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자, 당가의 막둥이 되다 74화
신화문의 의뢰를 처리하는 데 꼬박 하루.
당지독이 약속한 4일 중 하루를 날려먹었고, 성도에서 조금 멀리 나오느라 두 시진 가까이 잡아먹었음에도 조급한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다.
왜냐면 아주까리 구하는 과정이 매우 순탄했기에.
“이쪽입니다.”
“오…….”
신화문에서 주선해 준 약초꾼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아주까리의 자생지.
들판 가득 아주까리가 펴 있진 않았으나, 누가 따로 관리하는 게 아님에도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양보다 배는 많아 보였다.
‘이렇게 쉽게 올 줄이야. 오늘은 정말 운이 좋아. 아니면 형님 덕인가?’
평소의 운을 생각해 보면 이곳에 오는 동안 사건이란 사건은 죄다 엮였을 법한데도, 오늘은 아무 일 없이 평화롭게 도착했다.
거기다, 다른 자생지로 이동 안 해도 될 만큼 양도 넉넉했으니…… 운이 좋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돌아가는 길은 쉬우니 길 잃을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겁니다.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일을 마치고는 유유히 사라지는 약초꾼.
평소라면 뒷일을 걱정해 붙잡았을 테지만, 약초꾼 말대로 우리가 한 거라곤 산길을 따라 쭉 올라오다가 옆으로 한 번 빠진 게 다라서 그냥 보내줬다.
조금 캐 가는 거면 모를까, 싹쓸이하듯 가져가는 걸 보여봤자 좋을 건 없으니 말이다.
“자, 그럼…….”
소매를 걷으며 미리 준비해 왔던 큰 보자기를 풀었다.
“본격적으로 수확해 보자고.”
독성을 가진 만큼 관리나 재배가 힘든 독초들.
그만큼 다루거나 가까이 가는 데도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허나, 피마자의 경우 독초임에도 일반적인 독물들과 달리, 순전히 열매를 먹지만 않으면 독성이 없다시피 했기에 일염이도 나서서 거들고 있었다.
“하암.”
조금의 긴장도, 조심도 필요 없는 단순 반복 과정.
그게 몇 시간이고 이어졌기에 상당히 지루하긴 했지만, 피마자를 이용할 생각을 하니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정제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겠지만, 천열운무보를 익히고 리신을 뿌리고 다니면…… 크으, 아주 그냥 끝장나는 거지.’
물론, 천열운무보를 익히고 개량하는 건 머나먼 이야기가 될 터이니 지금 당장은 주먹구구(?)식으로 써야겠지만, 2.1㎎이면 사람도 죽이는 독이다.
암기에 발라서 쓰기만 해도 그 효용은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도 동귀어진용 독으로 쓰긴 부적합하지만 말이야.’
저번에 이야기했듯이 리신이 완전무결한 독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괴랄한 독성에 비해 확보가 쉬운 만큼 단점도 명확한 편이었다.
그 단점은 혼합독을 만들면 해결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아직 이론뿐이고 될지 안 될지 모르는 상황.
그렇기에 동귀어진용으로는 부적합했고, 필시 그런 상황이 온다면 평소에 쓰는 독보다 더 강한 독이 필요할 게 분명하기에 다른 독을 생각하고 있었다.
독성은 리신보다 조금 강하면서 내성을 만들 수 없고, 배출은 몰라도 해독 자체가 불가능하며, 내기로 태우려고 하면 형태가 변해 새로운 독성을 뿜어내는 그런 독을 말이다.
‘아예 못 구하는 건 아니지만, 그것도 결국 북해빙궁 쪽에 가야 겨우 구할 텐데 갈 시간이 없으니…… 뭐, 지금은 구한다고 해서 바로 만들 수도, 쓸 수 있는 것도 아니니 고민할 이유도 없긴 하지.’
사실 찾는 것도 일이고, 어찌저찌 만들었다고 해도 제대로 쓰지도 못할 거다.
