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77화
“빙궁으로 가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 차라리 뇌의한테 가는 건 어떻지?”
“공자도 이런 경우는 처음일 거다. 임시로 몇 가지 조치를 해놓으면 빙궁에 갈 때까지 문제없을 터이니 괜히 모험하지 말고 빙궁으로 가는 게 나을 거다.”
빙궁으로 가는 게 낫다는 결론.
당지천의 상태를 고려해 빠르게 결론을 낸 것까지는 좋았으나, 빙궁으로 옮기는 것도 빠르게 해야 했기에 지금 여기 있는 둘 중 하나가 가는 게 맞았다.
“…….”
천일염의 눈치를 슬쩍 보는 당기룡.
지금 당기룡은 쉬이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뭐, 일 때문이라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사실 일까지는 그렇다 칠 수 있었다.
당가에 유능한 인재들이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말이다.
어디까지나 당기룡이 자리를 비우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그 자신이 당가 최대의 전력이기 때문이었다.
평소라면 모를까, 아직 정체 모를 조직에게 집중 견제를 당하는 중인 당가.
거기다, 사방에서 조여오는 압박도 상당했기에 어느 때보다도 무력 부대가 활발히 움직이고 있었다.
즉, 가문 외부로 도는 무력 부대가 많다는 소리.
그런데 이 상황에서 당기룡이 자리를 비운다?
그것도 거의 일주일 넘게?
‘경거망동하면 당가가 위험하다.’
들키지 않으면 다행이겠지만, 잘못하면 당가가 습격받을 수도 있었다.
아무리 자신이 당지천을 편애한다고 한들, 엄연히 한 가문의 가주.
그 의무를 도외시할 순 없었다.
‘그렇다고 선뜻 맡길 수도 없는 노릇이니…….’
그렇기에 당기룡의 입장에선 천일염이 지천이를 맡아주는 게 최선이었지만, 그러면 지천이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데리고 가지.”
더 지체할 이유는 없다는 듯 바로 당지천을 업는 천일염.
그 모습을 보던 당기룡은 벌써부터 걱정되는 게 있었다.
혹, 천일염이 당지천을 빙궁까지 데려다주고서, 홀로 돌아와 버리는 것은 아닐지 말이다.
10년 전.
그때 이후로 천일염을 본 게 손에 꼽을 정도인 당기룡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천일염이 당지천의 곁에 있을 시간이 정말 얼마 안 남았음을.
입 밖으로 뱉은 말은 어떻게든 지키는 천일염.
그가 내뱉은 말 중에서 지키지 않은 건 여태껏 단 하나뿐이었기에 빙궁에 데려다준다는 말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하지만, 그 이후는 모르는 법.
연이 다했다고 판단한 천일염이 홀로 돌아와 버린다면 당지천은 홀로 빙궁에서 돌아와야 할 거다.
그리고 복귀하는 데 최소 반년, 길면 1년이 넘게 걸릴 수도 있었다.
남들보다 시간을 귀하게 쓰는 당지천에겐 뼈아픈 이야기.
가히 이무기 입에 물린 여의주를 뺏는 일과 다름없었기에 그런 사태는 어떻게든 막아야 했다.
‘그러려면…….’
다행히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곧 끝을 고하더라도, 아직은 남아 있는 자그마한 정에 기대는 방법이 있었으니까.
그러니 별로 내키지 않더라도, 설령 자존심을 굽히더라도 당지천을 위해서 해야만 했다.
“바로 출발하겠다.”
당지천을 업은 천일염이 떨어지지 않게끔 고정하고 곧장 떠나려고 하자, 당기룡이 황급히 운을 뗐다.
“지천이를…….”
천일염에게 고개를 숙이려고 하자, 뻣뻣하게 멈춰 서는 목.
자식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자존심을 굽히는 것이 부모의 미덕이거늘, 막상 하려니 쉽지만은 않았다.
천일염과 자신 사이에 생긴 감정의 골은 결코 작지 않았고,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깊어졌으니까.
하지만 내키지 않는 상황이더라도 당기룡은 당치천을 생각해 예를 갖춰 고개를 숙였다.
“지천이를 잘 부탁합니다. 형님.”
당기룡이 고개 숙인 채 부탁하자, 우뚝 멈춰 선 천일염.
