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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76화 (76/200)

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76화

기세를 몰아서 계속해서 이어지는 공격.

천일염이 순전히 방어만 하는 걸 보고 승기를 굳히겠다는 듯이 열심히 박도를 휘둘렀으나, 수십 합을 겨뤄도 생채기 하나 내지 못하자, 그제야 이상함을 느꼈다.

‘어째서 통하지 않는 것이지?’

한때, 혈풍채의 부채주였던 만큼 혈풍소도(血風小刀)라는 별호로 산서에 소문난 고수인 맹호채주.

당연히 실력에 자신이 있었음에도 천일염과 합을 겨루면 겨룰수록 뭔가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점점 들었다.

“여기에도 흔적은 없나.”

공방을 나누는 와중에도 무언가를 생각하며 혼잣말을 지껄이는 천일염.

마치 처음부터 맹호채주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적당히 방어만 하는 모습에 무시당했다고 착각한 맹호채주는 속에서 올라오는 위화감을 털어내고는 박도에 기를 불어 넣었다.

“조금 봐줬더니 감히 날 눈앞에 두고 딴생각을 해?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리겠구나!”

솔직히 이상함을 느꼈다고 한들, 기세에 밀리면 절대 이길 수 없는 법.

부하들 앞에서 나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기에 재차 기수식을 취한 맹호채주는 단칼에 베겠다는 마음으로 천일염에게 달려들었다.

“죽어라!”

가히 용맹한 호랑이와 같은 기세.

맹호채주가 뒤에 있는 녹림도들조차 몽골이 송연해질 기세를 내자, 산적들은 자신들의 채주가 저 호위무사를 단칼에 썰어버릴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눈물이라 했느냐.”

허나, 그런 맹호채주를 보면서도 태연하기 그지없는 천일염.

“유감스럽게도 난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눈물을 흘려본 적이 없다.”

위험한 상황임에도 예의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로 천천히 검을 치켜세웠다.

그리고…….

“설화를 잃었던 그 순간조차도. 나는 눈물을 흘릴 수 없었다.”

달려드는 맹호채주를 박도와 함께 단칼에 베며 말을 이었다.

“그게…… 내게 주어진 업이었으니.”

자신이 베었는지, 아니면 베였는지 가늠조차 못 한 채 천일염을 바라보던 맹호채주는 이내 가슴에서 몰려오는 통증을 느끼고서야 자신이 베였다는 걸 깨달았다.

“어?”

대체 언제, 어떻게 베였는지 인지조차 못 한 맹호채주가 허망한 유언을 남긴 채로 허물질 때쯤.

-쏴아아아.

시원한 소리와 함께 소나기가 쏟아졌다.

* * *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 듯 갑자기 쏟아지기 시작한 소나기.

“하아, 하아…….”

이걸 곧이곧대로 맞다간 감기에 걸릴 걸 알고 있었지만, 몸이 쉬이 움직이지 않았다.

‘춥다.’

왜냐면 아까 내디뎠던 발을 시작으로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착각이…… 아니, 진짜로 얼어붙는 느낌이었기 때문에.

‘결국, 이 추운 것도 내가 약해서 그런 거겠지.’

만약 한서불침이었다면 이런 추위쯤 아무것도 아니었을 테고, 하다못해 벽만 넘었다면 춥더라도 이렇게 덜덜 떨진 않았을 거다.

약하다.

너무 약하다.

그걸 상기하면 할수록 사방에 가득한 한기가 점점 강해지는 느낌이었다.

‘마치 내 몸에서 냉기가 흘러나오는 것 같아.’

맨몸으로 냉동 창고에 던져진 듯 몸이 덜덜 떨렸고, 이제는 아예 얼어붙은 듯 몸에서 한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흐으…….”

그렇게 얼마나 추위에 떨고 있었을까.

이번엔 갑자기 사우나에 던져진 듯 사방에서 갑갑함과 뜨거움이 느껴졌다.

‘더워, 목이 타들어 갈 것 같아.’

5초 전만 해도 얼어 죽을 것 같았는데, 이번엔 쪄 죽을 것만 같은 상황.

온몸의 수분이 쫙 빠져서 탈수증세가 오는 것만 같았기에 쏟아지는 비라도 받아먹으려고 입을 크게 벌렸다.