동귀어진할 만한 상대를 만났음에도 깨달음을 못 얻은 상황이라면 어떤 수를 쓰든 막힐 게 분명했고, 아무리 승기를 다 잡았다고 한들, 상대가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눈먼 독에 맞아줄 리는 없으니 말이다.
‘하아, 빨리 벽을 넘긴 해야 할 텐데 말이야.’
생각하니 싱숭생숭해지는 마음.
마실 것 없이 고구마만 집어먹은 것처럼 속이 갑갑하고 갈증이 났다.
‘몸이 왜 이러지?’
거기다, 밤도 아닌데 기온이 뚝 떨어진 것처럼 사방에서 한기가 느껴졌다.
‘몸살이라도 났나…….’
답답한 속만큼이나 점점 심해지는 오한.
이틀 전, 연무장에서 느꼈던 오한이 단순한 몸살로 치부할 정도였다면 지금은 진짜로 기온이 떨어진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생생했다.
“끙.”
그래도 못 참을 정도는 아니었기에 리신이라도 구한 걸 위안 삼아 끙끙거리며 피미자를 수확하고 있자, 멀리서 일염이가 물었다.
“공자님. 그런데 피마자는 어디에 쓰시려고 이렇게 많이 따십니까?”
“왜? 또 어디 가서 꼰지르게?”
“……그 이야긴 어제 정리된 게 아니었습니까?”
“내가 속이 좀 좁아서 한 1년만 참아. 그때 되면 잊어줄 테니까.”
“1년이라…….”
대충 1년이라고 말한 건데, 씁쓸하긴 한 건지 얼굴을 굳히는 일염이.
아마도 내가 이렇게 놀려먹을 줄은 생각도 못 한 듯했다.
“거,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지. 너무하십니다.”
“꼬우면 알지? 처신 잘하자.”
“에이, 저희 사이가 어떤 사이인데 그렇게 정 없게 구십니까.”
답답한 가슴도, 갑자기 들던 오한도 일염이와 농담 따먹기를 하다 보니 점점 잊혀가는 듯하던 그때.
“공자님. 누군가 이쪽으로 달려옵니다.”
저 멀리서 인기척이 나더니 수풀에서 곱상하게 생긴 여인 한 명이 뛰쳐나왔다.
“도와주세요!”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는 듯 이쪽을 보고서 달려오는 여인.
어느 정도 무공을 익히긴 했는지, 몸놀림이 예사롭지 않았다.
“거기 서라!”
이어서 마치 짜기라도 한 듯, 몰려나오는 험상궂은 사내들.
한눈에 봐도 ‘나 산적이요’라고 과시하는 듯 저마다의 무기를 든 채로 열심히 달려오는 게 위압감을 주기보다는 상당히 우스꽝스러웠다.
“꺄악! 제발 도와주세요!”
그러나 도망치던 여인에겐 저승사자가 쫓아오는 것처럼 보였는지 연신 비명을 질러대며 우리 쪽으로 붙으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고 있던 나는…….
“하아.”
도와줘야겠다는 생각보다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왜냐면…….
“어쩐지 오늘은 조용히 넘어간다 싶었다.”
“공자님.”
“말 안 해도 알아.”
쫓기듯이 다가오는 여인.
그녀의 몸에는 씻기 힘든 지독한 혈향이 배어 있었기에.
* * *
“소협! 제발 저 좀 도와주세요!”
애절한 외침과 눈물을 흘리며 필사적으로 도주하는 여인.
초석령은 당지천과의 거리가 줄어들면 줄어들수록 속으로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호위는 조금 의심하는 거 같지만, 딱히 경계하지 않는 걸 보면 순탄하게 넘어가겠어.’
왜냐면 초석령은 사실 쫓기는 게 아니라, 저기 뒤쫓아오는 산적 무리, 녹림도들과 한패였기에.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산서에 있는 혈풍채 소속이던 초석령 일행.
호랑이 없는 골에 토끼가 왕 노릇을 하듯이 혈풍채는 대문파가 없는 산서에서 쉬이 세력을 넓힐 수 있었고, 결국 산서에 녹림도가 없는 곳을 찾기 어려워지자 부채주를 필두로 다른 지역에도 세력을 확장하려고 했다.