잠깐 제자리에서 당기룡을 돌아보더니 무심하게 한마디 던졌다.
“돌아오는 것까지.”
이내 다시금 몸을 돌려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돌아오는 것까지는 어떻게든 책임지겠다.”
할 말을 마치고는 미련 없이 갈 길 가는 천일염.
“……감사합니다.”
당기룡이 늦게나마 감사를 전했을 땐, 이미 가주전을 떠난 후였다.
* * *
무림 전도의 한참 위.
지도에 나오지 않을 만큼 아득히 멀리 떨어진 새외무림(塞外武林) 중 한 곳인 북해빙궁.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얼음 동굴의 한가운데 가부좌를 틀고 있는 한 노인이 있었다.
“…….”
마치 동굴과 같이 얼어붙은 듯 미동조차 하지 않는 게 언뜻 보면 동사했다고 생각될 정도였으나, 손부터 팔꿈치까지 양팔을 뒤덮고 있는 붕대가 조금씩 풀린 채 나풀거리는 게 노인이 살아 있음을 알려주었다.
……바람이 불지 않는 동굴인데도 말이다.
“이 기운은…….”
그렇게 한참을 가부좌를 틀고 있던 노인은 혼잣말을 내뱉더니 슬며시 눈을 뜨고는 동굴을 뛰쳐나갔다.
“오는 속도를 보아하니 급한 일이군.”
태평하고 여유로워 보이는 발걸음.
급하다고 말하는 것과 달리, 노인의 걸음이 빨라지는 일은 없었으나, 거리가 그다지 멀지 않았는지 노인은 순식간에 빙궁 앞에 도착했다.
“어서 오너라.”
노인이 도착하자, 기다렸다는 듯 나타나는 천일염.
등 뒤에 당지천을 업은 채로 노인의 앞으로 다가왔는데, 온몸에 흙먼지가 가득하고 뭐에 쓸렸는지 옷이 해진 것이 한눈에 봐도 강행군을 했음을 알 수 있었다.
“지천이의 용태가 이상합니다.”
인사를 채 건네기도 전에 노인에게 당지천을 보여주는 천일염.
노인은 잠시 진맥을 하더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빙혈을 각성했구나. 음기와 독기가 충돌하면서 속이 뒤틀렸어.”
“위험한 상황입니까?”
“위중한 사안은 아니다. 뒤늦게 왔으면 모를까, 이 정도는 조치하면 생명에 지장은 없으니 말이다. 물론, 음기를 다스리려면 좀 시간이 걸리긴 하겠다만 말이다.”
답변을 듣자, 별다른 말 없이 조용히 서 있는 천일염.
노인은 그런 천일염을 보고는 옅게 웃음을 지어줬다.
“설화와 함께 처음 찾아왔던 날. 딱 그날의 눈을 하고 있구나.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와는 상황이 정반대라는 것이겠지.”
노인의 말에 잠시 눈을 맞췄던 천일염은 얼마 되지 않아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반가운 마음에 쓸데없는 소리를 했구나. 늦지 않게 오느라 고생 많았다. 들어가자꾸나.”
노인이 몸을 등진 채 빙궁으로 들어가려 함에도 미동도 없는 천일염.
잠시 뒤를 돌아본 노인은 천일염을 보고는 물었다.
“곧장 설화한테 다녀오려는 게냐?”
“예.”
“지천이는 내가 맡을 터이니 다녀오거라.”
천일염의 덤덤한 대답에도 노인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웃어주며 당지천을 건네받고는 그대로 입구를 향해 몸을 돌렸다.
“…….”
그리고 그 모습을 보던 천일염은 한참 동안 그 뒷모습을 쳐다보다가 말없이 발길을 옮겼다.
* * *
얼마나 오래 잠을 잤을까.
문득 눈을 뜨자, 온통 하얗게 칠해진 새하얀 천장이 보였다.
“낯선 천장이다.”
당가에서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새하얀 천장.
멍하니 그것을 보고 있자니 몽롱했던 정신이 점점 원래대로 돌아왔고, 이내 정신이 번쩍 들어 품부터 뒤졌다.
‘나 분명 쓰러졌었지? 비급은?! 천열운무보는?!’
