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78화
‘뭐, 옮긴 것은 둘째치고, 왜 빙궁으로 온 거지?’
의문을 가지자, 안 그래도 설명하려 했다는 듯 말하는 일염이.
“공자님이 쓰러지신 건 기억하십니까?”
“기억하지.”
속이 갑갑해지면서 온몸이 얼어붙는 고통을 얼마나 느꼈을까.
이내, 반대로 타들어 가는 느낌과 함께 전생의 기억을 보며 쓰러졌던 거로 기억한다.
……많이 불쾌한 기억을 보면서 말이다.
‘그나저나 생각해 보면 더웠던 건 추위가 극한에 다다라서 그런 거였나?’
이상 탈의(Paradoxical undressing).
저체온증이 극에 달하면 명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인간은 옷을 벗어 던질 정도의 더위를 느끼게 된다.
아마도 나 또한 그런 상황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그런 날 빙궁으로 날 데려왔다는 것은…….
“설마, 극음지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하긴, 극음지체같이 특이한 몸을 가졌으면 나는 몰라도 다른 사람들이 못 알아보는 건 말이 안 되지.
“그럼 내가 왜 쓰러진 건데?”
“빙혈을 각성해서 그렇습니다.”
“빙혈? 그게 뭔데?”
“빙궁의 혈통에 심어진 특성 같은 거라 보시면 됩니다. 사실 저도 자세히는 모릅니다.”
“…….”
“그런 눈으로 보지 마시죠. 제가 뭔지 잘 알았다면 쓰러지기 전에 조치했을 겁니다.”
그런 의미로 본 게 아닌데, 착각했는지 뚱한 얼굴로 마주 보는 일염이.
물론, 배신감을 느낀 건 마찬가지였기에 다시금 째려봤다.
왜냐면 내가 빙혈을 각성했고, 빙혈이 빙궁의 혈통에 심어진 것이라 하면 내가 빙궁의 혈통이란 소리 아닌가?
그 말인즉슨, 일염이가 그렇게 언급하지 않으려 들었던 어머니가 빙궁의 사람이었다는 말이었다.
‘일염이가 제대로 말해주지 않길래 신경을 안 써서 몰랐는데, 빙궁의 사람이었다니…….’
여태껏 어머니가 어디 사람인지도 몰랐다는 걸 떠올리면 어이없긴 했지만, 알려주지를 않는데 내가 어떻게 알겠는가.
하도 거절한 탓에 나중 가서는 다른 사람한테 물어볼 생각도 못 했으니 말이다.
‘몇 번 언급한 적이 있긴 했는데 그때도 이후엔 별말 안 해서 알아볼 생각조차 안 했지.’
어쨌든, 상황을 정리해 보자면 내가 있는 곳이 빙궁이고, 이곳이 내 외가라는 소리였다.
‘기회다.’
외가가 빙궁에서 어느 정도 지위를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최소한의 인맥은 있을 터.
빨리 구하면 좋음에도 아득히 먼 빙궁까지 와야 했기에 포기했던 물건들을 구할 수 있을 테고, 더군다나 남들 눈을 신경 쓰지 않고 수련에 임할 수 있을 거다.
‘물론, 독의 수급은 안 되니 아껴 써야겠지만…….’
가문에선 대량으로 수급하기 어려운 오철부터 예전에 필요하다고 생각한 피치블렌드까지.
이 중요한 것들을 한꺼번에 구할 수 있을 터이니 그 정도는 감수할 만했다.
‘무엇보다 가문에서와 달리, 수련에 집중하기 좋은 환경이야.’
거기다, 가문의 일로 호출이나 혹은 방해가 들어오는 경우가 많던 가문 내에서와는 달리, 지금은 엄연히 손님 신분.
만약 독에 대한 사건이 있다면 내가 몇 가지 도와줄지언정, 크게 방해를 받을 일은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대장장이까지 빌려 쓸 수 있다면 금상첨화일 텐데…… 역시 그건 무리겠지.’
비록 연구실은 없지만, 니티놀 같은 건 실력 있는 대장장이에게 맡기기만 하면 되기에 빙궁에서도 만들 수 있는 상황.