그런데 웬걸, 몇 년 전 사천에 자리를 잡았던 독사채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사천이 무주공산이란 것 아닌가?
‘능력은 쥐뿔도 없는 놈이 산채만 주야장천 늘리니까 그렇게 소리 소문 없이 가는 거지.’
본신의 무력은 나약하기 짝에 없으면서 사람 다루는 능력은 좀 있던 독사채의 채주.
사람 다루는 능력과 달리 생각이란 건 없었는지, 하필 당가가 있는 성도 근처에 자리 잡았으니 사라지는 건 예정된 수순이었다.
거기다, 성도 근처에 자리를 잡았으면 내실부터 다져야 하는데, 맹주 놀음이라도 하고팠던 건지 그걸 무시하고 휘하 산채 늘리기만 급급했으니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뭐, 우리한테는 좋은 일이지만.’
허나, 혈풍채를 떠나온 이들에겐 엄청난 희소식.
이제 다시 새로 산채를 만들어야 하는 만큼 사람이 필요했는데, 독사채 아래에 있던 산채들을 전부 흡수하면 단번에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기에 가히 하늘이 준 기회였다.
‘당가만 조심하면 돼.’
자신들과 거래를 트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일망타진할 무력이 없는 것도 아닌 당가였지만, 고슴도치 같은 가문이라 건드리지만 않으면 사천도 별거 없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저들이 낭자를 핍박하고 있는 겁니까?”
당지천이 멀리서 초석령의 상태를 묻자, 초석령은 일이 성공했음을 직감했다.
‘역시 철부지들이 속이기 제일 쉽다니까.’
산서에서 도련님들을 속여서 인질로 잡고 몸값을 받는 일을 했던 초석령이다.
지금에야 소문이 쫙 퍼져서 당하는 이들이 없지만, 그전까지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을 정도로 전문가였기에 당지천의 얼굴만 봐도 벌써 견적이 나왔다.
‘귀태가 줄줄 흐르는 걸 보면 금 500냥, 아니, 어쩌면 1,000냥도 가능할지 모르겠어.’
아직 사천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만큼 어느 집안의 도련님인지는 잡아봐야 알겠지만, 금의환향할 미래가 보이자, 초석령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의선문이 아니라서 다행이지.’
처음에 백의를 입은 모습에 의선문의 사람은 아닐까 싶긴 했지만, 의선문의 문도들은 호위 하나 달고서 혼자 다니지 않는다.
물론, 예외가 있긴 한데, 그건 어디까지나 제 한 몸 지킬 만큼의 무력을 가진 이들이었기에 눈앞의 도련님이 반로환동을 한 고수가 아니라면 말이 안 됐다.
그렇기에 당지천을 단순히 있는 집 자식으로 본 초석령은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
“예! 저는 길을 걷고 있었을 뿐인데 갑자기 나타나서…….”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짓자, 가여운 얼굴로 보는 당지천.
“제 뒤에 숨으시죠. 낭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소협!”
한술 더 떠서 아예 자기 뒤로 오라고 하자, 정말 다행이라는 듯 환희에 찬 모습으로 당지천의 뒤로 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다치신 것 같군요.”
뒤에 숨으려는 찰나, 팔을 붙잡는 당지천.
초석령은 순간 공격인 줄 알고 반격할 뻔했으나, 당지천의 움직임이 한없이 느렸기에 순순히 팔을 내줬다.
“아, 이건…….”
“말씀 안 하셔도 됩니다. 어차피 저 녀석들에게서 도망치느라 생긴 것이겠죠.”
귀하게 자란 도련님들은 살면서 피를 볼 일이 적다.
그래서 그런지 이렇게 상처를 내놓으면 동정심을 유발하는 효과가 좋았다.
“약이라도 발라 드리겠습니다.”
품에서 나무 상자를 꺼낸 당지천이 꿀같이 점성이 있는 걸 상처 부위에 잔뜩 끼얹고 문지르자 사라지는 듯한 가벼운 통증.
빠르게 상처가 아무는 것이 딱 보아도 값비싼 약이었다.