잘 부탁할게.”
째려보는 일염이랑 눈이 마주치자, 알아서 말을 줄였다.
“어머니께서 기다리시겠다. 얼른 가보자.”
“조모님께서는 어떤 분이십니까?”
“하하, 할머니에 대해서 궁금했구나? 어머니는 말이야…….”
말을 하다가 말고는 갑자기 일염이의 눈치를 살피는 삼촌.
둘 사이가 어떤 사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을 늘어놓기 전에 일염이의 허락을 구하는 걸 보면 예사 관계는 아닌 듯 보였다.
“간단히 추려서 필요한 말만.”
“어머니는 빙궁의 신녀셔. 주로 빙궁에 닥칠 미래의 일을 예지하기 위해 점을 보시는 편이신데 이게 딱딱 들어맞아. 한 번도 틀리신 적이 없어.”
“……끝입니까?”
“끝이야.”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다고 하길래 어떤 일이 있었는지부터 빙궁의 대처와 삼촌의 소감까지 곁들여서 이어질 거라 예상했는데, 단번에 끊기니까 이젠 심심하다고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나저나 신녀라…….’
신녀(神女).
무협에서는 대부분 여고수들의 별호에 들어가는 단어로 아마 그쪽을 더 많이 생각할 텐데, 여기서 삼촌이 말하는 신녀는 점을 치는 신녀를 말하는 걸 거다.
‘전생에 읽던 무협지에선 주로 주인공의 미래를 점쳐주고 경고하거나, 혹은 주인공의 적으로 나와서 실체를 들여다보고 조직에 경고하는 역할을 하곤 하지.’
아마 제일 많이 나왔던 게 천마신교의 신녀.
주인공이 마교의 사람이면 신녀가 알아보고 도와주지만, 반대로 주인공이 적이라면 마교에 닥칠 위험을 예지해 최대한 막으려고 경고하는 역할이었다.
물론, 그 경고는 명확한 증거가 없단 이유로 씨알도 안 먹히고, 신녀는 안타까움에 눈물을 줄줄 흘리는 게 클리셰지만 말이다.
어쨌든, 정말 간단히 생각하자면 엄청나게 용한 점쟁이라고 보면 되는데 그 신녀가 무려 내 할머니란다.
‘삼촌이 대장장이고, 할머니가 신녀? 도대체 빙궁은 뭐 하는 곳이지?’
어떤 가족사가 숨어 있을지는 모르겠다만, 당가와는 180도 다른 빙궁의 온도 차.
빙궁의 따뜻함에 가슴이 웅장해지다 못해 사르르 녹아버릴 것만 같았다.
“아, 참고로 네 할머니가 궁주님의 누나셔.”
“궁주님의 누나 말입니까?”
궁주라면 빙궁주를 말하는 거겠지?
그러니까 이곳 빙궁의 주인인 빙궁주?
그런데 할머니가 그런 빙궁주의 누나라면 그 말인즉슨, 빙궁주가 내 외종조부, 작은할아버지라고?
‘미쳤다…….’
당가에서 나름 금수저 노릇을 하긴 했으나, 든든한 뒷배가 있는 게 아니어서 매일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삶을 살아왔다.
매일같이 중앙선을 넘어야 하는 스릴 있는 삶.
허나, 그런 내가 빙궁에 도착하니 차 한 대 없는 8차선 고속도로를 달리는 것만 같았다.
‘삼촌과 할머니가 이러한데, 그럼 할아버지는? 명색이 빙궁주의 집안에, 할머니가 신녀이신데 평범한 사람하고 결혼하셨겠어?’
본디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
누가 도와준다고 약조한 것도 아니고, 아직 어떤 가정사가 숨어 있을지 모르지만, 이미 머릿속에는 꽃밭이 펼쳐진 상황.
그렇기에 할아버지는 어떤 사람일지 심히 궁금해졌다.
“할아버지께선 어떤 분이십니까?”
“어, 그게…….”
할아버지에 대해 묻자, 다소 난처한 듯 말끝을 흐리는 삼촌.
뭔가 문제가 있나 싶어서 빤히 쳐다보자, 잠시 고민하던 삼촌은 안타깝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다소 충격적인 말과 함께 말이다.
“아버지께선 이름깨나 날리시던 무림 고수셨어. 무려 일인전승 문파의 사람이시거든. 근데…….”
“무슨 일 있으십니까?”
“치매에 걸리셨어.”
“……예?”
* * *
삼촌의 뒤를 따라, 어딘지 모를 곳으로 향하는 길.
외지인은 오랜만에 보는지 지나가던 빙궁의 사람들이 다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엄마, 엄마. 저 사람들 손님인데도 백의를 입고 있어. 저 사람들도 오늘부터 빙궁 사람이야?”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가 날 쳐다보는 상황.