허나, 아무리 친분이 있다고 한들, 어디까지나 나는 외부인인 만큼 빙궁의 대장장이에게 시간이 많이 걸리는 일거리를 의뢰할 순 없을 거다.
‘뭐, 솔직히 그거까진 욕심이지.’
노력은 해봐야겠지만, 안 될 가능성이 크니 반쯤 포기하고 다른 걸 신경 쓰는 게 현명한 처사일 거다.
지금의 빙궁은 나에게 준비된 비밀 창고이자, 수련실이니까 말이다.
‘그럼 가보자고.’
수련할 생각에 신난 마음으로 침소에서 일어섰다.
“어, 어?”
허나 신난 마음과 달리, 무겁기 짝에 없는 몸뚱어리.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몸에 당황하고 있자, 일염이가 말했다.
“아직 상태가 호전된 건 아니니 좀 더 쉬시죠.”
쉬라는 일염이의 말에 잠시 서서 내부를 관조했다.
‘독기와 음기가 서로 얽혀 있긴 한데…… 충돌하고 있진 않아. 몸도 처지긴 했어도 피로할 뿐 아픈 건 아니야.’
순전히 걷는 것뿐이라면 문제가 될 게 없는 상황.
굳이 수련하지 않아도 빙궁의 구조나 오철을 구할 수 있는지 등 이것저것 알아볼 수는 있을 테니 쉴 이유는 없다고 판단하자, 일염이가 한숨을 쉬고는 주섬주섬 두꺼운 옷을 꺼내 왔다.
“그건 왜?”
“어차피 말려도 나가실 거잖습니까. 밖은 추울 테니 옷 따뜻하게 입고 나가시죠.”
뭐라 하기도 전에 옷부터 입혀주는 일염이.
내 고집은 알고 있어서 그런지 나가는 건 뭐라 안 했다.
“오랜만에 외가에 들른 만큼, 어르신들께 인사 먼저 하시는 게 나을 겁니다.”
“아.”
전생엔 고아였기에 가족은커녕 친척도 없었다.
거기다, 지금은 가족이 있어도 조금 거리감이 있었기에 친척들을 만나야 한다는 사실이 매우 낯설었다.
“그리고 가는 길인 만큼 대장간부터 들르도록 하죠.”
“대장간? 인사하러 갈 거면 어차피 나중에 들러도 되니까 곧장 가는 게 낫지 않을까?”
“이것저것 둘러보시라고 들르는 게 아닙니다.”
“그럼?”
“공자님의 외숙이 빙궁의 대장장이거든요.”
“뭐?! 대장장이?!”
전혀 예상치 못했는데 외삼촌이 대장장이였다니…….
“빙궁은 역시 최고야.”
행복해서 기절할 것만 같았다.
* * *
“춥네.”
일염이의 뒤를 따라 밖으로 나오자 보이는 눈 천지.
여기도 눈.
저기도 눈.
마치 강원도를 연상케 할 만큼 온통 눈밭에다가 저 멀리 배경으로 설산이 보이는 게 참으로 화려했지만, 살을 에는 추위 덕에 그 감흥은 오래가지 못했다.
“저기가 대장간입니다. 추우시면 몸 좀 녹이고 가도록 하죠.”
일염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을 보자, 쉴 새 없이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있는 것이 멀리서 봐도 대장간임을 알 수 있었다.
“확실히 딴 데는 몰라도 저긴 따뜻해 보이네.”
한서불침은 아니지만, 대부분 추위에 면역인 빙궁의 사람들.
그 덕에 손님방이 아닌 이상에야 어딜 가든 서늘한 정도가 유지되고 있기에 따뜻한 곳을 찾기가 힘들다고 했다.
하지만 항상 열기로 후끈거리는 대장간만큼은 손님방만큼 따뜻할 거란 생각에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오, 따뜻해.’
예상대로 대장간 입구에 도착하자, 쏟아져 나오는 열기.
열린 문에서 수증기가 마치 연기처럼 새어 나왔다.
“계십니까?”
따뜻하긴 하지만 남의 일터에 함부로 발을 들여서는 안 되는 법.
밖에서 사람을 부르자, 수증기 속에서 한 남자가 걸어 나왔다.
“와…….”
나도 결코 작지 않은 키였음에도 머리 한 개는 차이 날 정도로 커다란 거인.