하지만…….

ⓚ②②

‘부족해.’

분명 비를 받아 마시는데 갈증은 해소되기는커녕, 마치 한지에 떨어진 먹물처럼 쉽사리 퍼져 나가 점점 심해져만 갔다.

‘물.’

덜덜 떨리는 손으로 옷을 죄다 풀어헤치며 품에서 물병을 꺼내 들자, 갑자기 세상이 뒤집혔다.

* * *

“아.”

잠시 눈을 감았다가 뜨자, 어느샌가 내가 서 있는 곳은 비 오는 아주까리밭이 아닌 현대의 내 연구실이었다.

……이전에 봤던 것보다 더 지저분하고, 칙칙한 배경의 연구실 말이다.

“설마…….”

그래. 이건 아마도 그날의 기억.

그 어떤 악몽보다도 지겹게 많이 꾼, 그럼에도 그 어떤 악몽보다 두려운 그 꿈이었다.

-쾅!

눈을 뜨길 기다렸다는 듯, 굉음을 내며 열리는 문.

이어서 아이를 옆구리에 낀 채 다급히 뛰쳐 들어온 남자가 권총을 내게 겨누며 협박했다.

“네가 권준일이지! 다 알고 왔으니까 발뺌할 생각하지 마!”

당장에라도 죽이겠다는 듯 사납게 노려보는 남자.

-탕! 탕!

진짜 총이란 걸 알려주고 싶어서인지, 아니면 떨떠름한 얼굴을 한 나를 보고 화가 치밀어 올랐는지는 모르겠지만, 천장을 향해 총을 두 발 쏘고는 내게 총을 겨눴다.

“해독제! 죽고 싶지 않으면 해독제를 내놔!”

한눈에 봐도 심각한 상황.

애초에 눈앞에 권총이 들이밀어졌으면 누구나 지레 겁을 먹었겠건만, 당시 연구에 미쳐서 현실감각 없던 나는 무심하게 대답했다.

“미안하지만, 해독제 같은 건 없어. 내가 만든 독은 그런 독인걸.”

“뭐……?”

해독제가 없다는 소리에 권총을 든 남자가 잠시 공황에 빠지더니 이내 다시 정신을 차리고 권총을 내게 겨눴다.

“거짓말 치지 마! 죽고 싶지 않으면 갖고 오란 말이야!”

-탕! 탕! 탕!

아까와 달리, 볼을 스치고 가는 총알들.

빗맞은 부위에서 쓰라린 감촉과 함께 피가 흘렀다.

“없으면 만들어! 만들면 되잖아!”

-탕! 탕! 탕!

분을 이기지 못해서인지 연신 총을 쏴대는 남자.

그런 와중에도 날 죽이지는 않고, 제 얼굴을 감싸 안으며 눈물을 흘리더니 권총을 버리고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제발! 나는 괜찮으니까! 나는 죽어도 좋으니 우리 애한테만이라도…….”

이제 막 다섯 살이나 됐을까.

아버지에게 등 떠밀린 채로 나와 마주 보게 된 아이의 눈은 썩은 동태 눈깔 같았다.

그게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돼서였는지, 아니면 그저 자신의 미래를 알고 있어서 그런 건지는 아직도 모른다.

허나, 한 가지 확실히 기억나는 건 아이가 보내오는 시선은 나이에 맞지 않게 담담하기 그지없었다는 점이다.

“제발…….”

애절한 부탁에도 해줄 수 있는 게 없기에 가만히 있자, 결국 눈물을 터뜨리는 아이의 아버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메마르고 공허한 눈의 아이를 대신해 울어주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아이가 나와 눈을 맞추고 있다가, 끝내 담담히 눈을 감았을 때.

나는 처음으로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내가 결코 만들어선 안 될 걸 만들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 * *

차가운 빗방울들이 볼을 때리듯 세차게 내리자, 그제야 다시금 눈에 들어오는 현실.

그날 스쳤던 총알과 같이 쓰라린 빗물을 맞고 있자, 갈증을…… 목이 아닌 온몸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갈증을 느꼈다.

‘강해져야 해…….’

남에게 휘둘리지 않을 만큼의 힘을.

