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75화
‘돈이 더럽게 많아 보여. 어쩌면 상상 그 이상의 금액을 불러도 될지도?’
자신의 예상보다 훨씬 돈이 많아 보이는 당지천의 모습에 위아래로 자세히 살피자, 옷부터 귀태가 줄줄 흐르는 것이 어지간히도 돈이 많은 집안의 도련님으로 보였다.
“약을 발랐으니 금방 나을 겁니다. 일단, 저들을 상대해야 하니 뒤에 가만히 계시죠.”
“감사합니다. 소협.”
그렇게 당지천의 뒤에 숨은 초석령은 둘의 사각지대에서 천일염의 눈치를 살피며 슬며시 품에 손을 넣었다.
“어이, 거기 공자님. 남의 일 참견 마시고 곱게 하던 일 하시지?”
“강호에서 남의 일에 끼어들면 피 본다고 못 배웠어?”
그와 동시에 초석령이 자리 잡은 걸 본 녹림도들이 시선을 끌려고 저마다 무기를 들자, 당지천이 나지막이 물었다.
“역시 다른 인원은 없는 것 같지?”
“예, 단순한 잔챙이들이군요. 우려했던 상황은 아닌 듯합니다.”
“그럼 정리하자.”
영문을 알 수 없는 대화.
허나, 내용이 어쨌든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눈치챈 초석령이 품에 숨겨둔 단검을 꺼내 당지천에게 휘둘렀지만…….
-챙!
“어, 어떻게?”
당지천은 다 알고 있었다는 듯이 가볍게 막아냈다.
* * *
피마자를 채취하던 도중, 갑자기 나타난 산적 무리.
산적에게 쫓기는 여인이라는 진부한 방법으로 접근을 시도하길래 처음에는 심히 당황스러웠고, 긴장됐다.
‘설마 나를 노리는 건가?’
당지독이 막아주겠다고 했고 일 처리도 확실한 편이지만, 어디에서나 상정 외의 일은 일어나는 법.
녹림이 미치지 않고서야 이렇게 대놓고 당가를 건드리는 경우는 아예 없다시피 했기에 의심 갈 수밖에 없었다.
‘근데 전체적으로 수준이 너무 낮은데…….’
하지만 그렇다고 단박에 확신하기엔 이들의 수준이 심히 낮았다.
그렇기에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고, 일염이도 같은 생각을 했는지 잠시 상황을 지켜봤다.
허나, 아무리 살펴봐도 여기에 다른 인원은 없었고, 굳이 이런 방식으로 습격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에 단순한 산적 무리로 결론 냈다.
“어, 어떻게?”
기습이 막히자, 여인은 전혀 예상치 못했는지 당황하며 얼빠진 얼굴을 했다.
“어떻게긴. 좀 씻고 다녀. 냄새나잖아.”
지금도 여인에 옷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짙은 피 냄새.
이런 작업을 칠 때면 옷을 깨끗이 빨았을 게 분명함에도 피 냄새가 나는 게 어지간히도 사람을 많이 죽인 듯했다.
“들킨 이상 어쩔 수 없지!”
모욕적인 언사를 듣자, 화가 나는지 재차 검을 휘두르는 여인.
허나, 그 검이 내게 닿기도 전에 여인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이건…… 독?”
휘두르는 도중 놓친 탓에 저 멀리 날아가 버린 단검.
손아귀는 물론 온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고, 호흡곤란을 느꼈을 여인은 그제야 상황이 잘못됐음을 파악한 듯했다.
“허억, 허억…… 서, 설마 금창약?”
“정답.”
뻔히 보이는 수작을 거는데 당연히 안전장치를 해둬야 하지 않겠는가.
상황 파악을 위해서, 그리고 여인이 이류 수준인 걸 알기에 접근을 허용했지만, 만약 품에 알 수 없는 이상한 무기를 숨겨 왔다면 위험할 수도 있기에 미리 대비했다.
그래서 여인에게 금창약을 발라주면서 속밀독봉의 독밀을 발라줬다.
‘수준이 낮아서 그런지 정말 빨리 도네.’
물론, 이렇게 빨리 돌 줄은 몰랐지만 말이다.
“자, 그럼 들어가시고.”