마치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것처럼 이리저리 관심을 사고 있었지만, 나는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왜냐면 아까 삼촌이 했던 말에 흠뻑 취해 있었기에.
‘일인전승…… 일인전승이라. 역시 평범하진 않은 분이셨어.’
일인전승.
이 얼마나 감미롭고 심금을 울리는 말인가.
비록, 치매라고 하긴 했지만, 할아버지 또한 비범하기 짝에 없는 분이 분명했다.
왜냐면 일인전승이란 말은 무협지에서만큼은 가히 치트키와 비슷했기에.
‘이게 들어가 있으면 무조건 강하지.’
일인전승(一人傳承).
무언가를 단 한 명에게만 전해주는 일.
항상 무예를 발전시키려는 문파가 오직 단 한 명에게만 무공을 전수하는 건 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서였다.
예를 들자면, 무공이 너무 강력해서 전수자를 단 한 명만 만들려고 해서거나.
혹은 문파의 존재 자체가 비밀이고, 비밀리에 전승되는 사명이 있다거나.
혹은 오직 특이한 체질만이 익힐 수 있는 무공이라 계승자가 단 한 명밖에 없거나 등등.
여러 가지 사유가 있지만, 이 모든 걸 귀결한다면 결론은 하나다.
바로 강하다는 것.
‘천하십대고수까지는 아니더라도 온 강호에 이름을 널리 알렸을 게 뻔하지.’
비록 어렸을 때부터 온갖 지원을 받으며 영약으로 온몸을 떡칠하는 대문파의 사람들을 이기긴 힘들지만, 그 밑에 쟁쟁하게 포진해 있는 것이 일인전승 문파들이다.
근데 그런 상황에서도 가끔가다 천하십대고수에 드는 문파도 있으니 이 얼마나 대단한 이들인가.
‘물론, 강한 이들만 있는 건 아니긴 하지.’
강한 이들이 있으면 약한 이들도 있는 법.
모두가 강하진 않을 거다.
허나, 그 수준까지 올라오지 못했다면 소리 소문 없이 명맥이 끊길 확률이 더 높으니 충분히 기대해도 될 거다.
“여기야.”
이거저거 생각하는 동안 어느새 도착한 할머니가 계신다는 곳.
망성루란 이름이 붙은 큰 건물로 외관은 조금 화려할 뿐, 일반적인 빙궁의 건물들과 다르지 않았으나, 빙궁의 주요 시설인지 문지기들이 서 있었고, 유독 창문이 하나도 없었다.
“여긴 창문이 하나도 없군요.”
“이야, 관찰력도 좋아라. 바로 알아보는구나. 망성루에 창문이 왜 없냐면 말이야…… 설명해 주고 싶지만, 들어가 보면 알게 될 거야.”
무어라 설명하려다가 일염이의 눈치를 보고는 입을 다무는 삼촌.
처음에는 말이 많은 게 조금 당황스럽긴 했으나, 계속 눈치를 보는 게 다소 불쌍해 보일 정도였다.
뭐, 그렇다고 해서 궁금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듣고 싶진 않지만 말이다.
“여, 나왔어.”
조금 풀이 죽어 보이는 삼촌이 손을 흔들며 망성루로 향하자, 아는 얼굴이라 그런지 문지기들이 제지하지도 않고 문을 열어줬다.
“매번 그렇지만 오늘도…….”
“괜히 수다 떠느라 시간 끌지 말고 곧장 올라오라는 신녀님의 전언이 있었습니다.”
“……그래.”
문지기한테 말이라도 붙여보려고 했다가, 단박에 거절당하자 한층 더 시무룩해진 삼촌.
마치 아끼던 장난감을 잃어버린 아이처럼 터덜터덜 걸어가는 모습에 괜스레 마음이 아팠지만, 우리는 조용히 그 뒤를 따를 뿐이었다.
“이쪽 위야.”
망성루의 안쪽으로 들어가자, 등대를 연상시키듯 원형으로 이어진 계단.
그곳을 한참 올라가자 그제야 여러 별자리가 장식된 큰 문이 하나 나왔다.
“들어오너라!”
문 앞에 서자마자 들려오는 우렁찬 소리에 삼촌이 곧장 문을 열자, 안쪽에 보이는 건 사방이 막혀서 어두컴컴한 동그란 방.
그리고 방 가운데에 고정된 커다란 수정구에 손을 얹고 있는 풍채 좋은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아직 일을 마무리 못 했으니 문 닫고 잠시 기다리거라.”
할머니의 말에 삼촌이 문을 닫자, 한 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 만큼 어두워지는 내부.
옛날 옛적 1번 서고에 들어갔을 때가 떠오를 만큼 어두웠다.
그러나 1번 서고와는 달리 잠시 기다리자, 방 중앙에 놓인 수정구가 빛을 발하더니 방 안에 별자리 같은 게 하나둘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