심지어 현대의 보디빌더들처럼 온몸이 근육질로 되어 있어서 덩치가 어마어마한 사람으로 보였고, 순간 대장간 입구가 작아 보일 정도였다.
‘이 정도면 3대 500이 아니라 3대 1,000은 칠 것 같은데?’
아니, 어쩌면 1대 1,000도 가능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헤드락이라도 걸리면 반항 한 번 못해보겠단 생각이 들 정도로 위압감을 뿜어내는 남자는 나오자마자 일염이를 보고는 의문을 표했다.
“어, 형님? 여긴 어쩐 일로…….”
그런데 말하다 말더니, 갑자기 나를 보고는 위아래로 한 번 쫙 살펴보더니 환한 미소를 짓는 게 아닌가?
“이야, 우리 조카님 깨어나셨네?”
조카?
그렇다면 이 통나무도 맨손으로 부러뜨릴 것 같은 남자가 내 외삼촌?
“아, 내가 누군지는 기억나나? 하긴, 기억이 날 리가 없지. 마지막으로 본 게 10년도 더 됐는데 말이야. 에이, 삼촌이 바쁜 조카 한 번 안 보러 가고 말이야. 참 나쁘지 그치? 그래도 이해 좀 해줘. 왜냐면 삼촌이 말이야…….”
“저…….”
“아, 미안. 내가 말이 좀 많았지? 사실 원래 내가 이렇게 말이 많았던 건 아니야. 이게 다 사연이 있거든? 그때가 아마 너보다 조금 컸을 때였을 거야. 내가 처음으로 빙궁을 떠나서 안휘에 발을 들였을 때였는데…….”
뭘 물어 시간을 주긴커녕, 도무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외삼촌의 말.
그래도 자기소개를 겸하고 있었기에 어느 정도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수준은 간신히 벽을 넘어섰고, 대장장이 일은 18년 차로 아직 스승 밑에서 수학하는 중. 혼인은 안 했고, 사귀는 여자도 없음. 언제 올지도 모르는 조카를 위해 암기를 만드는 법도 연습했음.’
꽤 상세히 자신에 대해 설명해 주는 외삼촌.
그것까지는 마음에 들긴 했으나, 겨우 저 정보를 얻으려고 이야기만 15분 넘게 듣고 있었으니 효율이 심하게 떨어지긴 했다.
……뭐, 엄연히 따지자면 사실 강제로 듣고 있는 거지만.
“그래서 네가 필요한 게 있으면 이 삼촌에게 이야기해 주면 뭐든 다 만들어 줄 테니 말만 하렴. 독을 사출하는 자그마한 암기부터 당가의 꽃인 추혼비접까지, 못 만드는 게 없거든! 아, 물론 만드는 과정에 독성 나오는 암기도 있는 만큼 혹시 독에 중독되는 게 아닌가 걱정될 수도 있어. 하지만 하나 기억해 두렴. 이 삼촌은 말이야 어렸을 때부터 강골이어서 뭐든지 잘 버텼단다. 그리고 아무래도 매형이 사천당가의 가주잖아? 그런데 만약 독살이라도 당하면 어디 가서 얼굴을 못 들고 다닐 것 같아서 독에 대한 내성도 키웠단 말씀. 걱정할 필요 없다 이 말이야.”
대충 날 위해 독 내성도 기르고 암기 만드는 것도 연습했다는 외삼촌.
여차하면 암기를 수급할 수 있다는 사실은 참으로 감사했지만, 진짜로 날 생각한다면 그 길고 긴 설명을 줄여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삼촌?”
“오, 미안. 너도 궁금한 게 있을 텐데 또 너무 내 이야기만 늘어놨구나. 이를 미안해서 어쩌나. 원래 당가 사람들이 잡설이 긴 건 별로 안 좋아하잖니. 옛날에 이 삼촌이 너희 아버지랑 독대한 적이 있었거든? 근데 나는 분명 매형한테 살갑게 굴었는데, 매형은 별로 내키지 않는지 무려 세 시진이 넘도록 인상만 쓰고 계시는 거야. 그래서…….”
도무지 끝이 보이지 않는 삼촌의 말.
말리지도 못한 채 그걸 듣고 있자니 대략 정신 멍해지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