여인에게 정답을 맞힌 선물로 혈을 짚어주자 여인은 단번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석령아! 네 이놈들! 석령이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
그 모습을 보더니 분개하며 달려드는 산적들.
“감히 우리 맹호채를 건드려!”
동료를 버리고 가는 게 당연한 일반적인 산채와 달리, 앞뒤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걸 보아하니 꽤 규모가 있는 산채인 듯했다.
“이런 애들을 만날 때면 왠지 악역이 된 듯한 기분이야.”
“기왕 이렇게 된 거 즐기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럴까?”
어차피 심심했던 찰나.
산적들을 제외하곤 다른 이들이 존재하지 않는 걸 확인했기에 산적 놀이나 하기로 했다.
“지금이라도 순순히 가진 걸 내놓으면 목숨만은 살려 보내주겠다!”
“…….”
장난스러우면서도 반쯤 진심을 담은 채 말하자, 인지 부조화가 오는지 발걸음을 멈추는 산적들.
자신들이 매일같이 외치던 말을 직접 들은 게 어이없는 듯 벙찐 얼굴로 나를 봤다.
“웃기지 마라! 우린 맹호채는 동료를 버리지 않는다!”
제일 앞서서 오는 조장이 고려할 가치도 없다는 듯 일갈했지만, 내 눈은 속일 수 없는 법.
뒤에 따라오던 몇 놈은 다른 인원의 눈치를 슬쩍 보는 게 때를 봐서 도망칠 생각으로 보였다.
“하하하! 어리석은 녀석들!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택하는구나!”
산적들이 으레 할 법한 말을 하며 암기를 던지자, 추풍낙엽처럼 쓰러지는 산적들.
하나같이 긴장할 필요도 없을 만큼 약한 이들이었고, 독무를 풀기에는 독무가 아까울 정도였기에 오직 암기만으로 상대하는데도 명백한 차이를 보였다.
“아, 암기?! 설마?!”
이제야 내가 어디 사람인 줄 깨달았는지 핼쑥해지는 산적들의 얼굴.
앞의 조장으로 보이는 인원마저 소리 없이 쓰러지자, 재빨리 삼십육계 줄행랑을 쳤다.
“가진 건 내놓고 가라니까, 그냥 가버렸네…….”
친히 은혜를 베풀어줬는데 배은망덕하게 갚는 게 역시 산적다운 모습이었다.
“뭐, 상관없지.”
사실 산적들을 풀어준 건 일부러 풀어준 거다.
왜냐면 산적들을 일망타진하려면 산채의 위치를 알아야 했기에.
아마 옆에 있던 일염이도 그걸 짐작해서 도망가는 애들을 뒤쫓지 않았을 거다.
“이번엔 제가 나서겠습니다.”
그런데 한발 더 나아가 뜻밖의 말을 하는 일염이.
“네가? 왜?”
“지금 온 인원들의 수준은 낮지만 행동하는 것을 보아하니 꽤 규모가 있는 산채로 보였습니다. 아무리 공자님께 독이 있다고 한들, 어디선가 단체로 넘어온 이름 있는 산채라면 위험할 수 있으니 여기서 기다리시죠.”
평소에 내가 위험한 일에 끼어들면 항상 핀잔을 주더라도 직접 끼어들지 않았는데, 지금은 아예 자신이 가겠다고 했다.
“그렇긴 한데 너 그런 거 싫어하잖아.”
“어제의 벌충이라고 생각하시죠.”
“아니, 그래도…….”
“같이 가봤자 방해만 될 터이니 공자님은 여기 계시기 바랍니다.”
같이 가려고 한 발자국을 내딛자, 따라오지 말라는 듯 혼자서 앞서 나가는 천일염.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수풀 너머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 씁쓸했다.
“쓰읍.”
단순한 산채라면 모를까.
누군가가 습격을 준비하고 있다면 가봤자 방해만 된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고, 나도 안다.
왜냐면 독무의 위력은 개활지에선 반감이 되다 못해, 조절하기가 까다로웠으니까 말이다.
어쩌면 깔아둔 독무가 바람을 타고 일염이에게 가서 민폐가 될지도 몰랐다.
다만…….
“결국, 약한 게 문제인가.”