속아 넘어가더라도 만회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을.

최소한이라도 속죄를 할 수 있을 만큼의 힘을 가져야만 했다.

……그게 내 업이었으니까.

-철퍽.

허나, 그런 마음을 몇 번이고 되새김질하는 게 무색하게도, 몸은 도저히 버티지 못하겠는지 끈 풀린 인형처럼 힘없이 쓰러졌다.

* * *

오늘도 바쁘게 돌아가는 당가주의 집무실.

당기룡과 백호단주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일 처리에 여념이 없었다.

“……따라서, 2할의 예산이 추가로 필요합니다.”

“예상 범위 이내군. 허가해.”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 안건은…….”

“잠깐.”

백호단주의 보고를 받다가 말고, 뭔가 이상한 기운을 감지한 당기룡.

안 그래도 서류 더미가 밀려 있는 상황이라 바쁜데, 웬 이상한 게 신경을 거슬리게 만드니 짜증이 절로 솟구쳤다.

‘아니, 이건…….’

하지만 그런 짜증도 잠시.

저 멀리서 감지된 이상한 기운이 이쪽으로 점점 다가오자,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알아챘고, 파리해진 안색으로 명령했다.

“가주전에 있는 인원들 전부 퇴거시켜!”

“예?”

난데없는 퇴거 명령에 반문하는 백호단주.

당기룡의 명령에 항명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나, 워낙 난데없는 명령이기에 순간 당황한 모습이었다.

“최대한 빨리!”

“알겠습니다!”

당기룡이 안색을 굳힌 채 재차 호통을 치자, 예삿일이 아님을 깨달은 백호단주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바람같이 뛰쳐나가며 빨간 피리를 꺼내 불었다.

-삐이이이이!

이는 긴급 대피 신호 중 하나로, 신호를 들은 이들은 모두 가주전 밖으로 대피하라는 일종의 경보.

이외에도 여러 가지 경보가 있긴 했지만, 백호단주는 지금 상황에선 적색경보가 제일 낫다고 판단하고 가주전에 울려 퍼지게끔 피리를 불어댔다.

-삐이이이이!

“무슨 일이야?!”

“난들 아나!”

경보를 듣자, 하던 일을 멈추고 냅다 뛰어나오는 인원들.

-삐이이이이!

-삐이이이이!

이어서 전파를 위해 자신들도 피리를 꺼내 불었고, 이후 곧장 밖으로 향했다.

-삐이이이이!

가주전에 수십 번도 더 울려 퍼진 피리 소리.

그래도 혹여나 못 들은 이들이 있을까 봐, 몇 번이나 반복해서 피리를 불던 백호단주는 인원들이 모두 퇴거했음을 확인하고 제일 마지막으로 가주전에서 벗어났다.

그렇게 잠깐 사이에 당기룡을 제외하고 텅 비어버린 가주전.

당기룡은 인원들이 늦지 않게 퇴거한 걸 다행으로 생각하고는 집무실의 문을 열어놨다.

그러자, 눈 깜짝할 새에 집무실로 들어오는 한 인영.

“지천이의 상태가 이상하다.”

그건 다름 아닌 당지천을 업고 있던 천일염이었다.

“뭐?!”

당지천이 위급하단 말에 화들짝 놀란 당기룡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당지천의 상태부터 살폈다.

“이건…….”

당지천의 몸을 자세히 살피자, 서로 충돌하고 있는 두 기운.

하나는 당지천이 여태껏 쌓아온 정제된 독기였고, 하나는 원인 모르게 발생한 음기였다.

“왜 이러는 줄 알겠나?”

당지천의 상황은 알지만, 이유는 모르는 천일염이 당기룡에게 묻자, 당기룡은 심사숙고 끝에 결론을 내렸다.

“아무래도 빙혈이 깨어난 것 같다.”

“빙혈? 그건 빙공을 익히는 무인들이 몸 안의 쌓인 음기를 수습했을 때 하는 비유 아니었나? 분명 제대로 수습하지 못해도 별문제 없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정확한 이유는 잘 모르겠다. 다만, 그건 빙궁에서 따로 조치를 취해서 가능한 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어쩌지? 여기서 치료할 수 있는 건가?”

“아니, 빙궁으로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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