품에 손을 넣자, 곧장 잡히는 비급 하나.
다름 아닌 꽁꽁 싸맸던 천열운무보였다.
“휴.”
힘들게 얻어 온 비급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곧장 사라진 물건이 없는지 품을 샅샅이 뒤졌다.
그런데…….
“야명주가 없어…….”
내 보물 1호.
나와 기나긴 세월을 함께한 애완 돌이자, 부르는 게 값이라고 불릴 만큼 비싼 야명주를 넣어둔 주머니가 사라졌다.
“야명주가 없어!”
다시금 쥐 잡듯이 온몸을 뒤져봐도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야명주 주머니.
마치 집 가서 게임 좀 하려고 했는데, 피곤해서 한숨 자고 일어났더니 경험치 3배 이벤트가 끝나 있었다는 이야기만큼 끔찍한 소식이었다.
……지금의 나에겐 별 다를 바 없는 소리기도 했고 말이다.
“인생 망했네…….”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한들, 구할 수도 없는 물건.
돈의 가치로 따져봐도, 야명주 자체의 가치로 따져봐도 어느 쪽이든 아찔한 건 마찬가지였기에 연신 한숨을 쉬고 있자, 일염이가 문을 열고 들어오며 말했다.
“야명주라면 여기 있습니다.”
무심한 얼굴로 야명주 주머니를 건네주는 일염이.
황급히 주머니를 받고 열어보자, 환한 빛이 쏟아져 나오는 걸 보아하니 우리 명주가 맞았다.
“귀중한 물건이니, 임시로 제가 맡고 있었습니다. 괜히 공자님 옮기다가 잃어버리면 난리가 나니까 말입니다.”
다급한 상황에서도 잊지 않고 챙겨왔다는 일염이를 보고 있자니, 가히 후광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아 눈을 슬며시 감아야만 했다.
“고맙다.”
만약 잃어버렸다면 삼 일 밤낮을 앓았을 만큼 소중한 야명주.
다시는 잃어버리지 않게끔 품에 꼭 끌어안자, 일염이가 야명주 주머니를 도로 가져갔다.
“왜 뺏어 가?”
“야명주가 독기를 내뿜는다고 한 건 공자님이셨잖습니까. 환자에겐 안 좋을 것 같으니 이건 잠시 제가 보관하겠습니다.”
예전에 해줬던 설명을 기억하는지, 몸에 안 좋을 거라며 야명주를 챙겨 가는 일염이.
“아.”
경황이 없어서 그렇지, 생각해 보니 나는 환자였다.
방사선이 뿜어져 나오는 야명주를 곁에 두어봤자, 좋을 게 없긴 했다.
“그래, 그럼 야명주는 네가 가지고 있도록 하고…….”
슬슬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으로 몸을 일으키자, 비명을 지르는 관절들.
“에구구 삭신이야, 아주 그냥 온몸이 결리는 것 같네.”
“한 달 가까이 누워 계셨으니 그럴 만하실 겁니다.”
“뭐?! 한 달?! 에이, 거짓말하지 마.”
한 달이나 허비했단 말에 화들짝 놀라서 침소 옆의 창문을 활짝 열어봤다.
‘어우씨, 추워.’
창문을 열자, 몰아치듯 들어오는 한기.
대충 감기인지 뭔지 모를 것에 걸려서 쓰러진 것이니 추운 건 당연한 거라 생각하고 주변을 둘러보니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확실히 계절이 변해 있긴 했다.
“……눈?”
……좀 많이 변해 있긴 했다만 말이다.
“그럼 이 추위도? 아니, 겨울이 오려면 아직 멀었잖아…… 근데 여긴 어디냐?”
사방이 눈으로 뒤덮인 풍경뿐이었지만, 한눈에 봐도 당가와는 구조부터가 달라 보이는 곳이었다.
“빙궁입니다.”
“뭐? 빙궁이라고?”
아니, 갑자기 빙궁이 왜 튀어나온단 말인가?
애초에 빙궁이 어딘지는 정확히는 모르지만, 일전에 봤던 지도로는 마차로 대략 넉 달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그런데 의식 없었다는 한 달 가지고는…….
‘생각해 보니 되네?’
일염이가 직접 옮겼다면 강행군을 했다는 가정하에 납득이 가는 기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