짐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무력감이 뼈에 사무치자, 나 자신에게 화가 치밀어 올랐고, 예전에 가라앉혔던 조바심이 다시금 수면 위로 올라왔다.
“빨리…… 빨리 깨달음을 얻어야 해.”
그 어느 때보다도 심한 조바심이 말이다.
‘내겐 강해져야만 할 이유가 있어.’
자신을 사지에 내몰아서라도 깨달음을 얻어야 한다는 강박이 뇌리를 지배하자, 당장 일염이의 뒤를 쫓아가기 위해 한 발자국 크게 내디뎠다.
하지만…….
‘춥다.’
마치 얼어붙는 듯.
땅에서부터 올라온, 몸을 엄습하는 강한 한기에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 * *
도망친 산적들의 흔적을 따라 맹호채로 가는 길.
천일염은 예상대로 당지천이 쫓아오지 않는 걸 한번 확인하고는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다행히 따라오진 않는군.’
대부분 이성적인 판단을 하지만, 이상하게 불의를 보고 지나치지 못하는 당지천.
일반적인 산적이라면 모를까, 이렇게 짙은 혈향을 내뿜는 이들을 보고 절대 그냥 지나칠 수 없었을 거다.
멀리 가지 않아도 지금 산적들을 풀어준 걸 보면 알지 않는가.
밑에서 습격한 이들은 단순한 산적 무리에 불과하지만, 위는 다를 수 있는데도 굳이 산채를 공격하겠다는 생각으로 풀어준 걸 보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던 것 같았다.
‘역시 내가 나서는 게 맞았다.’
원래라면 당지천의 고집에 어울리지 않는 것이 천일염의 원칙.
하지만 이번만큼은 당지천을 도와주기로 마음먹었기에 위험할 만한 상황을 사전에 미리 차단하기로 했다.
‘이번 일은 비동에서의 일의 벌충이다.’
사람은 때론 당연한 걸 잊는다.
그리고 그걸 잊어서 크나큰 실수를 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만두기로 했으면 모를까, 엄연히 호위라는 작자가 대상을 지키지 않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어제 그에 대한 보상을 마련해 주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보상일 뿐.
자신 때문에 목숨이 위태로워졌으니, 그런 상황을 한 번 타개해 주는 것이 진정한 벌충이라 생각했다.
‘또한, 설화의 부탁을 잊은 벌이다.’
무엇보다 당지천에게 자신을 대하듯 해달라던 천설화의 부탁.
그것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질책이기도 했다.
‘……어쩌면 끝에 거의 다다른 것일지도 모르겠군.’
다른 이의 부탁도 아니고, 천설화의 부탁임에도 이제는 옛날같이 중요하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물론, 지금은 아직 오락가락하는 상황이기에 당지천의 곁에 천일염으로 남아 있는 것이었다.
허나, 언젠가 천설화의 부탁마저 빛이 바래 버릴 때가 온다면 아마 당지천의 곁에서 주저 없이 떠날 거다.
“비군.”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고 있자, 한두 방울씩 떨어지는 빗방울.
하늘을 올려다보니 먹구름이 잔뜩 낀 게 당장에라도 비를 쏟아낼 것만 같았다.
‘흔적이 지워지니 빨리 움직여야겠어.’
상대가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이들이 아니라서 단순히 비가 오는 정도로 흔적이 사라지는 일은 생기지 않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발걸음을 재촉하자 멀지 않은 곳에서 산채를 발견할 수 있었다.
“네놈이 우리 애들을 건드렸냐?”
인기척을 낸 채로 산채에 다가가자, 자연스레 문을 열고 나오는 채주로 보이는 작자.
“꼴에 검 좀 잡아봤다고 실컷 설쳐댄 것 같은데…….”
그 흔한 통성명 한번 없이 곧장 자신의 박도를 꺼내 들고 기수식을 취하는 게 어지간히도 화가 난 모습이었다.
“얼마나 자신 있어서 그랬는지 어디 한번 그 비루한 실력 좀 보자꾸나!”
단숨에 거리를 좁혀 연격을 퍼붓는 맹호채주.
제 발로 쳐들어온 천일염이 공격은 안 하고 막기만 하고 있자, 기고만장한 얼굴로 천일염에게 외쳤다.
“고작 그 정도 실력으로 우리 맹호채를 건드린 것이더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